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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령
최 명 익
상진(尙眞)이는 짐스러운 책 꾸러미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쥐어가며 걸었다. K군 본서(本署)의 호출로 소위 ‘출두’하러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다행이다 하면서도 그래서 오히려 실없이 싱겁기도 한 일이었다.
결국은 고등계 주임이 무슨 일로 출장 왔던 차에 행여나 무엇이 걸려드나 하여 가택 수색을 하고 그때 압수했던 이 책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불러다가 취조해보는 것이라고밖에는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말하자면 놈들의 말대로 이 절박한 시국에는 무용지물로 저희들 눈에 거슬리면 거슬렸지 곱게 볼 수 없는 존재라, 할 수만 있으면 긁어 부스럼으로라도 건(件)을 만들어보자는 심사였고 그나마 안 되더라도 한번 단단히 오금을 박아두자는 것이어니 하면 그만이기도 하였다. 취조래야 가택 수색 때부터 책은 이것뿐이냐
책을 빌려가는 젊은이는 없느냐
누구와 편지 거래를 하느냐
어떤 사람들과 상종을 하느냐
이번 징병령에 대해서 누구에게 이러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느냐
이런 것으로 별로 이렇다 할 초점이 없이 그저 등떠보고¹ 넘겨 짚어보는 암중모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상진의 가슴속에 묻혀 있을 소위 ‘비국민적’ 사상이나 언행이나 또 혹은 그런 음모를 적발하려 드는 것이라 놈들은 한순간도 그의 표정과 태도를 놓치지 않고 감시하였다.
암만 그래야 너희들이 무슨 단서를 붙들고 덤비는 것은 아니구나.
무슨 거리가 있을 리 없을 것은 상진 자신이 더 잘 알지만 갑작벼락으로 가택 수색을 하고 또 이같이 취조까지 하는 것은 누구의 무고나 엉터리 불래미²에 걸려든 것이나 아닐까 하여 없는 죄도 있는 듯 불안할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지금은 왜 작품을 통 쓰지 않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장 힘들었다. 그런 일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렇다든가 아니라든가 단마디로 갈라 대답할 수 있는 구체적 사실과는 다르고 그래서 더욱 놈들도 대답하는 상진이의 말소리의 여운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세우고 이편의 표정을 감시하였다. 얼굴이 따갑고 눈이 시울게³ 쏘아보는 그들의 시선 앞에서 상진은 벌써 몇 번째나 “건강 때문에……” 하며 그의 각기(脚氣)와 약한 심장을 내세울밖에 없었다.
그런 줄은 자기네도 안다면서 그러기에 징용이나 보국대는 못 나가더라도 글이야 쓸 수 있지 않느냐? 하였고 “요컨대 심장이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문제겠지?” 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에 상진의 대답은 더욱 궁할밖에 없었다. 오직 자기는 본시 대중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존재라는 것, 더욱이 건강 때문에 오륙 년째나 붓을 놓았으므로 지금은 문단에서까지도 존재가 없다는 것이 고작인 변명이었다.
고등계 주임은 한 번 콧방귀를 뀌고 나서 딴은 당신이 언제 한번이나 이 시국에 협력하여 대중에게 영향을 줄 만한 글을 쓰려고 했더냐고 하며
“끝으로 여러 말 할 것 없이 이 점 하나만은 알아두어야 하오. 이 시국을 방관만 하다가 한번 비국민으로 지목이 되면 그 담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한다. 단단히 오금을 박으려는 마지막 협박이었다. 상진은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오직 구구한 말이 있을 뿐, 그것은 이편에서 오히려 긁어 부스럼으로 이때까지 지니고 온 결백성을 더럽히고 마는 것일 뿐이다. 소심한 상진이는 등골에 진땀을 감촉하며 재하자⁴ 유구무언 격으로 그 자리를 물러왔던 것이다.
도로 찾아올 것도 없이 그냥 버려도 아깝지 않은 책들이지만 노상 크게 알고 압수했다 내주는 것이라 그자들 앞에서는 이편도 아주 소중한 체 묶어 가지고 나올밖에 없었다. 『우수의 철학』 『우울증의 해부』 『비극의 철학』 『악의 화』 등등 이런 것들이 응당 금서(禁書)일 리는 없지만 우선 그 건전치 못한 세기말적 표제에 놈들은 놀랐고 다음은 절박한 이 시국과는 하도 동떨어진 것이므로 오히려 어떤 미채(迷彩)나 같이 의심하고 압수하는 눈치였다. 사실인즉 상진이가 S면 장거리로 소개해 나왔을 때는 장서(藏書) 전부를 짐짝 그대로 헛간 샛단⁵ 속에 묻어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작가라고 다소나마 이름이 팔렸고 중일전쟁 이래 오륙 년 간이나 붓을 던지고 있는 지금도 아직 그렇게 지목을 받는 중이라 방 안에 책 한 권도 없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하고 혹시 이번 경우와 같은 때 어떤 책을 어디다 감추었는가 의심받을 염력도 없지 않아 허울로나마 몇 권 책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조선말 책은 물론 붉은 글자 붉은 표지까지 꺼려가며 골라 내놓는 수십 권 중에 젊은 시절의 창백하고 말쑥한 우울의 자취로 남은 이 책들은 지금은 내출혈적(內出血的)으로 속 깊이 멍들고 찌든 그의 우수(憂愁)를 가리기 위한 미채로 가장 눈에 뜨이게 진열했던 것이다.
한 10리나 왔을까 어제 하루 동안을 말바로⁶ 기름이 내리게 치까슬고⁷ 내리훑고 앙큼하게 할퀴고 하는 취조에 시달리고 밤에는 또 여관방에서 까슬려 선 신경에 빈대 벼룩으로 한밤을 고스란히 새다시피 한 뒤라 사실 각기로 다리가 변변치 못한 상진은 벌써부터 피곤하였다.
이 며칠 동안 징병 검사로 적령 (適齡)의 젊은이들이 모여든 읍내는 증원까지 한 경관이며 헌병으로 사뭇 경계가 어마어마하였다. 그런 데서 한나절 후에야 떠난다는 자동차 시간을 기다리느라 어물거리다가 혹시 또 취체나 당하지 않을까 하여 40리 길이 벅차지만 이른 조반을 먹자 곧 떠났던 것이다.
