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1> 카이사르는 왜 루비콘강을 건넜을까?(上)
“주사위는 던져졌다”…
정권장악 위해 로마 진격 결단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종신 독재관 술라 뒤이어 유력 지도자로 대두
두 명의 권력자 존재할 수 없는 법…생사 건 대결
루비콘강을 건너는 카이사르(그림).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는 정예 1개 군단을 이끌고 이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
역사 속에는 시대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 사건들이 있다. 더구나 그 분수령의 배후에는 물꼬를 트는 결정을 주도한 영웅적 인물이 있다. 이 기획 시리즈는 해당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시점에 그 인물은 어떠한 동기와 이유로 그러한 결단을 내리게 됐고, 그 결과가 이후의 역사 전개에 미친 영향과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시도다. 다시 말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서양(주로 서양)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린 인물들(이른바 ‘역사 속 영웅들’)을 중심으로 ‘그때 그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에 좀 더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우선 서양 역사상 분수령을 이룬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서 우리 역사상 해당 주제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매 주제마다 상·하 2회로 나눠 게재한다.
이 사건의 주인공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100~44)는 서양 고대세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극적인 죽음과 더불어 사후에 그가 미친 영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 예로 우리는 그의 사후 역사상 등장한 강력한 통치자를 흔히 카이사르 외에도 시저(영어), 카이저(Kaiser, 독일어), 그리고 차르(Tsar, 러시아어)라고 부른다. 바로 그의 이름에서 연유된 명칭이다. 이처럼 그가 세계사에 회자될 수 있던 극적인 계기가 바로 기원전 49년 루비콘(Rubicon; 라틴어 Rubico)강 도하사건이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이때 카이사르는 왜 루비콘강을 건너야만 했을까? 이것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한 시도이다.
루비콘강의 위치. |
● 카이사르와 그의 시대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 반도 중앙의 라티움 평원에서 건설된 로마는 이후 왕정을 거쳐 공화정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지중해 세계의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북아프리카의 도시국가 카르타고와 벌인 전쟁(일명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확고한 팽창의 기틀을 마련했다. 실제로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등지에 새로운 속주(屬州)가 설치됐다. 이로부터 얻은 막대한 부(富)를 바탕으로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그리스 및 소아시아와 같은 동지중해 세계 등지로, 서북쪽으로는 유럽 대륙 깊숙한 지역으로까지 영토 팽창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해외 팽창의 결과 로마시민들의 소득과 재산은 빠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모든 세상사가 그러하듯 이러한 로마의 영화(榮華)에도 명암이 스며들었다. 빠르게 유입된 엄청난 재화는 점차 로마사회 내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를 중시하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온 로마인들의 전통적 가치관에 자연스럽게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일상화된 전쟁으로 해외에서 수많은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시골의 소농들은 노예노동에 기반한 귀족 지주의 대농장(라티푼디움)에 밀리게 됐고, 결국에는 대도시 로마로 유입돼 빈민화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증폭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이로 인해 누적된 불만은 서서히 폭발점으로 향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기원전 146년부터 기원전 30년경까지의 시기는 로마 역사에서 심화된 내부 갈등의 표출로 인해 죽음이 만연한 거대한 혼란기였다. 어찌 보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기 위한 진통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막대한 치부를 토대로 거의 사병 성격의 군대를 거느리게 된 유력 장군들 간의 반목과 이로 인한 내전과 반란(특히 스파르타쿠스 노예 반란) 등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기원전 130~120년대에 로마의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해 보려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후, 로마에는 대외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유력 장군들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됐다. 기원전 107년에 군대 및 평민계층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집정관(Consul; 원래 공화정 로마에는 평소에는 임기 1년의 선출직 집정관 2명이 권력을 나누어 행사하다가 국가비상 시에는 6개월 임기의 독재관 1명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음)에 선출된 후 거의 종신토록 연임한 마리우스(Marius)를 필두로 기원전 82년 종신 독재관에 오른 술라(Sulla)가 권력을 휘둘렀다. 이로 인해 반란과 배반, 패배 진영에 대한 가차 없는 응징과 복수가 다반사로 자행됐다.
카이사르 흉상 |
이러한 상황에서 술라의 뒤를 이어서 로마의 유력 지도자로 대두한 두 인물이 바로 폼페이우스(B.C.106~48)와 카이사르였다.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인기를 얻은 두 사람은 정치 권력 장악을 위해 초기에는 서로 뜻을 함께했으나 곧 헤게모니를 다투는 경쟁 관계로 변했다. 먼저 우세를 점한 인물은 동지중해 지역, 즉 소아시아와 팔레스타인 정복으로 한껏 주가를 올린 폼페이우스였다.
초기에 열세하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 필적하는 대항마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지역) 정복사업의 연이은 성공이었다. 특히 기원전 52년 가을에 갈리아에서 터진 유명한 베르킨게토릭스의 반란을 알레시아 전투에서 진압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무엇보다도 정복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갈리아 주둔 로마 군단의 진정한 충성을 얻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 과정을 『갈리아 원정기』라는 책으로 남겼음은 물론 군사 원정 성공의 여세를 몰아서 로마의 최고권력자 자리를 넘보게 됐다.
그러나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두 명의 권력자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는 법!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곧 생사를 건 대결로 나아갔다.
갈리아에 머물고 있던 카이사르와는 달리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단독 집정관으로 추대된 폼페이우스가 선수를 쳤다. 그는 기원전 50년 원로원을 통해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복귀하라는 소환령을 발했다. 말이 소환이지 로마로 가면 카이사르는 혈혈단신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칫하면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몰랐다. 명령에 순응해 로마로 갈 것인가, 아니면 로마(국가)의 반역자가 돼 폼페이우스와 일전(一戰)을 벌일 것인가?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고민 끝에 카이사르는 후자를 택했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마침내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휘하의 정예 1개 군단 병력(약 4500명)을 이끌고 로마와 속주의 경계선이던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이후 전개될 길고 치열한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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