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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복음의 3대 핵심/ 요한복음 3:16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JZfJ_Qb4iWU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12월 25일은 성탄절이 아니다. 날짜를 잘못 계산한 것이다.” 심지어 “12월 25일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날인데, 12월 25일에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이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날짜가 아니라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성탄절은 구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지 날짜가 뭐가 중요합니까? 날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절기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주일이어야 하고 날마다 성탄절이고, 부활절이고, 감사절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탄절이라고 하면 파티, 선물, 산타할아버지 등을 먼저 떠올립니다. 몇 년 전 TV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성탄절에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한다면… 무슨 선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죠. 산타할아버지 하면 선물을 주는 사람인데 그 할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물어봤다는 것이 발상의 전환입니다.
어린이들의 대답이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의 대답 3위가 제일 재미있습니다. 산타할아버지에게 필요한 선물 3위는 산타 할머니이었습니다. 이유는 산타할아버지가 외로워 보여서입니다. 2위는 운동기구이었습니다. 이유는 배가 나와서입니다. 1위는 핸드폰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렇다면 왜 핸드폰을 선물하고 싶은가?”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 전화를 해서 자기가 가지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 알려 드릴 수 있으니까”라고 답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의 주인공은 선물을 나누어주는 산타클로스가 아닙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김반석 전도사가 ‘본질로 돌아가자’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제 설교와 본문이 같았습니다. 무엇이든지 기초가 중요하고 기본이 중요합니다.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가 중요합니다. 모래 위에 건물을 지으면 안 됩니다. 반석 위에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믿음의 기초가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는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부분을 다루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을 다루겠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고 기본이 잘 된 사람은 엉터리 신학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단자들의 말도 안 되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튼튼하고 기본이 잘 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깊은 영적인 세계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손흥민 선수의 어떤 면이 가장 멋있어 보입니까?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고 70m를 질주하여 골인시키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일명 손흥민 존에서 왼발이든 오른발이든 공을 감아 차서 골대를 가르는 모습입니까? 저는 손흥민 선수가 경기 직전 경기장에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장면이 가장 멋집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손흥민 선수는 2021-2022년 EPL 득점왕이 되었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재능이나 노력도 중요한지만 그의 아버지 손웅정감독의 역할도 중요했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혹독하게 훈련 시켰습니다. 훈련 강도가 너무 심해서 손흥민이 훈련을 하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경찰에 신고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손감독님이 손흥민을 훈련시키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기본기입니다. 매일 같이 하루 2시간 씩 기본기만 시켰답니다. 18살이 될 때까지는 슈팅도 시키지 않고 기본기만 충실하게 했습니다. 날마다 리프팅을 하며 운동장을 세 바퀴 돌았는데, 중간에 공을 떨어뜨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네 시간씩 드리블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 것입니까? 손흥민은 그렇게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기본기가 분명해야 합니다. 건물의 기초가 흔들리면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신앙도 기초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본이 약하면 모든 것이 약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신앙의 기초와 기본을 다질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성경을 대표하는 구절입니다. 성경은 총 66권, 1189장, 31,173절로 되어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구절이 오늘 우리가 본 본문입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이 말씀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믿는 사람은 신앙의 기초가 튼튼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의 기본이 확실합니다. 그런 사람이 복음 위에 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복음을 받아드리면 일어나는 두 가지 결과를 말합니다.
①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생명은 멸망을 향하여 달리는 기차와 같습니다. 인간의 처지를 보여주는 풍자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서 맹수에 쫓겨 도망가다가 우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물 밑바닥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그 사람이 바닥에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나무뿌리에 매달려 간신히 위험을 모면하고 있는데 큰 일 났습니다. 위를 보니 그 나무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 번갈아 뿌리를 갉아먹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돌 사이로 보이는 벌집에서 꿀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는 허기를 느껴 그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힙니다. 그는 꿀을 찍어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잊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그네는 사람이고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의 시간입니다. 우물 밑바닥의 구렁이는 죽음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처한 상황이 죽음이라는 무서운 위협 앞에 직면해 있는데 사람들은 현실의 쾌락에 취해 그 사실을 잊고 삽니다. 물론 잊지 않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서글퍼 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멸망을 사망과 심판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누구나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의 결과는 지옥입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사망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 사망입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입니다. 이러한 육체적 사망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 한데서 오게 된 형벌이며, 심판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사망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꽃꽂이의 꽃은 살았다는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은 살았다는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원한 사망입니다.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으면 그는 육체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게 됩니다. 사망이 한문으로는 죽을死에 망할亡자입니다. 사망은 죽고 망했다는 뜻입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세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도,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도 죽어서 지옥에 들어간다면 그는 망한 사람입니다. 철저히 망한 사람입니다.
