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산(又山) 손경석의 『韓國登山史』 읽어보기 21
금강산 집선봉 중앙봉 제2봉(C2)을 초등정한 오꾸노 마사이(奥野正亥)
글·번역: 조장빈(근대등반사팀)
오꾸노가 초등한 금강산 집선봉 중앙봉 제2봉(C2)
이이야마 다츠오(飯山達雄)의 北朝鮮の山
"서쪽 암봉(S.1)에서 서북쪽으로 깊이 파인 계곡 너머로 보이는
센타피크 C.2의 멋진 모습에 숨을 멈췄다.
그 암봉은 피켈의 피크처럼 날카롭게 서있고, 높이는 거의 600m는 되어 보였다"
손경석의 『韓國登山史』의 기록에 집선봉 중앙봉 제2봉(C2) 초등이 1939년 10월 경성고보 OB인 원등등(遠藤登)의 단독등반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김정태의 기록(월간 山, 한국등산사 고찰⑪)에 근거한다.
일제강점기 전 기간을 통해 가장 어려웠던 초등반으로 여겨지는 중앙봉 제2봉(C2) 초등은 1939년 여름 오꾸노와 엔도(遠藤登一)에 의해서 남벽으로 초등했다. 집선봉 동북릉 제2봉(S2)가 크리스챤 후퍼의 루트 파인딩 도움으로 이야마 다츠오(飯山達雄), 이즈미 세이이치(泉清一)에 의해 1935년 초등되고 4년이나 지나서였다. 오꾸노가 후퍼와 이 C2 남벽을 제3등할 때, 제2피치에서 홀드가 연이은 쪽으로 3m 정도 오르다 보면 등반이 불가능한데, 이 구간에서 후퍼도 이어가지 못했고 오꾸노는 제2피치에서 다른 코스를 찾아 초등반에 성공하였다. 이즈미가 1930년대 전반기에 가장 뛰어난 클라이밍을 했다면 후반기는 그의 몫이다.
오꾸노의 서울근교산 암벽등반은 북한산 노적봉 초등(1938년)이 대표적이고 금강산 집선봉 암벽 초등반기록도 독보적이지만 관모봉 동계 초등반도 의미있는 등반 활동이다. 1936년 12월~37년 1월에, 이토(伊藤武男) 외 경성제대산악회의 이즈미、타케나카 카나메(竹中要) 그리고 이이야마, 오쿠노 외 3명이 민막곡에서 관모봉으로 동계 초등하였고 1939년 12월~40년 1월 오쿠노와 와타나베(渡辺泰造)、이토(伊藤たまき)가 도정산에서 관모연산을 거쳐 연면수로 나오는 종주 초등을 했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은데, 집선봉 등반은 이이야마의 『北朝鮮の山』에 그의 등반기가 있어 우선, 일본산악회 구마모토지부 회지에 실린 「想い出の冠帽連山」과 「思い出の冠帽連山 一 渡正山から冠帽主峰へー」 두 등반기를 옮겨 싣는다.
관모봉 민막골 빙계등반 계획은 이즈미의 경성제대 산악회에서 추진되었다. 전년도 한라산 등반에서 대원인 마에가와(前川智春)를 잃고 리더 자리를 내어 놓은 이즈미는 그에 굴하지 않고 관모봉 민막골로 동계 빙계에서 빙폭 훈련을 목표로 등반에 나섰으며, 3일간의 빙계 등반은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동계등반 중에 능선종주 이외에 가장 의미있는 빙계, 빙폭 등반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시 관모봉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고원은 조선의 알프스라 명명하며 알피니즘을 구현할 동계등반의 최적지로 여겼다. 1929년 12월 한국의 첫 동계등반인 임무와 (舊)조선산악회의 금강산 비로봉 등반이 끝난 직후인 1930년 3월에 가모(加茂進, 경성영림서)에 의해 남하서에서 관모봉과 운령 사이의 3~4봉 사이 능선(후에 가모(加茂)능선으로 명명 됨)에서 동계등반이 시도되었고 이후 백령회원들이 참여한 조선산악회의 마천령종주 백두산 초등반까지 1934~35년 동계 백두산 초등 등 많은 등반이 이루어졌다.
