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學而)로 되돌아보는 현대사회와 유학
유가철학
김치완 교수님
철학과
2019101237 김현승
공자가 태어난지도 어느덧 2000년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중국, 한국,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는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그 변화에 적응해야 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지식과 사상,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와 동시에 ‘잃어버린 것이 없을까’라고 뒤돌아보게 된다. 현대 사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지고 이기주의적인 마음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서부터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견제하기 위해 수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 종교인들이 노력해왔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상에 사람들은 안주하기 힘들어졌고 결국 남보다 내가 먼저 앞서나가기 위해 수많은 성인들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더욱이 나아가서 과거 성인들의 말은 과거시대의 잔재일 뿐, 현대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은 말이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나아가서 그들의 말은 봉건시대를 유지하고 옹호하기 위한 적폐라고까지 하며 헐뜯는다. 공자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하지만 공자는 과연 그저 구시대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주었던 것일까?
공자의 대표적인 경언들을 엮은 책인 논어의 첫 번째, “학이(學而)” 편을 알아보게 된다면 공자의 생각이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드는 마음, 우리가 평소에 듣는 말과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존에 고리타분하면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 같던 그의 말들이 사실은 바쁜 현대에도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나서 적절한 때에 배운 것을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읽어보더라도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실들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논어의 시작 부분이자 공자의 말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부분이다. 어떤 지식이나 학문이던 간에 배워서 삶의 지혜로 써먹는다면 그것만큼 잘 배운 것은 없다. 이것은 우리가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유교 사상만이 아니다. 공자는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았고 아집적이지도 않았다. 두 번째 구절을 알아보자. 여기서 말하는 벗은 우리가 같이 만나서 놀고 먹고 마시고, 힘들 땐 서로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일반적인 의미의 친구뿐만이 아닌 “같이 뜻을 함께하는 동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가치를 공유하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된 지금, 자신의 생각과 뜻을 마음껏 외칠 수 있는 지금, 자신 옆에 서서 같이 외쳐주는 동지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간절한 현대 시대에도 반드시 통용되는 말이다. 세 번째는 우리 일상,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통용되어야 할 말이다. 자신이 아무리 멋진 일을 하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더라도 남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굳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여자친구가 “나 오늘 바뀐 거 없어?”라고 물었을 때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남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공자는 이런 경우에 상대방이 자신을 몰라준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알려준다.
학이 7장을 보게 된다면 “자하(子夏)가 말하길, 현명한 사람을 현명하게 대하는 것을 아름다운 여자를 보듯이 하라. 부모를 모실 때 자기 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길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라. 친구를 사귈 때는 말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자기가 많이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런 사람을 배운 사람이라 부르겠다.”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지식이 아닌 행동이라는 것이다. 유학의 영향이 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배움은 아주 중요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배움도 행동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이다. 현대의 “행하지 않는 선보다 행하는 위선이 낫다.”라는 말과 100%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사실 배운 지식인들이라면 자신의 지식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실제로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자하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요즘 사회에서도 명문대를 나와서 사회에서 으스대지만 결국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러서 초라하게 몰락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예쁜 여자”라는 비유를 든 것이다. 흔히 보수적인 유교 사상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 역시 시대가 지나면서 왜곡된 것이다. 공자 시대에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사랑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는 것은 불효인 것이다. 그래서 이를 타파하기 위해 부모님께서 짝을 정해주던 것이 와전되어 조선 후기에서 볼 법한 폐단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지금 보았던 두 개의 구절만 아니라, 그리고 학이 편만 아니라 공자의 가르침인 논어를 살펴보자면 사실 현대사회에서도 통용되고 지켜져야 할 말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를 시대에 그림자, 심하게는 “유교 탈레반”이라고 헐뜯는 이들은 오로지 유교의 부정적인 이면에만 주목하여 객관성을 잃어버린 주장을 뱉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을 배운 우리로서는 이렇게 감정에 우선한 주장을 거르고 공자의 “사람이 셋이 모이면 그 중에는 반드시 스승이 있다.”는 말처럼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무언가에서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드는 마음, 우리가 평소에 듣는 말과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인류지성사가 보편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되겠지요. 논어의 군자3락을 중심으로 과제물을 작성했군요. 때에 맞추어서 공부를 하는 것, 먼 곳에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가 와서 생각을 나누면서 지지 받을 수 있는 것, 누군가가 나를 몰라주더라도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일상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가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공자만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상상하고 바라는 인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5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이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우리가 "유교 탈레반"이라고 폄칭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그것을 경험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지쳐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