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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과 김부식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가·정치가였다.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하여,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에 올랐다. 유교주의적 대의명분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보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중세의 유교적 합리주의자였다. 軾수레 앞턱 가로나무 식
당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한문은 당대의 세계어였다. 이를 얼마나 자유자재로 높은 수준에서 구사하는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이것은 지상의 과제였다. 12세기 중반에 나온 [삼국사기]는 한문을 공용어로 받아들인 고려 사회가 드디어 이 언어체계를 완벽하게 소화했음을 나타내는 좋은 예이다. 역사서를 쓰는 방법론이 자리 잡혔고, 문장 또한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김부식이 이런 역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김부식 개인의 능력이기도 했고, 시대가 만들어준 온축의 결과이기도 했다.
흔히 [삼국사기]의 지은이로 김부식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하자면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관리들이 만든 책이다. 그가 책임자로 있으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편의상 지은이라 하는 것이다. 김부식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삼국사기]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시대가 지닌 역량이 그런 수준에 올라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중국의 황제로부터 받은 선물
김부식은 송나라에 여섯 달 동안 머물며 송나라 휘종에게 [자치통감]을 선물로 받았다. 김부식은 이를 보며 [삼국사기]에 대한 집필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김부식은 1075년(문종 29년)에 태어나 1151년(의종 5년)에 세상을 마친 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가·정치가였다.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은 고려 태조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근(覲) 때부터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김부식은 어려서부터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그를 포함한 4형제는 모두 문장에 뛰어나고 박학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중앙정계에서 벼슬을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분명한 소망이 있었다. 최고의 문장가로 입신양명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김부식의 동생이 김부철(金富轍), 이렇게 놓고 보면 송(宋) 나라의 문장가 집안 소순(蘇洵)이 그의 자식에게 붙인 이름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떠올리게 한다. 소식은 바로 송나라 최고문장가인 소동파(蘇東坡)이다. 覲뵐 근 蘇깨어날 소 洵참으로 순 轍바뀌자국 철 坡고개 파
김부식이 관계에 진출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 곧 1096년(숙종 1년)이었는데, 그로부터 20여 년 동안 주로 학문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의 폭과 깊이를 더해 나갔다. 이 같은 김부식의 학문이 빛을 낸 것은 1116년(예종 11년) 7월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였다. 여섯 달 동안 머물며 송나라 휘종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휘종은 이제 막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패기에 찬 학자에게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질을 선물로 주었다. 김부식은 황홀했다. 황제로부터 선물을 받아서만이 아니라, 이 책에 버금갈 우리의 역사서를 써보리라는 결심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그가 나중에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묘청의 난을 물리치고
김부식의 생애에서 가장 큰 정치적인 난관은 묘청(妙淸)의 난이었다고 하겠다. 묘청의 난이란 무엇인가.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개성)의 궁궐이 불에 타자, 묘청은 무리를 모아 ‘서경천도론’을 주장하고, 서경(평양)에 궁궐을 새로 지어 왕이 자주 행차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 유신들의 반대는 극에 달했다. 급기야 묘청은 1135년(인종 13년) 1월,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때 개경 유신을 대표하는 김부식은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지휘 통솔해 진압에 나섰다. 반란군의 진압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김부식은 먼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세력인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특히 정지상을 죽인 것을 두고 세상에서는 말이 많았다. 그가 자신보다 시를 더 잘 지었으므로 이를 시기하여 일부러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파의 예봉을 꺾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반란은 묘청의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어렵사리 진압되는가 했는데, 반란군의 처분을 놓고 다시 개경의 유신들 사이에도 분란이 생겼다. 난은 1년 2개월 만에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翰날개 한
이 같은 공적을 바탕으로 김부식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로 승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事上柱國太子太保)의 자리도 겸하였다. 모두 왕 아래에서 나라의 일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위치였다.
그러나 그의 일생이 끝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치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정적은 생겨났고, 그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난 것도 반대파들의 거센 압력에 밀린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유교주의적 대의명분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보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중세의 유교적 합리주의자였다. 김부식의 세계관을 잘 나타내주는 시가 결기궁(結綺宮)이다. 綺비단 기
堯階三尺卑 요 임금의 섬돌은 석 자밖에 안되었지만
千載餘其德 오랜 세월 그 덕이 남아 전한다네.
