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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部隊 여군(女軍) 만세!/이원우 명예 분대장, 어느 예비역 하사. 서울역 광장은 그에겐 너무나 큰 의미를 안겨 주었고 지금도 안겨 주는 곳이란다. 단언컨대 그가 만약 그곳에서 그 체험을 한 게 사실이라면, 더러는 그와 나에게 소설 쓰느냐고 비아냥을 들이댈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와 서울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해도 괜찮으리라. 여기서 잠깐! 알 만한 사람은 안다. 26사단이 8사단에 흡수 통합된 지 몇 년 지난 사실을 말이다. 둘 다 기계화 보병사단인데, 전투력 증강의 효율을 도모하는 의미에서 한 부대로 개편된 거다. 우리 둘은 각기 그 부대에서 반세기 전에 제대한 터라, 만나기만 하면 두 모부대(母部隊) 이야기를 나눈다, 퍽이나 자연스럽게. 여기서 잠깐! ‘모부대’라니 국민 대부분이 생소한 정의(定義)로 받아들인다. 심지어는 어떤 신문사에서 예비역 영관 장교를 인터뷰했는데, 기사 제목이 ‘모 부대가 그립다’더라. 어찌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가정을 해 본다면? 군 복무를 한 청장년이며 노병들에게 물어보는 거다. ‘모부대’를 아느냐고? 그들은 자신이라도 있는 듯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모부대’라니 어느 부대라는 뜻이겠지요.” 그들은 ‘아무 모(某)’ 즉 ‘어느 신사가…’와 같은 경우로 알 있는 것이다. ‘모부대’! 모교(母校)나, 모항(母港), 모국어(母國語) 등과 빗대어보면 일상화하기 쉬우리라. 다시 한 번 풀이하자. 장병들이 제대를 할 때 몸담았던 부대, 그게 모부대다, 처음 두 개 사단 통합 운운했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내게 고백했다. 엄마를 잃는 줄 앓았다? 설마 그렇기야 했을까마는. 참, 그는 26사단에서 제대를 했고 나는 8사단에서 군복을 벗었다. 하사로 말이다. 비슷한 시기였다. 나이는 한 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건 둘의 전우애에 아무 영향을 못 끼친다. 호형호제(呼兄呼弟), 그와 나는 그런 사이다. 둘의 직업(?)은 인터넷 신문 기자다. 거기선 내가 선배다. 그와 교유(交遊)하는 동안 그가 ‘서울역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였다. 온 국민이 괴질에 신음하는 2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도 ‘서울역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수시로 거기서 볼 수 있었다. 승객들이며 역무원, 가게 주인과 종업원, 약사, 청원 경찰…. 심지어는 TMO에서 근무하는 군인들까지. 그 기행(?)이, 이 얘기의 첫 번째 갈래다. 여간해서는 서울까지 가지는 않지만 일단 이런저런 까닭으로 행정구역상 ‘서울 시내’에 발을 들여놓는다 치자. 틈을 봐서 지하철이나 버스 택시를 이용, 서울역으로 간다. 역사(驛舍) 안으로 들어서, 청원 경찰과 가벼운 목례를 나누는 것도 전과 다름없다. 하릴없는 사람처럼 역사 안에서 두리번거리다가 8사단 오뚝이 부대 병사들을 만났을 때 서슴없이 외친다. 돌격! 묘하게도 26사단 구호는 공격이고, 8사단은 ‘돌격’이다. ‘공격’과 ‘돌격’이니 이질감은 줄어든다. 8사단 병사들은 어리둥절해하지 않는다. 자기 부대의 경례 구호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옛날 같았으면 그가 병사를 붙잡고, 커피며 담배 등을 사서 건네기도 했단다. 지금은 그러다가는 이상하다는 소릴 듣게 마련이라나? 반시간쯤 지나고 나서 아래 지하철역으로 내려긴다. 거기 플랫폼에서 병사들을 전송하기 위해서…. 그냥 그린 듯한 자세로 서서 8사단 병사들에게 마음의 손을 흔드는 거다. 상대가 8사단 병사들이라 치자. 거침없이 또 ‘돌격’이 튀어나온다. 옛날 같았으면 전동차에 올라 부대, 그러니까 통합되기 전의 26사단 까지 다녀왔으련만 지금은 그건 삼가야 할 일이다. 한데 그가 맞닥뜨리는, 설명이 불가능할지 모르는 이상한 현상이 있다. 간부, 그러니까 하사 이상은 지하철을 잘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서울역(철도역 및 지하철 역)과 인연을 맺어 왔지만, 그곳에서는 물론 전동차 안에서 남군 중사 이상 부사관 혹은 중위 이상 장교와 조우한 적이 극히 드물었다. 하물며 여군이랴. ‘여군 1만 명 시대’라 하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온 여군과는 조우하기 힘들다. 더더구나 여군은 최하 계급이 하사, 즉 간부라 그렇다. 