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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예수님과 형제들과 더불어(together) 우정(友情)의 여정-늘 새로운 시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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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4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과 형제들과 더불어(together)
우정(友情)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내 한 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성가445장)
지금도 선명한 1989년 7월11일 왜관수도원에서 사제서품미사중 입당송에 주르르 흐르던 눈물의 추억입니다. “예수님과 형제들과 더불어(together) 우정(友情)의 여정-늘 새로운 시작-”, 오늘 강론 제목에 감사했습니다. 역시 자주 사용했던 강론 제목이지만 이번 착안의 은총이 새롭고 고맙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중 맨 끝 세 구절의 주석에서 착안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위에 머문다”(요한3,34-36)
이 고맙고 귀한 말씀에 대한 주석을 그대로 나눕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밀접한 결속 관계로 언급되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강조된다. 여기서 믿음은 계시자의 구원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그 계시자를 실제로 따르는 것까지도 뜻한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계시자의 인격적 결속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라는 명사대신 ‘믿는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것도 바로 그런 뜻을 시사한다.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삶이 직접 가능하고 구원이 현재적이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생명을 보지 못한다’란 ‘하느님의 나라를 보지 못한다’와 같은 뜻으로 하느님의 생명 영역, 곧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정말 은혜롭고 고마운 주석입니다. 저에게 하루를 여는 새벽 강론 쓰는 시간은 배움의 시간이자 기도하는 시간이고, 회개하는 시간이요 예수님과의 우정을 새로 깊이 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시간이 첩첩산중疊疊山中 하루하루 산을 넘게하는 힘을 줍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의 결속관계처럼, 예수님과 우리의 일치의 결속관계가 살게 하는 힘입니다. 삶은 여정이자 관계입니다.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을 삽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예수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 관계의 여정인지요? 예수님과 깊어가는 우정의 관계가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본 처방이기도 합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날로 자유로워지고 밝아지는 자아초월의 여정이 됩니다.
우리가 평생 추종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복음에서 보다시피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모든 것 위에 계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며 아버지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 분,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는 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과 무관한 삶의 여정이라면 우리가 생각없이, 영혼없이 아무리 오래 산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트랙 경주의 비유가 적절하겠습니다. 생각없이, 영혼없이 그냥 수없이 많은 트랙을 도는 경주같은 인생의 삶이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과 우정 관계의 깊이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태평양 깊이의 관계도 있을 것이요, 작은 시냇물같은 얕은 관계도 있을 것이며 전혀 무관한 관계의 깊이 없는 관계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노쇠하는 육신과는 관계없이 끝없이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관계인지요?
마리아 성모님, 사도들, 순교자들, 성인들의 주님과 우정 관계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나무들이 하루 이틀 정도로 저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 하늘을 찌를 듯 잘 자라고 있습니다. 2009년 심을 때는 작은 묘목들이었는데 14년만에 아름드리 나무들로 자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나무들입니다.
주님과의 우정관계 역시 똑같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깊어가는 우정 관계의 여정이지 하루이틀의 벼락치기로 깊어지는 여정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시종여일 항구한 사랑의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다시 심기일전하여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박차를 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인생이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시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된 내 인생 여정의 시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 자주 예로 들었습니다만 제 경우는 일일일생 하루로 하면 오전 6시부터 해가지는 오후 6시까지로 압축한다면 아마 지금의 시점은 오후 4:30분쯤,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의 시점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정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는 관계라면 신체의 나이와는 무관하게 정신은, 마음은, 영혼은 ‘파스카의 봄철’같은 신록에 빛나는 ‘영원한 청춘’의 아름다운 영적 삶일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예수님의 사도들이야말로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에 대가들입니다. 예수님과 신뢰와 사랑의 우정 관계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지 다음 다음 베드로와 사도들의 담대한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증인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무딘 마음을 두드리는 사도들의 우레같은 고백입니다. 그러나 무지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완고한 지도자들은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합니다. 새삼 주님과 우정의 여정은 더불어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혼자의 외롭고 고독한 여정이 아닙니다. 바로 사도들의 주님과 우정의 여정이 이를 입증합니다. 사실 저에게도 세상 곳곳에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랑하는 형제자매 도반들이 많습니다. 바로 하루하루 날마다 제 강론을 애독하는 분들이 그러합니다.
영원한 주님이자 도반인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더불어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도반들인 사도들입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들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도반 형제자매들간의 우정도 깊어질 것이니 그대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주님과 형제들과 더불어,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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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복되고 고귀한 순종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주님께 대한 순종에 대해 얘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주님께 대한 순종에 대해 묵상하다가
주님께 대한 순종을 아는 것만으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왜냐면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 개념조차 없는 사람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 그게 뭐야? 왜 하는 건데? 이러는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런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 이전에
순종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뭘 안다면 복종이나 굴종을 알지
순종과 같이 고급스러운 것은 모를 것이고,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같이 거룩한 것은 더더욱 모를 것입니다.
그러니 순종이 뭔지 알고
더 나아가 오늘 사도들처럼 인간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까지 아는 우리는 참으로 복되고 고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는 것만으로도 복되고 고귀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순종을 실제로 산다면 얼마나 더 복되고 더 고귀하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위에서 내려오신 주님처럼
위로 하늘로 오르는 사람이기에 하느님께 순종하는 겁니다.
땅에서 기어 다니는 사람은 기껏해야 인간에게 순종하지요.
