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제2절 죄의 본질-3
3. 죄의 전가(轉嫁)
[로마서 3:10]을 보면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지은 죄가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죄의 전가라고 합니다.
전가라는 말은 한자로 ‘구를 轉’, ‘옮길 嫁’字를 쓰는데, 이 말은 罪過, 책임 등을 남에게 덮어씌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죄의 전가라는 말은 아담이 지은 죄를 모든 인간에게 옮겨서 덮어씌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지은 죄가 어떻게 온 인류에게 옮겨졌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실재설, 직접 전가설, 간접 전가설 등의 세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실재설이란, 하나님께서 최초에 하나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넣어주셨는데, 이것이 온 인류 각 사람에게 나누어져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범죄하지 않은 인간성이 인류 각 개인에게 들어갈 텐데, 아담이 범죄하여 죄로 오염된 인간성이 온 인류 각 개인에게 들어간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말장난적인 입장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두 번째, 직접 전가설이란, 아담은 인류의 시조이면서 또한 언약의 대표였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가 인류 대표의 자격으로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의 죄책이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전가된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를 “대표의 원리”라고 부르는데, 이 주장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장입니다.
세 번째, 간접 전가설이란, 인간의 죄책이 자연적 생식 과정을 통하여 전가된다는 주장입니다. 아담의 죄가 조상을 통하여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뿐 아니라 우리가 나기 전의 모든 조상이 지은 죄들도 함께 전가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담의 죄에 더해서 조상들의 죄까지도 후손들에게로 넘어가 그 후손들이 조상들의 죄책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평가합니다.
우스운 말이기도 합니다만, 신학자들이란 쉬운 성경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전가에 대해서 제가 설명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무죄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무죄한 상태였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범죄하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은 아담뿐만이 아닙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 아닙니까?
죄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까닭에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 그것은 아담의 후손들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아담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속으로 온 인류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직접 옮겨졌느냐, 간접적으로 옮겨졌느냐 하고 따질 것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용어를 써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온 인류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 그래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는 것 - 그것이 죄의 전가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뒤에 구원론에서 자세하게 알아보겠지만,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서 온 인류가 하나님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먼저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善’이라고 말하고 선한 인간을 義人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오늘 글의 처음에 인용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 3:10]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첫 번째 교리인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고 합니다.
전적 타락은 완전 타락과는 다른 말입니다.
완전 타락이란 선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누구도 도덕적 선조차 행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전적 타락이란 선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도덕적 선은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살인한 者라도 길에 가다가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일으켜줄 줄 아는 것은 그 안에 도덕적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면에서 생각한다면 세상에 완전 타락의 인간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는 단순히 조금 더 착하게 살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전적 타락 상태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셔서 구원하시는 종교입니다.
*(덧붙이는 글)
기독교인 중에는 기독교를 종교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신앙이라는 면에서 그렇게 말하는데,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를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는 사전적 의미로만 본다면 기독교를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그 첫 번째 의미가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한다고 볼 수도 있고, 삶의 고뇌라는 것을 사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라고만 한정한다면 기독교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고뇌를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를 의미한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와는 다릅니다. 기독교인이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은 그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최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변화하는 것이며,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은 그것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자(漢字)가 재미있는 해석을 해줍니다.
‘마루 宗’을 파자(破字)한 것을 보면, ‘갓머리’는 ‘집(신전)’, 그 아래 ‘보일 시(示)’의 위쪽 가로 막대는 ‘제물’, 그 아래 ‘ㅜ’는 제상(祭床), 좌우의 찍은 점은 ‘제물에서 흐르는 피’라고 합니다. 이 파자를 종합하면 ‘죽여서 피를 흘리는 제물을 신전의 제상 위에 놓고 하나님께 보이며 제사 지내는 것이 마루(으뜸)’라고 ‘가르치는 것(敎)’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 파자를 보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는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