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화분에 물을 준다 혹여 촉이 돋을까 혹여 촉이 돋을까 여름과 가을 지나고 다시 겨울이 지나는 베란다
죽음을 키우고 있는 뿌리를 본다 충분히 기다릴만한 神聖 죽음만한 질긴 꽃받침이 어디 있으랴
플라스틱 화분 속으로 걸어오는 모랫산 말린 낙타고기를 싣고 홀로 가풀막을 오르며 사막의 딸이 노래를 한다
낙타의 고비에서는 하늘에 바로 닿을 수 있네 암컷 낙타의 눈처럼 고비의 물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신기루의 고비에서는 따뜻한 마을이 떠나지 못하네*
거멓게 타버린 잎줄기가 따라 부른다 그 나직하고 느린 음조에 물을 준다 충분히 꿈꿀만한 밤 그래, 죽음만한 양식이 어디 있으랴
움푹움푹 허공꽃으로 피어난 저 발자국들
* 낙타를 타면 해가 가까워진다는 고비사막의 노래
길의길
쓸데없이 바늘쌈을 꺼내보곤 한다. 은박지 안에서 오롯이 반짝이는 은빛 바늘들. 어린 날 손가락 찔리며 지어보던 인형의 옷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내가 기워내야 할 수많은 하늘과 바람, 사람들 때문일까. 예리한 슬픔과 맑은 느낌. 내 저승빚은 얼마나 될까. 내 목숨으로 이어지기까지 창세 이후의 긴 핏줄들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세상의 모든 뼈들이 튼튼했으면 좋겠다.
신화를 넘어 민들레와 자주달개비를 넘어 아프리카와 팔레스타인을 넘어 빈곤과 분노와 테러를 넘어 위험한 시장을 넘어 사육으로 병든 소를 넘어 곰배팔이 희망을 넘어, 저마다의 길을 켜든 제 본래를 찾아다니는 저 촛불 촛불들
세상에서 제일 뜨거운 문장이 됩니다 고단한 사랑이 받으셔야할 긴, 긴, 편지가 됩니다
삶이란 매순간 살아있는 제사라, 순간순간 꽃을 피우니 순간순간 비손 올리는 하늘이니
자기 이름을 부르는 울음, 가장 오래된 떨림을 듣습니다 결코 서럽지 않는, 강력한 자기장磁氣場을 가진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사는 일이 민망할 때마다 '다시' 라는 말에 매달린다. 용서와 희망의, 하얗게 널린 빨래 같은 그 냄새 때문인지 이 시집은 '다시' 투성이이다.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는 의미"라는 생떽스의 말은 모든 존재는 매일 씨앗을 뿌린다는 말이리라. 언어라는 끼니를 떠먹을 때마다 더 허기
지는 하루. 나와 나의 길은 언제나 흔들리고, 자꾸 휘청이다 삶의 경건과 경이에 다시금 일어서며 오늘도 하늘 그리운 강아지풀처럼 태어난다. 천천히 태어나, 날마다 태어나 삶을 살아내고, 시를 살아내고 싶다.
- 자서 중에서
봉쇄수도원 / 김수우
찔레꽃, 흰 지느러미로 조용조용 마당을 젓습니다.
닫힌 채 떠있는 저 창문, 지상에 맨처음 떠오른 산소처럼 원시미생물의 촉수처럼 캄캄합니다
감춰둔 기도방들 애초 먼별처럼 각을 키웁니다 오래 전에 죽은 신들이 매일 죽는 자리, 날카로운 공포로 흔들리지만
비루하거나 찬란하거나 제 슬픔이 전깃줄 엉킨 묵시인 것 같아 역사인 것 같아
우는 어머니를 버린 우는 어머니들, 그립습니다, 위태합니다 몸을 굳게 잠그고
그림자 속으로 고스란히 살진 절망, 그 절망으로 지구는 오늘 안전한가요
흰 옷자락, 자꾸 심해를 저어갑니다 멀고 멉니다
붉은 사하라
의자도 거울도 전부 사막이다. 집도 절도 붉은 모래다. 무수한 나사로 조여진 문명 속에서 마주치는 원형의 세계. 그 굳건한 적막에 하루하루 아득하다. 막막하다.