Ⅰ. 추억의 관모 연산
지난해 말 와세다대 산악부편 『リュックサック』을 혼다 씨에게 빌려 읽을 기회를 얻었다. 그 중 1936~37년 「동계 소장백산맥」과 1940~41년 「다시 관모봉으로」 등 2편은 특히 꼼꼼하게 읽었다. 내 머릿속이 금새 60년의 세월을 지나 겨울의 관모연산으로 되돌아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해 겨울, 경성제대(이하 성대라고 한다)의 산악부도 관모연산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나는 이이야마 다츠오(飯山達雄)씨와 함께 학외 인사로 참가하고 있었다. 와세다대가 관모연산 남쪽 끝의 궤상봉 2,272m에서 남쪽 능선을 종주하여 주봉을 왕복한다는 정통적인 등반계획인데 반해 성대 등반대는 미답의 민막골을 올라 운령(2,340m)을 가로질러 주봉으로 종주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1936년의 그 당시 민막골은 아직 손길이 닿지않은 매우 험난한 지역으로, 아마도 계곡은 빙결한 동계 이외에는 루트로 설정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등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대원의 등반 의욕은 높아지고 있었다.
성대 등반대는 전년도 제주도 한라산에서의 조난사고 때문에 이즈미 세이이치(泉精一)씨를 대신해 이토 다케오(伊藤武男)씨가 리더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성대산악부를 창설하여 육성한 타고난 리더였다. 이토 리더와 저는, 이틀 일찍 선발대로 가서 인부 등의 수배를 마치고 포상동에서 본대를 맞았다. 얼어붙은 보로천을 거슬러 올라가 민막골 가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설영을 했다. 다음날 아침, 리더와 2명이 선발해 계곡로 들어갔지만, 예상했던 대로 협곡이다. 계류가 동결되지 않았으면 매우 어려운 등반이 연속되겠지만 크고 작은 빙폭은 완전히 얼어붙어 본격적인 아이스워크가 이뤄지자 일단 기뻤으나 피켈과 8개의 발톱의 아이젠만으로는 기술적으로도 어려웠다. 문제는 있었지만 우리는 고도차이 1300여 m의 어두컴컴한 협곡을 꼬박 사흘 걸려 등반을 하고 운령 정상에 섰다. 멋진 조망이 우리를 맞았고 계곡 밑 빙설지옥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관모주봉(2,541)m의 정상에 서게 되었다.
나에겐 첫 동계등반이자 루트 초등정에 성공한 것은 큰 기쁨이었다. 나는 동쪽 급경사를 내려다보며 짜릿한 감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나는 산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느꼈고 이후 나의 등산은 시작되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2차 와세다대의 원정, 「다시 관모봉으로」를 전후한 나의 산행에 대해서는 나중을 기약한다.
Ⅱ. 추억의 관모연산-도정산에서 관모주봉으로
관모연산의 주봉은 관모봉(2,541m)이다. 관모봉에서 북북동쪽으로 여러 개의 지봉을 이어주는 북능선의 끝자락에는 도정산(2,200m)이 있다. 1939년 겨울에 우리는 이 북릉을 종주하기로 했다. 당시 이 북능선과 홍대봉의 능선은 전인미답의 공백지대로 미지에 대한 기대에 가슴이 설레였다. 종주 파티는 와타나베 야스조(渡部泰造, 경성치전학생으로 19세), 이토 다마키(伊藤玉喜, 조선은행원으로 24세), 그리고 나, 오쿠노 마사이(奥野正亥, 금강산협회 소속으로 28세) 등 3명이다. 등반 계획은 주을에서 주을온천을 건너 마이잠(馬耳岑)의 동양척식회사작업소(東拓作業所)에 산행을 준비하고 북릉선 끝자락인 도정산으로부터 산맥을 종주하여 주봉에 이르는 계획으로 남관모봉(2,440m), 서관모봉(2.432m), 홍대봉(2.471m), 북설령(2.442m)을 지난다. 소요일수는 10일이고 예비 2일을 합쳐 총 12일을 예정하고 장비, 식단, 연료를 준비했다. 아무리 경량화를 도모해도 당시의 장비로는 한 번에 옮길 수 없다. 왕복운반을 해야하는데, 북쪽 능선의 수평거리는 약 15km로 기복이 많다. 3명의 작은 파티였지만, 최연소인 와타베는 치전산악부장인 이나가와(稲川) 교수로부터 “그 친구는 밥만 먹으면 얼마든지 걷는다”라고 보증하였고, 여성인 이토는 1934년 겨울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1,638m)의 단독 종주를 완수한 실력파로 경험이 충분하다.