*
아카시아꽃이 피기 시작하는 때 아직 응달이 음산한 절기지만 고개를 넘고 나니 숨이 차고 등골에 땀이 배었다. 병신스럽게 이마에서까지 흐르는 땀을 씻으며 상진이는 나무 그늘을 찾아 풀밭에 다리를 뻗고 담배를 붙였다.
언제나 시일은 감상고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이 세월은 언제나 끝나는가. 소련군이 백림(伯林)의 외곽 도시를 점령했다는 유럽의 전국은 다 끝이 나나 다름이 없지만 태평양전쟁은 유황도가 이미 떨어지고 충승도(沖繩島)⁸에까지 미군이 상륙은 하였으나 일본 본토까지는 아직도 상거가 있었다. 하루가 1년 맞잡이로 기다리는 이편이 너무 착급해 그렇겠지만 연합군이 일본에 상륙한다 하더라도 늘어지게 준비를 해가지고야 시작한다는 둥 그래서 전국은 앞으로가 장기전이 될밖에 없다는 놈들의 선전을 볼 때마다 역시 백성을 속이는 거짓이라고는 하면서도 얼마나 긴 세월일지 모를 앞날이 아득하였고 더욱 이번 일을 당하고 나매 이 세월이 길면 길수록 놈들의 위협은 위협만이 아니려니 하면 깨어 볼 수 없는 다음 순간까지도 아득한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옛날에 축지법(縮地法)은 있었다는데 세월을 줄이는 법은 없었던가? 어떻게 하면 이 난세(亂世)를 욕되지 않게 넘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고개 너머로 칠팔 명 젊은이들이 내려왔다. 한결같이 무명 국방색 전투모에 각반 차림이 이번 징병 검사를 하고 오는 적령자들이 분명하였다.
“자 우리두 좀 쉐 가자.”
어느 한 사람의 말에 그들은 호령이나 내린 듯이 저마다 모자를 벗어던지고 풀판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모두 한창인 그들이지만 여드름이 울긋불긋한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비끼고 그 우왁진⁹ 어깨도 축 처져 한결같이 시달림과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그중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도 한둘 있었다.
“정 맥살나 죽갔네.”
“아무러믄 멫 조금 살갔게, 아야 미리 죽어두렴.”
“얘얘 맥키한 소리 좀 작작 해라.”
이런 말을 지껄이며 몇몇이는 전투모로 얼굴을 가리고 풀판에 번듯이 누워버렸다. 혹은 호주머니에서 담배 부스러기를 털어내서 신문지쪽에 말아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꾹꾹 찔러가며 성냥이나 부싯돌을 찾는 젊은이도 있었다.
“불 여기 있소.”
상진이는 피워 물었던 담배를 내밀었다.
“아새끼 염소처럼 담배는.”
“이치 엊그저께 먹기 시작했는데 발쎄 인이 백엣나 바.”
“일마 석주야 어른 앞에서 담배가 다 머이가, 잰내비 방구 뀌듯 빡빡 재수 없게.”
받고 차기로 놀려대는 바람에 담뱃불을 붙인 석주라는 젊은이는 얼굴을 붉히고
“멀들 그래 병덩 나가문 담배밖엔 먹을 것 없어…….”
하며 그는 혀끝에 달라붙는 담배 부스러기를 연방 훼훼 뱉어가며 연기로 고리를 뿜고 있다. 노상 담배를 안 피우는 듯이 곡를 놀리던 축들도
“일마 이왕이면 나두 한 모금 먹자.”
하기도 하고 호주머니에서 먼지까지 털어서 담배를 말아 붙이기도 한다. 그나마 없는 이는 한 모금 돌아올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 있으니 한 대씩 피시우.”
상진이는 제 담뱃갑을 도중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선뜻 집는 이는 없었다.
“한 대 피시지.”
가장 손바로 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뭘루 합격 됐소.”
“갑종이야요.”
“갑종! 참 체격이 좋군요.”
아까운 젊은이로구나! 이런 생각에 상진은 다시금 그를 보았다. 장대한 편은 아니나 아래위를 찍은 듯 통지고¹⁰ 단단해 보이는 그 젊은이의 빛나는 눈과 동탁한¹¹ 얼굴은 퍽 낯이 익었다.
“머 인갑(仁甲)이만인가요 다 갑종인데요.”
“팔다리 병신만 아니구 올물¹²만 갖으면 다 갑종이야요.”
“기저 제 발루 걸어 댕기는 총알맥이문 다 돼요.”
“정말 막탕이두만, 아마 이전 사람 종자두 밭은¹³ 거야 그러게 데 고자리¹⁴ 먹은 개똥차무깨¹⁵ 겉은 겉손이가 다 갑종이디 말할 거 있나.”
앉은키만으로도 제일 걸싸¹⁶ 보이는 젊은이가 저편에 있는 젊은이를 턱으로 가리키며 빈정거렸다. 그 젊은이는 젊다기보다 아직 소년다운 얼굴을 붉히고 약간 벼슬 자국¹⁷ 있는 콧살을 찌푸리며
“동석이 일마, 너 암만 그래두 똥 디린¹⁸ 막대기 같은 너나 내나 돈반짜리긴 마츤가지야” 한다.
“돈반짜리라니 ?”
누가 묻는 말에 고자리 먹은 개똥참외라는 길손이는 제 말을 설명한다.
“장개석이 총알은 한 방에 돈반짜리 래.”
그 말에
“아새끼 어디서.”
하고 모두들 웃고 떠들었다. 역시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괜히 웃었더니 배만 고프다.”
누가 이런 말을 하자
“정말 배꼽시계가 틀어달라구 쪼루락 쪼루락 보채는데.”
하는 동석이라는 젊은이는 풀을 한 줌 뿍 뜯어 비벼 던지고 길게 누워버린다. 그 말에는 모두 실감이 있는 모양으로 웃음판은 오히려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상게두¹⁹ 보릿고갤 넘 을래문 까맣구나.”
