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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요즘 돌아가는 걸 보노라면 한숨이 나옵니다. 도대체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국민을 걱정해야지 우리 국민이 여의도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입니다. 우물안에 갇힌 깜깜이들입니다. 주변정세나 격동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가하게 몇 개월째 세월호 특별법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과 희생자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요?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입니까? 국민의 대표로 뽑아줬으니, 남탓하지 말고 자신들이 애걸하여 받은 그 신성한 代義政治의 의무를 다하면 될 일입니다. 그걸 못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시급하고 중요한 국사를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당파이익에만 매달려 허송세월을 하는 이런 망할 국회는 해산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세금이 아깝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헤매는 동안에도 세상은 세상대로 지지고 볶는 중입니다. 요즘은 스코틀랜드 독립이 핫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분리독립 운동을 해왔던 다른 나라의 독립투쟁 세력들도 스코틀랜드의 9월 18일 투표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닌 말로 제주도도 이참에 분리독립을 해버릴까요? 한반도의 역사가 이리도 지리멸렬하니 속이 터져서 하는 말입니다. 남북이 찢어진 것도 어리석은 일인데. 우리는 왜 이다지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난리들일까요?
내 고향 제주는 먼 옛날 작은 섬나라 왕국 '탐라'였습니다. 탐라국(耽羅國)은 始祖 고을라왕(髙乙那王)이 제주섬에 세운 고대왕국입니다. 씨족국가라 해야 하나요? 아무튼 이 섬나라 왕국은 기원전 57년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 백제, 신라와 고려에 차례로 복속되었다가 1402년에 조선에 완전 병합되면서 작은 왕국은 사라졌습니다. 탐모라국(耽牟羅國) 또는 섭라(涉羅), 탁라(乇羅), 담모라(耽牟羅), 담라(憺羅)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중국의 진수(陳壽)가 펴낸《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주호(州胡)라고 적고 있습니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 한(韓)에 따르면, 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이라 했습니다. 州胡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韓中'과 교역한다는 뜻이겠지요?
한반도의 왕조와 탐라 사이에는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벌였던 피나는 전쟁도 없었습니다. 한반도의 왕조들의 눈으로 본다면 여러번의 모반도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民亂이 여러 차례 일어나기는 하였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섬나라를 온갖 공물로 착취하고, 반도에서 내려온 목민관들이 민중을 무시하고 야만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제주 토박이들의 가슴에는 한반도를 배척하는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제주사람들은 半島民들을 '육지것들'이라 부르며 경계심을 가집니다. 출세길을 찾아 서울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출향인을 斜視로 대하기도 합니다. 우리 젊을 적에는 서울말이라도 할라 치면 "이것봐라, 닝끼리네..."하고 시비를 걸기도 하였습니다. '닝끼리다'는 '미끄러지다'는 뜻의 제주말인데, 서울말이 간사하고 매끄러워서 그런 야유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주말 쓰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가니 이런 시비는 줄었겠습니다. 여의도 개판정치가 가까이에 있는 서울동네에 살다보니 벼라별 생각을 다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탐라국 독립은 어렵겠지요?
지금 제주섬은 제주특별자치도라고 합니다. 자치경찰제 실시와 교육자치권을 확대할 뿐 아니라 중앙정부 권한의 이양과 자치입법권 및 자치재정권의 부여 등 고도의 자치권이 보장되는 특별자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같이 둔한 사람은 이런 특별자치라는 것이 다른 지방자치와 그 무슨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싸워서 쟁취한 자치가 아니라서 그런가요? 특별자치란 것이 좀 맹맹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거두어 들여서 살림을 꾸려나갈 稅收도 마땅하지 않은 터에, 경우에 따라 중앙정부에 맞서기도 하는 그 어떤 自治가 가능하겠습니까? 재정자립도가 제주의 경우에는 30%가 채 안되더군요.
[문갑식 기자의 Oxford Letter⑮] 스코틀랜드인이 '윌리엄' 이름에 기겁하는 이유 글=문갑식 사진=이서현 2014년 9월 11일 <조선일보>
스코틀랜드 독립(1)
오는 18일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지도 모를 투표가 실시됩니다.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지요. 지금까지는 부결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지만 점차 찬성률이 높아져 최근 조사로는 찬반비율이 47대53입니다.
