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전라북도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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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18:13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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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전주
조선 초기의 학자인 성임은 전주를 두고 “안팎으로 산과 강이 전주의 영역을 휘감아 돈다”라고 하였는데, 풍수지리상 전주를 행주형(行舟形)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한 배 가득 싣고서 순풍에 돛을 달아 항로에 오른 배를 지그시 잡아 매어둔 형상이란 뜻이다.
윤곤은 “나라의 발상지이며, 산천의 경치가 빼어나다”라고 하였고, 서거정이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물건을 싣는 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에서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한다”라고 기록하였던 곳이 바로 전주였다. 전주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사철과 명종 때 우의정을 지낸 황헌,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정언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상진이 그들이며, 기축옥사 또는 ‘정여립(鄭汝立)의 난’의 주인공 정여립이 선조 때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인해 4대 ‘사화’ 때 보다 더 많은 천여 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 뒤 기축옥사나 정여립이라는 단어조차 찾아볼 수 없다가 단재 신채호에 의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조금씩 얘기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만 두껍게 각색된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져올 뿐이다. 기축옥사와 정여립에 관한 것들은 여러 문헌이나 백과사전 등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
?~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모반자.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이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으나 성격이 포악, 잔인하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ㆍ성혼의 문인.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퇴관하였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집권한 동인에 아부해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 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 신분의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중 의연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 『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거사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여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 군수 이축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잡혀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립이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대동계를 조직한 뒤 활동했던 그 당시를 『난중잡록』을 지은 조경남(趙慶男)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엎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와 집에 있으면서 자중하는 체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사림에서는 달려가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선조 39년(1606) 10월 오익창이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당당한 성명의 조정에 감히 임금의 자리를 넘겨다보는 궤를 낸 것이 이 역적보다 더 심함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바야흐로 그 이름을 도둑질하던 초두에 학문을 가탁하고 박학과 변론으로 꾸려 나가 성명지학을 고담준론하고 도의를 강론하여 온 세상을 속이니,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 번 보는 것으로서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여 정여립의 학문적 명성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전주부윤이자 양명학자였던 남언경 또한 당파가 달랐음에도 “정공(鄭公)은 학문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다른 사람이 가히 따르지 못할 바다”라고 하여 정여립을 주자에 비기기도 하였으며, 정개청은 18세나 나이가 적은 정여립에게 보낸 글 가운데 “도(道)를 높고 밝게 봄이 당세의 오직 존형(尊兄)뿐이라” 하였다. 이발 역시 정여립을 당시 “제일 인물”이라 하였고, 이이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고 하였다. 그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인하여 대동계원들뿐 아니라 호남의 지식인들이 정여립의 집에 모여들었고, 또한 그들은 정여립의 집에서 책도 읽고 무술도 연마할 수 있었다.
정여립은 그 시대의 스승이었다. 사서오경은 물론이고 글로 적은 것이라면 무엇을 갖다 대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희미한 법이 없고 불을 보듯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정여립은 이 무렵 대동계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큰 적자라도 학문과 예법만 숭상할 줄 알았지, 육예(六藝, 원칙적으로 육경을 말하는데, 주례에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육예라 하였다)를 다 가르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육예를 가르쳐주겠다.”
이것만 보아도 정여립이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성리학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여립에 대한 칭송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고, 여기저기서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대동계에는 신분의 제한이 없어 상민이나 종이나 중, 사당, 광대, 점쟁이, 풍수, 무당 할 것 없이 별별 계층의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정여립은 능란한 말솜씨와 의젓하고 늠름한 태도로 가르쳤으므로 누구나 존경의 마음을 품었다. 또한 그들 중에 근심되는 일이 있거나 혼자서 해결 못할 일이 있으면 힘써 도와주기도 하여 그들의 마음을 한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꿈은 피어나지도 못하고 역모에 몰려 죽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피의 역사 기축옥사가 일어났고, 그때의 상황이 유성룡이 지은 『운암잡록』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처음에 임금이 그를 체포하러 가는 도사(都事)에게 밀교를 내려, 여립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 편지들을 압수하여 대궐 내에 들이게 하였다. 그래서 무릇 여립과 평소에 친근하게 지내어 편지를 주고받은 자는 다 연루를 면치 못하게 되어 사류(士類)가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
그중에 고문을 받고 죽은 자는 전 대사간 이발, 이발의 아우 응교 이길, 이발의 형 전 별좌 이급, 병조참지 백유양, 유양의 아들 생원 백진민, 전(前) 도사 조대중, 전 남원부사 유몽정, 전 찰방(察訪) 이황종, 전 감역(監役) 최여경, 선비 윤기신, 정여립의 생질 이진길 등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이발과 백유양의 집안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입었다. 그리고 연루되어 귀양 간 자는 우의정 정언신, 안동부사 김우옹, 직제학 홍종록, 지평 신식과 정숙남, 선비 정개청이요. 옥에 갇혀 병이 나서 죽은 자는 처사 최영경이었다.
옥사(獄事)는 덩굴처럼 얽히고 뻗어나가 3년을 지내도 끝장이 나지 않아 죽은 자가 몇천 명이었다.
그렇게 많은 피해자들 중 정여립의 9촌 아저씨뻘이었던 정언신은 기축옥사 당시 가장 높은 관직인 우의정에 있었고, 공조참판으로 재직 중이던 형 정언지와 더불어 최대의 피해를 본 사람이다.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함경도 병마절도사와 대사헌, 부제학을 지냈다. 선조 16년(1583) 야인(野人) 이탕개가 쳐들어오자 함경도 순찰사에 임명되어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과 충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신립 그리고 진주성 싸움의 명장 김시민과 이억기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처럼 함경도 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면서 관북 일대의 안정과 복지를 위해 정성을 다하자 여진족들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정언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옥사를 담당하였는데, 호남의 유생 양천회가 올린 상소에 의해 역모 혐의를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뒤를 이어 정여립의 조카 정집이 “정언신 등이 역모에 같이 참여하였다”라고 하여 선조가 정언신, 정언지 등을 친히 국문하여 정언신은 중도부처의 형을 받았다. 중도부처란 죄를 지은 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살게 하는 형벌이다. 한편 정언신의 막내아들 정율은 “아버지는 역적 괴수와 친밀하지 않았다”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아버지가 큰 화를 입자 부끄러움과 한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전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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