땅의 것밖에 못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보고 하느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 뜻에 따라 위에서 오신 주님이 모든 것 위에 계신 것처럼
주님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께 순종하면 주님처럼 모든 것 위에 있고,
모든 것 위에 있기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가 땅의 산과 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자유롭게 강을 건너고 높은 산도 아래로 보고 넘어가듯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높은 사람도 아래로 보고 불순종하고,
낮은 사람에게도 하느님 뜻에 따라 순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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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오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믿음의 재발견”). 곧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차원인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성실함’(믿음이나 성실함은 다 같이 히브리어 “에무나”를 쓴다)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의미로 ‘순전한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철저한 헌신을 토대로 하는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인 "CREDO"라는 단어 역시,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cro;심장, 생명’+dare;주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드리며,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이 됩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오늘도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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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4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다
"인생은 정직과 거짓, 충직과 불충, 이기심과 이타심, 선과 악이라는 두 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다르며 대치되는 논리로 이루어진 두 길 사이에서 오고 갈 수는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야말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루카16,13).
집회서를 보면“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6-15-17).고 적혀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사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예수님과 복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깨우침을 주면 계산하지 말고 먼저 받아들여야 더 큰 것을 알게 되고 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닌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위인 중 한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보다는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로 초대받았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완벽하고 좋은 일을 해 공로를 많이 쌓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결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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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뉘어졌습니다. 소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따르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팔정도의 삶을 철저하게 지키고, 금육과 금식을 실천하라고 하였습니다. 소승은 작은 수레라는 뜻입니다. 이론과 실천을 강조합니다.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하고 사회와 분리된 엄격한 수행을 강조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절대성을 부여합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속세의 삶을 살면서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게 살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엄격하고 복잡한 계율보다는 자유롭고 단순한 계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입니다. 본인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대중이 깨달을 수 있도록 문을 열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진보적이고 개방적으로 해석합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다른 방식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에도 소승이 있고, 대승이 있습니다. 소승은 사막에 들어가서 은수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질, 명예, 권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삶입니다. 이런 소승의 전통은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찾듯이, 어두운 밤을 항해하는 배가 저 멀리 보이는 등대를 찾듯이 수도원에서 지친 삶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기둥처럼 받쳐준 것은 침묵과 고독 속에서 소승의 삶을 살아간 수도자들의 힘이 컸습니다. 대승은 세상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거침없이 세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환난도, 위험도, 굶주림도, 죽음의 권세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와 수도원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원이 뿌리라면 교회는 꽃과 같습니다. 수도원도 교회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혼은 우리의 감각과 생각을 주관합니다. 혼이 맑지 않으면, 혼이 악의 세력에 넘어가면 우리의 감각은 욕망의 화신이 됩니다. 우리의 감각은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과 선행으로 우리의 혼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혼은 우리의 감각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의 혼은 우리의 생각이 하느님이 모상을 닮아 자비를 베풀고, 겸손하며, 부끄러움을 알고, 선과 악을 식별하게 됩니다. 영은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상식과 이성을 초월합니다. 성령을 받은 다니엘은 지혜가 충만하여 수산나의 억울함을 밝혀 주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오늘 이렇게 담대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기도와 말씀 그리고 자선으로 우리의 혼이 정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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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원시인들은 눈앞의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면 일차적으로 두려움이 생겼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근육을 움직였습니다. 즉,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했습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 활성화되는 부분이 뇌의 편도체입니다. 이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전전두피질의 기능은 심각하게 저하된다고 하지요. 원시 사회에서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 최약체였습니다. 힘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하늘을 날거나 물속을 헤엄칠 수도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지능을 사용할 때 활성화되는 전전두피질의 기능의 발달이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 볼 때,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긴장하지 마. 다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만 지능을 사용하는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는 지능의 활성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긴장되는 순간에서도 편도체를 안정화하고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할 수 있어야 올바른 판단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편도체를 안정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많은 심리학자는 명상을 이야기합니다. 눈을 감고 마음의 평화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기도, 묵상과 다를까요?
기도, 묵상을 통해 우리는 더 큰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기도와 묵상을 소홀히 할까요?
편도체의 활성화가 계속되는 원시인이 아닌,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는 현대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걱정이 많아져서 우리 뇌의 편도체가 계속 활성화되는 원시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또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현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이 아드님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굳게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길이 아니라 영원한 벌이 머무는 길을 선택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굳은 믿음보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보면, 성령과 하나 된 사도들이 힘차게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말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이 말을 듣고 오히려 격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나온 모습입니다. 당연히 영원한 생명보다 영원한 벌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더 열심히 기도와 묵상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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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스스로 헛된 바람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존 포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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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스러운 소명, 즉 ‘성소’에 대해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사랑하셔서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이는 아드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성소입니다.
간혹 우리는 ‘성소’를 단순한 부르심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소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소는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임과 동시에 순간순간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유혹받으셨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빵의 유혹과 세상 제물에 대한 유혹,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섬기라는 광야의 유혹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 주님께서 유혹의 그 순간순간을 순수한 믿음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말씀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빵과 제물은 물론이고 주님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도 유혹은 다가옵니다. 빵과 제물의 유혹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유혹도 찾아옵니다.
그 순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또 선택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거룩한 소명, ‘성소’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늘 우리에게 유혹은 다가오겠지만 그 유혹을 믿음으로 그리고 신앙인의 담대함으로 헤쳐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모습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모습을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말 중 하나는
‘바빠 죽겠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생활 같은 것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은 시간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진짜 그럴까요?
아십니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말입니다.
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모른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보화도
지금부터는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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