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1권에서
부레옥잠
김신용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작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가,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말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개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매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김신용, [부레옥잠]({도장골 시편}, 천년의 시작) 전문
유태인들은 떠돌이--나그네로서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학대를 받은 민족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어렵고 힘든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최선의 생존 방법을 발견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탈무드}에서 역설하고 있는 ‘루푸트 멘시’, 즉, ‘공기의 사내’가 바로 그것이다. 언제, 어느 때, 어떠한 사건들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늘, 항상, 몸을 가볍게 하고 또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에 의하여 나라를 잃고 이천 년 동안이나 전세계 곳곳으로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유태인들, 늘, 항상, 법률적 차별에 의하여 제조업이나 길드조합의 가입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던 유태인들, 슬럼가와도 같은 ‘겟토오’(유태인 거주지역) 지역에 거주하면서도 최고급의 경전인 성경을 공부하고 유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유태인들, 그 살아 있는 조국----유태인들은 {성경}을 ‘들고 다니는 조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불타는 향학열과 그 인식욕은 정말이지, 세계적인 대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민족이 되어갔던 유태인들, 마르크스, 아인시타인, 프로이트, 베르그송 등과도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을 배출해내고 오늘날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들----. 공기의 사내는 전지전능한 인간이며, 그들의 고통이 유태인들을 공기화시킨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공기의 사내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 인간이며, 그 어떤 곳에서도 자유 자재롭게 적응해나갈 수 있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 변신의 용이함 때문에 자기 창조성에 뛰어나고 새로운 사상과 이론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공기의 사내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공기주머니’를 달고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부귀는 요새이며 빈곤은 폐허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듯이, 언제, 어느 때나 현실주의자이며, 이 순간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유태인들은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며, 또, 그리고, 권력을 사랑한다. 따라서 그들은 ‘지배와 복종’이라는 그 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그토록 잔인한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이고, 오늘날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민족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신용 시인은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으며,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버려진 사람들}과 {개 같은 날들의 기록}, 그리고 {몽유 속을 걷다}와 {환상통}과 {도장골 시편} 등이 있고, ‘천상병문학상’과 ‘노작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김신용 시인의 삶은 겨우 중학교를 중퇴하고 양동시장의 지겟꾼과도 같은 파란만장했던 삶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제는 환갑을 넘긴 나이인데도, 슬하에 단 한 명의 자식도 없이, 그의 아내와 함께 ‘수의’를 만들면서, 겨우, 간신히 목구멍에 풀칠을 해나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부귀가 요새이고 빈곤이 폐허’이라면 그는 폐허 속에서 지난 60여년 간을, 오직, [부레옥잠]처럼 살아온 것이다. 김신용은 ‘공기의 사내’이며, ‘부레옥잠의 사내’이다. 김신용 시인은 그 떠돌이--나그네의 삶을 선호하고, 그 떠돌이--나그네의 삶을 통해서 아름다운 ‘부레옥잠’의 삶을 꿈꾼다. 왜냐하면 그 자유 자재로운 삶을 통해서 돌부처의 내장 속을 뚫고 들어가 만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낙천주의란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는 사상이며,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상을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으며, 또한 어떻게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나는 김신용 시인의 [부레옥잠]이 그의 대표작이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시라고 생각한다. 그의 아내가 시골 장바닥에서 구해온 부레옥잠 한 그루를 관찰하고, 그 부레옥잠의 삶과 그와 그의 이웃들의 삶을 동일화시키고, 그리고, 그 아름답고 행복한 삶(‘연한 보랏빛 꽃’)으로 활짝 꽃 피워나게 된 것이다.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작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가,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말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개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매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라는 이 [부레옥잠]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부레옥잠은 몰옥잠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며, 열대 및 아열대 지방의 아메리카가 그 원산지이다. 