만일 ‘연합왕국(United Kingdom)’, 혹은 ‘그레이트 브리튼(GB)’에서 스코틀랜드가 떨어져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토는 3분의1이 줄고 인구는 530만명이 감소합니다. 이는 전체 영국 인구의 9.1%에 해당됩니다. 영토와 인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경제’입니다. 경제는 먹고살기 힘들어진다는 뜻입니다. 파운드화를 계속 사용할지부터 시작해 영국의 최대 천연자원의 보고(寶庫)인 북해(北海)유전의 소유권 문제도 불거지겠지요.
영국사를 살펴보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인종(人種)부터 다릅니다. 같은 켈트족이었지만 잉글랜드는 로마에 정복돼 라틴족에 동화됐습니다.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아 물러난 뒤엔 독일계의 침략을 받지요. 앵글로색슨족에서의 색슨은 독일 작센(Saxen)에서 건너왔으며 앵글로족도 색슨족의 이웃입니다. 지금의 윈저(Windsor) 왕가도 독일계지요. 빅토리아 여왕 사후에 왕위를 이은 가문이 작센-고부르크-고타 가문입니다.
1910년 윈저 왕가(王家)의 시조가 되는 조지5세(1910~1936)는 형 앨버트가 사망하자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작위를 받습니다. 동족인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1917년 모든 독일계 작위를 포기합니다. 1차 대전중 싸운 독일의 빌헬름2세와 조지5세는 고종4촌간입니다. 그리고 20여년후 다시 제2차 세계대전때 서로를 향해 V2로켓과 잠수함(독일), 대공습(영국)을 했으니 동족상잔(同族相殘)도 이런 경우가 드믈지요.
영어 단어에서 ‘윈저’는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저작(著作)’ ‘둥근 바닥’이라는 뜻입니다. 새 왕가도 모든 것의 근본이 되고 국민 전체를 담는 그릇이 되겠다고 다짐했는지 모르겠지만 영국에선 두가지로 쓰이지요. 첫번째가 윈저성(Windsor Castle), 두번째는 버크셔 주 윈저시를 말합니다.
▲윈저성 잔디밭에서 바라본 윈저성의 전경. 마치 영국신사처럼 단정한 모습이다. ▲윈저성 출입구를 지나자마자 보이는 광경. 정돈된 모습이 영국왕실의 공식 주거지답다.
윈저성은 세계에서 가장 한자리에 오래 보존된 성채(城砦)로 알려져있습니다. 세워진 시기가 정복왕 윌리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은 ‘~왕’이라고 왕을 특징짓는 일이 많지요. ‘정복왕’ 윌리엄은 영국사에서 꽤 중요한 인물입니다.
역사를 살펴보자면, 로마가 철수한 이후 작은 나라로 갈라져 다투던 잉글랜드가 통일해야할 필요가 생깁니다. 덴마크의 바이킹(Viking)이 침략한 겁니다. 외적(外敵)의 침공을 받아 잉글랜드를 통일시킨게 알프레드왕(849~899)입니다. 그에겐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도버 해협 북쪽에 위치한 ‘웨섹스 왕국’의 계승자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에그버트왕이 거의 잉글랜드를 통일했을 즈음 바이킹이 지금의 런던, 캔터베리, 요크 지방으로 물밀듯 밀려옵니다. 영토는 황폐해지고 왕국은 멸망했습니다. 알프레드는 바이킹이라면 이를 갈았을 겁니다.
알프레드에게 진 바이킹은 이후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합니다. 노르망디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의 분수령이 된 상륙작전지지요. 여기서 100여간 프랑스왕의 신하를 자처하다 노르망디왕이 된 이가 윌리엄입니다. 윌리엄은 1066년 잉글랜드 정복에 나섭니다. 예전에 영어독해학습서에서 ‘Norman conquest’라는 말을 본 기억이 나시지요? 바로 윌리엄의 침략인데 이는 영국사에서 로마제국에 이어 두번째의 대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윌리엄이 ‘윌리엄1세’가 되면서 권력은 노르망디 출신 귀족들이 장악합니다. 왕실과 귀족은 프랑스어, 평민은 영어를 사용하지요. 윌리엄1세는 욕심장이였던지 속속 프랑스 영토를 잠식하는데 훗날 백년전쟁을 잉태하지요.
