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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쇠망치질 힘겨워도 “이게 내 운명”
▲ 네팔 산골 소녀 루빠는 4살 때부터 채석장에서 돌을 깼다.
올해 나이 8살.
온 가족이 하루 종일 돌을 깨서
건축업자에게 팔면 100루피(약 1500원)를 번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던져진 무거운 현실.
카메라를 향한 눈망울에는 슬픔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다딩(네팔)=최현묵 기자.
▲ 오늘도 루빠는 돌을 깬다.
돌을 내려치는 쇠망치에 꿈도 산산조각 나고,
아이는 그만큼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있다.
정한 전주방송 PD
네팔의 돌 깨는 여덟살 소녀 루빠.
가족 다섯명, 천막서 자며 일해도 하루 1500원 힘들어
“올해 입학한 학교 너무 좋지만…”
체념한 듯 망치질만..
“돌 깨는 게 지겹지 않니?”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아이가 대답했다.
“글도 모르고 가난하니까 돌을 깨야 해요.
이게 내 운명이에요.”
여덟 살 소녀가 ‘운명’이라고 했는데,
그 단어가 그토록 진지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조선일보 2007.08.24 00:24]
누더기가 다 된 반소매 티셔츠를 걸친 소녀가
쇠망치로 돌을 깬다.
머리는 감은 지 한 달은 된 듯 까치집을 지었고,
신발도 다 떨어져 가는 슬리퍼다.
돌무더기 속에 앉아 쉬지 않고 망치질을 하는 루빠는 8살이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계급제 사회 네팔에선 부모의 직업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다.
루빠도 마찬가지다.
두 달 전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지난 3일 취재진이 만난 날에는
하루 종일 채석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는 무표정하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외국인을 보고도 놀라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저 망치질을 할 돌만 바라보고 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지만,
소녀의 시선은 줄곧 아래를 향해 있다.
아이에게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들어달라고 했다.
눈빛,너무나 강렬하다.
여덟 살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는 분노가 전해져 왔다.
시계는 오전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루빠는 아침밥을 먹지 못했다.
늘 그렇듯 이날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물로 배를 채우고
지금까지 돌을 깨는 중이다.
루빠의 오른손엔 망치가, 왼손엔 고리가 들려 있다.
타이어를 잘라 만든 고리는
돌 파편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장치.
고사리 같은 손에는 온통 돌에 다친 자국들이 선명하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은
아예 한쪽이 움푹 패어 깊숙한 흉터가 나 있다.
15㎏ 돌 광주리 지고 터벅터벅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멎었다.
강가에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루빠는 천막 안에서 쉴 새 없이 망치질을 하고 있다.
높이 70㎝ 정도 되는 천막은
나뭇가지로 뼈대를 세우고 비닐로 햇빛을 가렸다.
안에는 야구공만한 돌들이 가득 쌓여 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마을 바로 옆 아그레콜라
강 바닥에서 캐 온 돌들이다.
돌을 나르는
커다란 광주리에는 나무줄기로 엮은 끈이 달려 있다.
루빠는 이 끈을 이마에 건 뒤 광주리를 이고
100m 떨어진 강까지 하루 한두 번씩 왕복을 한다.
아이 몸집은 커봤댔자 5~6살 정도다.
그런데 15㎏이 넘는 돌 광주리를 지고도 토박토박
잘도 걸음을 옮긴다.
강에서 주워온 돌은
망치질을 거쳐 손가락 마디만한 건축 골재로 바뀐다.
작업장 바로 옆에 있는 루빠네 집도 천막이다.
흙바닥 위에
가로 2m, 세로 3.5m, 높이 1.3m 정도로 세웠다.
제대로 허리도 펴기 힘든 집안에서 루빠네 3남매와
부모 등 다섯 가족이 산다.
루빠는 돌 깨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알고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봐온 모습이 온통 돌 깨는 사람들 뿐이었다.
부모 곁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외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돌 깨는 게 지겹지 않니?”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아이가 대답했다.
“글도 모르고 가난하니까 돌을 깨야 해요.
이게 내 운명이에요.”
여덟 살 소녀가 ‘운명’이라고 했는데,
그 단어가 그토록 진지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네팔에선 루빠처럼 어릴 때부터
부모를 도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MF(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2005년 네팔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293 달러다.