지금껏 말참견도 않고 두 무릎을 끌어안고 초금(草琴)을 불던 인갑이라는 젊은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이는 밭의 밀보리는 아직 이삭도 패지 않은 청초였다. 어리기도 하려니와 보국대 징용 징병으로 손이 모자라고 거름조차 부족한 농사라 청초부터 될 성 싶지가 않았다.
“밀보리 고개두 다 옛말이네. 밀보리 갈²⁰을 하문 뭘 하나. 쥐뿔이나 남갔게?”
맥없는 동석이의 말이다. 그러자 석주는 시치밀 따고
“정말 난 방굴 뀔 젠 꿰두 보리밥이나 한번 실컷 먹어봤으문 한이 없갔다” 한다.
“흥 방구 뀌두룩 먹을 거 있갔다. 공출이나 다 해서 경이나 안츠문 요행이 다.”
“쌍놈의 거 맞을 젠 맞아두 즐거잽이²¹ 해서 몽땅 먹어놓구 보디.”
“일마 너더러 즐거잽이²¹ 해먹으라구 가만 둬둘 줄 아네. 낼이라두 오래문 쥑에주소 하구 나가야 돼.”
이렇게 말을 가로채는 길손이는 그 소년다운 얼굴을 또 붉혔다.
“하긴 것두 그래.”
“새끼들 어디서 골라가멘 맥 나는²² 수작들만 하네게레.”
지금까지 얼굴에 모자를 덮고 누워서 자는 듯 말이 없던 축의 한 젊은이가 귀찮게 중얼거리고는 돌아누웠다.
높은 하늘 넓은 들 한가운데지만 이 한보자락²³ 나무 그늘 아래의 대기(大氣)만은 걸쭉하게 엉긴 듯 무거운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모두들 제 주먹을 베고 느른히 누워 있는 한가운데 저만이 우뚝 남아 있게 된 상진은 마치 말과 감정이 달라서 이런 분위기조차 느낄 수 없는 딴 나라 사람이나 같이 지금 무서운 채찍 밑에 몰리어 자기네 생명의 등잔불을 짓밟아 끄러 나갈밖에 없는 이들 젊은 동포의 신음 소리를 그저 멍청하게 듣고만 있는 제 꼴을 의식하고 몸서리를 칠밖에 없었다.
그때 고개 너머로 찌릉찌릉 종소리가 나며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달려온다.
누가
“얘 병사계장 (兵事係長) 온다.”
하자 누웠던 젊은이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경례한다. 또 한 사람은 면장이었다. 그들은 속력을 죽여가지고 이편을 바라보며 내려온다. 상진이도 일어서 인사할밖에 없었다.
면장은 우선
“야―”
하고 어떻게 여길 왔더냐고 묻는다.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따려는 그 입 가장자리는 저도 어쩌지 못하고 새어 흐르는 웃음에 분명히 떨렸다. 그러고는 무슨 재미난 이야기라도 있는가고 역시 일본말로 깐죽거린다. 보국대 면제를 위하여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 공의의 진단서를 가지고 가서 만나보는 정도나, 언제 대하든 유쾌치 못한 인물이다. 아무리 복잡한 세상 아무리 비좁은 골목이라도 비집고 헤치고 하다못해 남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서라도 거침없이 처세할 듯한 그 기름 강아지같이 매끄러운 생김생김과 태도. 그리고 언제나 또 무슨 잡도리²⁴를 할지 모르게 나불거리는 그 엷고 반지르르한 입 가장자리에서는 언제나 그런 웃음이 흐르는 것이었다.
“그저 다리쉼을 하는 중입니다.”
하는 상진의 대답은 조선말이므로 오히려 어색할밖에 없었다. 면장은 들은 체도 않고 어느새 병사계장과 뭐라고 쑥덕거렸고 그러고는 또 “야一” 하고 실례를 한다며 자전거를 달렸다.
“뭣 하러 이러구들 있는 거야 썩썩 집으루 가지들 않구…….”
뒤에 남은 병사계장은 그렇지 않아도 모자를 털어 쓰고 그의 낯색을 살피며 나서는 젊은이들에게 호령한다. 젊은이들은 서로 재촉하듯 뒤를 돌아보며 병사계장의 자전거를 따라간다. 상진이는 자기도 꺼들려 핀잔을 당한 듯 불쾌하였다. 당한 듯만이 아니라 자기만 없었던들 병사계장이 다리쉼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렇게까지 볼 부은 소리를 할 리는 없으려니 하면 더욱 불쾌하였다. 이놈의 세상을! 귀찮게 혀를 차고 상진이는 책 꾸러미를 들고 일어섰다.
몇 걸음 안 가서 앞서 가던 축들이 이편을 돌아보며
“인갑이 넌 안 갈래?”
한다.
“응 이제 따라갈게……”
하는 그 젊은이는 신발을 고쳐 신느라 돌아앉아 풀밭에서 어물거리고 있었다. 아까 밀보리 고개 타령을 꺼냈던 젊은이였다.
“괜히 그러다간 니 라마레루조²⁵―”
그들이 또 돌아보며 외치는 소리다. 그러자 병사계장의 자전거는 속력을 내어 몽당 꼬리를 끌고 맞은 고개를 넘었다. 상진은 뜻하지 않은 제 한숨 소리를 들었다. 이런 경우마다 제 반발력이 소모되는 듯한 한숨이었다. 긴치 않은 책 꾸러미를 이 손 저 손 바꿔 쥐며 더벅더벅 걷는 그는 발부리의 제 그림자가 별로 엷고 호젓하게 보였다. 이런 고독감! 그러나 ‘고고(孤高)’라든가 ‘독야청청(獨也靑靑)’의 긍지가 있을 리 없는 상진은 그저 제 꼴이 초라하게 호젓할 뿐이었다. 뒤에서 초금 소리가 들려온다. 인갑이가 부는 소리였다. 높은 하늘 넓은 들 한가운데서 새지고 또렷한 대로 그 역 호젓한 소리였다.