그는 혼잣말. 아! 난 ‘여군을 보고 싶어 부르짖는데, 그들이 이토록 외면한단 말인가! 그가 26사단 불무리 부대 마크를 단 때가 65년 7월이었단다. 101보충대에서 사단사령부 보충중대로 전입했던 것. 거기에서 며칠 있다가 부관참모부에서 올라 온 부사관과의 면담에서 픽업되었고. 마침내 그는 평생 붓을 잡는 계기를 그렇게 맞게 된다. 영천부관학교 기수가 하나 차이 나는 8사단에 갔으나 예하대 떨어지는 바람에 인사행정병으로서의 특기를 살리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혼자서 그때 일을 생각하면 벌레 씹는 표정이 될 수밖에. 신문 기자로서의 그는 매우 분주하다. 그는 등단한 작가이기도 한지라 문학 냄새가 많이 배어 있다. 형용사를 줄이는 게 그 악습(?)을 척결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타고난 고집 탓으로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 두 부문은 완전 대립이라, 즉 허구와 사실을 드나들어야 한다. 거기에서 느끼는 충돌에 고민을 많이 한다는 고민도 털어놓는다. 다만 그의 입담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인지 모른다. 그걸 무기로 삼는 바람에 오히려 따돌림을 받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도 특히 기자 임명식이나 송년회 같은 데에서 사회를 하면서 기량을 나름 발휘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더라, 행사를 앞두고 지휘자가 몹시 앓는 바람에 프로그램 중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합창을 못 넣을 뻔했다. 한데 그가 자원해서 그 문제를 거뜬히 해 치운 거다. 연습도 그가 주관해서 했고 당일 지휘도 그가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이 일을 해 치웠으니, ‘26사단을 사랑하는 모임’의 결성이었다. 서른 명 남짓한 기자가 단원이었다. 남성은 그 반의반도 안 되었다. 그 중에 세 명이 26사단 출신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그가 모부대에 복무할 때, 편집국장은 같은 시기에 예하 부대 대대 정보 장교였다, 두 살 많은 최연장자인 O단원은 그 전후 26사단에 몸담았던 일등병이었다. 전 종합대학교 이과 대학장 출신인 노병이 같은 무대에 섰다는 얘기다. 어쨌든 지휘봉을 든 그의 부르짖음! “26사단을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희 셋으로 출발합니다. 행여 여러 기자님 중에서 불무리 부대 즉 26사단 출신이 있으면 가입하시도록 권합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사단가’를 독창하기 시작한 거다. 눈부신 햇살 아래 옥토 삼천리/ 짙푸른 향내 나는 내 조국 강토/ 어둠이여 사라져라 찬란한 아침/ 지켜서 억만년을 누려 보리라/ 아아 우리는 불무리의 용사/ 식을 줄 모르는 불무리 용사… 물론 2절과 3절은 생략했다. 꽤나 반향(反響)이 괜찮더란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전에 국방 TV와 국방 FM 방송에 출연했었던 터, 현역 26사단 어떤 장병보다 정확하게 사단가를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케스트라와 가곡 협연을 한 적도 있던 성악과 약간은 인연이 있던 그였으니까. 어쨌든 몇몇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예비역 중령만도 둘이었다. 삽시간에 동의한 전우가 여남은 명이었으니, 아무리 실체로까지 발전하기는 요원하리란 예단이었지만 성과는 대단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일이 있느냐고? 26사단에서 그가 사단장으로 모셨던 두 분 소장(少將)과 지금은 사단 군악대장으로 가 있는 현역 대위에게 감사패를 증정한 것. 물론 두 분 장군은 이미 고인이다. 유택 아니면 기념관에 가면 감사패를 볼 수 있다. 26사단을 사랑하는 모임은 점점 진화했다. 아니 발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임 자체도 따로 없고, 회비도 없으니까. 마음으로 모부대(26사단)를 사랑하면 그로부터 회원 자격이 있다. 예를 든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이(李) 대령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용인 문화원 부설 시니어 합창단원인데, 태국 방콕에서 열렸던 세계합창대회(아 카펠라/ 무반주)에 참가한 적이 있는 전우다. 