윌리엄 이후 두아들 윌리엄2세(1087~1100), 헨리1세(1100~1135)때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면서 만든게 윈저성입니다. 성채 바닥 면적이 4만4965㎡이며 현지에서 보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하고있습니다. 윈저성은 런던의 버킹엄궁전, 에딘버러의 홀리루드궁전과 함께 영국 군주의 공식 주거지 가운데 한곳입니다. 지금의 엘리자베스2세는 주말 대부분을 윈저성에서 보냅니다. 국정을 돌볼 뿐아니라 오락도 즐긴다고 하지요.
▲영국여왕이 거주하는 윈저성은 야트막한 언덕위에 있다. 올려다보면 웅장한 모습이지만 비탈이 가파르진 않다.
▲윈저성에는 몰려오는 전세계 관광객을 위해 언어서비스를 실시하는 코너가 마련돼있다.
여왕의 나머지 거주지는 샌드링햄 하우스와 발모럴성이 있는데 이곳들은 공개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길기에 윈저성에는 왕가의 숙소뿐 아니라 근위대를 둔 요새, 교도소 등도 있는데 1992년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지요. 위에서 보면 인공제방 위에 세운 거대한 원형탑이 윈저성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건물은 역사 그 자체로, 윌리엄1세가 만든 제방을 헨리 2세가 허물고 돌로 원형탑을 쌓았으며 동·남·북쪽에 벽을 추가 건설했습니다. 13세기에 헨리 3세가 서쪽 방벽(防壁)을 완공했으며 지금의 앨버트 기념 예배당이 있는 곳에 왕의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1348년 에드워드 3세가 이곳을 새로 결성된 ‘가터 기사단(騎士團)’의 중심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가터 기사단의 예배당으로 설계된 세인트조지 예배당은 에드워드4세가 세웠는데 수직(垂直)으로 지은 대표적 건축물입니다. 1528년에 완공됐다가 1921~30년에 복구됐는데 웨스트민스터사원 다음으로 웅장하다고 하지요. 헨리 7세가 왕릉(王陵)으로 지은 앨버트 기념예배당은 빅토리아 여왕이 복구한 뒤 죽은 남편을 추모해 ‘앨버트’로 이름붙였지요. 빅토리아는 성격이 괴팍했는데 앨버트는 그런 부인을 외조(外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역사를 지녔다지만 현장에서 본 윈저성은 ‘관광지’같은 느낌입니다. 18.5 파운드(성인), 16.75 파운드(학생), 11 파운드(12세 이하 어린이)를 기꺼이 지불하는 방문객들의 표정도 “여왕이 사는 곳…” 정도를 기대하는 정도지요.
▲버킹검궁에서처럼 윈저성에도 털모자쓴 경비병이 지키고 있다. 그의 주된 임무는 경비보다 관광객들과 사진촬영해주는 것인 듯 하다. 순서를 기다려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의 모습이다.
▲윈저성 바로 밖은 완전히 상점가다. 왕실에 기대어 수입을 올려보려는 장사꾼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든듯 하다.
▲한가롭게 성 곳곳을 둘러보는 관광객들. 성답게 윈저 시내가 조망된다.
▲윈저성에는 관광객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 그래서인지 전체를 둘러보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진 않는다.
그에 비해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 복판에 자리한 에딘버러성이 주는 인상은 다릅니다. 밤늦은 시간에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 사비성이 주는 애잔함이랄까, 잃어버린 왕조에 대한 영화(榮華)가 서려있다고 할까요.
에딘버러는 빙하기때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얼음이 녹자 이번에 화산(火山)이 곳곳에서 폭발했습니다. 에딘버러성의 표고(標高)는 해발 133m로 밖에서 보면 가파른 절벽이 성의 세면을 둘러싸고있습니다. 척봐도 천혜(天惠)의 요소로, 경사가 덜가파른 동쪽 언덕을 통해 입구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북해를 통해 에딘버러로 접근할 수 있기에 바이킹의 침략에 대비해야했고 잉글랜드 침공에도 대비하려는 입지로 보입니다.
▲에딘버러성에 입장하려면 최소 30분 이상이 걸린다. 스코틀랜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에딘버러성은 밑에서 올려다보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인다. 윈저성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에딘버러성은 가파르다. 진짜 성같은 느낌을 준다. 윈저성과는 또다르다.