고생대의 숲이 지금도 살아 분열하고 있는 사하라는 가장 치열한 생명의 땅이며, 오늘 내 삶의 현실이다. 말의 틈새기로 먼지처럼 분열하는 몸과 꿈의 뜨거운 분신들이 아프고 그립고 고맙다. 때문인지 이 시집에 발끝을 세우는 것들이 많다.
-자서 중에서
알타미라의 소 / 김수우
1 고대이집트에서 나는 창조신 누트였고 길고 짧은 신화를 수없이 건넜으며 인도에선 지금도 성자이다 이중섭의 손끝에선 아름다운 눈을 가진 식구였으며 알타미라 동굴에서 매일 지축 울리고 오늘도 허공을 넘는 尋牛인데
2 냉이꽃 듬성한 다리 밑 액체질소통 -196°C로 동결된 수소의 정액이 거래된다 전기자극으로 뽑아낸 정액을 분양받은 가축인공수정사들, 몸에 바람 든 암소를 안는다 수태시킨다 산도 바다도 애비 없는 단백질덩이로 태어난다 채권과 채무로 절룩거리는 생명의 流轉, 일상은 신상품과 재고로만 유통된다 下水에 무심히 젖는 봄
신은 이제 번식 관리되는 중이니 신화도 식구도 푸른 허공도 배합사료일 뿐이니
3 뼈와 살을 뜯어 먹이는 일 가죽구두를 신기는 일 그저 사랑이었거늘 찬란한 제의였거늘 내 눈이 수평선이었거늘 수평선 너머 네 집, 네 아침이었거늘 너희가 냉이꽃보다 쓸쓸한 이유를 안다 까닭없이 절망하는 이유를 안다
이 영악한 슬픔들아, 영원한 슬픔들아
버스를 탄 노자 / 김수우
종점 한 구역 전에 타서 종점 한 구역 전에 내리는 청소부 김씨 급정거에도, 잠을 깨지 않습니다 하루 두 번 마흔일곱 개 정류소를 흘러가며 도심으로 스며드는
사이, 신호등과 횡단보도, 아파트와 교회, 식당과 가구점, 은행과 병원, 입구들과 출구들, 타는 사람들, 내리는 사람들, 들, 들, 들, 환한 것과 어두운 것 틈으로 숨은, 들, 들, 들
아무리 버스가 휘청거려도, 꿈쩍 않는 산등성이 김씨 여름도 겨울도 한 개 낡은 빗자루에 불과합니다 타기 전에 한두 명이 타고 있고 내리기 전에 꼭 한두 명 남아 있는, 변두리 무위로 휘돌아갑니다
청소일도 곧 떨어질 참인데 단풍이 저리 쩔쩔매는데
사랑을 기억한다 / 김수우
얼마나 오래 기억하는가 내 몸 속 백혈구들은 고등어 한 토막에 일으켰던 네 살 적 알레르기를 꽃밥 짓다 사금파리에 긁힌 손끝 비린내를 마흔 네 개의 봄을 먹고 마흔 네 개의 겨울을 낳은 핏줄, 그 뜨거운 숲을 침입한 비린내에 돌짝 가슴 온통 가렵구나
살아있는가. 견딜 만한가 내 사랑, 다시 누군가, 라는 혁명을 꿈꾸라
제 그림자 다 크도록 흔들리기만한 눈빛들 놓쳐버리거나 놓아버린 이름들 내 몸속 빗살창이 되었으니 표시 없이 기억나는 멍울들 기억 없이 표시 나는 흠집들 마흔 네 그루 포플러를 낳았으니 , 그 바람소리에 온 하늘이 지독히 가렵구나
그래, 많이 여위지는 않았는가 내 사랑, 다시 어딘가, 라는 혁명을 꿈꾸라
지붕밑 푸른바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 골목과 누더기 진 지붕을 찍고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처를 넘는 법'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일탈로 인한 상처이건, 상처로 인한 일탈이건, 그래서 존재한다.'고 쓸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우리 삶의 어떤 트라우마일 것이다. 상처가 주체를 탄생시킨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그는 낡은 담벼락과 지붕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인데, 이때 우리는 그가 사진이미지를 통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 발문 중에서 (박수연, 문학평론가)
