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한국 창가방 원정대/빛나는 벽에서 찾은 마음의 평화
북벽 6100m까지 진출…계속된 악천후로 철수 글 하호성 원정대원·서울문리대산악부·사진 정승권 원정대장 ·협찬 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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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캠프로 철수한 다음날 베이스캠프로 하산하기 전 장비 정리를 마친 대원들. 왼쪽부터 정승권 원정대장·김지성·이민숙·하호성 대원. |
얼굴에 와 닿는 섬뜩한 차가움에 눈을 뜬다.
시계는 아직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곳 창가방 하늘엔 어느새 신의 축복과도 같은 햇살이 가득하다.
플라이 내부에 잔뜩 얼어붙은 성에가 떨어지지 않도록 살금살금 몸을 일으켜 조그마한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 본다.
저 멀리서부터 햇빛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그 따스함에 도취되어 햇빛이 그려놓은 궤적을 바삐 좇아가고 있노라면, 어느새 피식. ‘그래본들 오후 해질녘쯤 돼서야 나한테 올 거잖아.’ 짧은 체념 뒤에 돌아앉아 아침식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재킷의 모자를 푹 뒤집어쓰는 것이다.
버너의 불꽃이 파르르 몸을 떨며 피어나면, 포타렛지 안은 때 아닌 장마철로 변해 버린다.
후두두둑 떨어지는 빗속에서 맞이하는 아침. 창가방, 그 빛나는 벽 위의 하루가 또다시 시작된다.
자연과 하나 되는 방법
“탕! 탕!”
경쾌한 망치질 소리가 침묵으로 가득한 허공을 울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정승권 등반대장과 지성이형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등반을 시작한 모양이다.
밤새 추위에 얼어붙어 잘 열리지 않는 플라이의 지퍼를 라이터불로 녹여 열고, 두 다리를 허공 위에 내놓고 포타렛지 귀퉁이에 걸터앉아 두 사람의 등반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북벽의 아침은 차갑다.
아직도 어둠이 가득 묻어 있는 벽 저 너머로는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듯 따스함으로 충만한 하늘이 파르라니 빛나고 있다.
‘그래, 우리는 창가방이라는 벽을 오름과 동시에 무릉도원을 찾아 헤매는 나그네와도 같이 저 따스함을 쫓아가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렇게 위로, 저 위로 향해 올라가고 있는 지성이형의 몸짓은 신명나는 한판 춤사위. 그 경쾌한 리듬감과 등반대장님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져 어느새 자유가, 참방대고 있는 내 발 아래서 넘실대고 있다.
2캠프에 올라 온지도 벌써 사흘째. 7월 4일이면 서울을 떠나온 지도 46일째가 되는 날이다.
머릿속에 지나온 여정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간다.
무더웠던 델리에서의 1주일도, 꿈속을 걷는 듯 황홀했던 베이스캠프까지의 카라반도, 바기니 빙하를 거슬러 올라 거대한 벽 앞에 처음 마주 섰을 때의 그 감격과 함께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총 천연색 기억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기억들을 더듬어 가다 보면 언제나 그 끝엔 그리움이 묻어난다.
가슴 속에 가득한 그리움의 까닭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그런 물음은 그리움을 더욱 진하게 만들 뿐.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 원초적인 그리움에 이끌려 등반을 나섰고, 이 원초적인 그리움에 또다시 이끌려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시계가 오후를 가리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눈이 내린다.
서쪽 하늘 너머 머물러 있던 구름들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순식간에 한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동시에 가혹한 스노 샤워의 시작도 가까워지고 있다.
이 눈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지난 5월 7일 전진캠프를 구축하고 몇 차례의 짐 수송에 이어 모든 대원들이 전진캠프에 올라 온 것은 5월 17일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었는데 고통스러운 짐 수송과 루트 개척, 홀링을 반복하며 베르그슈른트를 지나 1캠프, 2캠프까지 올라왔다.
그 와중에 날씨가 어찌나 우리를 괴롭히든지. 스노 샤워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등반을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에 루트 개척이 점점 늦어진다.
하루 종일 퍼부어대는 스노 샤워에 부득이하게 쉴 수밖에 없었던 적도 여러 날 되었다.
특히나 눈사태를 방불케 하는 스노 샤워 속에서의 홀링은 대원들의 기력을 다 빼앗아 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등반은 계속되고 한 피치가 종료된다.
이어 근택형이 대장님과 교대해 빌레이를 보기 위해 올라간다.