멸망한 사람은 지옥에 가는데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지옥은 어떠한 곳입니까? 첫째, 지옥은 무저갱입니다. 밑이 닿는 곳이 없는 깊은 구덩이입니다. 바닥의 깊이를 모를 만큼 깊고 어두운 곳입니다. 둘째, 지옥은 옥입니다. 이 말은 일체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옥에 간 영혼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셋째, 지옥은 불못입니다.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입니다. 그 불이 얼마나 강력한지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당할 것입니다. 불속에 왕소금을 뿌리면 소금이 탁탁 튀듯이 고통스러운 곳이 지옥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지옥에 간 부자가 목이 말라 죽겠는데 물을 구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절규했습니다. 넷째, 지옥은 영원한 불입니다. 그곳에 한 번 들어가면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데 그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습니다. 한 번 지옥 판결을 받으면 영원히 세세 무궁토록 그곳에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슬픈 것은 어떤 사람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힘쓰고 애써도 지옥을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복음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망과 영원한 사망에서 벗어납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②복음을 받아드리면 영생을 얻습니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인생이란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망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모든 불안의 근본 뿌리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죽음을 이기기 전에는 완전한 평화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이 복음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영원한 사망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복음의 3대 핵심’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개인에게 적용되면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
신학자 가운데 칼 바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시카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였습니다. 한 학생이 칼 바르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많은 책을 쓰고, 한 평생 연구하고, 또 가르쳤는데, 당신이 그 동안 연구하고 배운 심오한 진리가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학생의 질문에 칼 바르트는 대답 대신에 어렸을 때 부르던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칼 바르트는 학생의 질문에 찬송가 411장으로 답한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을 한 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이수영목사님은 성경 전체의 말씀 속에서 가장 간결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말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은혜롭고 가장 큰 위로와 기쁨과 소망이 되는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듣기 좋은 말씀일 뿐 아니라 사실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일 하고 싶어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성경에서 제일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은 지혜이시라”라면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 지혜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낱낱이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경에서 제일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은 공의이시라”라면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의의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의 모든 죄를 엄히 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경에서 제일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은 전능자시라”라면 우리는 겁에 질려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벌하시기 위하여 못하실 것이 하나도 없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장 열심히 가르치고자 하는 것,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공급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공급하십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방식은 보호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방식은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방식은 징계하심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듯이 하나님은 필요할 때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방식은 독생자를 보내주심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래리 제임스라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자식들 위해서 한평생 희생하신 좋은 어머니였는데 치매에 걸린 겁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치매 환자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래리는 매주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머니가 아들을 몰라봅니다. “엄마”라고 하면 “당신은 누구죠? 당신 이름은 뭐예요?”라고 합니다. 엄마가 자식을 못 알아보니 자식 편에서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그래서 래리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한 번만 우리 엄마가 나를 알아보고 아들아 아들아 이렇게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런데 어머니의 병세가 계속 악화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코마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가실 모양이라고 식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어머니가 두리번거리는데 자식들을 알아보시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래리가 “엄마!” 하고서 엄마의 손을 딱 잡았더니 엄마 손을 펴더니 아들의 손등을 세 번 두들기더랍니다. 엄마가 래리의 손을 세 번 두들기자 아들은 울기 시작 했습니다. 래리가 운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을 표현한 독특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두 분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부사랑을 표현할 때는 항상 두 번씩 손등을 두들겼답니다. “I love you”하는 대신에 손을 두 번 두드렸고, 더 진한 사랑을 표현 하고 싶을 때는 세 번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신 엄마가 갑자기 아들의 손등을 세 번 두들긴 겁니다. 그래서 아들이 울컥해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아들이 얼마나 좋은지 아들도 엄마의 손등을 세 번 두들겼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환하게 웃더니 “할렐루야” 하시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등을 두드리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표현한 것이고, 아들도 어머니의 손을 두드리며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사랑해요”라고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손등을 두드리는 것은 두 사람에게는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독생자를 주심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력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롬 5:8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면 목숨까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의 희생