파도의 방 / 김수우
머리맡에 선고처럼 붙어 있는 사진 엄마와 동생들, 내가 유채꽃밭에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서 아버진 삶을 집행했다 깊이 내리고 오래 끌고 높이 추어올리던 그물과 그물들, 종이배를 잘 접던 일곱 살 눈에도 따개비지붕 단칸방보다 벼랑지던 방
평생이었다 고깃길 따라 삐걱대던, 비린내와 기름내 질척한 유한의 방에서 아버진 무한의 방이 되었다 여섯 식구 하루에 수십 번씩 열고 닫는
기관실 복도 끝에 있던 그 바다의 방을 육지에 닿은 십 년내 지고 왔는지 스무 명 대가족사진 속 소복소복 핀 미소에서 어둑한 방 하나 흔들린다
칠순 아버지의 굽고 녹슨 방, 쓸고 닦고 꽃병을 놓아도 아직 비리다 아무리 행복한 사진을 걸어도 생이 얼마나 비리고 기름내 나는 방인지 겨우 눈치챈다
방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연다 집행된 파도들이 환하다
봄꽃 천 원 / 김수우
주먹만한 봄화분 안에 시장통 골목이 흔들리고 있네 신발들 하늘 딛고 휘청이네 봄꽃 천 원, 쪽지를 달고 살랑살랑 살가운 얼굴 속에 팔락이는 여섯 살 내 치맛자락 홀로 팽팽하던 꼬리 연 아직 눈부시고 아버지의 짐자전거 저만치 달려오네 노오랗게 묻어나는 사람들 천 원어치 꽃가루를 따라 황사하늘 어디든 갈 수 있으리 목덜미에 돋는 떡잎 한 장
하늘 우체국 / 김수우
시립묘지 납골당 입구 하늘 우체국은 열두 달, 가을이다 오늘도 헐렁한 쉐터를 입은 가을이 소인을 찍는 중, 우표없는 편지들이 시시로 단풍든다 몰래 지나는 바람에도 말의 잎새더미에서 풍기는 젖은 지푸락 냄새, 말의 송아리, 슴벅이며 돌아본다
죽은 화분에 물을 준다 혹여 촉이 돋을까 혹여 촉이 돋을까 여름과 가을 지나고 다시 겨울이 지나는 베란다
죽음을 키우고 있는 뿌리를 본다 충분히 기다릴만한 神聖 죽음만한 질긴 꽃받침이 어디 있으랴
플라스틱 화분 속으로 걸어오는 모랫산 말린 낙타고기를 싣고 홀로 가풀막을 오르며 사막의 딸이 노래를 한다
낙타의 고비에서는 하늘에 바로 닿을 수 있네 암컷 낙타의 눈처럼 고비의 물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신기루의 고비에서는 따뜻한 마을이 떠나지 못하네*
거멓게 타버린 잎줄기가 따라 부른다 그 나직하고 느린 음조에 물을 준다 충분히 꿈꿀만한 밤 그래, 죽음만한 양식이 어디 있으랴
움푹움푹 허공꽃으로 피어난 저 발자국들
* 낙타를 타면 해가 가까워진다는 고비사막의 노래
길의길
쓸데없이 바늘쌈을 꺼내보곤 한다. 은박지 안에서 오롯이 반짝이는 은빛 바늘들. 어린 날 손가락 찔리며 지어보던 인형의 옷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내가 기워내야 할 수많은 하늘과 바람, 사람들 때문일까. 예리한 슬픔과 맑은 느낌. 내 저승빚은 얼마나 될까. 내 목숨으로 이어지기까지 창세 이후의 긴 핏줄들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세상의 모든 뼈들이 튼튼했으면 좋겠다.
