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우<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 <표암문학> 자문위원-경기 PEN 감사/ 소설집 <나그네 방황 끝나는 곳> 외 5권, 수필집 <죽어서 개가 될지라도> 와 14권, 기타 4권/ 황조근정훈장-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봉사 본상)-부산교육상-KNN문화대상-화쟁포럼문화대상(문학)-<문예시대> 대상-경기 PEN 문학대상- 부산 PEN문학 대상- 한국전쟁문학상-부산수필대상--부산북구문학대상-허균문학상-부산가톨릭문학상-쿠알라룸푸르한인회장 감사패- 자랑스런 부산교대인상
정말 군 이야기는 입에 들먹이거나 글로 쓰기 망설여졌는데--(전쟁문학회 회원이면서).오늘은 할 수 없다. 눈 질끈 감자꾸나. 참, 지하철 안임을 밝힌다. 이병수 회원의 덕분에 이 아슬아슬한 씨름을 한다. (*그는 26사단 출신이고 문중섭 사단장을 같이 모셨다.)
오늘은 제 71주년 포병의 날이다.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열 시 시작이라, 아홉 시 30분까지 삼각지역에서, 이병수 예비역 수필가(중령)를 만나기로 했으니--.
역시 군 전우는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나 같은 병사 출신은 드문 터라, 주눅이 들 만한데, 웬걸 나는 평상복 차림에 하사 베레모를 쓴 채 입장했다. 다들 계급이 높은 건 불문가지, 나는 맞닥뜨리는 예비역 모두에게 거수 경례를 올려붙였다. 충성!
기자증을 목에 걸고 보니, 더욱 기고만장(?).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사진부터 스마트폰에 담았다. 다음 순간 '야전포병대가' 악보가 틀린다는 걸 알고 포병학교장(소장)에게 지적했다.
사기 충천! 전우들의 눈동자는 빛났고, 목소리는 우렁찼다. 예비역이 그렇거늘 하물며 현역이랴. 상을 받는 대대장과 포대장들은 정말 늠름했다. 주임원사들의 위상, 행동거지를 통해 그들은 그걸 스스로 드높임을!
헤드테이블에 권영세 전 장관이 앉아 있었다. 알은체하는 게 예의일 것 겉아, 목례+'거수경례흉내'(?). 그도 답례를 보내더라. 회장에게는 허리를 굽혔다(예비역 소장). 사회하는 이가 육사 39기. 손 잡고 몇 마디 나누었다. 최충현 예비역 준장(육사 39기), 내가 꿈에도 잊지 못하는 전 26사단장 양병희 소장의 한 기 선배다.
누가 뭐래도 부사관들에게 정감이 갔다. 내가 떠들밖에, 그들과 어깨동무를 하고서! 그러다가 뜻밖의 다섯 살 아래인 예비역 하사와 만났다. 아니 그가 찾아와서 인사를 건네기에 통성명을 하고 악수를 나눈 것이다. 포병 행사에 세 번째 참석했는데, 동계급 전우와 조우하다니! 깍듯이 나를 선임 대접하듯하는 그가 좋았다. 최우석 포천소재 산천나무농원 대표 010-9058-4870
점심까지 대접받고 귀갓길에 올랐다. 아직 헤매는 터, 물어물어 몇 번이나 갈아타고 자리를 하나 얻어 앉았다. 중얼거렸다.
"소설가협회 이사회가 네 시지만, 불참 연락을 해 둔 터다. 우선 왕십리로 거서 출발, 도중 하차하여 병원에 가서 도수 치료를 받자."
한데 정말 기가 막힌 일을 겪는다. 내 옆에 앉은 점잖은 노신사가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포병의 날 행사장에 다녀오시는 모양이지요?"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아시지요?"
"타월 포장지에 적혀 있군요."
"그랬었군요. 포병 출신이지요?"
"그렇습니다만--."
"혹시 이병수 중령 아십니까?"
"절친입니다. 안 그래도 오늘 거기 간다는 말 들었습니다."
"와, 이럴 경우도 있군요. 방금 저랑 헤어졌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만 보씩 걷는 친구지요."
"아까 이병수 중령으로부터 들은 정보(?)입니다. 다음에 저도 회비 낼 테니 한 번만 끼워 주시지요."
"그러십시다. 당연하지요."
"오늘 일을 콩트로 모바일에 쳐넣으려 합니다. 우리 만남도 기가 막히는군요. 인적 사항을 일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렴요. 41년생. 이병수 중령과 임관 동기. 이름 강병걸. 41년생 전화번호 010-3766-3194, 예비역 포병 중령"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으니 실로 기가 막힌다. 아니 아찔했다고나 하자. 이럴 때 '점입가경'이란 말 쓸 수 있다는 것쯤 나도 아다마다! 그 자초지종을 덧붙이자.