앞선 축들이 맞은 고개 너머로 사라지차 초금 소리는 끊어지고 더벅더벅 잰 발소리가 들렸다. 인갑이가 따라왔다. 이윽고 나란히 걷던 그 젊은이는 상진이를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선산님…….”
“?”
“데 ― 영어루……”
“음 영어루?”
인갑이는 한층 더 얼굴을 붉히며 주저한다.
“데― 거시기 영어루 ‘난 조선 사람이다’ 하는 말은 멜 하나요.”
이렇게 묻고 난 그는 제 말에 놀라기라도 한 듯이 경계하는 눈으로 앞뒤를 살핀다. 그리고 다시 상진을 쳐다보는 그 빛나는 눈은 결코 실없는 호기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주 보는 이편이 엄숙해지도록 빛나는 눈이었다. 한순간 이 젊은이는 어째서 나를 믿고 제 맘을 열어 보이려는가, 언제부턴가 혹시 길에서 만나면 저편에서 먼저 눈인사를 하던 기억으로 낯이 익다는 정도가 아닌가? 하였으나 이 젊은이를 경계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는 것을 그의 눈으로 알 수 있었다. 혹시 왜 그런 것을 알려느냐고 묻는 것도 지금 인갑이에게는 너무 실없는 농담이 되고 말 것이다.
“저 말하자면 ‘나는 왜놈이 아니구 조선 사람이오’ 하는 것 말이지?”
“예예 그래요.”
인갑이는 제 의사를 알아주는 것이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상진이가 가르치는 대로 따라서 아이 앰 어 코리앤 어쩌고를 그는 열심히 되풀이해 왼다.
“언제 좀 배우지 않았소?”
합쳐 몇 자 안 되는 단순한 말이기는 하지만 몇 번 듣자 곧 뗄데 떼는 거라든지 미끄럽게 돌아가는 구음의 억양이 전연 초대²⁶ 같지는 않아서 물었다.
“이 전에 중학교엘 갔더래서요.”
인갑이는 또 얼굴을 붉히고 귀밑을 긁적거리며
“그래두 니어²⁷ 고만둬서 지금은 ABC두 잘 몰라요” 한다.
그리고 그는 ‘워 쓰 항궈린 워 뿌스 을버린(我是韓國人 我不是 日本人)’ 하는 같은 뜻의 중국말도 이미 배워두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인갑이는 무슨 주문(呪文)이나 같이 지금 배운 것을 외던 모양으로 가다가 잠꼬대처럼 “노―쨉” 소리를 지르고 씽끗 웃기도 한다. 그런 때마다 상진은 그런 감상적 행동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스스로 억제하기에망정이지 인갑의 손을 쥐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가족들은 몇이나 되우?”
“나꺼정 넷이야요, 오마니 아버지 그리구 누이.”
“형은 없구?”
“7년 전에 죽어서요. ……나두 우리 형님만 살았으문…….”
하는 인갑의 말은 가난한 살림에 제가 중학교에 갈 생의를 내고 또 갔던 것은 도시 그 형의 고집이었다는 것이다. 형 자기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농사하기에 공부를 못했지만 자기 아우만은 제 몸을 열 조각 내서라도 기어이 공부시킨다고 고집해서 평양 × × 중학교에 입학시켰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형은 인갑이가 2학년 진급 시험 준비를 하던 겨울에 급성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비는 더 날 데가 없고 설혹 자기는 고학을 한다 하더라도 늙은 부모를 도와 농사할 손이 없으므로 학교를 그만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부모님 네가 그렇게 나이 많으신가?”
“둘이 다 내년이 한갑이야요. 선산님 왜 우리 아바지 모르십네까? 작년 갈에 선산님네 앞 텅깐²⁸ 넝개²⁹ 해준……”
“아― 그 노인이든가 저…….”
상진이는
“저 죔손이영감?”
하려다 말았다.
*
작년 늦은 가을이었다.
두이(二)자 집의 안채 삼간은 고가〔古家〕나마 기와집이지만 앞 채 삼간은 초가라 이엉을 해야 겨울을 나겠는데 새끼와 짚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품을 사기도 어려웠다. 상진이로서는 이곳이 생소한 탓도 있었다.
이곳으로 ‘소개’해 나온 인반³⁰이 된 중학 동창인 금융조합 이사와 그의 소개로 한두 달에 한 번 진단서를 고쳐 써주는 공의 외에는 아침저녁 수인사나 하는 옆집 사람뿐으로 가까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본시 평양 어느 중학교 교원이던 상진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영어 시간이 줄어서 여벌 선생으로 하품하는 시간이 많던 중에 조선 교장이 쫓겨나 일본 교장이 들어오자 조선말로 작품을 발표한 것만도 조선 청년에게 악영향을 끼친 보람이 된다고 사직을 권고하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붓을 던진 지 오래이므로, 고료가 있을 리 없고 생활비가 될 리 없는 월급이지만 그나마 수입이 없고 보니 ‘소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도회 살림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재산이라고는 책과 집밖에 없었다. 요행 그때는 ‘소개’ 바람이 아직 심하지 않아서 집이 과히 천하지 않던 때라 팔면 시골집 한 채를 사고도 이삼 년 조석반 죽거리는 되리라는 예산이 서기도 하였다. 일본이 제아무리 뻗대더라도 과즉 3년, 그동안만 연명하면 그 다음은 해방의 날, 자유로운 내 나라에서야 무슨 일을 해서든 의식 걱정을 하랴. 그래서 마침 박이사의 주선으로 이곳에 집을 사고, 옮아와서는 그저 세월 가기만 고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어서 가기를 기다리는 세월보다 올라가는 물가 엄청나게 더 빨랐다. 사십 평생 돈벌이라고는 월급 외에 참새 눈물만큼씩 생기는 고료를 받아보았을 뿐 화식지계(貨殖之計)를 모르는 상진은 더욱 세월 가기만 기다릴밖에 없었고 초조하면 할수록 지루한 세월은 그래도 흐르긴 흘러서 가을이 되고 보니 이엉 할 걱정이 생긴 것이다.