한국야구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해 왔었던 전 양(梁) 사무총장도 마찬가지. 그가 지금도 수시로 통화를 하는 그의 군 출입(?) 시절 두 사단장도 곧 회원이 되리라. 감사패 증정 대상자가 아직 일고여덟 명이 남았다. 주로 당시 그가 모셨던 상관인데, 고인(故人)이 과반이다. 여기서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의 모부대 사랑 이야기를 어느 노인 학교에서의 강의와 그의 소설을 통해 접했다. 자다가도 일어난다는 그의 말이 허풍이라면 이 세상에 허풍 아닌 것이 없다. 한 인생이 군복무라는 삶의 여정을 통해 얼마나 긍정을 향해 변해가는 건가를 일러 주는 웅변(雄辯)이라고도 그는 강조한다. 모부대가 아니었으면 그는 이미 일흔을 갓 넘겨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다수의 타인은 물론 자신의 입에서도 수시로 튀어나오는 소리가 왼소리, 즉 죽었다는 소문에 시달렸었다. 남도(南都)에 있을 때…. 그는 타관에 와서 ‘나그네설움’만 부르다가 우연한 기회에 모부대 26사단에 승용차로 왕복 네 시간 되는 거리에 있다는 걸 알았다. 군인 주일(主日)에 전 가족과 함께 불무리 성당을 찾은 게 구사일생의 첫 걸음이었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모부대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8171 부대라는 현판이 제26사단 기계화보병사단으로 바뀐 것이 조금 달랐을 뿐, 외관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이윽고 미사에 참예하고 나서 사목위원(전부 군인)들에게 간단하게 점심을 대접하였다. 그때 12* 기보대대장이 반세기 만에 사령부 바로 앞까지 걸음을 한 노병을 반기며 한마디 건넨 게 이거였다. “감개무량하시지요?” “그럼요. 제가 제대복을 입고 떠날 때, 한참 불무리 성당 터를 고르느라 분주했었는데, 오늘 그 성당에서 미사에 참예(參詣)하다니 꿈만 같습니다. 그때는 불자였습니다. 뭐 교육공무원 인사기록카드에 ‘불교’라 적어 놓았을 뿐 초파일, 즉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번 가는 정도였지만요. 그때 저희 부관참모부 생활관(당시는 내무반) 바로 밑에 부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대로 있습니다. 부대 안에는 절도 있어요.” 이윽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대대장이 사령부 안으로 한 번 들어가 보지 않겠느냐고 묻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그와 군수참모는 대대장 승용차에 같이 타고 부대 후문으로 들어갔다. 공격! 공격! 구호 소리가 쩡쩡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대대장은 여러 군데에 그를 안내했다. 물론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침내 부관참모부 인사과 사무실 앞에 섰다. 셋은 애써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희미하지만 잘 정리된 책걸상이며 컴퓨터 등이 시야에 잡혔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 만 거다. 엄마! 평생 시각 장애인으로 살았던 엄마였다. 막내인 그를 군에 보내 놓고 울음으로 세월을 보낸…. 엄마가 더 그를 걱정했다. 더더구나 그 자식, 평생 주치의 외는 남에게 고백해 보지 않은 부끄러운 질환을 갖고 있었으니…. 그 아픔을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부르짖지 않았던가? “엄마, 참고 이겨 나갈게요. 걱정하지 마이소.” 그 엄마가 그가 일하던 사무실 안에서 무려 50여 년 기다리다 그를 보고 반긴 것이다. 아니 당신도 눈물을 흘렸다. 두 중령이 등을 토닥거려 주는 바람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귀가하려는데, 대대장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선배님! 저희 대대에서 안보 강연 한 번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안보 분야에 전문 식견을 못 가졌는데,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요.” “아무 상관없습니다. ‘안보’에 신경 쓰지 마시고, 그저 인성 교육 한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명심보감> 구절을 풀이하시거나 전래 동화를 재미있게 구연하셔서 장병들에게 권선징악의 덕목을 일러 주신다면 그 이상 없습니다. 