조금씩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밖으로 나가 레더에 몸을 싣고 얼음을 깨 들고 와서 물을 만든다.
한참이 흘렀을까. 또 스노 샤워가 시작된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그 놈을 피해 등반을 하던 두 사람은 피치를 종료하지 못한 채 포타렛지로 돌아온다.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처럼 플라이 위를 할퀴고 내려가는 눈 소리를 들으며 이른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내 거짓말처럼 하늘이 갠다.
“근택아, 호성아, 들리냐?”
“네, 대장님. 말씀하십시오.”
“문 열고 바깥 한번 봐라. 석양에 물든 두나기리(7066m)가 참 멋있다.
” 등반을 도와주지 않는 날씨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오히려 대장님께서는 바깥 풍경을 한번 보라고 무전을 주신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볕이 들기 시작하는 북벽. 그 짧디짧은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모두들 너무나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에도 한줄기 빛이 스며들고 있다.
등반만 나서면 눈이 내리고, 등반을 멈추면 눈이 그쳐 버리는 얄궂은 이곳의 날씨가 때론 답답하고 화도 나지만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거대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 나는 작디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 이 등반을 통해 그리고 대장님의 가르침을 통해 나는 나를 버리고 자연 앞에 머리 숙여 그 안에 하나가 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거대한 대자연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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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기니 빙하를 거슬러 전진캠프로 올라가는 길, 카랑카 전진캠프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이근택 대원. 멀리 이민숙 대원이 보인다. |
사람은 부드러움과 동시에 강해야 한다
“선생님, 선생님.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전진캠프에 머물러 우리들의 등반을 지켜보고 있는 민숙이 누나의 상냥한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들려온다.
2인용 포타렛지 2동에 5명이 머물기는 너무 힘들 것 같다는 대장님의 판단에 스스로 등반을 포기하고 전진캠프에 남기로 한 민숙이 누나. 등반을 향한 열정을 알기에 누구보다도 누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아침저녁으로 무전이나 저 멀리 힘껏 손을 흔들어 힘을 주는 누나가 정말 고맙다.
가만히 저 아래 점으로 보이는 전진캠프를 내려 보자니 혼자 있을 누나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그러고 보니 포타렛지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8일째다.
이제는 볼 일도 편히 볼 수 있고, 침낭에 기어들어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생활의 편안함마저 느끼게 된다.
처음 포타렛지에서 자던 날 불편함에 온 몸을 떨던 일이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난다.
“내일은 나랑 호성이랑 등반하러 나가고, 지성이랑 근택이는 물 만들면서 쉬도록 하자.”
“네, 대장님.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 저녁을 먹고 난 뒤 무전을 통해 다음날 등반에 대해서 대장님이 말씀해 주신다.
사흘 전 1캠프에서 2캠프로 짐을 홀링하면서 너무 무리해서였을까. 2캠프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탈진 상태였었다.
급히 들어간 포타렛지 안에서는 오른손가락에 찾아온 동상 때문에 밤새 아파 뒤척였다.
모두에게 걱정을 끼친 뒤 무려 사흘을 휴식하고 드디어 내일 등반을 나서게 된다니 가슴이 너무 두근거린다.
다음날 아침,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자리에서 일어나 등반을 준비한다.
아침을 얼른 먹고 장비를 모두 착용하고 난 뒤 대장님께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린다.
자! 출발이다.
얼굴을 마구 찌르는 새벽의 냉기도 오늘 아침만은 그리 차갑지가 않다.
한 줄 로프에 몸을 의지해 주마링하고 있는 내 가슴은 넓게 펼쳐진 광활한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벅차오르고 있었다.
진정 신이 살고 계실 것만 같은 이곳, 절로 경외감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곳. 그러다 문득 아래를 내다보면 점점이 떠다니고 있는 죽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 달콤한 공포에 몸을 떨며 나는 또다시 죽음이라는 화두와 마주서게 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죽음은 삶과 다르지 않으며, 삶 역시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만 지금의 미천한 나는 경계를 나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외줄 위에서, 살아 있음에 또한 살아갈 수 있음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확보 완료! 호성아, 올라와라.”
빌레이 시트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대장님 등반 모습을 지켜본다.
엄청난 고도감의 벽 위에서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대장님의 등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문득 베이스캠프에서 “사람은 부드러움과 동시에 강해야 한다”던 대장님 말씀이 떠오른다.