짚과 새끼는 공출에 빨려서 제 손으로 농사한 농가에서들도 자기네 집 이엉 할 것조차 걱정할 지경이었다. 사람도 귀했다. 징용 보국대로 손에 풀기 있는 젊은 일꾼들은 거진이다시피 없어졌고 나머지 일꾼들은 지금이 한창인 타장(打場)³¹과 공출에 말바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일에만 쫓기는 것이 아니라 여기 말투로 농삿줌이나 한 집이면 더욱 공포 공황으로 떨기에 정신을 못 차리는 형편이었다. ‘강본’이라는 주재소 주임은 더 말할 것 없고 K군 내에서 공출 성적으로 일등 가는 면장은 한 수 더 뜨는 편으로 두 자가 배가 맞아서 과중한 공출량을 채울 도리가 없는 농민을 면장은 낱낱이 고발하고 주임 놈은 매질을 전문으로 하였다. 더욱이 강본이는 알코올 중독자로 언제나 제정신이 없다시피 닥치는대로 집어 함부로 치는 매라 한번 걸려들기만 하면 대개는 제 발로 걸어 나오는 사람이 쉽지 않았다. 머리가 터지거나 팔다리가 상하고 갈빗대가 부서지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공출량이 채 차지 못하는 농민들은 소나 집까지 팔아서 나락을 사서라도 할당량을 보충해야 했고 그도 못하는 농민들은 몸을 피할밖에 없었다. 이렇게 소연한³² 판국이라 저마다 바쁘고 공포에 싸여 헤매는 그들의 품을 사기도 힘들었다.
그까짓 오늘이라도 전쟁만 끝나면 당장 내버리고 가도 아까울 것 없는 집을 애써 이엉은 해 뭘 해 하기도 하였으나, 당장이라도 비가 오면 새는 것이요 태평양에서는 아직도 ‘라바울’을 지킨다 뻗대고 서유럽 의 제2전선은 기다리는 사람을 골리는 저기압뿐으로 까마득 소식조차 없었다.
쓰고 있는 제 집의 삼간 이엉 하나도 제 힘으로 치워 못 가는 무능이 어이없어 걱정만 하던 차에 수인사나 하는 옆집 사람 중에 가장 가까이 지나는 춘식이의 주선으로 그중 한가한 사람을 골라 품을 산 것이 죔손이영감이었다. 그는 하루 품을 새겨가며 짚과 새끼를 구해왔고 그 이튿날은 이엉을 엮어주었다.
“오늘은 쥔 선산님두 한몫 도이 하시야갔소옵더.”
아침에 죔손이영감은 벌써부터 와서 지붕의 길이를 재고 이엉날 새끼를 날쿼서³³ 사리고³⁴ 하여 차비를 다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넝이³⁵는 모숨³⁶이 한뜻 같으야 비를 츠니까나.”³⁷
하는 그는 상진이가 서툰 솜씨로 쥐어 섬기는 짚을 모숨마다 일일이 이번엔 많다 적다 타발³⁸을 하였다. 그래서 더욱 서툴게 어름거리게 되는 상진의 손에서 짚 모숨을 채가듯 받아서 엮는 그의 손은 무쇠 갈고리같이 검고 억센 것이나 희고 날씬한 상진의 손 따위는 어림도 없게 빨랐다.
“영감님은 뭐 죔손이라드니…….”
“흐흐흐 정말 죔손이문 남의 일 하러 댕길나구. 이렇게 양껏 페딜 못하니까나 괜히들 그럽소옵디.”
힘껏 펴 보이는 모양이나 그 손은 큰 달걀이나 쥔 것만큼밖에는 더 펴지를 못했다.
“거 왜 그래요.”
“소싯적부터 손아구 센 일에 굳었으니까나…… 그러게 내 손이 죔손이문 풋내기 일꾼의 손은 버텅손이라구 난 그럽소옵디 흐흐.”
이같이 그가 자랑하는 그 손의 손톱이 또 볼 만한 것이었다. 가려운 데 긁게나 마련된 흰 손의 손톱과는 그 존재의 의의부터 다르다고 할 만큼 그의 손톱은 손가락 끝을 단단히 무장한 무기라고도 할 것이다. 까막조가비같이 굳고 날쌘 그 엄지손톱은 짚기스름³⁹은 물론 창칼 못지않게 이엉 날도 끊었다.
“좀 쉬지 않을까요?”
늙은이를 위한 인사가 아니라 제가 따라가기 힘들어서 사정하듯 말하면 죔손이영감은 힐끗 해를 쳐다보고
“넝이 하네 가지구 햇구녕을 막으문 남이 웃소옵디, 흐흐흐.”
할 뿐이다. 흐흐흐 웃을 때마다 앞니가 없는 그 입은 더욱 뻥 뚫어진 것 같고 그래서 그 웃음은 더욱 낙천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그런 웃움이 금시에 가시고 마는 그 얼굴은 이마와 뺨에 깊이 팬 주름살로 어둡고 무겁게 굳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웃음 끝에 고인 눈물로 지적지적한 눈을 내리깔고 그저 기계적으로 놀리는 무쇠 갈고리 같은 그 손은 더욱 빨라졌다. 상진이는 미리 주워 섬기기만도 딴눈을 팔거나 이야기해볼 여념이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 식후에 짚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쉬는 참이었다. 죔손이영 감을 소개한 옆집 춘식이가 쩔름거리며 온다.
“데 사람이 또 무슨 화나는 일이 있는가베.”
죔손이영감은 웃으며 바라본다. 본시 좀 저는 다리지만 바쁘거나 혹은 홧김에 되는 대로 걸을 때에는 더욱 절름거렸다. 아닌게 아니라 춘식이는
“씨파 공출인디 뭔디 돼지 새낄 세 놈이나 팔아 넣구두 상게 모자라니 놀음 츨츨하다…… 씨파 갑재기 안 살디두 못하구……”
혼잣소리로 두덜거렸다.