▲에딘버러 시내에는 빙하지형과 화산폭발의 영향으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가 세곳 있다. 칼튼힐도 그중 하나다. 짓다만 그리스 파르테논신전같은 건물이 서있는 정상부근에선 사방이 다 보인다.
전쟁으로 얼룩진 에딘버러성의 역사는 윈저성 못지 않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지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성(聖) 마거릿 예배당입니다. 스코틀랜드 데이비드 1세가 1130년쯤 신앙심이 독실한 어머니를 기리는 의미에서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건물입니다. 성이 처음 잉글랜드에 점령된 것은 1174년입니다. 그후 10년간 잉글랜드인들이 거주했지요.
1296년부터 1313년에도 성이 잉글랜드의 손에 들어갔는데 성을 되찾은 것은 ‘로버트 더 브루스’라는 인물입니다. 그의 조각상이 성문 입구에 새겨져있습니다. 이후 성은 왕궁으로 쓰입니다. 필요에 따라 건물도 신축되지요. 제임스4세가 1639년까지 스코틀랜드 의회로 쓰였던 그레이트홀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에딘버러성은 그후에도 포위와 공격의 대상이 되는 운명입니다.
에딘버러성에서 북쪽 바다 방향으로 거대한 대포가 늘어서 있습니다. ‘몬스 메그(Mons-Meg)’라 하는데요, ‘Mons’는 여성의 치구(恥丘), ‘Meg’는 키가 큰, 덩치가 크다는 뜻으로 제임스2세가 1457년 손에 넣었지요. 하지만 이 몬스 메그에도 불구하고 에딘버러성은 16~17세기에 여러번 포위당하고, 1560~1660년까지 영국인 수중에 넘어가지요. 1689년엔 오렌지공(公) 윌리엄에게 포위당하기도 합니다. 스코틀랜드는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악연인 모양입니다.
▲에딘버러성의 거포들이 바다를 향하고있다. 스코틀랜드의 왕들은 이 대포를 믿었지만 결국 망국의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지금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이곳에서 과거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북해를 통해 침략해온 외적들을 보고 긴장했을 것이다. 사진 중앙이 바로 칼튼힐이다.
청교도 혁명후 영국 역사상 처음 처형된 왕 찰스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제임스2세(1685~1688)는 가톨릭신자로 국교인 성공회와 대립합니다. 켄터베리 대주교 등이 탄원서를 냈지만 달래기는 커녕 구속하고 맙니다. 성공회측은 왕위계승권을 가진 제임스2세의 딸 메리의 남편에게 비밀서한을 보내지요. 그가 오렌지공 윌리엄 혹은 네덜란드의 빌헴공이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의 군사력은 프랑스 루이14세를 견제할만큼 강력했습니다.
오렌지공이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하자 제임스2세는 북쪽으로 도망치지요. 그러자 오렌지공은 “제임스2세를 내놓으라”는 명분으로 북진(北進)합니다. 스코틀랜드 입장에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었을 겁니다. 빌헴은 제임스2세를 돕던 아일랜드와 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아내 메리2세(1689~1694)와 함께 재위(윌리엄3세·1689~1702)에 오릅니다. 역사상 처음 두명의 왕이 생겼는데 결정은 메리, 조언은 남편이 했다는군요.
왕이 됐지만 둘의 팔자(八字)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임신을 못하는 아내를 두고 남편은 바람을 피웠고 아내는 서른둘의 나이에 천연두로 죽습니다. 윌리엄 3세는 훗날 암살되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유린당한 에딘버러성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게 3대 보물(寶物)입니다. 일본 왕실에 3종의 신기(神器)가 있다고 하지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거울(鏡)과 구옥(勾玉·반달모양의 굽은 옥돌)·검(劍) 세개를 가지고 있어야 정통성을 인정받는데 스코틀랜드 왕가에 세가지의 보물이 있었습니다.
▲월터 스콧은 스코틀랜드가 낳은 문호다. '아이반호'의 작가이자 100년 넘게 사라졌던 스코틀랜드 왕가의 3대 보물도 그가 찾아냈다.
왕관과 왕홀(王笏), 즉 보석으로 장식된 지휘봉과 보검(寶劍)입니다. 이 3개의 보물에 대해서는 팩션 소설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1707년 양국이 통합된 후 사라져버린 겁니다. 이것이 재발견된 것은 100년 후입니다. 스코틀랜드 역사에 정통한 문호(文豪)로 ‘아이반 호’를 쓴 월터 스콧경(卿)이 왕궁 깊은 속에 은닉된 창고를 찾아낸 것이지요. 1818년 월터 스콧이 3종의 보물이 들어있는 궤짝을 여는 그림이 에딘버러성에 있습니다.