모든 것을 구분 짓고 경계를 나누어 버리는 문명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가운데 진정한 평화와 강인함을 갈구하고 있던 나에게 있어 대장님의 등반은 하나의 답을 보여주고 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되고
몇 시간이 지나고 대장님으로부터 확보 완료되었다는 무전이 온다.
대장님이 기다리고 있는 피치 지점까지 올라서서 보니 이제 한 피치 혹은 두 피치만 더 가면 3캠프로 점찍어둔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른쪽으로는 거대한 오버행 장벽이 놓여져 있고, 그 너머로는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 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곧이어 스노 샤워가 시작되고 온몸이 젖어 드는 가운데 대장님은 계속해서 등반을 이어나간다.
가끔 엄청난 스노 샤워가 내리면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그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다 싶으면 다시 등반을 해나가는 모습이 여느 때와는 달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스노 샤워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대장님이 내려오더니 “그만 내려가자”며 20여m 가량 진전되어있던 피치에서 로프를 회수하신다.
위험하고 힘든 하강을 마치고 2캠프로 돌아오니 춥고 지친 몸뚱이는 털썩 포타렛지 안으로 가라앉는다.
그날 밤 저녁을 먹고 난 뒤 대장님의 무전이 들려온다.
“근택아, 민숙아, 지성아, 호성아! 이제 우리 그만 내려가자. 다른 의견이 있으면 이야기해줄래?”
“대장님, 저희는 대장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아침 서둘러 짐 챙겨서 전진캠프까지 내려가는 걸로 하자”
예상하고 있던 대장님의 말이었지만 막상 이제 내려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뻥 뚫린 듯하고 눈물이 날 것 같다.
한 줄기 랜턴 불빛 아래 근택형과 포타렛지에서의 마지막 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등반일지를 다시 꺼내 읽어본다.
나는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었는지! 셀 수 없는 질투와 욕망에 애태우고,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울적해 했던 많은 날들을 뒤돌아보며 다시 한번 작고 초라한 나 자신을 느낀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를 내게 주신 대장님과 근택형, 민숙이 누나, 지성형, 그리고 나 자신과 창가방 여신께 마음 속 깊이 인사를 드렸다.
베이스캠프로 올라오는 카라반 도중 나는 심하게 굽이진 길을 마주쳤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나 있는 길인 양 그 다음이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서 나는 얼마나 설레었는지. ‘저 굽이를 돌고 나면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라는 기대감에 한 발을 내디뎌 그 길 너머로 돌아섰을 때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또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힘든 등반 가운데서도, 나 자신과의 힘들고 불안한 싸움에서도, ‘정상에 도착하면 앞으로 내가 시작해야 할 길이 보일 거야’라며 쉴 새 없이 마음을 다잡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려가야 할 시간. 비록 정상엔 가지 못했지만 내 가슴속엔 새로운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시작이 끝이 되고 끝이 시작이 되는 이 길 위에서, 정상이나 지금 내려가야 하는 이곳이나 나에겐 모두 똑같이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모처럼 창가방 여신이 활짝 웃는 듯한 화창한 날씨 속에서 우리 다섯 명의 대원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육중한 몸뚱이를 흔들며 홀드럼은 하늘을 날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등반은 그렇게 끝이 났다.
원정대 정부연락관이 보내온 편지
한국 창가방 원정대원들을 생각하며
나브딥 싱 브라 (Navdeep Singh Brar·28세)
인도 델리에서 로펌 소속 변호사로 일하면서 법정과 사무실을 오가며 바쁘게 살아가는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2005년 4월 어느 날, 인도산악연맹 직원으로부터 정부연락관 자리가 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일상의 업무에 조금 지쳐가고 1년이 넘도록 산에 가지 못했던 나는 그 제안에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후 원정대가 한국원정대라는 소식을 들었다.
2003년 9월 불가리아 원정대와 함께 탈레이사가르 베이스캠프에서 한국원정대와 함께 있었지만 한국원정대를 맡은 것은 처음이다.
4월 20일 김지성·하호성 대원을 처음 만나 통관을 진행했다.
내가 약속 시간 보다 조금 늦자 그들은 표현하진 않았지만 불만이 느껴졌다.
4월 27일 정승권 대장과 이근택·이민숙 대원을 만나 브리핑을 했다.
나도 정부연락관의 모든 장비를 인도산악연맹에서 대여 받고 필요한 서류를 챙기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모든 원정대가 그렇듯 원정 초기에는 무척 바쁘기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델리에서 조시마스로 이동했다.