아까 복음 성가를 불러서 많은 박수를 받으셨는데, 오케스트라 협연 경력도 있으시니 장병들에게 군가며 가곡도 지도해 주시구요.” “좋습니다. 힘들지만 해 보겠습니다. 날짜와 시간만 알려 주시지요.” 어쭙잖은 그날의 약속이 그가 안보 강연이란 명분으로 군부대를 드나드는 명분으로 변한다. 장병들 앞에 선 시간만 총 마흔 시간에서 15분 빠지는, 어찌 보면 전무후무하다는 기록의 출발을 그렇게 시작한 거다. 약속한 날짜에 사위가 고맙게 하루 연가를 얻어 그를 부대까지 실어 덕분에 왕복 자체는 참으로 편안했다는 전제부터 깔자. 사위는 부대 앞에서 차를 돌렸다. 두 시간여 뒤에 돌아오기로 하고. 대대장이 정문까지 마중을 나오는 바람에 적이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대장과 함께 대대장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는 감탄사가 튀어나오는 걸 제어하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앳되고 예쁜 여(女) 하사가 주번 사관 완장을 차고 젊은 병사들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왁자지껄하는 소리로 보아 굉장히 즐거운 분위기로 느껴졌다. 아니나다르랴, 그들은 짓궂게 여겨질 정도의 장난까지 치고 있었다. 같은 또래 즉 동갑내기 임이 틀림없다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대대장에게 물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그러는 가운데 뭔가 절도가 있고 군기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대대장이 눈치를 채고 말했다. “걱정 되십니까? 선배님. 전혀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군은 계급 사회입니다. 하사는 간부(幹部)입니다. 저 친구는 분대장이고, 분대장은 아홉 명의 부하가 있는데, 지휘 체계가 서 있어요.” 참으로 산뜻한 충격이었다. 계급 무시하고 여군을 얕잡아 보는 일이 있다면 큰일이란 생각을 줄곧 해왔는데, 그게 한갓 기우임을 깨닫는 현장에 자신이 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반가운 사실 하나를 확인했으니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대대 내 교회 성전에서 강연이 시작되었는데, 다른 여(女) 하사가 눈에 띄었다. 아주 특별한 존재였으니 어느 시도 대표 복싱 선수 였으며 태권도 고단자란다. 역시 곱상한 인물을 뽐내는…. 간부들이 공공연히 말하는데, 우리나라 여군 출신 최초의 주임원사가 될 전우라는 것. 압축하면 이렇다, 강의 말이다. 이건 어느 중대나 대대, 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명심보감>의 구절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요’부터 들먹이고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약간은 억양을 서당식으로 바꿔 외치도록 한다. 벌써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손가락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이입시키는 거다. 물론 전쟁을 한다면 목숨을 바친다는 걸 강조함은 물론이고말고. 고사성어 ‘단장(斷腸)’과 연결 짓는다. 새끼 원숭이를 잡아 뱃전에 싣고 강 상류까지 왔더니 기어이 헤엄쳐 따라온 어미가 창자가 끊어져 죽었다는 것. 때맞추어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절창 혹은 열창하여, 몸 성히 제대하는 게 목표임을 강조한다. 청승맞게 그가 혼신의 힘으로 토해내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 미아리 눈물 고개/ 임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방금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절박함을 보이는 그 앞에서 장병(병사)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다음 이어지는 그의 파격 강연은 새엄마에 관한 내용이다. 병사의 상당수가 새엄마 슬하에 있는데, 언제까지나 ‘콩쥐팥쥐’며 ‘장화홍련’ 타령인가 말이다. 그는 훌륭한 새엄마 사례를 들려주고 강조한다. 철기(鐵驥) 이범석(李範錫) 장군은 소년 시절 새엄마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논가에서 풀을 뜯는 이웃 집 암소의 **에다 쇠막대기를 쑤셔 넣었다. 암소가 쓰러졌는데, 이를 본 아버지가 화가 나 철기 소년에게 그 쇠막대기를 던졌다! 