12월 24일, 와타베가 선발대로 출발해 나남의 관모보에 대해 해박한 사이토(斉藤竜本)씨를 방문하여 동양척식회사에 삼림 궤도의 편승을 의뢰하는 등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가 2일 후에 도착했을 때는 입산 준비를 완료하였다. 12월 26일, 삼림궤도를 타고 오르는 난로가 달린 열차의 객차 승차감은 쾌적하지만 마이잠(馬耳岑)을 넘어 작업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졌다.
12월 27일, 입산 첫째 날에는 짐을 진 인부 3명과 함께 도정산으로 향한다. 적설은 30cm 정도지만, 숲에서는 스키를 쓸 수 없다. 정오가 지나 짐을 데포하고 인부를 돌려보냈다. 데포지에서 봉을 하나 넘긴 고개에 C1를 건설하여 다시 짐을 올리기 위해 왕복했다.
둘째날 C1에서 절반의 짐을 들고 출발하여 삼림 한계를 넘어서면 허리까지 파고들 정도로 눈이 깊어지고, 쌓인 눈으로 단단해진 표면은 강풍으로 표면이 파도 모양을 이루고 있다.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올랐는데, 설마 그렇게 무섭게 불어 고생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도정산 정상은 사방을 둘러 거침없는 대파노라마이다. 찬바람이 불었지만 하늘은 맑았고 국경지대는 드넓은 산림지대가 바다를 이루었고 그 끝으로 백두산, 포태산 등 멋진 조망이 펼쳐져 있었다. 우선 마주보는 관모주봉은 생각보다 훨씬 뚜렷하지만 산등성이는 예상외로 복잡한 지형이다. 등반을 당분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며 내심 즐거웠으니 다시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달콤했다. 동해쪽으로는 온통 두터운 운해에 덮혀 있었지만, 남하석산(1,741m) 설릉의 일부가 보였다. 정상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데포를 한 후 돌무더기를 쌓아 표시 하고 C1로 내려갔다.
제3일, C1을 철수하고 모든 장비를 가지고 출발한다. 도정산을 넘고 전날의 데포를 통과해 전진해 바람막이 지붕 위에 C2를 건설했다. 이날 밤은 도정산 초등 정과 왕복 운행의 성과에 모두 마음이 들떠 있었다.
4일, 바람이 거세지고 큰 파도 모양으로 굳어진 설릉에 발목이 잡히며 여정이 순조롭지 못하다. 반나절 전진한 곳에서 데포하고 C2로 돌아왔다. 제5일, 새벽에 바람이 멎었다. 텐트를 나서니 짙은 안개에 잠겨 시계가 50m도 안 된다. 전날의 발자국은 완전히 사라져, 평탄한 능선의 루트 판단도 곤란하였다.
데포지점을 지날 무렵부터 바람이 거세지며 가스가 차올랐고 옆에서 부는 강풍에 시달렸다. C3 예정지인 돌무더기의 관목 군락지역에 가까스로 도착해 설영할 수 있었다. 이 밤은 섣달 그믐날이라 작은 병의 푸도주를 따라가며 가는 해를 아쉬워했다.