루빠네 마을인 럽시콜라에는 20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강가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다.
힌두교 계급제도인 카스트의 최하층인 수드라,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사르키(가죽일 하는 사람들)에 속한다.
공식적으론 카스트제도가 철폐됐지만 수천 년을 내려온
카스트의 그늘은 히말라야의 산자락처럼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3살 아기부터 70대 노파까지 하루 종일 돌을 깬다.
이렇게 쌓은 골재들은
1주일에 2~3번씩 트럭이 와서 사 간다.
가격은 40리터들이 한 통에 8 루피(약 120원).
온 가족이 달려들어 하루 종일 돌을 깨도 100루피
(약 1500원)를 벌기 힘들다.
“팔없는 동생 고쳐주는 게 꿈”
루빠는 두 달 전 바깥 세상을 알게 됐다.
걸어서 1시간 거리인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루빠가 말했다.
“어느 날 깨끗한 옷을 입은 언니들이 마을에 왔어요.
아빠한테 ‘루빠를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했어요.
그 언니들이 선생님들이었어요.”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불법이라 처벌받을 수 있다”는
교사들 으름장에
아빠 미자르씨는 루빠를 학교에 보냈다.
네팔 또한 초등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이다.
루빠가
학교에 다니는 데 드는 돈은 한 달에 100루피 정도.
매일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아빠는
딸이 너무 열심히 학교에 나가는 것이 마땅치 않다.
아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루빠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일주일에 하루도 안 빠지고
학교에 나간 적은 없었어요.
일 안하고 학교만 가려 한다고 아빠한테 맞기도 했어요.”
소녀 얼굴에 힘줄이 돋았다.
줄곧 힘차게 내려치던 망치질도 잠시 멈췄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에서 분노가 뿜어 나온다.
루빠와 달리 오빠는 4년 전부터 학교에 다니고 있다.
미자르씨는 “딸들은 시집가면 남의 집 사람이지만
아들은 나중에 부모를 부양하니까”라고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루빠가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아빠는 대답을 애써 피한 채 망치질만 하고 있었다.
부모의 허락을 얻어
루빠와 함께 읍내로 나들이를 나갔다.
식당이라는 곳을 처음 와 본 아이는 라면을 시켜 놓곤
당황한 듯 한참을 바라만 본다.
5분쯤 지난 뒤
결국 라면 그릇은 식탁 대신 바닥에 놓여졌다.
늘 땅바닥에서 밥을 먹다 보니
식탁 위 음식을 먹는 일이 불편한 것이다.
침 루빠의 담임선생님 선기딸 라마(여·21)씨가 식당에 들렀다.
“루빠가 공부는 잘 못하지만 워낙 착해서
친구들은 많아요.
전교생 688명 가운데 60% 정도가 돌 깨는 집 출신인데,
30명 정도는 루빠처럼 점심을 굶어요.”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길에 루빠에게 선물을 사줬다.
문방구와 치약·칫솔, 운동화, 옷까지 사줬다.
한국 돈으로 5만원어치다.
오랜만에 망치 대신 공책과 연필이 쥐어졌다.
그제서야 소녀 얼굴에서
또래 아이다운 웃음이 떠올랐다.
“꿈은?”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될 거예요.
그래서 내 여동생을 고쳐줄 거예요.”
여동생은 오른팔이 없이 태어났다.
루빠는 돈만 있으면
동생의 팔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수줍은 웃음과 미래에 대한 꿈은 너무 짧게 사라졌다.
생전 처음 운동화를 신고 다시 마을 입구에 들어선 순간,
루빠의 표정이 다시 굳어진다.
새 운동화도 어느새 양손에 들려 있다.
선물꾸러미를 엄마에게 넘긴 루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망치를 잡았다.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익숙했던, 그 무채색 현실 속에
아이가 망치로 꿈을 깨뜨리고 있다.
아!!
“글도 모르고 가난하니까 돌을 깨야 해요.
이게 내 운명이에요.”
8살 소녀가 한 말....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한 쪽에선 남아서 버리는데..
다른 한 쪽에선... 이렇듯 슬프고 슬픈 사연이...
아!!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이 가련한 영혼들에게 우리주님 사랑도 전해주고
저들의 고통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런지요.
이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
복음 전도와 작은 도움의 손길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드려봅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