에딘버러성은 관광명소로서 표를 사려면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영국군 지역사령부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지요. 영국군이 머무는 곳 근처의 스코틀랜드 국립전쟁박물관과는 또다른 감회를 자아냅니다.
▲에딘버러성에는 지금도 수백명의 병사들이 실제로 주둔하고있다. 그래서인지 왕궁경호 교대식은 절도가 넘친다.
▲에딘버러성이 보이는 곳에서 여학생 두명이 스코틀랜드의 전통악기 백파이프를 연주하고있다. 망한 왕국의 애잔함이 음률에 담겨있다.
백파이프(Bag Pipe) 연주를 들으시려면 상단 중앙의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로열마일 끝부분에서 에딘버러성 입구에 서있는 이 스코틀랜드식 교회는 '허브'다. 에딘버러 시내의 랜드마크격으로 내부에서는 각종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약속의 장소이기도 하다.
▲에딘버러성 입구에서 쭉 뻗은 도로를 로얄마일이라고 부른다. 과거엔 서민들의 통행이 금지됐지만 지금은 에딘버러 최고의 번화가다.
▲로얄마일의 활기찬 모습. 지금 에딘버러는 스코틀랜드 독립투표의 진원지가 되고있다.
[문갑식 기자의 Oxford Letter⑯] 스코틀랜드 국명이 이집트 공주 이름에서 유래한 사연 2014년 9월 11일 <조선일보>
스코틀랜드 독립(2)
18일 투표는 스코틀랜드 주민 520만명중 1998년 9월18일 이전 출생자에게로 투표권이 확대된데다 여론의 흐름이 급변해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왜 1707년 통합 이후 307년만에 독립을 추진하는 것일까요.
에딘버러에서 처음 느낀 것은 ‘비장감(悲壯感)’같은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인들이 그리도 비꼬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무뚝뚝’은 ‘나라잃은 국민’이란 감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선지 잉글랜드에 대해 그들은 유독 민감합니다. 잉글랜드식 영어를 못알아듣는체 하고 파운드화를 내면 거스름돈을 꼭 스코틀랜드화(貨)로 바꿔줍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별의별 것에서 다 차이가 납니다. 일례로 스코틀랜드의 우체통은 다른 지역과 다릅니다. 보통 엘리자베스2세의 왕관(Royal cypher·EⅡR로 새김)과 이름을 각인하는데 스코틀랜드는 왕관만 새깁니다. 50년대 이 논쟁을 ‘우체통 전쟁(Pillar Box War)’이라 불렀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707년 연합법에 따라 통합했지만 정서적으로 괴리가 컸습니다. 1952년 현재 여왕이 즉위했을 때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우체통이 파괴되거나 우체통 겉면 여왕의 이름이 지워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유는 “잉글랜드에는 과거 엘리자베스1세가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Queen Elizabeth II)로 불러도 되지만 스코틀랜드에는 ‘엘리자베스’란 여왕이 없었기에 엘리자베스1세로 부르는게 옳다”는 정서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불붙인게 스코틀랜드 국민당 지도자 존 매코믹이었습니다. 그는 “새 국왕의 ‘2세’라는 호칭이 연합법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걸었습니다. 법원은 “이름을 정하는 것은 국왕의 특권”이라며 매코믹에게 패소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런 문제의 재발을 우려해 영국은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호칭중 ‘~세’부분이 다르면 숫자가 큰쪽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잉글랜드의 ‘제임스3세(1452~1488)’가 다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Stone of Destiny
스코틀랜드 기준으론 ‘제임스 8세’여서 역사가 뒤죽박죽되는 것입니다. ‘우체통 전쟁’ 못지않은 감정싸움이 이른바 ‘대관식(戴冠式) 바위(Stone of Scone)’ 혹은 ‘숙명의 돌(The Stone of Destiny)’을 둘러싼 것입니다. 이 바위는 에딘버러성에 보관돼 있습니다. 이것을 보러 하루 수만명이 고액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지만 에딘버러성측은 진품을 숨긴채 모조품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스코틀랜드왕이 남긴 보물3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1천명만이 사용해 사어(死語)가 되다시피한 스코틀랜드의 게일어로 ‘Lia Fail’이라고 불리는 이 붉은빛 돌은 가로 66㎝, 세로 41㎝, 두께 27㎝, 무게 152㎏으로 500년여간 역대 스코틀랜드왕 대관식때 쓰였습니다. 무트힐에 있던 돌을 1296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1세가 스코틀랜드를 점령하면서 들고와 700년간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보관했습니다. 라틴 문양의 십자가가 새겨진 돌을 잉글랜드왕들은 대관식 때마다 의자밑에 넣었습니다.