제6일, 1940년 새해 첫날은 맑았으나 혹한의 강풍을 무릅쓰고 데포로 돌아와 등반대의 짐을 전진시켰다. 2,270m봉을 넘어 안부에 짐을 두고 돌아왔다. 새해 첫날부터 혹독한 하루였다고 이야기했지만, 실은 이것이 겨울 관모연산의 환영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제7일 찬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기온도 뚝 떨어져 텐트 안쪽은 새하얗게 내려앉았다. 식량, 연료는 확실히 줄어드는 고통이지만 체력도 소모되므로 짐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는다. 텐트도 얼어붙고 너무 무거워 철수이동이 쉽지 않았다. 이날 하루 전의 데포를 지나 중관모봉(2,450m)을 절반 정도 올라 동쪽에 눈처마 형태의 테라스를 발견하고 C3를 설치했다. 연일 강풍을 맞으며 걸으면 웬만한 바람에 불감증이 생기는데, 북관모봉 서편의 큰 사면에 눈보라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보면 뼛속까지 얼어붙는 느낌이다.
제8일, 강풍, 엄동의 겨울산에서의 이동은 반드시 3명이 동일하게 행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이날은 1명이 텐트에 남고 2명이 데포한 곳을 왕복하기로 했다. 텐트를 나와 설릉을 넘다 보면 광활한 지역에 쇄석이 퇴적된 큰 경사면을 고음을 내며 눈 섞인 강풍이 성난 파도처럼 불어온다. 마치 격류에 몸을 실은 듯 숨도 쉴 수 없다. 바람이 기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중량감에 압도되었다. 30분 정도 버텼지만 전진할 수 없어 텐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서자마자 강풍은 설사면까지 솟구쳐 오르고 말았다. 이 사소한 행동으로 와타베는 코와 뺨에 가벼운 동상을 입었다. 밤이 되어도 바람의 위세는 꺾이지 않고 산등성이 너머로 더욱 더 몰아친다. 텐트 안은 안감에새하얗게 서린 서리가 텐트가 펄럭이면 얼굴에 쏟아져 내렸다. 이날 기온은 영하 36도까지 떨어졌다.
제9일 새벽과 함께 강풍은 잠잠해지고 드디어 맑게 개였다. 활기차게 데포를 왕복하며 짐을 날랐다. 식량을 곁에 두니 정말 든든하였고 짐을 정리하면서 내일부터는 간단한 짐으로 운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의 등반 의욕은 높아졌다. 저녁때에는 더욱 바람도 약해져서, 파묻힌 텐트를 꺼내거나 텐드 안에 붙은 얼음덩어리를 제거 했고 이제 텐트도 많이 가벼워졌다 라며 서로 웃는 여유도 생겼다.
제10일 1월 5일 새벽 한바탕 바람이 불었다가 출발할 무렵이 되자 날씨는 맑지만 맹렬히 몰아치기 시작했다. 텐트 밖에 내놓은 등산 배낭이 날아가 급경사의 설사면을 60m가량이나 미끄러져 내려 가지러 가는 해프닝도 있어 10시가 넘어서야 출발이 가능했다. 능선 위로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로 그 사이로 주봉의 정상이 어른거린다. 중관모봉 등정은 포기하고 서측으로 큰 사면을 조심스럽게 횡단해 주봉의 안부로 향한다. 강풍이 홍수처럼 눈을 몰아쳐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안부와 주봉 정상의 고도차는 380m로 마지막 등반 거리를 두고 힘을 내었지만 강풍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사방에서 밀려올 때마다 우리는 한없이 비틀거리다 무릎을 꿇고 반바퀴 돈 뒤 엉덩방아를 찧곤 했다. 주봉 아래의 바람은 매섭고 냉혹하며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혔으나 이제 정상은 머리 위에 가까이 있어 온갖 힘을 다해 한 걸음 한 걸음 고도를 높혔다.
이윽고 갑자기 발밑의 경사가 완만해졌다고 느껴졌을 때, 우리는 정상 가까이 다가 서있었다. 한층 거센 돌풍이 굉음과 함께 정면으로 덮쳤다. 우리는 왼쪽으로 조금 가 삼각점표 기둥을 둘러싸고 섰다. 모두들 말없이 태연한 것처럼 보였지만 진한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 있었던 것이다. 두 손을 마주 잡았을 때 이토가 뭐라고 말했지만 엄청난 바람소리에 휩쓸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방이 어슴푸레한 눈보라 속에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은 사망한 후지키 쿠조(藤木九三) 씨의 단가를 빌려서 이 글을 끝마치고 싶다.
“보시옵소서, 신이시여! 눈보라치는 이 산정에 선 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