버스로 20시간 정도 달려 조시마스에 도착했다.
우딸란쩌 지방정부산하 산림청에서 입산허가를 받기 위해 다시 바빠졌다.
산림청에서는 두꺼운 가이드북을 주고 서류양식을 서너 개를 작성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쓰레기 예치금 1만 루피를 요청했다.
내가 두 번째로 맡았던 독일원정대가 입산허가를 받기 위해 3일이나 지체 한 것에 비해 한국원정대는 비교적 수월하고 매끄럽게 진행되어 예정대로 포터를 수배하고 베이스캠프를 향한 카라반을 시작했다.
약 5일간의 카라반으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대원들이 장비를 챙겨 전진캠프로 이동하면서 원정대는 나에게 전진캠프와 통신할 수 있는 무전기와 원정자금을 맡겨 놓고 갔다.
돈이 생각보다 많아 부담스러웠다.
그 후 나는 내 텐트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돈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베이스캠프에는 나와 쿡, 그리고 2명의 고소포터 등 4명이 남게 되었다.
대원들이 모두 전진캠프로 이동하자 우리는 차파티 등 인도요리를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올봄 날씨는 유난히 좋지 않았다.
베이스는 물론 전진캠프와 벽에서의 날씨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하루 중 등반 시간이 몇 시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소포터의 라디오를 통해 일기예보를 청취해보지만 고산지역의 날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는 2000년에 등산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늘을 보며 날씨를 예측 방법을 이용해 다음날의 날씨를 예측했다.
그리고 전진캠프에 있는 이민숙 대원에게 하루에 2번 무전을 했다.
날마다 라디오 일기예보를 듣고 하늘을 보며 구름, 바람, 온도를 확인했으며 전진캠프와 무전을 교신하기 위해 높은 언덕을 하루에 두 번씩 올랐다.
물론 아침저녁으로 원정자금을 확인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조금은 지루하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대원들이 내가 예측한 일기예보를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 같아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이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 대원이 베이스를 떠난 지 2주쯤 되었을 때 “정승권 대장이 전진캠프로 철수한다”며 “고소포터를 전진캠프에 에 보내라”는 이민숙 대원의 무전을 받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베이스캠프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틀 후 베이스캠프로 내려오는 정승권 대장의 모습에 무척 놀랐다.
정 대장은 큰소리로 “아임 해피 투 씨 유 어게인(I am happy to see you again)!”이라 외치고는,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로 베이스 식구들과 깊이 포옹을 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 불평?불만도 없었으며 기죽어 보이거나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매우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그는 진정 산을 즐기는 산악인처럼 보였다.
다음날 정 대장은 모두를 위해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양고기와 술잔이 오가고 노래가 울려 퍼졌고 원정대의 일정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원정 기간 동안 쿡과 고소포터 그리고 에이전트 사람들과 사이가 나빠져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정 대장과 대원들이 나에게 믿음을 준다는 것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힘든 기간이었지만, 나는 이번 원정대에게서 잊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을 배운 것 같다.
정승권 대장은 매우 침착하다.
작은 일에 불평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 않았다.
또한 모든 운행 일정을 계획을 세워 꼼꼼하게 운행하는 것 같았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는 진정 산을 즐기는 산악인인 듯 보였다.
이민숙 대원은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 뛰어난 결단력을 가진 밝고 매력적인 대원이다.
체력이 좋아보이진 않았고 원정 시작부터 아팠지만 불평 없이 운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전진캠프에서 2주간 혼자 지낸 용기에 놀랐다.
뛰어난 친화력은 원정 내내 원정대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하호성 대원은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산에서는 상당히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산에서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한 섬세한 것까지 느끼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아마 그가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유창한 영어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때문에 원정이 조금 더 즐거웠다.
김지성 대원은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인 것 같다.
그의 인상처럼 뭐든 매우 빨리 하길 원하고 모든 일들이 빠르고 정확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는 뭐든 잘 만드는 재주 있는 사람이다.
이근택 대원은 본래 말이 없는 조용한 사람인 것 같다.
물론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매우 편안하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번역 이민숙 원정대원·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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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캠프 전경. 멀리보이는 뾰족한 봉우리가 두나기리(7066m)다. |
INFORMATION
창가방 길잡이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난다데비 성역 북서쪽에 있는 창가방(6864m)은 서부 가르왈의 쉬블링(6543m)이나 캉첸중가 산군의 자누(7710m) 등과 함께 히말라야의 난봉으로 알려져 있다.