秦城萬里長 진 나라의 성은 만 리나 되었지만
二世失其國 겨우 아들 때에 그 나라를 잃었다네.
결기는 진 후주(陳後主)가 584년에 지은 누각 셋 가운데 하나이다. 모두 침단향목(沈檀香木)으로 틀을 세우고 금은 보옥으로 장식하였으며, 기화요초(奇花瑤草)를 심어 사치를 다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호사스러운 궁이나 누각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그러나 왕의 권위는 이런 데서 나오지 않는다. 요 임금과 진시황의 경우를 들어, 무엇이 진정한 권위요 백성을 위한 길인지, 김부식은 요령 있게 설파하고 있다. 沈잠길 침 檀박달나무 단 瑤아름다운 옥 요
김부식에게 내려진 시호는 문열(文烈)이었다.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으나 이제는 전하지 않으며, 많은 글이 [동문수(東文粹)]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그것만으로도 그를 문장의 대가라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김부식을 이렇게 평하였다. 粹순수할 수. 兢떨리다삼갈 긍 麗고을 려
“박학강식(博學强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그보다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삼국사기를 편찬하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기로 한 것은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이었다. 왕은 그를 도와줄 젊은 관료를 보내주었다. 김부식은 인간의 운명적 생애에다 자신을 대입시켜 가며 역사의 흐름을 보았다. 그것이 [삼국사기]의 큰 줄거리였다. 나아가 [삼국사기]를 통해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 데 거울로 삼으려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삼국사기]를 서지상 간략하게 정의하자면, “1145년(인종 23년) 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표(表)’ 3권, ‘열전(列傳)’ 10권이 들어가 있다. 이 같은 체재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은 왕의 명령에 따라 김부식이 주도하였다. 곧, 최산보(崔山甫)·이온문(李溫文)·허홍재(許洪材)·서안정(徐安貞)·박동계(朴東桂)·이황중(李黃中)·최우보(崔祐甫)·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수관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관찬사서(官撰史書)라고도 한다. 이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각 부분의 머리말,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贊도울 찬
[삼국사기] 편찬의 보다 직접적인 목적은 김부식이 쓴 글에서 잘 나타난다. 왕에게 올리는 표문이 그것이다. 김부식은 이 글에서, 우리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여러 역사서의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신하·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12세기적 상황에서 그때의 지식인이 갖출 수 있는 최상의 민족주의였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를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책이라 평하는 시각도 있다. 김부식이 취한 철저한 사대주의적인 태도 때문이다. 모처럼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필요성을 자각하였지만, 지나친 중국 의존이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지상 때문에 살고 죽고
이규보는 그의 [백운소설]에서 김부식의 죽음을 희화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평생의 라이벌 정지상의 손에 불알이 잡혀 죽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설화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 사이에 그럴듯한 이야기로 믿어지는 것은 두 사람의 생애가 교차된 비극적 로망 때문이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 날 봄날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柳色千絲綠 버들 빛이 천 가닥의 실처럼 푸르고
桃花萬點紅 복사꽃 일만 점이 붉기도 하다
그러자 문득 공중에서 정지상이 귀신으로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이 엉터리 같은 놈아, 네가 무슨 재주로 버들가지가 천 가닥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았다는 거냐? 시를 쓰려면
柳色絲絲綠 버들가지 가닥가닥 푸르고
桃花點點紅 복숭아꽃 송이송이 붉구나’
라고 써야지, 이 멍청한 놈아”라고 했다. 과연 한 글자 달라졌는데 시의 분위기는 완연 바뀌었다. 이 이야기는 시를 퇴고하는 데 하나의 요령으로도 널리 인용된다. 또 一字師, 즉 한 자의 스승이란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정지상의 귀신은 끈질기게 김부식을 따라다녔다. [백운소설] 속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김부식이 절에 가서 뒷간에 앉아 볼일을 보는데, 또 정지상이 귀신으로 나타나 김부식의 불알을 힘껏 잡아당겼다. 터질 듯한 아픔을 참느라고 용을 쓰니 김부식의 얼굴이 빨개졌다. 귀신이 “술도 먹지 않았는데 왜 얼굴이 붉어지느냐?”고 묻자, 김부식은 “隔岸丹楓照顔紅 건너편 언덕의 단풍이 낯을 비춰 붉어지네”라는 시로 응대하였다. 그러자 귀신이 더욱 강하게 불알을 잡고 “이놈의 가죽 주머니는 왜 이리 무르냐?”라고 하자, 김부식은 “네 아비 음낭은 무쇠였더냐?”하고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정지상의 귀신이 더욱 힘차게 음낭을 죄므로 부식은 결국 측간에서 죽었다 한다. 隔막을 격
이 모든 이야기가 설화이다. 시까지 들어가서 그럴듯해 보이지만, 두 사람을 견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고든 이야기이다. 문학적으로 평가한다면 정지상은 시에 강하고 김부식은 산문에 강했다. 시적 자질에서 떨어지는 줄을 아는 김부식이 정지상에게 느꼈을 열등감이야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김부식의 전아한 산문의 멋은 당대 최고였고, 문벌을 이룬 자신의 집안에 대해 갖는 자부심은 팽팽했다. 거기에 정지상을 비교하기가 민망할 따름이다. 사실은 그래서 비극적 약자인 정지상에 대해 세상의 온정이 모인 것은 아니었을까.
