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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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가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복지쪽 일에 관련되면서 생각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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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지하실에 술집 노래방이 있는 상가 임대예배당에 있을 때 일이다. 교회와 살림집이 같이 있을 때라 매일 밤 노래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계단 복도에서 여자와 남자들의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워 자다가 깨어서 내려가 보았다.
사연인즉 남자들이 술 기운에 팬티 벗고 알몸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도우미 아줌니들이 기분 맞춰준다고 같이 벗고 노래를 불렀단다. 문제는 끝나고 나가는데 '봉사료'를 주지 않은 것이었다.
남자들은 '언제 벗으라고 했냐? 네가 좋아서 벗은 것 아니냐?'고 했고 도우미 아줌니들은 '그럼 보기만하지 왜 만지고 주물렀냐?' 로 싸운 것이었다. 싸움은 경찰의 출동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한 쪽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잠시 즐거웠지만, 한 쪽에서는 목숨의 연명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삶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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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 미묘한 현대 사회에서 윤리를 추구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 줄 유전자 변형 식품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하지만 당장 그런 것이라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복잡하다고 해서 분석과 판단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유전자 변형 식품 문제의 논란의 배후에는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유전자변형 기술을 가진 희사들의 이윤추구라는 자본의 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논리까지 꿰뚫어야 유전자 식품의 문제를 비로소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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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이 어디에 있는가? 엄숙한 분위기가 차있는 대성당 같은 곳인가?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따지고 보면 나무와 돌과 쇠와 헝겊과 색깔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재료로 해서 거룩해 보이도록 장식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막노동 공사판 아귀다툼 같이 보이는 시장의 한복판, 거대한 기계가 윙윙 돌아가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조그마한 인간, 막장 속의 탄부, 웃음을 파는 룸살롱의 여자들의 삶 속에 차라리 거룩함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 이상 거룩한 것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류에게 가장 높은 가치를 가르치다 타살된 젊은이가 아닌가?
신앙은 높은 윤리적 판단을 요구한다.
‘진실은 작게 작게, 거짓은 크게 크게’ 보도하는 사악한 신문 조중동처럼 잘못하면 예수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은 할렐루야 복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서 헬렐레 복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