그는 나면서부터 왼편 발목에 힘이 없어 축 늘어지는 발을 걸을 때면 다리를 높이 들어 옮겨놓아야 했다. 그의 부모는 오력⁴¹이 남같지 못한 자식이라 공부시켜서 힘든 일이나 안 하고 벌어먹게 하려고 가난한 살림이지만 춘식이가 보통학교를 졸업 하자 상업학교나 공업학교에 입학시키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그러므로 오히려 입학이 안 되었다. 그래 화가 난 그의 부모는 글이기는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여 넘은 동네 서당에 보내서 한 2년간 한문을 읽혔다고 한다. 그래서도 결국 춘식이는 농사를 했다. 대서소의 조수도 몇 달 했으나 한 면에 몇이라고 제한이 있는 대서소가 언제 제 차례에 돌아올 것 같지 않아 그만두었다. 면소 서기 자리도 그 발 때문에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만 이력서를 가지고는 타향에까지 직업을 구하러 갈 용기는 물론 없었다. 결국 농사였다. 논밭갈이는 못해도 기운은 남만 못하시 않아서 별로 막히는 일인 없었다. 성미가 팔팔하고 말이 퉁명스러워 역시 병신 맘 고운 데 없어하는 오해를 사는 때도 있지만 남이 다 끌려 나가는 보국대 징용을 그 다리 때문에 걱정 않고 지나는 자기 신세를 새옹지마(塞翁之馬)에 비하는 유머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언젠가는 기성명이나 한다고 하여 반장 소임이 돌아왔을 때 그런 구실이 아니라도 자기는 보국대 징용은 걱정 없다고 하며 광솔 포도덩쿨 참나무 껍질 같은 공출을 면할 수 있는 소임을 다른 젊은이에게 사양하리 만큼 협기(俠氣)도 있었다.
“이 녕감 내 또 이럴 줄 알았디.”
춘식이는 짚단 위에서 털썩 주저앉아 마당귀에 엮어 세운 이엉 떼를 돌려보고
“정말 이 아즈바니터럼 일에 탐센⁴² 건 없드라니…… 전 그렇드래두 남의 생각두 좀 하야디……”
하며 늙은이 코앞에 손가락을 흔들어 보인다.
“흐흐흐 일에 들어서두 사정이 있는가베.”
“그러게 아즈바닌 궁하단 말이오…… 글쎄 이 녕감이…….”
“남 바쁘다니까나 또 무슨 수작을 할나구서…….”
“선산님 데 궁상맞은 녕감의 말 좀 들어보실나우.”
춘식이는 그때도 그 극성스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좌우간 이 아즈바니가 저 암만 일을 잘하문 뭘 하갔소. 그렇게 알뜰살뜰히 다루던 텃물받이는 사태에 쓸어버리구 말았디. 늙마에 당나무같이 믿던 외아들은 딩병(징병) 나가게 됐으니 살아오야 오나 부다 하게 됐디. 그러니낀 덩혼했던 메누리는 남 되나 다름없디, 딸이 있긴 있어두 그까짓 쇠년 과부 돼 온 거 누가 얻어간대두. 어떤 놈 가딕이⁴³ 네편네 처갓집에 부루씨⁴⁴ 모루 박을 땅두 없는데 데릴사위 갈 놈 없디…… 그러니 이 녕감의 팔자같이 더러운 것이 어디 있갔소.”
하고는 어이없이 껄껄 웃는 것이었다. 진정인즉 제가 소개한 죔손이영감이 일손이 좋은 것을 자랑하기 위한 말로 시작하여 그의 딱한 신세를 동정해 하는 말이지만 남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기에는 그들의 손이 너무 거친 것처럼 그의 말도 이런 투로 거칠어서 얼른 들으면 독담 같기도 하였다.
“옳다 옳아 놈의 수작이라니……”
죔손이영감은 그때도 그 뻥한 입을 벌리고 흐흐흐 웃었다. 소위 노소동락이랄까. 어떻든 그렇게 퉁명스럽고 거친 말이므로 오히려 울어야 할 일도 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좌우간 데 녕감이 어찌 지독한디 저 부치는 논으루 들어가는 거라구 우물 앞 개구장⁴⁵ 물이 얼마나 거나 보누라구 먹어보대스니낀…… 말할 거 있소.”
춘식이는 말만 해두 께름한 듯이 침을 뱉는다.
죔손이영감이 그렇게까지 알뜰히 여기던 ‘텃물받이’ 첫배미는 이 근방에서는 모르는 이 없이 이름난 논이었다고 한다. 그 이름처럼 이 동네 텃물이 흘러 들어가는 논 중에도 첫배미라 물이 흔하고 또 결어서 다른 논들보다도 거름을 덜 해도 잘되었고 또 땅이 하도 좋아서 소가 빠질 지경이라 연장을 안 쓰고 호미나 괭이만으로도 기경⁴⁶을 하는 오랑논⁴⁷이었다고 한다. 그런 텃물받이는 예로부터 부자들의 자랑감인 노리개같이 되어온 것이다. 전부터 그 논의 종곡과 비료는 소작인이 자담하는 규례이므로 지주는 봄 기경 때부터 가을 추수 때까지 종곡이니 비료대니 하여 소작인과 홍야라 부아라⁴⁸ 할 것도 없이 그저 소유권만 쥐고 있으면 소작인이 반타작한 나락을 제 등에 져 들였고 복놀이 영계와 추석의 진암탉까지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논에는 논갈이 황소가 필요치 않으므로 소를 안 사주고도 소작인에게 귀뚜라미 모으로⁴⁹ 누워 뜯어먹어도 시원찮게 되는 마른 밭떼기까지도 재세⁵⁰해가며, 겸처⁵¹ 소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다른 데는 몰라도 이 근처의 땅을 사려면 좀 비싸더라도 이왕이면 달걀 노른자위같이 치는 이 텃물받이를 사려 했다. 그만큼 누구나 탐내는 논이라 이 근경 사람들은 “그 사람 텃물받이 사게 됐다”거나 “텃물받이 팔아먹게 된걸” 하는 말로 어느 누가 돈을 모았다든가 세상살이가 기울어간다는 것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쌍놈의 거 아무렴 텃물받이 사구 살아보갔게.” 흔히들 이렇게 탄식하거나 주정하는 농사꾼들도 이 텃물받이를 탐냈다. 종곡과 비료를 자담하더라도 첫째 흉풍이 없었다. 제때 한 보름만 가물어도 봄내 여름내의 적공이 나무아미타불이 되어 한 해 농사를 백실⁵²하게 되는 천수답에 비할 바 아니었다. 그리고 또 문 앞 전장이라 밭이 가까워서 품이 덜 들기 까닭이었다.
