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3호
사랑의 계절
어느 늦가을 날 대낮 베란다 밝은 곳에 놓아두었던 어항을 깜박 잊고 실내로 옮겨놓지 않고 한밤 새고 아침에 보니, 어항속의 열대어들이 모두 얼어 죽어 있었다, 그때 딸 <유미>가 주전자로 따뜻한 물을 조금씩 부어주자, 신기하게도 뻣뻣이 죽어있던 열대어들이 꼼지락거리며 되 살아나는게 아닌가... 그렇게 부활(?)하여 사이좋게 살더니... 그런 어느 날, 그 중 한 녀석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싶어 보니, 몸에 상처 난 한 마리를 나머지 녀석들이 쪼아대고 결국은 1/3쯤은 띁어 먹혀 죽고 말았다. 그래도 한 지붕아래 한 솥밥을 먹은 녀석들인데 저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여리고> 노상에서 강도만나 거의 죽어 버려진 어떤 사람을 보고 그저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인의 몰인정함이나 (눅 10:29이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찌꺼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던 <거지 나사로>에게 궁휼함이 없었던 지옥 간 어떤 부자의 무자비(눅16;19-31)를 생각하면, 미물인 물고기들로선 그리 흉 될 만한 짓도 아니다 싶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눈 한 지붕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10/16) 여기 성찬식의 의미를 단적으로 표현한 <참예함>이란, 서로 <피>를 나누어 교제한다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이 피를 나누며 서로의 관계를 확인하는 교제의 현실적 모습은 유감스럽게도 폭력조직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야쿠자, 삼합회, 마피아, 양은이파, 막가파, 그들이 생사를 같이 하는 한 패거리란 의미로 행하는 입단식은 다 피를 나누는 의식입니다. 세상에서 알아주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그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감싸주고 감방 뒷바라지 해주고, 그래서 한 칸 방에 열 댓명이 굴뚝 속 같은 담배 연기 속에서 칼잠을 자면서도 그곳에 들어서면 그들은 살맛이 납니다.
꼭이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예수님을 보스로 한 우리의 신앙터인 교회는 그들처럼 살맛이 나는 곳일까 반문해 봅니다. 말씀이 살아 사랑으로 은혜로 역사하고 하나님의 온전하고 기쁘고 선하신 뜻이 넘쳐나, 세상에서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영혼이, 위로 받고 치료 받고 나음을 입는 과연 그런 곳일까요?
공생하던 열대어처럼, 상대가 동료가 아닌 자기의 필요를 채워 줄 물건쯤으로 보일 때, 연약한 자, 상처 난 자, 아픈 자는 보호의 대상이 아닌 먹이감 쯤으로 여기고 상대의 약함만큼 자기의 강함을 더욱 과시하는 약육강식이란 생존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은 무섭습니다 .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 부족함 추악함을 예수의 피에 씻어 강함과 더함과 정결함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신앙(信仰)은 의리(義理)”라고 표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받은 만큼은 줄줄 아는 의리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 고아와 과부가, 상처받은 자 소외된 자가 오히려 천대 멸시 받는 교회는 더욱 무섭습니다.
한결같이 <하회양반탈> 같이 온화한 눈빛, 밝은 웃음, 사랑에 겨운 표정의 가면을 쓴 “가면무도회장” 같은 교회에서, 경건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감춰야 하고 숨겨야하고, 이런 척, 저런 척, 그런 척, 아닌 척 하다 보니, 안으로 안으로 곪아 터지는 아픔은 어데 가서 어느 누구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니라, 만일 한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12/20이하) 인체의 각 세포는 다른 세포들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암(癌)세포랍니다.
성경은 이웃사랑을 말하면서 네 몸(내 자신을)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베푸는 사랑의 손길에 대해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마25;40) 곧, 이웃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 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 사랑은 하나됨(연합)에 따른 선택의 문제이나, 이웃사랑은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네가, 네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가 있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이웃사랑은 바로 자기사랑이 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연결됩니다.
이웃 사랑이 말같이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머리에 있는 사랑이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 이 말은 故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랑의 종교 지도자로서의 이 고백이 의미하는 바, 사랑이란 우리의 마음대로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랑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성령의 (보편적)역사에 의한 성령의 열매랍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 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사랑을 나눌 줄 알고, 개인적인 경험상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첩경은, 이 몹쓸 놈도 저 나쁜 인간도 그 불쌍한 인생도 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나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지으시고 사랑하는 상대는 곧 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 위반은 “부작위의 죄(Sin of Omission; 不行罪)요,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단5/25) 곧 심판의 3중적 의미인<헤아리고><분류하고><선고와 집행>의 대상이 된답니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입양의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유난히도 사랑이 강조 되는 이 5월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7~8) -아-멘-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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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로 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
아멘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랑하며 살기를 원함니다
아멘~~~~
사랑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것이 사랑입니다. 왜 주셨는가 그것은 우리를 용서 하신 표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용서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권면 하십니다. 용서함을 받고도 요서할줄 모르는 악한 세대를 봅니다... 악한 세대여 내가 너희를 얼마나 참으리요 주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