신화를 넘어 민들레와 자주달개비를 넘어 아프리카와 팔레스타인을 넘어 빈곤과 분노와 테러를 넘어 위험한 시장을 넘어 사육으로 병든 소를 넘어 곰배팔이 희망을 넘어, 저마다의 길을 켜든 제 본래를 찾아다니는 저 촛불 촛불들
세상에서 제일 뜨거운 문장이 됩니다 고단한 사랑이 받으셔야할 긴, 긴, 편지가 됩니다
삶이란 매순간 살아있는 제사라, 순간순간 꽃을 피우니 순간순간 비손 올리는 하늘이니
자기 이름을 부르는 울음, 가장 오래된 떨림을 듣습니다 결코 서럽지 않는, 강력한 자기장磁氣場을 가진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사는 일이 민망할 때마다 '다시' 라는 말에 매달린다. 용서와 희망의, 하얗게 널린 빨래 같은 그 냄새 때문인지 이 시집은 '다시' 투성이이다.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는 의미"라는 생떽스의 말은 모든 존재는 매일 씨앗을 뿌린다는 말이리라. 언어라는 끼니를 떠먹을 때마다 더 허기
지는 하루. 나와 나의 길은 언제나 흔들리고, 자꾸 휘청이다 삶의 경건과 경이에 다시금 일어서며 오늘도 하늘 그리운 강아지풀처럼 태어난다. 천천히 태어나, 날마다 태어나 삶을 살아내고, 시를 살아내고 싶다.
- 자서 중에서
봉쇄수도원 / 김수우
찔레꽃, 흰 지느러미로 조용조용 마당을 젓습니다.
닫힌 채 떠있는 저 창문, 지상에 맨처음 떠오른 산소처럼 원시미생물의 촉수처럼 캄캄합니다
감춰둔 기도방들 애초 먼별처럼 각을 키웁니다 오래 전에 죽은 신들이 매일 죽는 자리, 날카로운 공포로 흔들리지만
비루하거나 찬란하거나 제 슬픔이 전깃줄 엉킨 묵시인 것 같아 역사인 것 같아
우는 어머니를 버린 우는 어머니들, 그립습니다, 위태합니다 몸을 굳게 잠그고
그림자 속으로 고스란히 살진 절망, 그 절망으로 지구는 오늘 안전한가요
흰 옷자락, 자꾸 심해를 저어갑니다 멀고 멉니다
붉은 사하라
의자도 거울도 전부 사막이다. 집도 절도 붉은 모래다. 무수한 나사로 조여진 문명 속에서 마주치는 원형의 세계. 그 굳건한 적막에 하루하루 아득하다. 막막하다.
고생대의 숲이 지금도 살아 분열하고 있는 사하라는 가장 치열한 생명의 땅이며, 오늘 내 삶의 현실이다. 말의 틈새기로 먼지처럼 분열하는 몸과 꿈의 뜨거운 분신들이 아프고 그립고 고맙다. 때문인지 이 시집에 발끝을 세우는 것들이 많다.
-자서 중에서
알타미라의 소 / 김수우
1 고대이집트에서 나는 창조신 누트였고 길고 짧은 신화를 수없이 건넜으며 인도에선 지금도 성자이다 이중섭의 손끝에선 아름다운 눈을 가진 식구였으며 알타미라 동굴에서 매일 지축 울리고 오늘도 허공을 넘는 尋牛인데
2 냉이꽃 듬성한 다리 밑 액체질소통 -196°C로 동결된 수소의 정액이 거래된다 전기자극으로 뽑아낸 정액을 분양받은 가축인공수정사들, 몸에 바람 든 암소를 안는다 수태시킨다 산도 바다도 애비 없는 단백질덩이로 태어난다 채권과 채무로 절룩거리는 생명의 流轉, 일상은 신상품과 재고로만 유통된다 下水에 무심히 젖는 봄
신은 이제 번식 관리되는 중이니 신화도 식구도 푸른 허공도 배합사료일 뿐이니
3 뼈와 살을 뜯어 먹이는 일 가죽구두를 신기는 일 그저 사랑이었거늘 찬란한 제의였거늘 내 눈이 수평선이었거늘 수평선 너머 네 집, 네 아침이었거늘 너희가 냉이꽃보다 쓸쓸한 이유를 안다 까닭없이 절망하는 이유를 안다
이 영악한 슬픔들아, 영원한 슬픔들아
버스를 탄 노자 / 김수우
종점 한 구역 전에 타서 종점 한 구역 전에 내리는 청소부 김씨 급정거에도, 잠을 깨지 않습니다 하루 두 번 마흔일곱 개 정류소를 흘러가며 도심으로 스며드는
사이, 신호등과 횡단보도, 아파트와 교회, 식당과 가구점, 은행과 병원, 입구들과 출구들, 타는 사람들, 내리는 사람들, 들, 들, 들, 환한 것과 어두운 것 틈으로 숨은, 들, 들, 들