용산역에서 경로석에 앉았는데, 어떤 초로의 여자가 앞에 선다. 그러곤 자꾸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밉지 않은 얼굴이다. 이윽고 그가 말을 건네는데,
"반갑습니다. 하사님! 전 드물게도 여군 중사 출신입니다."
내 입에서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
"충성, 하사 이원우!"
웃는 미소가 아름답다. 그의 씩씩한 대답.
"반갑습니다. 중사 황춘자! 55세까지 살면서 선배님 같은 차림새의 어르신 처음입니다."
나는 그의 거침없는 전우다움이 좋았다. 다시 한마디.
"황춘자라 하셨지요? 자유한국당 용산 당협위원장이 황춘자라 했습니다. 본인입니까? 부사관 출신이라던데---아까 권영세 장관을 만났거든요. 두 분 경합 중?"
"동명이인이지요. 그런 오해 자주 받습니다. 그분은 부사관 전역 후 다시 장교 임관을 했습니다. 저도 당적을 갖고 있지만, 반대당입니다(웃음). 나이 차이도 많이 납니다."
"그렇군요. 우연의 일치 차고는 기가 막힙니다."
"그러게요."
그가 내리면서 내 모자를 바로 씌워 주었다. 덧붙이는 말
"계급장이 왼쪽 눈썹 위에 바로 오도록 하십시오. 모자 바로 안 쓰면 얕잡아 보입니다."
오늘 그 많은 남자 전우들 관심의 총화보다, 여자 예비역 부사관의 관심이 더 값진 게 아니고 뭔가? 내년 여름이면 이 모자도 벗어야 한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조금은 반듯한 예비역 부사관이 되자.
아무튼 이사회 불참의 명분은 억지로 세웠다. 치료를 마치고 방금 지하철을 탔다.
덧붙임/ 겨우 70% 정도 어깨가 나았다. 아침에 비상약을 먹고 나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병수 수필가에게 짐만 될 뻔했다. 문중섭 사단장님이 둘 사이에 잠깐 화두가 되었다. 이병수 수필가는 장교, 나는 사병. 대한민국에서 가장 표창장과 상장 감사패를 많이 그리고 공정하게 주던 분이다. 그걸 전부 내가 다 썼었다. 꼬박 만 2년 동안이나. 내 표창장도 내가 만들었으니,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증거? 아래에 있다.
5년 전, 군 안보 강사 위촉장을 받으러 사단장에게 신고하러 갔더니, 내 병적 기록부 사본을 건네 주더라. 육본에서 복사한 것이다. 병적기록부에 내가 기재하고, 공적조서도 내가 작성했었다. 마침내 표창장도 내가 縱書로 붓글씨를 썼으니 기막힌 일이다.
1년여 전 나는 책 스무남은 권을 짊어지고 26사단 본부대에 갔다. 본부대장과 군악대장에게 전해 주고 행정장교 이철우 중위와 함꼐 2사단 기념관에 들렀다. 역대 사단장 중에서 문중섭 소장 사진을 발견하고 울었다. 그리운 그분 모습, 그리고 지휘봉!
나는 그분에게서 표창장 및 상장 감사장의 모든 걸 배웠다. 나만의 철학(?)은 그래서 정립되었다. 교장 시절에 그 기준에 맞게 그걸 시행했다. 내가 붓으로 썼음은 물론이다. 특히 착한 어린이가 있으면 즉시 그 매체를 통해 격려했다. 한꺼번에 예를 들어 5월 5일 어린이날 등의 기념 표창, 수시 표창 회수가 엇비슷했다. 학구내 주민들에게 감사장도 많이 증정했다.
나는 고 문중섭 사단장님께 감사패를 드리려 한다. 이승과 저승의 벽을 뚫고 그분에게 전달하는 방법? 정성들여 만들어 기념관 사진 곁에 비치--.이게 유일무이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외연을 모르겠다. 국방부 앞 가게에 가서 주문하면 된다.
첫댓글
환영합니다.
문학과 국군을 사랑하며 봉사를 마다하지 않는 열렬 유명 작가입니다.
회원 여러분, 이원우 작가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너무 부족한데 존경하는 박경석 장군님이 열심히 문학 공부를 하라시는 뜻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명심하여 보답하겠습니다.
장군님이 12연대에 계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부대에서 안보 강연 두 시간 제가 했습니다. 이 사진은 전진 성당에서 평신도의 날 강론을 마치고 찍은 겁니다. 계급장이 왼쪽 눈썹 위에 오도로 군모를 썼습니다. 전진!(1사단 경례 구호) *위 여군 장군님 계급장도 참고하시면 베레모 착용의 요령을 민간인들도 알게 되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