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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없어진 사람 / 신미균
은하수 추천 0 조회 18 15.01.24 01: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없어진 사람 / 신미균

 

 

형광등에 검붉은 띠가 생기더니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1분 간격으로 깜박거리다가

30초,15초,1초 간격으로 깜박거렸다

방 안에 있던 내가 없어졌다 나타났다

거울과 팔이 없어졌다 나타났다 다시 없어졌다

보이던 물체들이 토막토막 끊어져서 보였다

얼굴 팔 다리 의자 책상 거울 연필 모두를

까만 배경 위에 하나씩 조명을 받으며

나타났다 곧 없어졌다 그 틈에 끼어 있는 내가

감전된 듯 자꾸 어둠 속으로 빠져 나갔다

나는 로봇처럼 토막토막 끊어지는 행동으로

나를 잡으려고 어둠 속을 휘저었다

껌벅이는 조명 때문에 마치 춤추듯

내가 나를 잡으려 하는데,

나와 거울과 의자와 책상이 완전히 지워졌다

 

- 시집『웃는 나무』(서정시학, 2007)

.................................................................

 

 내 방 형광등의 맛이 간 모양이다. 연신 빛을 윙크하며 어둠을 게워내고 있다. LED조명의 깜빡임(Flicker)은 조명에 공급되는 전압·전류의 투입량 변화 때문에 빛의 밝기가 계속 달라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재래식 형광등 양쪽에 검붉은 띠가 생기는 현상은 성능이 떨어진 필라멘트의 열에 의하여 관에 도포된 형광물질이 탄화되었기 때문이다. 형광등의 수명이 다하면 필라멘트는 열전자를 내는 양이 충분치 않아 빛이 나지 않고 필라멘트의 온도조차 유지하지 못해 껌벅이다가 그만 끊어지고 만다.

 

 이런 일상의 대수롭지 않은 전자전기 현상도 시의 질료로 불러들일 줄 아는 시인의 예리하고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명멸하는 빛과 어둠 사이에 ‘방 안에 있던 내가 없어졌다 나타났다’하며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로봇처럼 토막토막 끊어지는 행동으로 나를 잡으려고 어둠 속을 휘저어‘다니며 허둥대는 자신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주변이 이렇게 지속적으로 깜박거리다 보면 원래의 나와 이런 현상에 반응하는 나 사이의 괴리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급기야는 본래의 나와 단절된 불안정한 내가 ‘마치 춤추듯 내가 나를 잡으려 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보이던 물체들이 토막토막 끊어져서 보’이고, ‘나타났다 곧 없어졌다’ 모든 것들이 미친 듯 망나니 춤을 춘다. 기능을 상실한 빛이 토막 난 그림자를 생산해내면서 상황을 카오스 상태로 빠트리고 만다. 해외 의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조명의 플리커 현상이 광과민성 발작(간질)을 동반하는 신경계 질환, 두통, 피곤함, 몽롱함, 눈의 피로, 시력 저하, 산만함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제 구실을 못하는 빛이 비추는 모든 형상 역시 온전치 못하다. 이러한 삶의 본질과 왜곡된 현상의 불일치는 결국 어둠을 품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은 어둠으로 마감하고 말 운명인 것이다. 형광등은 처음 테두리가 검붉게 띠를 만들 때 갈아 끼워야 하는데 방치한 결과다. 처음 1분에서 30초,15초,1초 간격으로 깜박거리는 걸 그대로 두다보면 결국은 망가진 모습들만을 들추어내고 만다. 썩은 것은 일치감치 도려내야 하고 맛이 간 형광등은 ‘나와 거울과 의자와 책상이 완전히 지워’지기 전에 진작 갈아 끼웠어야 했다. 이는 비단 형광등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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