송인(送人)
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긴 둔치에 풀빛이 더욱 푸르른데
送君南浦動悲歌 그대를 남포에서 떠나 보내며 노래 가락 슬퍼라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이 언제 다 마를 것인가
別淚年年添綠波 이별의 눈물만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데[1]
정지상은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서경(西京) 출신으로 초명은 지원(之元)이고, 호는 남호(南湖)이다. 서경 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歇쉴 헐, 개 이름 갈, 사람 이름 알
[2]정지상의 오언절구 시
임궁범어파(琳宮梵語罷)(절간의 염불소리 그치니)[琳아름다운 옥 림(임), 푸른 옥] [罷방면할 파, 그치다.]
천색정유리(天色淨琉璃)(하늘 빛 고요해 맑은 유리 같네) 琉유리 유 璃유리 리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 풍경을 읊은 이 시를 김부식이 정지상에게 “빌려주면 나머지 부분은 자신이 채우겠다.”고 했다. 정지상은 거절했다. 이 거절이 묘청의 난 때 김부식에게 비운의 죽음을 맞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요.
2. 생애[편집]
그의 생년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한국의 참고서에는 으레 고려 12시인의 한 명으로 꼽고 있는데 고려 12시인이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짚을 수 없다. 조선 초기의 한시문집인 동문선에 정지상의 한시 작품 14수와 산문(황명으로 지은 국가의례에서의 표전문이나 연회에서의 축사) 4편이 실려 있는데, 과거 급제 때 자신의 어머니에게 물품이 하사된 것을 하례하는 표전문에서 어머니의 성이 노씨(盧氏)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이 두 살 때 이미 대동강 위에 노니는 오리를 보고
何人把新筆 방금 누가 붓을 집었길래
乙字寫江波 을(乙) 자를 강물 위에 써놨을까? 把잡을 파
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1114년(예종 9) 과거에 급제해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127년(인종 5)에 좌정언으로,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하는 척준경을 탄핵해 유배하도록 하였다.
1129년 좌사간으로 기거랑(起居郎) 윤언봉(尹彦蓬)[3]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소(疏)를 인종에게 올렸다. 이 해에 서경의 대화궁이 완성되어 인종이 행차해 대화궁의 건룡전(乾龍殿)에서 하례를 받을 때 묘청이나 백수한 등과 함께 백수한(白壽翰) “임금께서 자리에 오르시자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렸으니 이 어찌 새 대궐에 행차하시는 상서로운 조짐이 아니겠습니까."라며 하례하는 표문을 초하여 재신과 추신에게 서명하기를 청했지만 관원들은 “우리가 비록 늙었으나 귀는 아직도 어둡지 아니한데, 공중의 풍악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은 속이지 못할 것이다." 라며 따르지 않았고, 이에 정지상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이는 비상한 아름다운 상서이니 마땅히 청사에 기록하여 후세에 밝게 보여야 할 터인데 대신들이 이와 같으니 매우 통탄할 일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표문은 결국 올릴 수 없었다. 蓬쑥 봉 疏트일 소
1132년 4월 병술에 서경에 행차했던 인종이 대동강에서 용주(龍舟)를 타고 뱃놀이를 했는데, 예종의 제사가 든 달이라서 악기를 준비해 놓고 연주하지는 않자 “예법에 기일(忌日)은 있으나 기월(忌月)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고, 기월이 있으면 기년(忌年)도 있어야 되겠습니까? 풍악을 울려서 서경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소서.”라고 해서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서경 출신으로 묘청과 함게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해 김부식 등의 개경을 기반으로 둔 문벌귀족들과 대립하였다.