죔손이영 감이 그런 텃물받이를 소작하기는 재작년부터였다. 본시 일에 꾀가 없이 저 생긴 대로 부지런하고 고지식한 덕에 근농꾼으로 지주의 눈에 들어서 한평생 두고 부러워하던 그 텃물받이 중에도 첫배미를 얻게 되었을 때 그의 기쁨은 평생 소원을 이룬 기뿜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살인적인 공출이 시작된 것도 그해부터였다. 이름나게 좋은 논이라고 공출 할당이 다른 논에 비하면 거진 배나 되어 오히려 힘들면 힘들었지 나을 것은 별로 없었다. 그뿐 아니라 그해 겨울에 지주가 이곳을 떠나면서 토지 관리가 다른 데로 넘어간 것이 또한 타격이었다. 이런 작은 곳에서는 일등이나 이등으로 세금을 내게 되므로 숨은 부자로 살 수 있는 평양으로 솔가해갈 지주는 그의 가신(家臣)이던 김주사에게 토지 관리권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남의 땅을 소작이나 하기야 지주면 어떻고 마름이면 어떻냐고도 하겠지만 역시 중간 이익을 보자는 관리인이라 잔고기에 가시 많은 격이 아닐 수 없었다. 김주사는 작인들에게 공품⁵³ 한 자루라도 더 시키려 했고 북데기⁵⁴ 털어 모은 마당쓸이 한 톨이라도 용수⁵⁵ 없었다. 그건 또 그렇다 치더라도 죔손이영 감에게는 텃물받이 첫배미를 엿보는 듯한 눈치가 무엇보다도 불안하였다. 김주사는 차마 제 체면에 꿀려서라도 당장 그런 눈치는 안 보이나 그 조카인 뺨가죽 두터운 봉덕이가 바로 제가 지주나 같이 젠체할 뿐 아니라 오래잖아서 그 첫배미는 저희가 부친다고 연신 말을 내돌렸다. 말만 그럴 뿐 아니라 경방단 부단장인 봉덕이는 제 등쌀에 못 배기도록 하는 계책인지 면서기들과 짬짜미를 꾸며서는 현저히 알아보도록 불공평하게 많은 공출량을 내려 씌우는 것이었다.
그래도 죔손이영감은 앞날에 소망을 두었다. 언제 어떻게 되어서라는 것은 알 턱이 없지만 옛날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콩출이 설마한들 한 백년 계속하랴, 지금은 힘들더라도 지긋지긋 견디여 공출만 않게 되는 날이면 어련히 텃물받이 첫배미는 첫배미가 아니랴. 또 봉덕이 이자가 아무런대도 지주야 설마 자기 손에서 이 첫 배미를 놓으라고 하랴.
이렇게 인성과 세월을 믿는 죔손이영감은 금년도 따지개⁵⁶부터 삽자루를 들고 물꼬에 장 서 있었다. 눈섹이⁵⁷ 물이 내리자 그 흐리고 걸쭉한 물을 무슨 간국이나 같이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뒷산에서 내리는 물이 장거리 한 기슭을 스쳐서 우물 도랑과 합쳐 흐르는 구정물이었다. 쩝쩔하고 비릿한 물맛 저의 논꼬로 흘러드는 물맛이 구리면 구릴수록 죕손이영감은 만족했다. 그리고 기경 때가 되어 한길에서 연장을 실은 곁이소⁵⁸를 몰고 나오는 사람을 보면 쇠스랑만 둘러멘 죔손이영감은 일부러 기다려서는 묻지도 않는 말을
“아 우리 텃물받이는 그 무슨 놈의 흙이 그런디 솔 대서 연장으루 갈 생의⁵⁹는 염두 못한다니까나.”
하고 흐흐 웃는 것이었다.
모를 낼 때 그의 늙은 마누라가 모춤을 나르다가 논 한가운데 빠져서 헤나지 못해 애쓰는 것을 보고 죔손이영감은 좋아라고 우선 한바탕 흐흐호 웃었다는 것이다. 실컷 웃고 나서야 마누라의 손을 꺼들어주다가 자기 마저 미끄러져 얼굴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일어난 그는 입에 드러난 흙을 뱉을 염도 않고 첩첩 입맛을 다셔보며
“원 그 무슨 놈의 흙인디 온종일 짓씹어야 모래라군 영 한 알두 없다니 까나.”
하고 또 흐흐흐 웃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끼던 텃물받이가 지난 장마에 사태로 모래에 묻히고만 것이다.
금년따라 전에 없이 큰 탕수가 나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몇십 년 혹은 몇백 년 잔디 뿌리에 눕히고 발담⁶⁰에 길들였던 논두렁과 동둑이 빨갛게 헐벗게 된 까닭이었다. 그 가혹한 공출 때문에 정전 정답으로 토지대장(土地臺帳)에 오른 논밭 농사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이 된 농민들은 저마다 산을 일구고 동둑 논두렁 밭최뚝 할 것 없이 벗기고 콩 한 포기 옥수수 한 대라도 더 심어야 했다. 텃물받이 논들을 둘러싼 동의 맞은편 둑도 역시 빨갛게 벗기고야 말았다. 이편 논두렁이 아니고 맞은편 둑이지만 결코 등한히 여길 수는 없었다. 만일 그 높은 둑이 무너져 그 아래 수돌을 메우게⁶¹ 되면 장마물은 이편의 낮고 가는 논둑을 넘거나 무찌르고 논으로 덮어씌울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죔손이영감은 물론 그 수돌과 관계있는 논을 부치는 농군들은 누구나 그 동둑 일구는 것을 반대했다. 나중에는 싸우다시피 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땅이 없거나 있더라도 작은 빈농들은 어디나 한 포기라도 심어야 연명할 처지라 앞뒤를 재가며 남의 일까지 걱정해줄 여유는 없었다.
