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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주일설교 고린도전서13:1-3
본문: 고린도전서13:1-3
제목: 사랑이 없다면!
오늘은 고린도전서13:1-3의 말씀을 가지고
“사랑이 없다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다면”
지난 번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서
은사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12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더 큰 은사를 추구하라고 권고합니다.
왜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가 있음에도
많은 문제를 겪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은사가 조화롭게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추구해야 할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그 무엇보다 탁월한 길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된 몸을 이루기 위해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의 송가라고 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바울은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 탁월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은사가 아닙니다.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참된 은사가 되게 하는 것은 곧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러 덕목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근본 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과 육체로부터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는 신자들이 지켜야 할 계명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계명은 모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의 요구를 다 채운 사람이다(롬13:8)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악행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이어진다고 말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분쟁이 있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하나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어우러지는 공동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은사가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배반하는
비극적인 일을 만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용도로 사용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호소하기 위해
사랑에 관한 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신자로서 최종 목표는 사랑을 최종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
나를 주어로 1인칭 시점을 고수합니다.
바울은 늘 나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권고할 때 늘 자신의 모범 사례를 들어서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자신을 모델로 삼아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모범이 되고 있다고 여러 말로 말했습니다.
하짐나 사랑이 없다면
자신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뛰어난 사람도,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도
어떤 헌신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절대성
건축물로서 화려하고 멋지고 튼튼하고
웅장한 등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었는데 바다에 불을 밝힐 수 없다면
그것을 등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령의 은사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성령의 은사 중에
방언과 예언을 대표로 언급하고
여기에 영웅적 자기희생의 행위를 덧붙입니다.
그런 은사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1) 방언
먼저 성령의 은사 중 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직역한다면 내가 사람들의 언어/ 방언들,
천사들의 언어/방언들 말하더라도 입니다.
이 문장은 가정법입니다.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설사 그렇다고 해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의 언어/방언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온갖 언어를 망라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의 은사인 특수한 방언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어 그 범위가 더 넓어졌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감탄할 만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상적인 언어보다는
좁은 의미에서 방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천사의 언어라는 말은
일부 성도들이 방언을 천사의 언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하는 방언을
천사들의 언어로 추켜 세웠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은사로 주어진 방언은 사람이나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말하는 사람의 언어입니다(14:2).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천사의 언어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일을 강하게 부정할 때 이런 말을 씁니다.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와도
안된다고 합니다.
내가 사람들의 언어를 말하고 천사들의 언어까지 말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말을 하고 아무리 감동적인 말을 해도
그래서 천사의 말과 같이 보인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뛰어난 말을 하고,
영적이고 천사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를 울려내는 구리판과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보통 이 두 악기는
광란적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사랑 없이 외쳐대는 방언의 형태가
마치 이방 종교의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시끄럽기만 할 뿐 뭘 말하려는지 모르는
그런 꽹과리 소리는 사람들을 괴롭게만 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참으로 훌륭하게 보이는바울일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가 하는 방언은 소음 공해일 뿐입니다.
사랑이 빠진 식사 자리 아무리 맛있는 것이 많아도
즐거움은커녕 외로움과 괴로움만 자극하는 자리가 됩니다.
사랑이 빠진 말, 방언은 무슨 말을 해도
실패하고 맙니다.
그 말하는 행위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떤 추상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구체적인 태도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는 채로 방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방언하는 태도나 방식 속에 다른 사람을
배려와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떤 방언의 능력을 소유했든,
그 속에 사랑이 없다면 나의 은사는
아무 유익도 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2)예언과 지식의 은사
예언과 지식은 별개의 은사입니다.
하지만 긴밀하게 얽히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멋진 가상의 상황이 그려집니다.
나는 예언 은사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고 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이었고(고전4:1)
하나님의 비밀이 그에게 알려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 “모든”이라는 수식을 덧붙여
상황을 극적으로 만듭니다.
바울 자신도 인정하듯이
바울이라고 해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에 통달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정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통달했다고 합시다.
이보다 부러운 일이 있을까요?
특히 지식의 은사에 예민했고
그런 은사를 풍성하게 가졌던
고린도 신자들이라면 더 그랬을 것입니다.
비단 지식뿐 아닙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미지가 더해집니다.
나는 모든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그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분명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남다른 기적을 행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바울은 다시금
모든을 덧붙여 가장 우월한 상황을 만듭니다.
현실적 기대든 아니든 이 역시 부러움을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특히 은사에 예민한 고린도 신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이 없다면 ....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은사를 가진 덕분에
사람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또 모든 믿음의 소유자로서
산을 옮길만한 능력을 과시한다고 해도
만약 내게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지식과 능력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은사 지식 능력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존재의 가치는
내 지식의 깊이나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알고 인정해 주시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얽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향한 사랑의 결핍은 바로 이 근원적
사랑,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결핍을 의미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졌든, 무엇을 행하든 사랑 없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남습니다.
3)구제와 헌신
세 번째 상황은 더 역설적입니다.
여기서도 먼저 두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우선 나는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준다고 합니다.
내 재산을 쪼개어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음식을 제공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구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재산을 나누어 남을 구제하는 것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놀랄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상황 또는 극단으로 몰고 갑니다.
내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도 모자라,
이제 자기 몸까지 내어 줍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고 말합니다.
물질을 나누어 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몸까지 내어 주는 극단적 희생까지 말합니다.
욥의 이야기에서 보면
욥은 재산을 잃어 버리고, 아들이 죽었을 때는
찬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아파서 재의 누웠을 때는
자신을 저주하고 태어난 것까지 저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 때문에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재산을 주는 일도 대단한 일이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준다는 일은
놀라운 일이고, 엄청난 일이고 최고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사태의 진정한 본질이 드러납니다.
무엇입니까?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 상황은 더 역설적입니다.
가장 영웅적인 희생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가장 휼륭해 보이는 자기희생조차
사랑과 무관할 수 있습니다.
이념 때문이나 누군가를 향한 증오심에서
내 몸을 내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위대해 보이는 희생도 무가치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비극적 자기희생이 칭송받는 행위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희생이어서가 아니라
그 희생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희생 자체보다는 그 속에 담긴 사랑이
행동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다면 이 얼마나 무모한 낭비입니까?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숭고한 희생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설 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구원을 향한 추구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천사처럼 말하는 것 대단한 인기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언과 지식과 능력이 있다면
대단하게 여기고 우러러 볼 것입니다.
내 재산을 다 내어 주고 내 몸까지 내어 주는 사람이라면
그를 얼마나 존경하고 칭송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랑이 없는 구제나 자기 몸을 드리는 희생은
불법을 일삼는 행동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마태복음7:21-23에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남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고
사랑이 없다면 나자신도 무가치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무엇을 해도
거기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고결한 신앙적,
도덕적 행위도 사랑이 아니라면 가치가 없습니다.
그 모든 멋진 것들은 오로지 사랑을 위한 수단이고
사랑의 표현일 때 그 가치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 어느 사람이 아니고
예수를 주로 믿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로 세상이 사람이 하듯이
그렇게 행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서
말씀해 주시고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그 사랑 때문에
모든 일을 행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 보여지는 어떤 말이나
사람을 가르치는 어떤 말씀이나 지식이나
사람에게 주는 어떤 물질이나 헌신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최고의 행위가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명절에 여러분의 모든 말과 행동이
무엇에서 출발하는지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만나는 부모나 형제나 친지들에게
무엇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오직 사랑을 바탕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물건도 사랑이 담긴 선물
사랑이 넘치는 명절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그 사랑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