그런데 새엄마가 그 쇠막대기를 가슴으로 받아내어 중상을 입는다. 거기서 대오각성한 철기 소년은 자라서 국무총리까지 오르게 된다는 얘기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금수현 선생은 네 번째 새엄마 덕분에 세계에 이름을 드날리는 음악가가 된 사실도 반드시 들려준다. ‘상가승무노인읍(喪歌僧舞老人泣)’은 꼭 소개했다. 옛날 임금이 평상복으로 백성의 삶을 살피러 다녔다. 어느 날 깊은 밤 외딴곳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집을 발견하고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더니, 상주 차림의 남자는 노래를 하고, 머릴 깎은 비구니가 춤을 춘다. 그 옆에 노파가 손을 맞잡고 울고 있다. 신분을 감추고 그 사연을 알아본즉슨 작년에 영감이 그만 세상을 떠났다는 것. 1년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그러던 중 며느리가 그만 자기 머리카락을 팔아 약간의 음식을 마련하고 소상(小祥)을 치르는 중이었다나? 상주는 곡(哭)을 하는 대신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기쁘게 하느라고 춤을 춘 것…. 섬광처럼 임금의 머리를 스치는 것. 그래 이 선비를 위해 특별 과거를 마련하자! 임금은 약간의 노자를 주면서, 가을에 특별 과거가 시행된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거기 응시하라고 권한 것. 남자는 글공부를 한 사람이란 걸 임금은 쌓여 있는 서책을 보고 눈치 챘다. 과연 세월이 흐르고 나니 나그네의 말대로 특별 과거가 있었다. ‘상주는 노래하고 여승은 춤추고 노파는 그 앞에서 읍한 채 우는 모습’! 이걸 어떻게든 서술하라는 주문이니, 선비야 떼놓은 당상이었고말고. 사단 군악대 병사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만, 국방 TV ‘우리는 전우’에선 편집…. 일본식 표현의 찌꺼기를 없애자는 주장도 내세웠다. ‘…적(的)’, ‘인하여(因하여)’, ‘대(對)하여’…. 그 흔적과 보람을 담보하리란 전망을 병사들의 표정에서 읽으면서 그는 ‘극일(克日)’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렇게 격정을 그는 토로했다. 특히 ‘그녀!’, 그게 일본말 ‘카노조’의 후신(後身)임을 강조했다. ‘그녀’를 응징하지 않으면, 문학 특히 소설의 발전은 없다! 배꼽을 잡게 하는 장면이 수시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튀어나온다. 다 소개하려면 진부하니 그만두자. 그의 이 언급을 통해 유추해 보자. “평생 노래를 부르며 살았어요. 막춤이 자연히 따르지요. 공군 5672 부대의 몇몇 부사관과 초급 장교들이 그 막춤을 내게 배웠어요.” 그러곤 현란한 솜씨를 선보이는 것이다. 후문인데 57전차 대대 소대장 출신인 이 중위가 그의 수제자다. 생전 처음 봤을 막춤을 손가락 동작 하나 안 틀리고 따라 하는 이 중위와는 그 뒤로 수시로 통화한다. 제대 후까지도 그럴 거다. 그땐 이 중위를 ‘귀관(貴官)’이 아닌 ‘녀석’이 중위가 먼저 청한 것이니, 자연스럽게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이 중위는 그를 ‘선배님’이라 부르고. ‘선배님’ 이야말로 군부대 간부가 외부 인사에 대한 최고의 호칭이란 걸 알아 채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여단장이 초청 강사로 위촉된 그를 만나러 왔고, 대대장실에서 차를 한 잔 나누었는데 여단장 또한 ‘선배님’으로 일관했고, 여(女) 부사관들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대로 따랐으니까. 아무튼 제대 후에 부대에 가서 여군을 만난 것은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었으니, 그 소중함이 어찌 쉬 잊힐 리야. 그런데 그날 그는 아주 중요한 질서 하나를 보았다. 군부대 간부가 외부 인사에게 ‘선배님’이라는 게 가장 입에 익고 상대에게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 손주 나이인 여 하사가 그를 보고‘어르신’이라 불렀다 치자. 그는 은근히 부아가 났으리라. 강연의 후평(後評)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다음 해 비슷한 시기에 다시 12*기보대대에서 강연 요청이 왔으니까. 대대장은 합참 본부로 전출해서 다른 중령이 후임으로 와 있었다. 내친김이다 싶어 여단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왕이면 7* 여단 전 장병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싶다고. 