복음의 핵심 두 번째는 예수님의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십자가는 믿는 자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삯을 지불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죄의 값을 지불한 것임을 모릅니다. 김영대목사님이 미국 뉴욕에 90년도부터 근 10년 간 살았습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인 이민자들이 여행을 한다하면, 2박3일 나이아가라 폭포나 3박4일로 플로리다에 있는 디즈니월드로 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서서히 한인들 사이에도 2-3주씩 수천 불의 비용을 들여 크루즈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김영대목사님이 섬기는 교회 교인 가운데도 크루즈여행을 다녀오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한 분이 비싼 배표를 사느라 여유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배를 타고 다니면 속도 울렁거릴 것이니 비싼 돈 주고 외국음식 사먹느니, 차라리 김치, 사발면, 햇반 이런 것을 사가지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서 먹으리라’하고는 2주일 분의 먹을 양식을 준비해서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은 식사 때마다 뷔페식당에서 엄청나게 차려진 다양한 음식을 즐기고, 중국음식, 일본 음식, 이태리 음식 같은 특별 음식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속으로 ‘실컷 먹진 못해도 여행지마다 볼거리가 풍성하니 이것도 감사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모든 여행이 끝나고 배가 마이애미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하선하는 승객들에게 선장이 일일이 인사를 합니다. “행복한 여행 되셨습니까? 즐거우셨습니까?” 집사님이 선장에게 대답했습니다. “네, 좋은 구경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모자라서 제대로 먹질 못했습니다.” 그러자 선장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손님! 이 배 안의 모든 음식들이 손님이 지불한 배 삯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그 집사님은 크루즈 여행에 대한 상식이 없어서 많은 음식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상식만 있어서도 그는 크루즈를 누렸을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지 않으면 복음의 능력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복음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믿는 자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요 3:14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에 길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셔서 심판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리면 몸이 부어오르면서 불에 덴 것처럼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치료의 방법을 지시해주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다니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마다 그 자리에서 해독이 되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모세가 장대에 매달았던 구리 뱀의 역할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 자들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래전 중국 북송에 사마광이란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사마광이 어렸을 때 동네에서 큰 일이 생겼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가 물이 가득 찬 아주 커다란 독에 빠진 것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올라갔는지는 몰라도 아이가 독 위에 올라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독 위로 올라가려고 해도 독이 너무나 커서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 손으로 독을 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아이고 어쩌나. 아이가 죽네, 큰일 났네!”하면서 야단법석일 때 아이는 숨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소년 사마광이 큰 돌멩이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큰 돌멩이로 항아리 밑 부분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항아리가 깨지면서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와아~!” 하고 동네 사람들이 놀라는 사이에 독의 물은 다 빠지고 아이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 독을 깰 생각을 한 사람은 사마광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절망의 항아리를 깨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심판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3) 십자가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꿈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보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가 자신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닥다리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은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3. 우리의 믿음
지난 수요일에 김반석전도사가 설교를 하면서 보여준 도표 하나를 함께 보겠습니다. 도표를 보면 사람들이 신앙을 버릴 생각을 한 이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가 ‘기독교인들에게 실망이 커서’가 49%입니다. 그 다음은 ‘기독교가 내게 인생의 의미나 도움을 주지 못해서’가 21%입니다. ‘종교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가 21%, ‘성경의 초자연적인 내용을 믿을 수 없어서’가 11%, ‘다른 종교에 관심이 많아서’가 4%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릴 생각을 했던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다양한 이유들의 이면에는 진짜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사람이 진짜 주님을 안다면 어떻게 신앙을 버릴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신앙을 버릴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합니다.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불신앙이 진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막 16:16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중국에는 황제요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2003년도 기사를 보니 14가지 요리가 나오는 한 끼 식사 값이 우리 돈으로 5,500만원이라고 합니다. 요리로는 상어요리, 제비집, 새끼 비둘기, 콩나물 뿌리, 100여 마리 잉어요리… 등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별 짓을 다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런 상을 차려줬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먹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먹어야 맛을 알고 먹어야 배부른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님의 희생은 믿어야 내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복음의 핵심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설교는 복음의 3대 핵심을 나눴습니다. 먼저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다음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신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믿음으로 복음의 능력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