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사회와 오늘날 한국사회를 한가지 주제로 비교하여 평가하기-
중국고대철학/철학과/2022201042/조성은
장자는 당시 전국시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혁대고리를 훔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왕이 된다.”
“사형당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서로 베개를 베고 누워 있고, 차꼬를 차고 칼을 쓴 죄수들이 서로 밀칠 정도로 바글거리고 형벌을 받아 손발 잘린 자들이 서로 마주 볼 정도로 많았다.”
가치표준이 무너지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참혹한 춘추전국시대.
그러나 단지 고대 춘추전국시대만의 모습일까? 그 시대의 힘이 무력이었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힘은 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힘을 돈으로 바꾸어 장자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돈의 논리에 의해 가치표준이 무너져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금의 시대와 고대 사이에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에, 순간 아찔함이 스친다.
우리 역시 혼란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안에서 무엇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 많은 힘을 쏟고도 답을 얻지 못하는 혼란의 시대를 살아간다. 제자백가의 춘추전국시대가 멀게 느껴지지 않음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사회적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만큼, 하나가 아닌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있는 시대속에서 하나의 답을 얻으려는 바람부터가 어리석음 아닌가 반론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지금 우리는 다양함이 공존할 수 있는, 다양함을 인정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다양한 생각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란 물음에 나는 회의적으로 답할 수 밖에 없다.
겉으로 보기에 다양함을 존중받고 스스로도 타인의 다름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힘 곧 돈을 얻기 위한 다양한 방법만이 인정받고 유지되는 것은 아닐까? 돈을 향한 욕망들이 다양하게 표출되고 적나라한 욕망들이 서로 경쟁을 넘어서 전쟁을 이루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함이 존중되는 사회이든 그렇지 않은 사회이든 사회의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런 사회들과 인간의 목표는 하나인 듯 하다. 돈.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은, 힘의 논리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가해지는 참혹함이다. 힘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이나 그 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존중받지 못함을 넘어서는 그들을 향한 잔인함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나의 가치 즉 돈의 논리를 향하는 때에, 그 논리에 함께 하지 않는 자들, 능력이 부족하거나 이 논리에서 이탈하려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잔인함이 두려워 우리는 더욱더 하나의 가치를 향해 서로를 부추기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가능한가? 왜 우리는 하나만을 향하고 있을까? 그것이 정말 각 개인이 원하는 것일까? 아니라면 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우리는 같은 인간종으로, 하나의 세계에 공존한다. 그리고 동시에 각자 자기만의 ‘나‘라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 함께 살아가지만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각자의 세계는 존중받을 수 있어야하고 그것이 결코 서로 같을 필요는 없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좌,우 또는 옳고 그름으로 평가 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것 저것으로 나누고, 니 것 내 것이 시작되면, 구분들이 모여 옳고 그름 곧 좌-우로 나뉘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은 힘의 논리에 굴복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하여 끝없이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전쟁 같은 혼란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장자는 인간의 한정된 시각으로 이것 저것으로 구분하고 옳고 그름으로 나눔을 지적한다. 6개월에 한 번 숨을 쉬는 붕새와 모든 생물의 숨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아지랑이를 비교하지만 이 두 존재에 대해 우열을 나누지 않고, 고작 덤불 사이를 날아다니는 메추라기가 거대한 붕새를 보며 이것도 분명 나는 것이고 그 기쁨 또한 지극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 장자는 작은 것이 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차이. 차이는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이다.
장자는 자신의 우화를 통해 끊임없이 다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거나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다름이라고 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알 수 있다는 것은 본래 불가능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장자-내편 마지막 혼돈의 이야기에서 북과 남의 왕, 숙과 홀이 혼돈의 땅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혼돈의 땅에서는 구분하고 구별하지 않으니 술과 홀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숙과 홀이 혼돈에게 눈,코,입,귀의 구멍을 만들어 주었던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무지에서 오는 친절함 곧 이해한다는 착각인 것이다. 숙과 홀이 혼돈에게 베푼 무지의 친절함으로 그 착각으로 혼돈은 죽음을 선물 받는다.
장자의 ‘무지의 지’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곧 ‘다름’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치지 않기 위한 ‘거리유지’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공길과 장생이 한양으로 향하던 길에 ‘장님놀이’를 시작한다. 지팡이를 짚은 두 장님은 서로가 보이지 않으니 서로에게 부딪치지 않기 위해 멀찍이서 서로를 부른다.
장생 :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공길 :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이 한 줄의 대사만을 반복하며 서로를 찾고, 엇갈리고 또 다시 부르고 엇갈리고를 반복하다 결국 기쁨과 안도의 포옹으로 만나게 된다.
그저 그 곳에 있으면 된다. 무엇을 생각하든 나와 같든 같지 않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함께를 향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손잡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하더라도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모습 그대로 소중하다. 괜찮다. 우리가 손잡을 수 있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면서 서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그 한걸음이 혹여나 더 멀어지는 걸음이 되더라고 같은 마음으로 다시 묻는 것이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편안함이, 그리고 그 여유가 장자의 소요유. 그것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첫댓글 양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우리는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패전국가의 전범에게 이 홀로코스트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묻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냉전시대, 시장경제 우위의 시대에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의 중심에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자유 국가들의 기득권 권력이 있습니다. 가치표준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역사 이래로 늘 "이러다 다 망할지 몰라"를 느낀 이들이 해왔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겠지요. 장자는 전국시대 를 살면서 전시대보다 훨씬 공동선에 대한, 질박한 인간 본성에 대한 가치표준이 무너진 것을 목격하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의예지를 말하는 유가조차도 결국은 정치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겠지요. 그래서 권력이 나누어지기 전의 본성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자연과 소요유를 통해서 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