바기니 빙하 쪽으로 갑자기 절벽을 이루는 북벽, 라마니 빙하 측의 서벽, 창가방 빙하 측의 남벽이 모두 거대한 화강암의 벽으로 되어 있다.
칼란카로 이어진 동릉 정도가 겨우 등반 가능성이 있을 정도다.
영국의 등산가이자 저술가인 프랭크 스마이드(Frank Smythe)는 창가방을 “정상에서 빙하까지 떨어지는, 단칼에 잘라낸 듯한 벽을 가진 봉우리”로 묘사했다.
1982년에는 환경보호문제로 난다 데비 성역에 입산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1996년에 다시 개방되었지만 현재 바기니 빙하를 따르는 북쪽 접근로만을 허용하고 있다.
등반사
창가방 등반은 머레이(W. Murray)라는 영국인이 1800년대에 등반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그의 주장은 영국산악회(The Alpine Club)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초등은 1974년 크리스 보닝턴이 이끈 영국 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원은 듀갈 해스턴, 더그 스코트, 마틴 보이젠 그리고 인도의 발완트 산두 그리고 셰르파 타시였다.
이들은 서벽을 오르려 했으나 쉽튼 콜 너머의 봉우리 반대쪽으로 목표를 옮겨 칼란카 동벽(6931m) 그리고 북동 리지를 등반했다.
서벽을 마주한 보이젠은 “말도 안 되는, 가파른 얼음으로 군데군데 덮여 있는, 수직 내지 오버행 각도의 벽. 너무나 어려워 보여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원정은 보닝턴이 쓴 <창가방>(1975)이란 책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1976년에는 6인조 일본 팀이 고정로프를 써서 남서 리지로 등정했다.
같은 해 여름 5명의 영국인들이 동벽 위에 알파인 스타일 루트를 개척했다.
같은 시기 창가방 반대편에서는 피터 보드맨과 조 태스커의 서벽 등정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최초의 캡슐 스타일 등반이었다.
보드맨이 쓴 등반기인 (1978)-<창가방 그 빛나는 벽>으로 국역 출간-는 세계 산악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978년에도 이에 견줄 만한 알파인 스타일 등반이 있었는데, 보이테크 쿠르티카, 알렉스 매킨타이어, 존 포커의 남벽 직등루트 등정이다.
인도 정부가 환경상의 이유로 입산 금지 조치를 취하기 전인 1982년에는 대규모 이탈리아 팀이 고정로프를 쓰며 남릉으로 정상을 밟았다.
1997년에는 4명의 영국등반대가 창가방의 북쪽 측면(North Flank)을 알파인 스타일로 올랐다.
이듬해인 1998년 봄 카를로스(Carlos Buhler)가 이끄는 5인조 러시아 팀은 북벽 직등 루트를 올랐다.
이 팀은 캡슐 스타일로 등반했으며 벽 위에서 연속으로 16일을 보냈다.
접근 방법
원정대는 수도 델리(delhi)에 위치한 인도산악연맹(IMF)에서 등반 전 브리핑을 하고 행정철 차를 밟아야하기 때문에 델리를 통해 인도로 들어가는 것이 편하다(IMF는 매우 저렴하고 쾌적한 로지도 갖추고 있다). 서울에서 인도의 수도 델리까지는 아시아나항공의 직항편을 비롯해 많은 항공사들이 취항하고 있다.
델리에서 카라반 준비의 시작인 조시마스(Joshimath)까지는 자동차로 접근해야 한다.
이른 새벽에 델리를 출발할 경우 자정 무렵 조시마스에 도착할 수 있다.
오후에 델리를 출발할 경우에는 하리드와르(Haridwar)나 리쉬케시(Rishkesh)에서 하루 머문 뒤 조시마스에 도착한다.
짐이 많지 않거나 트레킹의 경우, 델리에서 기차를 이용해 리쉬케시까지 간 뒤 택시를 이용해 조시마스에 이를 수도 있다.
조시마스에서는 지프를 이용해 비포장도로(부분포장)를 2시간 남짓 달려 줌마(Jumma)까지 접근한다.
줌마에서부터는 워킹 카라반이 시작되는데 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줌마 마을에서 1박, 다음 날 두나기리(Dunagiri) 마을에서 야영, 사흘째 되는 날 창가방 베이스캠프에 도착한다.
자세한 내용은 인도산악연맹 홈페이지(www.indmount.org)를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