이 돌이 1950년 성탄절 웨스터민스터사원에서 사라지자 영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5개월에 걸친 수사 결과 범행을 저지른 것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생들이었으며 돌은 스코틀랜드 아르브로스사원에서 발견됐습니다. 영국정부는 돌을 가져왔지만 1996년 에딘버러궁으로 돌려줬습니다. “대관식이 있을 때는 빌려준다”는 단서를 달고서였습니다. 문제가 일단락되는듯 했지만 “영국정부가 진짜를 숨기고 가짜를 가져다놨다”는 ‘음모설’이 무성했습니다.
이런 스코틀랜드 주민 정서를 업고 스코틀랜드NGO단체는 유네스코에 ‘숙명의 돌’ 반환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난처한 유네스코는 “이 돌이 누구것인지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 문제이므로 개입할 수 없다”며 빠져나왔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전 ‘숙명의 돌’은 딱 두번 자리를 옮긴 적이 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호민관(護民官) 대관식을 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공습이 심할 때 지하 밀실로 숨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은 왜 중요할까?
전설에 따르면 돌은 구약 창세기 28장 10절 야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야곱이 하란 땅으로 가던 중 돌을 베개삼아 자는데 꿈에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목격했습니다. 그위로 나타난 하나님이 야곱 자손의 번성을 축복했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돌위에 기름을 붇고 그 땅을 ‘벧엘’로 불렀는데 이 돌이 머나먼 스코틀랜드까지 오게된 사연이 그럴듯합니다. 옛 그리스의 왕즈 가텔로스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여행하다 바로 야곱의 돌을 발견합니다. 돌을 가지고 이집트로 간 왕자가 파라오의 딸인 스코다 공주와 결혼하는데 모세의 ‘탈애굽’ 당시 함께 이집트를 떠나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거쳐 스페인에 도착해 천년을 머물다 스코틀랜드로 돌을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스코틀랜드왕들의 대관식 때 바위가 사용됐고 스코틀랜드란 지명(地名)도 ‘스코타’ 공주에게서 유래됐다는 것입니다. 1292년 존 드 베일리얼이 돌에 앉아 마지막 대관식을 했는데 돌에 ‘예언’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Raeburn's portrait of Sir Walter Scott in 1822
“운명의 여신들이 그릇되지 않고 예언자의 목소리가 헛되지 않으면 이 신성한 돌이 있는 곳은 어디든 스코틀랜드 종족이 지배하리라.” ‘아이반호’를 쓴 작가 월터 스콧이 찾았다는 예언 적힌 금속조각은 현재 볼 수 없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움직임은 과거의 ‘향수’때문만은 아닙니다. 통합후 스코틀랜드에서 ‘클랜(Clan)’이라는 지주(地主) 씨족집단이 해체되자 지주들은 고원(高原) 정비사업을 벌였고 이로 인해 땅잃은 소작농이 속출했습니다. 소작농들은 도시로 유입돼 노동자계급으로 전락했으며, 상당수가 캐나다 퀘벡주나 온타리오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글래스고 같은 도시는 통합의 혜택으로 급성장했지만 1~2차 세계대전으로 스코틀랜드는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1차 대전때 병력(兵力)자원을 주로 스코틀랜드에서 조달하면서 젊은이 다수가 사망하자 1919년 1월 이에 항의하는 ‘레드 클라이드사이드’운동이 벌어졌는데 영국정부는 이를 탱크와 군대를 동원해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뒤이어 닥친 1920~30년대 대공황 당시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도시 글래스고가 최악 실업률을 기록했고, 2차 대전때는 스코틀랜드에 밀집돼있던 해군기지와 무기 생산시설이 나치 독일공군의 집중적인 표적이 됐습니다. 그런데도 영국정부는 스코틀랜드 로카버에 특수전과 유격전을 위한 군사학교를 세워 신병을 양성했습니다. 2차대전 후 경제를 지탱하던 조선업마저 쇠퇴하자 스코틀랜드는 생수와 신선한 고기를 공급하는 정도로만 인식돼왔습니다.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1970년 북해(北海) 유전이었습니다. 오일 붐으로 자생력이 생기자 독립을 주장하는 국민당(Scottish National Party)이 급성장했고 부결(찬성 40%)됐지만 1979년 자치권 이양투표가 실시된 것입니다. 결국 블레어 전 총리는 1997년 11월11일 스코틀랜드의 자치를 선언했으며,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재개원했습니다. 이런 유화책에도 불구, 2007년 자치수반이 된 스코틀랜드 국가당수 앨릭스 새먼드는 독립을 천명합니다.
