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영화, 게임, 소설. 그 네 가지 중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소설 밖에 없기 때문에 소설을 썼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관둬라.
과연 이것이 토론거리가 될 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토론을 하자는 얘기입니다.
.......온라인 상에서 문득문득 지나치다가 '내가 판타지를 접한 계기'를 말하는 사람을 보곤 하는데요. 《슬레이어즈》였던 경우가 많더군요. 저도 거기에서 최초로 접했습니다. 테레비에서 방영되던 만화. 최초로 접했던 것이므로 먼치킨적인 요소들도 전혀 식상하지 않고 멋있었어요. 그저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이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잘 이해가 가지 않던 것들도 그냥 넘겨버리곤 했죠.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저희 형이 만화가가 꿈이었고, 나는 그런 형에게 만화 스토리나 콘티 하나 쯤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머리속에 이야기를 만들어갔죠.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그 만화스토리는 무협이었어요. 그러다가 슬레이어즈를 보고 나서는 판타지로 바뀌었죠.
.......형이 만화를 그리는 것 보다는 제가 직접 그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하지만, 저는 머리를 굴리는 것 뿐 형처럼 만화가가 될 열정이 없었죠. 저는 늘 흐르듯 살았으니까요.
.......저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쌍커풀 수술을 한 국어선생님께서 글을 잘 쓴다고 칭찬해주시는 바람에 우쭐해졌죠. 그 때부터 언제나 만화쪽을 향해있던 제 이야기가 다른 길을 찾아 비틀거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소설은 언젠가 만화화하기 위한 제 이야기를 구현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죠.
.......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가끔 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요. 만화로 판타지를 접했고, 언젠가는 자신의 판타지도 만화가 될 거라는 이야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신의 소설을 만화로 가정하고 쓰더군요. 자신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만화로 그려서 자료실에 올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자신의 글 속에서 만화적인 표현을 쓰기도 해요. 눈이 갑자기 점으로 변한다거나, 일본 만화식으로 당황스러울 때 꽈당하고 넘어지죠. 캐릭터들도 그래요. 쓸데 없이 머릿카락은 왜 파랑색이나 빨강색인 걸까요? 그런 머리는 보통 만화에 등장하죠. 만화가 아니라면 아마, 전대물에 나오는 XX행성의 공주같은 어설픈 가발이 생각날 뿐인 걸요. 누구라도 그런 머리색이 나오면 만화를 상상하기 마련이고, 쓰는 사람도 그렇게 상상하고 쓰는 거죠.
.......녹색 머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은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장면을 떠올려야 하나요? 은발이라....... 늙지도 않은 남자가 은발이래요. 저는 어려서 아직 은발은 본 적이 없는 걸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라테우스님....... 슈마허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은발인 겁니까? 하얀색 털가발을 쓴 남성인 겁니까.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생각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소설이라면 어땠을까요? 저는 그 상황에서 두 가지 가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 1. 조아라나 다음 카페에 글을 올리는 평범한 아마추어 작가가 썼다.
그 경우, 소설 강철의 연금술사는 뜰 가능성을 가진 글이 됩니다. 초반부터 재미있는 전개에 장면 연출이 뛰어납니다. 니나, 휴즈 등이 죽는 장면은 압권이지요. 이야,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가 있을까 -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어서면, 등장인물이 햇갈리기 시작합니다. 터커? 터커가 누구였지? 라이라는 또 누구야? 로제는 또 누구지? 자꾸 록벨, 록벨 하는데 록벨이 뭐지? 그리고 재미있게 읽던 독자들은 앞으로 넘겨서 그게 누군지 봐야 합니다. 그런데 앞부분은 벌써 출판삭제. 뭡니까, 이게? 책을 대여점에서 빌립니다. 그 다음에 앞을 봤더니 그 인물에 대해 한 문단에 걸쳐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잘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앞 머리만 분홍색이다. 안경을 쓴 허스키한 목소리의 중년. 검은 긴 머리의 열 몇살쯤 되어보이는 여자인데, 대체로 검은 계열의 옷을 입고, 목에는 이러저러한 모양의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불꽃의 연금술사 로이의 부하들, 무적의 방패 호문큘러스 그리드의 부하들....... 간혹 등장하는 여러가지 단역들....... 많습니다. 감히 그런 인물들을 시각적 정보 없이 글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결국 연재를 중단하고 처음부터 인물 설정부터 다시합니다.
가정 2. 글을 잘쓰는 사람, 예를 들자면 소설의 신(神)이 썼다. (물론 그런 게 있을 리는 없지만)
많은 등장 인물을 생략합니다. 전체적으로 줄거리를 단순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기에 너무 발상들이 아깝다면,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하고 각각의 편마다 인물 소개를 다시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마텔의 늘어나는 팔이나, 알과 에드가 싸우는 동작들은 글로 묘사할 수 없는 박진감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강철의 연금술사에 대한 발상이 시각적인 것에 매우 의존해있기 까닭입니다.
소설의 신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대충 휘갈겨 쓴 후 원고를 들고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를 찾아갑니다. 아니면, 만화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소설로 표현합니다. 아마 후자겠죠.
.......말하자면 그런 겁니다. 만화를 상상한다면 만화를 그리세요. 영화를 만들려면 영화를 만드시죠? 게임을 생각하고 계시면 게임을 제작하고요.
.......글로 아무리 만화를 그려봤자, 그건 글도 아니고 만화도 아닙니다.
.......작가는 만화로 표현할 수 없는, 게임이나 영화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 꼬투리에 작은 복선을 담을 줄 알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과장하거나 독자를 우롱할 줄도 알아야 하고, 보이는 것을 언어로는 생략하여 숨길 수 있어야 하며, 책장을 다시 앞으로 넘길 기회를 주고, 독자의 기억으로부터 감정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고, 서술자의 농담과 재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만화가 아닌, 영화도 아닌, 게임도 아닌 소설임을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미래의 소설이고, 현재 장르소설의 길이기도 합니다.
"만화, 영화, 게임, 소설. 그 네 가지 중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소설 밖에 없기 때문에 소설을 썼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관둬라.
과연 이것이 토론거리가 될 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토론을 하자는 얘기입니다.
첫댓글 …제 만화는 소설화 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네요.
(박수)정말 맞는 말입니다.^^
...심장이 순간 움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