여단장은 단번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단장 ㅇ 소장에게 육필 편지를 쓴다. 부대 복귀 신고 뒤 강연을 하고 싶다는…. 구구절절 간절한 사연을 담았다. 설마 했는데, 사단장은 답신을 보내왔고 부관참모를 통해 전화까지 해 온 게 아닌가! 그의 수십 시간 강연기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며칠 지나 약속 그는 머리를 병사만큼 짧게 깎고 부관참모실에 들른다. 거기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앉아 있으려니 부관참모가 내미는 서류가 있다. 얼른 열어 보니 아, 그의 병적기록부가-물론 사본(寫本)이다-들어 있는 게 아닌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9개월 보름 동안의 군 생활이 고스란히 거기 담겨 있는 것이다. 부관참모는 말했다. 집에는 갖고 가지는 말라고. 사단장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는 선택된 사람이라는 자긍심마저 생겼다. 부관참모가 하는 넌지시 던지는 혼잣말 같은 게 이거였으니까. 일선 소대에는 반세기 만에 찾아오는 노병이 있어도 사령부 부관참모부의 경우는 너무너무 드문 일인지도 모르지요. 3년 동안을 그랬었다. 불무리 부대 숙소에서 일박을 한 적도 있었다. 침구도 호텔 수준이 되는 같았는데,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반세기 전 자신이 잠자고 생활했던 내무반(지금은 생활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만감이 교차. 다음 날 이른 아침 사단장이 1호차를 보내 차 한 잔 하자고 해서 난생처음 별판 달린 승용차를 타 보기도 했다. 자, ‘이젠 여군, 그 아름다운 여군’을 본격 이야기하자. ‘여군에 대하여’라 하지 않는 것은 앞서의 일본식 표현 찌꺼기와 관련이 있다. ‘본격적’ 대신 본격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부대 사령부에서 처음 만난 여군은 중위와 대위(진)였다. 그 자신이 먼저 출신지를 묻지 않았는데, 둘 다 부산에서 대학교를 졸업했단다. 그가 부산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부관참모부 안에 이미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리라. 초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 혹은 교감 선생님이 누구냐는 질문에 둘은 똑똑히 김, * * 자(字)와 손, ㅇ자 ㅇ자라고 대답한다. 아는 사람이다. 반가워서 하는 말이 “그럼 귀관들은 내 제자이기도 하지.” 하면서 아예 하대(下待)를 자연스럽게 할밖에. 셋은 파안대소했다. 그런데 노병이 이런 말을 하면 남들이 주책없다며 나무랄지 모르지만, 둘은 빼어나다고 할 것까지는 없어도 미인이었다. 그가 던지는 말에 좌중의 모두가 웃었다. 여군은 인물 보고 뽑는지 모르겠군! 12* 기보대대와 12* 기보대대에서의 강연을 마치고 불무리 부대숙소에서 잠을 자러 가려는데, 칫솔을 준비해 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군 박 중위에게 PX까지 안내해 달라고 했더니, 거기 가서 이런저런 야식까지 챙겨 주는 바람에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이 섞였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는 수시로 26사단에 드나들었다. 물론 가끔씩 사단장을 면담하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부사단장인들 어찌 예외이랴. 더더구나 말이다. 예하대에서 강연을 마치고(주로 여단) 그곳 지휘관(여단장)의 차를 타고 간부 식당에 올라와서 식사를 하니 참모장과 참모(제일 낮은 계급이 소령) 사령부 주요 간부들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특히 사단 주임원사! 그와는 특별한 인간관계까지 맺어왔다. 심지어는 주임원사 이임식 때 초청을 받아 단상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으니 더 이상 말하면 한갓 사족(蛇足)이리라. 둘이서 우리 신문에도 그걸 보도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모부대 군악대장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전우다. 공교롭게도 그가 몇 년 동안 모부대와 인연을 계속해 올 때 군악대장은 여군 대위였다. 그러다가 그 전우와는 별다른 관계를 맺어왔으니, 그의 배려가 한없이 고마운 거다. 