부레옥잠은 수염처럼 생긴 잔뿌리들로 수분과 양분을 빨아 들이며, 연못을 자유 자재롭게 떠다니며 자란다. 잎은 달걀 모양의 원형이며, 그 너비와 길이가 각각 4~10cm로 밝은 녹색에 털이 없고 윤기가 있다. 잎자루는 공모양으로 부풀어 있으며, 그 안에 공기가 들어 있어 물의 표면으로 떠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꽃은 8~9월에 피는데 연한 보랏빛이며, 수상꽃차례(穗狀花序)를 이루고 밑부분은 통으로 되어 있으며, 윗부분이 깔때기처럼 퍼진다. 꽃은 아름답지만, 꽃이 지는 것은 더럽고 추해보인다. 따라서 그 “꽃이 지는 자리를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부레옥잠’의 마음은 고귀하고 거룩한 마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의 아내도 부레옥잠과도 같은 삶을 꿈꾸고, 그 이웃의 아낙네도 부레옥잠과도 같은 삶을 꿈꾸며, 그리고 김신용 시인도 부레옥잠과도 같은 삶을 꿈꾼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아니, 그 이웃의 아낙네에게 최고급의 찬사를 할 수 있는 시인과 그의 아내 역시도 오늘은 다같이 제일급의 시인인 것이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의 도덕성은 참으로 그 어느 꽃보다도 고귀하고 거룩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귀하고 거룩하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그 아름다움의 극치는 예술적인 삶의 완성을 말한다. 부레옥잠의 존재 근거는 부레옥잠의 도덕이며, 부레옥잠의 도덕의 상징은 그 연한 보랏빛 꽃이다. “몸에 부레같은 구근을 매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부레옥잠, “물 위를 떠 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같은” 부레 옥잠,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네,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라고 노래를 하며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시인, 그리고,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시인----. 김신용 시인의 [부레옥잠]은 부레옥잠과 시인의 아내, 그리고 그 이웃의 아낙네와 시인의 사중주가 연한 보랏빛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나 가능한 것이지만,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그 슬픔을 아름답게 승화시켜나가면서 자유 자재롭게 살아가는 시인과 그의 아내와 그 이웃의 아낙네와, 그리고, 그 부레옥잠의 삶이 어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어떤 일을 시작하는 법과 끝 맺는 법을 안다는 것, 사는 법과 죽는 법을 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지상 최대의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신용 시인은 어떤 일을 시작하는 법과 끝 맺는 법을 알고 있는 시인이며, 또한 사는 법과 죽는 법을 알고 있는 시인이다. 고통 없이 살고 싶어서, 그 생살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김신용 시인, 드디어, “물 위를 떠 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연한 보랏빛꽃을 피우고, 어느 누구에게도 그 꽃 지는 자리는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신용 시인, 요컨대 김신용 시인은 그 고통(슬픔)을 공기화시키며, 그 고통(슬픔)을 부레처럼 매달고 그의 마지막 남은 생을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그의 삶의 존재 근거이고, 고통이 그의 스승이고, 고통이 그의 기쁨이고, 고통이 그의 행복이다.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같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기피하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고통이라는 삶의 바다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어떤 이는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입산속리하고, 어떤 이는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악차같이 돈을 벌고, 어떤 이는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거꾸로, 고통 속으로 뛰어들고, 어떤 이는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단 하나 뿐인 목숨까지도 끊어버린다. 하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그 고통을 제거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만을 향유하지는 못한다. 입산속리도 또다른 고통의 시작이고, 부의 축적도 또다른 고통의 시작이며, 심지어는 자살자의 삶마저도 또다른 고통의 시작이다. 단 하나, 오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듯이, 그 고통을 공기화시키고, 그 고통을 통해서 아무런 고통도 없는 것처럼 부레옥잠과도 같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시는 고통의 꽃이며, 행복의 꽃이다. 시인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고 그 고통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김신용 시인은 입산속리하지도 않았고, 돈을 벌지도 않았고, 또, 그리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지도 않았다. 오리혀, 거꾸로, 이 세상을 [부레옥잠]과도 같이 몸 가볍게 떠돌아 다니며, 낡고 초라한 옷과 최소한도의 음식만으로 살아온 것이다.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모든 욕망을 다 비우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달래주는 것이 김신용 시인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삶인 것이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매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김신용 시인은 어느 덧 부처가 된 것일까? “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시의 종교, 시의 순교자, 득도, 열반.
시는 고통의 꽃이며 행복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