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주신 꿈 (초등학교 선생님 한분이 대학교수 1천명 보다 더 위대하다는 이야기)
범몽 정임표
서재초등학교는 금호강 비단물결이 굽이져 흐르는 와룡산 기슭에 자리한 작은 시골 학교이다. 내 고향 박실에서 3킬로미터나 떨어져 강을 건너 있다.
내가 학교를 다닐 그 시절은 철교만 있어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열차가 지날 뿐 사람들은 나루를 이용하였다.
금호강 홍수 탓에 우리 마을은 자주 흉년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청보리가 까칠한 수염을 낼 때쯤이면 강냉이 죽을 쑤어 찌그러진 노란 양재기에 퍼 담아 소금과 함께 주었다. 옥수수가루 포대에는 미국과 우리나라가 악수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곽화명 선생님이시다. 인물이 훤칠하신 분이셨는데 매일 종례시간에 반 아이들에게「알프스의 소녀」라는 동화책을 읽어 주셨다. 한 번에 다 읽어 주신 게 아니고 지금의 TV연속극처럼 하루에 한 단원씩 끊어 읽어 주셨다. TV도 없고 얘기꺼리도 모자라던 시절이라 아이들은 선생님의 내일 이야기가 늘 궁금하여 애를 태우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도저히 다음 이야기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선생님 서랍을 열어 동화책을 훔쳐 내고야 말았다. 선생님 몰래 가져가 밤을 새워 읽은 후 아침 일찍 몰래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책을 훔쳐낸 가슴 두근거림보다 다음이야기에 더 정신이 팔려 학교가 저만치 멀어지자 책보에 감춰온 책을 꺼내 걸으며 읽고, 밥 먹으며 읽고, 호롱불 밑에서 잠을 자지 않고 밤새워 읽었다. 책을 읽고 난 내 머리 속에는 아름다운 알프스만이 남았다.
먼 산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고 초원은 푸르고 맑은 계곡물이 시원스런 소리를 내며 들을 적시고 목동들 피리소리와 꼬리를 흔들며 주인에게 안기는 주둥이가 기다란 양치기 개와 고소하고 흰 신선한 양젖 그리고 건초를 집어넣어 만든 풀 침대―
이튿날 새벽, 나는 기차통학생들이 새벽 첫차를 타러 갈 때를 맞춰 아침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서 선생님 몰래 책을 도로 가져다 놓았다. 모든 게 감쪽같이 넘어 갔는데 문제는 선생님께서 내일 읽어주실 이야기를 내가 먼저 친구들에게 자랑스레 다 애기해 줘 버린 데서 터져버렸다. 다음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미리 다 알아버린 아이들 덕택에 책을 훔쳐 읽은 것이 탄로가 난 것이다.
선생님께서 “정임표는 집으로 가지 말고 교무실로 오너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종례가 끝났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에게 교무실로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는「검찰 출두명령서」만큼이나 공포감을 주는 것이었다. 내일 일어 날 일을 먼저 알아버린 벌을 달게 받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교무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텅 빈 책상들 사이에 혼자 계시던 선생님께서 굳어버린 나를 부르시더니 뜻밖에도 도서장 앞으로 데려가 보고 싶은 책을 골라 보라 하신다. 작은 시골학교라 도서관은 아예 없고 학생들이 보리걷이 후 이삭을 주워와 모은 돈으로 구비해 놓은 교육청 감사대비 전시용 책장이 전부였는데 그 책장은 늘 잠겨져 있었다. 책장 앞에서 얼어붙어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 선생님은 직접 동화책을 한권 뽑아 주시고는 다 읽고 가져다 두라 하셨다. 그리고 여기 있는 책을 매일 한권씩 가져가서 읽어도 좋다고 도서대출 허락까지 해주셨다. 지금 기억으로도 엄청 많은 책을 읽은 것 같다. 이야기 국사, 안데르센 동화집, 아라비안나이트, 이숍 이야기, 플루타크 영웅전과 수많은 동서양의 위인전등 무조건 읽고 또 읽고 무엇을 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야기에 함몰되어 배고픔도 잊었다.
책보를 옆으로 비켜 메고 베잠방이 적시며 강을 건너는 5월 오후의 배고픈 하학(下學)길은 금빛 모래가 눈부시어 현기증을 더하게 하였지만 철교 위로 서울 행 열차가 달리면 난 강가 포플러 그늘에 앉아 읽던 동화책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5년여 전에 소년시절의 꿈속에만 있던 알프스의 융프라우를 다녀왔다. 장난감 같은 기차를 타고 오르는 만년설 아래로 산허리까지 조성된 파란 목초 밭과 인형 같은 집들이 알록달록 동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목장에 들러서 풀 침대 위에서 하루 밤을 묵어가고픈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소년은 꿈을 이루었지만 아직 선생님은 찾아뵙지 못했다.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다. (원고분량 200자 원고지 11.4매/2008.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