아무리 버스가 휘청거려도, 꿈쩍 않는 산등성이 김씨 여름도 겨울도 한 개 낡은 빗자루에 불과합니다 타기 전에 한두 명이 타고 있고 내리기 전에 꼭 한두 명 남아 있는, 변두리 무위로 휘돌아갑니다
청소일도 곧 떨어질 참인데 단풍이 저리 쩔쩔매는데
사랑을 기억한다 / 김수우
얼마나 오래 기억하는가 내 몸 속 백혈구들은 고등어 한 토막에 일으켰던 네 살 적 알레르기를 꽃밥 짓다 사금파리에 긁힌 손끝 비린내를 마흔 네 개의 봄을 먹고 마흔 네 개의 겨울을 낳은 핏줄, 그 뜨거운 숲을 침입한 비린내에 돌짝 가슴 온통 가렵구나
살아있는가. 견딜 만한가 내 사랑, 다시 누군가, 라는 혁명을 꿈꾸라
제 그림자 다 크도록 흔들리기만한 눈빛들 놓쳐버리거나 놓아버린 이름들 내 몸속 빗살창이 되었으니 표시 없이 기억나는 멍울들 기억 없이 표시 나는 흠집들 마흔 네 그루 포플러를 낳았으니 , 그 바람소리에 온 하늘이 지독히 가렵구나
그래, 많이 여위지는 않았는가 내 사랑, 다시 어딘가, 라는 혁명을 꿈꾸라
지붕밑 푸른바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 골목과 누더기 진 지붕을 찍고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처를 넘는 법'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일탈로 인한 상처이건, 상처로 인한 일탈이건, 그래서 존재한다.'고 쓸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우리 삶의 어떤 트라우마일 것이다. 상처가 주체를 탄생시킨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그는 낡은 담벼락과 지붕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인데, 이때 우리는 그가 사진이미지를 통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 발문 중에서 (박수연, 문학평론가)
파도의 방 / 김수우
머리맡에 선고처럼 붙어 있는 사진 엄마와 동생들, 내가 유채꽃밭에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서 아버진 삶을 집행했다 깊이 내리고 오래 끌고 높이 추어올리던 그물과 그물들, 종이배를 잘 접던 일곱 살 눈에도 따개비지붕 단칸방보다 벼랑지던 방
평생이었다 고깃길 따라 삐걱대던, 비린내와 기름내 질척한 유한의 방에서 아버진 무한의 방이 되었다 여섯 식구 하루에 수십 번씩 열고 닫는
기관실 복도 끝에 있던 그 바다의 방을 육지에 닿은 십 년내 지고 왔는지 스무 명 대가족사진 속 소복소복 핀 미소에서 어둑한 방 하나 흔들린다
칠순 아버지의 굽고 녹슨 방, 쓸고 닦고 꽃병을 놓아도 아직 비리다 아무리 행복한 사진을 걸어도 생이 얼마나 비리고 기름내 나는 방인지 겨우 눈치챈다
방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연다 집행된 파도들이 환하다
봄꽃 천 원 / 김수우
주먹만한 봄화분 안에 시장통 골목이 흔들리고 있네 신발들 하늘 딛고 휘청이네 봄꽃 천 원, 쪽지를 달고 살랑살랑 살가운 얼굴 속에 팔락이는 여섯 살 내 치맛자락 홀로 팽팽하던 꼬리 연 아직 눈부시고 아버지의 짐자전거 저만치 달려오네 노오랗게 묻어나는 사람들 천 원어치 꽃가루를 따라 황사하늘 어디든 갈 수 있으리 목덜미에 돋는 떡잎 한 장
하늘 우체국 / 김수우
시립묘지 납골당 입구 하늘 우체국은 열두 달, 가을이다 오늘도 헐렁한 쉐터를 입은 가을이 소인을 찍는 중, 우표없는 편지들이 시시로 단풍든다 몰래 지나는 바람에도 말의 잎새더미에서 풍기는 젖은 지푸락 냄새, 말의 송아리, 슴벅이며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