동시대의 김부식과는 정적이자 문장으로도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다만 문장에서는 정지상이 한 수 뛰어나서 김부식이 그를 질투했다고 한다. 사실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정지상과는 달리 김부식은 시보다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당송대의 고문체에 능한 문장가였다. 그 때 즈음 고려에서는 그간 대세를 이루던 사륙변려체 대신 고문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강경한 서경파인 묘청에 비해 온건서경파에 가까웠지만, 서경을 거점으로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은 묘청을 토벌하러 가기 전에 화근을 미리 없애는 차원에서 개경에 있던 정지상과 김안·백수한 등을 함께 처형하였다. 참고로 이 일은 김부식이 왕에게 아뢰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형한 뒤 왕에게 사후보고를 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김부식은 평소 지상과 같이 문인으로서 명성이 비슷하였는데, 문자 관계로 불평이 쌓여, 이에 이르러 정지상이 내응한다고 핑계하고 죽인 것이다’ 평가했다. 사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 일으키는데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부터가 정지상 등이 묘청의 반란과 연관성이 약하다는 증거이지만, 원래부터가 정적이므로 일말의 구실이 생기자 이때다 하고 그 김에 제거한 것이다. 애초에 문신간의 대립이기도 해서인지 고려사에서는 정지상 등은 반란자로 꼽지도 않고 있다.
3. 여담[편집]
야사 <백운소설>[4]에 의하면 김부식이 시를 짓자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그것밖에 못짓냐 멍청아"라고 비웃고는 더 좋은 구절을 제시해서 김부식을 버로우시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자세히 말하면 정지상이 죽은 후의 어느 날 김부식은 '봄'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柳色千絲綠 버들가지는 천 가닥 실처럼 푸르고
桃花萬點紅 복사꽃 일만 점이 붉구나
그런데 갑툭튀한 정지상 귀신이 김부식의 싸닥션을 날리더니 "버들가지가 천 가닥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는 미친 놈이 어딨냐? 왜 이렇게 못 짓느냐?"라며 자신이 김부식이 지은 그 시를 고쳤다는 것이다.
"柳色絲絲綠 버들가지 가닥가닥 푸르고
桃花點點紅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겨우 두 글자만 바꿔서 김부식을 버로우시키는 일화의 사실여부야 어쨌든, 이 일화는 시를 퇴고하는 하나의 요령으로 인용되곤 하는 일화 중 하나다.
백운소설에서는 또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날 뒷간에 쭈구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었는데, 원한을 품은 정지상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김부식의 부랄을 덥썩 움켜쥐고 터트릴듯 말듯 오물락쪼물락 거리며 '이게 누구의 부랄이냐'고 묻자 부랄이 터질까봐 식은 땀을 흘리던 김부식은 그 희롱에 발끈하며 '니 에비 부랄이다 니 에비!'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화가 난 정지상이 그 즉시 부랄을 터트려 죽였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정지상을 죽인 것 때문에 결혼이 어려워진 김부식의 후손이 있다(...).
[4] 원전은 고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으로 조선 시대 홍만종이 동국이상국집에서 내용을 발췌해 편집한 것이 백운소설이다.
김부식은 유학자였지만 불교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고, 불교를 비판했음에도 정작 본인 역시 불교를 좋아했던 유학자이다.
恢恢一道 분명한 하나의 가르침을
落洛其音 분명하게 이야기하건만
機聞自異 근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들으니
大小淺深 크고 작고 깊고 옅은 이해의 차이가 있네.
如三舟月 같은 달이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과 같고
如萬竅風 바람이 구멍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네. 竅구멍 규
至人大鑒 지인(至人)의 큰 이해로 보면 鑒거울 감
卽異而同 다르면서 또한 같도다.
瑜伽名相 유식[瑜伽]은 명상(名相)을 이야기하고
方廣圓融 화엄[方廣]은 원융을 이야기하지만
自我觀之 내가 보기에는
無往不通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네.
百川共海 백 개의 강이 모두 같은 바다로 가고
萬像一天 하나의 하늘이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네.
廣矣大矣 크고도 넓어서
莫得名焉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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