국방 TV에서 ‘우리는 전우다’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고 했을 때 녹화 무대는 군악대였다. 그러나 사단장과 관련 참모(정보 공보 참모)가 좋다 해도 군악대장이 난색을 표하면 그 기획은 한갓 물거품이다. 그는 사전 정지 작업을 다시 했다. 육필 편지를 쓰고, 여러 상자의 양서(良書)를 보냈다. 자연스럽게 통화로까지 이어지고 마침내 합의가 이뤄졌다. 군악대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강연도 했다. 특정 인물을 들먹여서 미안하지만, 유노윤호가 거기 일등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유노윤호는 연예병사로서는 한 번의 스캔들도 없었고, 모범 병사로 소문난 친구였다. 그는 서른 가까운 나이에 입대했고, 군악대장보다 한 살 많았다. 그 상하 관계가 잘 정립되어 있는지 군악대장에게 물어봤더니, 너무나 당연하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공통분모(共通分母) 하나. 둘은 서른이 가까운데, 특급 전사로 선발되었다는 사실! 하루 전 자택에서 한나절 이런저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도 오랜만이라 약간은 당황도 했지만,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다음 날이면 모부대를 찾게 되니 장발(長髮)은 안 어울린다는 판단에 이용원에 갔다. 방송국 스태프들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돌아 나올 때 그들이 하는 말이 이거였다. 이등병 머리보다 더 짧습니다! 다음 날 새벽이다. 그가 사령부 입구에 평상복으로 도착했을 때, 유노윤호 등이 거기까지 나와 열렬한 환영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그를 포함한 여러 대원들 덕분에 프로그램 녹화는 멋지게 이뤄졌다. 이윽고 전국에 방영되었음은 물어보나마나! 물론 그는 완전 전투복 차림이었다. 한데 약간의 문제가 생긴 거다. 정훈 공보참모 보좌관인 여군 대위에게서 온 전화다. “공격! 선배님, ‘우리는 전우’를 유튜브에 올리셨더군요. 조회수가 엄청나 놀라고 있습니다.” “그래? 거 좋은 일이잖소?” “그렇긴 합니다만, 국방 TV에서도 전량을 내보내고 있는 데다 선배님의 유튜브(5분 정도의 양이다)까지 가세(?)하셨으니, 부대로 봐서는 조금 염려가 됩니다.” 어쩌면 좋겠느냐는 반문에 그는 유튜브 영상을 내려 달랜다. 유노윤호에게 안티팬이 생길 염려도 했다. 대위가 당돌하다 싶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기가 막히는 일도 있다, 여군과 관련된…. 녹화 당일엔 이미 부관참모부가 인사참모처에 흡수된 뒤였다. 그래도 반세기 전의 모필병(毛筆兵)의 실력을 한 번 가늠해볼 기회인데, 방송국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피디며 카메라맨, 구성 작가들이 따르는 가운데 그는 인사참모처로 들어갔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연필로 줄을 긋고 표창장 초안을 잡고 붓글씨로 써 내려가려는데, 이런! 붓 대신 붓펜이 아닌가? 더구나 용지도 옛날보다 작고 횡서로 쓰란다. 그래도 카메라의 앵글은 그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고 나니 그의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는 여군 상사가 큰소리로 부르짖는다. “공격! 선배님, 김 상사(上士)입니다. 저는 병적기록관입니다. 상훈 업무도 맡고 있지요. 글씨를 너무 잘 쓰시는군요. 지금은 모두 컴퓨터로 처리합니다.” “그래요? 내 이마의 땀 보아요. 옛날 같지 않아요.” “말씀 놓으세요. 그러고 보니 선배님의 후임이 바로 저로군요, 공격!” “와 이렇게 크고 안광(眼光)이 살아 있는 전우를 처음 보는군, 공격! ‘안광이 지배를 철(徹)한다.’는 말이 있어요. 책을 읽을 때 눈빛이 종이 뒷면까지 뚫는다는 뜻이지. 사단 본부대 및 7* 여단과 예하 부대에 내 장서를 전부 보내기로 했으니, 귀관이 선도(先導) 한몫을 맡도록!” 물론 완전히 그게 계기라고 할 순 없으나 그의 서재가 텅 빈 것은 그 상사 덕분이기도 하다. 몇 년 동안 그는 부지런히 사단 사령부를 드나들었다. 행사에 참석한 것만 해도 여남은 번은 되리라. 부대 창설 기념식, 국군의 날 행사, 주임원사 이임식, 부사단장 전역식 등등…. 반세기 전에 부관참모부 상벌계 병사로서 자신이 쓴 표창장과 대독문(代讀文), 사단장이 주는 부상(불무리 마크가 찍힌 라이터) 등을 담은 들고 단하에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느 해 감개무량함을 억제할 길 없어 당시부터 거기 살았었던 장로에게 몇 마디를 건네는 중이었다. 세상에! 