Mel Gibson이 주연한 영화 Braveheart 중,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윌리암 월러스가 행한 Freedom Speech 장면입니다!
윌리암 월러스가 사형대 위에서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외치며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 Braveheart의 마지막 장면!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스코틀랜드 주민들의 정서를 감안한 ‘1997년’이라는 숫자입니다. 블레어 전 총리가 이 해를 택한 것은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으로 불리는 ‘스털링 다리 전투’ 7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스털링 다리 전투란 1297년 9월11일 윌리엄 월러스가 이끄는 군대가 존 드 워렌이 지휘한 잉글랜드군을 스털링 포스(Forth)강 근처에서 무찌른 전투입니다. 월러스는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입니다.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언론정보학 석사.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을 거쳐 현재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Scotland The Free | 60 Minutes | Time For Scottish Independence?
Scotland the free: Remain part of Great Britain? Or should the Scots 'go it alone'? Charles Wooley admits this story is personal. You see, it's the story of his birthplace - Scotland - and the historic decision it must make in September. Scots will vote on whether to remain part of Great Britain or to 'go it alone': to finally be free from the "Sasinacks", the English, who have lorded over them for centuries. There will be many whose knowledge of Scottish history extends only as far as Mel Gibson in the movie Braveheart. But for Charles, the argument over Scottish independence has been life-long and one that has his own family divided.
Scotland Votes What's at Stake for the UK BBC Documentary 2014
So far the Scottish referendum debate has been almost entirely about Scotland - what is good for it and what is bad for it. But what about the rest of the UK? Whatever the result, the UK as we have known it for the past 300 years is set to change dramatically, and may never be the same again. If you think independence would not make any difference to the other 58 million people on these islands, think again. The reverberations could be felt across the land, from the future of the armed forces and nuclear deterrent, to the UK's place at the international top table; from the fate of the union flag to the entire British political landscape. Andrew Neil explores what an independent Scotland would mean for England, Wales and Northern Ireland, and the huge constitutional changes that may lie ahead whether the vote is yes or no.
Series celebrating Scotland's stunning landscape and landmarks from the air.
In this first episode, presenter Vanessa Collingridge starts her journey in the capital, exploring Edinburgh from its volcanic beginnings to the building of the glorious New Town. She then travels through the agricultural Borders and follows Glasgow's mighty River Clyde before arriving at the gateway to the Highlands, Stirling.
In this second episode, Vanessa Collingridge starts her journey in Mid-Argyll, visiting Kilmartin to explore the history of some of Scotland's earliest kings. She then travels to Inveraray and the west coast of Skye before ending with a journey from Ben Nevis to Urquhart Castle.
In this third episode, Vanessa Collingridge travels across the Cairngorms, journeys along the River Dee to Balmoral, revels in Aberdeen's granite architecture and ends by taking a look at two of Scotland's engineering marvels - the Bell Rock Lighthouse and the Forth Rail Bridge.
Scotland's stunning landscapes and landmarks as seen from the air in the depths of winter - the Cairngorms, Glencoe, the Great Glen Fault. Vanessa Collingridge presents this breath-taking aerial portrait of Scotland's beautiful scenery during the winter months, while covered in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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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주도 독립? 독립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자치라도....
게메~
제주가 독립 하려면 관광과 역외금융이 최우선인 도시국가가 되야 가능 하지안남 ?
정답~~~~~~~~~~!!!
엄보 대단합니다! (장난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