위에 얘기한 바 있는 부관참모부 여군 중위(朴)가 내 모습 그대로를 연출하고 있지 않은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박 중위에게 연민의 정이 갔다. 그리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다시 중얼거림. 미인이다! 그런데 그건 약과였다. 그동안 인사참모가 바뀌어 있었다. 부관참모부에서 보던 업무까지 통합해 보게 되니 사단 내 참모로서의 비중이 커진 터, 나이도 들고 경력도 많으며 어느 정도 덩치도 있는 남자로 보해야 할 자리라 여기고 있던 찰나, 등장하는 인사참모는 여군 중령이 아닌가! 떡하니 권총도 차고 말이다. 단상에 사단장과 인사 참모 둘만 무장한(?) 셈이었다. 물론 크기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사단장 것이 훨씬 작았다. 그를 보고 장로가 말했다. “놀랐지요?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군도 진화하지요. 여군 만(萬) 명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장로님 정말 놀랐습니다. 저는 체감하지 못했었는데….” “몇 년 전엔 헌병 대대장도 여군 중령이었습니다. 헌병 참모이기도 하지요.” 반세기 전이라면 상상조차 못할 현실이 부대를 스쳐 지나간 거다. 그는 상벌계로 헌병(지금은 군사 경찰) 대대의 현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격세지감(隔世之感)에 빠진 거다.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역시 미인이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서다. 군인 정신도 뛰어났을 테고…. 장로에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로님, 우리 모부대 여군 만세! 주위 사람들에게 들릴락 말락 했지만 고함으로 오해받을 정도의 소릴 내고 말았다. 괴질로부터 족쇄가 풀린다 치자. 가장 가고 싶은 데가 몇 된다. 현충원, 전쟁 기념관, 새 모부대 8사단, 그 안의 26사단 기념관…. 곧 임관되는 서모(庶母)의 손녀도 이왕이면 초급 장교 시절은 그의 새모부대 8사단에서 보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의 기나긴 ‘여군 만세’ 주장은 어떤 매체로든지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래야 부사관 재임 중 성전환(性轉換) 수술을 받고 끝내 전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ㅂ 예비역 하사 이야기를 그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어서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는 아직 유효하고말고. 그 얘길 문인 카페에 올렸다가 되레 슬프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 반응을 보았던 그다. 아무튼 ㅂ 하사의 유택(幽宅)을 올해 중 찾을 생각이다. 다시 그를 지배하는 부르짖음은 ‘여군 만세(특히 모부대)’, 바로 이거이고말고! ㅂ 하사도 여군으로 북무하기를 희망하지 않았던가. 그가 최전방 1사단 12연대 본부에서 한 강연도 기억에 남는다. 작전과장 ㅇ 소령도 여군이고 지금까지 서로 연락이 오간다. 본 이야기의 주인공 내 친구도 여생이 얼마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모부대 여군들이 보고 싶단다. 그들 앞에서 새 모부대 사단가를 불러보고 아니 정확하게 가르치고 싶다고? 새모부대 군악대장도 여군 대위다. 의기투합할 수 있으리라 그는 확신하고 있다. 그 밖에 인사를 나눴던 소령! 그 여군도 보고 싶다. 참, 수시로 우리 둘이서 부르는 8사단가는 이렇다. 설악산 기슭에서 자라난 우리/열풍을 식혀버린 영천 대회전/ 눈보라 몰아치는 만포선에서/피 흘린 자욱마다 영광의 승리/ 나가자 싸우자 응리를 위해/ 우리들은 불사신 8사단 용사 둘 다 걱정은 하고 있다. 남녀가 같이 부르려면 조(調)를 바꿔야 하겠다는 판단에서다. 인터넷에 뜬 악보를 보고서는 남자는 가창이 불가해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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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환영합니다.발음이 명확하지 않아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漢字 이름 부탁합니다.
충성! 장군님 뵙고 좋은 말씀 들어 가슴에 새기고 싶습니다. 이원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