“왜들 할 걱정이 없어 이러나? 님자네 부치는 논뚝을 일군대문 몰라두 주인 없는 나라 땅을 일궈 먹는데 무슨 상관이야.”
아닌 게 아니라 그 넓은 둑은 농로(農路)가 있을 뿐 주인 없는 풀밭이었다.
“여보 당신넨 좋은 논밭 부치니낀 그런 배부른 걱정두 하는디 모루갔소. 해두 우리는 이런 공터라두 일구야 죽풀꺼리라두 보태디 않갔소. 괜히들 그러디 말구 어디 같이 살아봅세다가레.”
듣고 보면 동무 과부의 설움으로 두말 못하게 다 딱한 사정이었다.
이루 따라가며 말릴 수도 없거니와 저편의 말을 듣고 보면 이편은 이편 생각만으로 두 수 세 수 지나치게 부질없는 걱정을 하는 듯도 하였다. 그러나 흙을 얽어맸던 잔디 뿌리가 실실이 끊기어 드러나 물꼬 근처까지 헐벗어가는 그 동둑을 볼 때마다 죔손이영감은 혀를 차고 머리를 흔들밖에 없었다.
동둑까지 일궈야 하는 한동네 사람의 딱한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렇다고 그저 두고 볼 수만도 없어 죔손이영감은 관리인인 김주사를 찾아가 여러 번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 역 별도리가 없었고 한번은 김주사가 면장을 찾아가 말해보았으나 부뚜막에라도 심어서 식량 증산을 하는 것이 국책이라는 면장은 제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오히려 귀찮게만 여기는 눈치였다고 한다. 죔손이영감은 걱정하던 중에 밉살머리스럽더라도 행여나 경방단 부단장의 힘을 빌릴까 하여 봉덕이에게 말해보았으나 봉덕이는 거기서 밸(腸)이 어디게 하는 투로 쓸데없는 걱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쓸데없는 격정만도 아닌 성싶었다. 벌거벗은 동둑은 큰 소바리⁶²만 지나가도 부슬부슬 떨어졌고 간밤에 비가 한 소나기만 와서도 흙이 몇 가랫밥씩이나 무너져서 좁은 수돌을 메워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죔손이영감과 그 논들의 농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장마철이 되고부터 수돌을 메운 흙을 이편 둑으로 처붙여 올리는 일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마침내 개부심⁶³을 하는 장마가 며칠 계속된 중 어느 날 밤이었다. 이날도 아침부터 오던 비가 초저녁에는 좀 뜸하는 것 같더니 재밤중⁶⁴부터 억수로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며칠 째는 맘 놓고 자본 적이 없던 죔손이영감은 심상치 않은 빗소리에 벌떡 일어나자 누구를 깨워서 같이 갈 겨를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섬거적 몇 닢과 삽자루를 들자 뛰어나갔다. 초저녁 때만 해도 반개통밖에⁶⁵ 안 되던 물이 어느새 차고넘쳐 길까지 휩쓸어 내려오는 것이었다. 채찍같이 쏟아지는 빗소리와 물소리뿐 한 발자국 앞이 안 보이지만 허턱“ 달리는 걸음은 그래도 제 길을 찾아서 물꼬까지 왔을 때였다. 얼마나 멀리선가 그가 오기를 기다렸던 듯한 철썩 소리, 그리고 우수수 분명히 둑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금방 정강노리⁶⁷ 치던 물살이 후려치듯 그의 무릎 위를 휘감아 돈다. 죔손이영감의 가슴도 철썩 내려앉았다. 눈코 못 뜨게 몰아치는 빗발에 새로운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벌써 한 삽이라도 물꼬에 처붙일 흙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할 수 없이 물꼬에 섬거적을 덮고 타고앉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때 둘째배미를 부치는 사람네도 나왔다. 첫째배미 춘식이네도 나왔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죔손이영감이 타고앉은
물꼬둑은 섬거적 밑에서 큰 거북이나 같이 미미적거리기 시작한다. 물에 풀리는 둑이 쥠손이영감의 궁둥이 밑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삽시간에 그의 허리를 휘감으며 물이 논으로 쓸어들었다. 모인 사람들은 우선 어린애같이 소리쳐 우는 죔손이영감을 끌어내야 했다. 날이 샌 후에 본즉 물꼬에서 얼마 안 가서 맞은편 둑이 서너 칸통이나 끊어져 수돌에 주저앉은 것이었다. 전에 없이 큰비도 아니었지만 뒷산 역시 장작 공출로 나무를 다찍었고 부대⁶⁸를 일궜으므로 비가 오는 대로 쏟아져 내려 말바로 황소 같은 물이 동둑의 굽이진 골목을 들이받고 무찔러서 삽시간에 무너뜨린 것이었다. 앞으로 더 흘러갈 길이 막힌 물은 이편의 엷고 낮은 물꼬를 넘고 터뜨리고 쓸어들어 텃물받이 첫 배미는 물론 둘째 셋째배미까지도 뒷산의 붉은 모래로 덮어버리고 만 것이다. 죕손이영감네 것만은 2천 평이 되나 마나 하지만 그 아래치까지 합하면 거진 5천 평이나 되는 논의 금방 이삭이 패려는 벼가 통모래에 묻혔다. 이번 비에 이 텃물받이뿐 아니라 비슷한 원인으로 그 같은 피해가 곳곳에 많았다.
하룻밤 사이에 1년 농사를 백실할 뿐 아니라 농터까지도 없어지고 만 그들은 어디 가 호소할 데도 없었다. 누구를 원망한대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인간 수대로 논귀에서 한나절 품을 놓고 울었을 뿐이었다.
“아니 이제 울어서 무슨 일 추갔다구들, 눈물두 낟알물 우러나는 거라우. 괜히 아까운 거 찔찔 짜디들이나 말소.”
이런 때도 역시 익살을 잊지 않는 춘식이가 이렇게 된 바에는 하루바삐 논을 고킬 도리나 하자고 하여 그들은 김주사를 찾아 의논해보았다. 이련 경우에 전장을 고치는 비용은 으레 지주가 부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주사는 하도 일거리가 거창해서 품삯이 엄청나게 들 것이므로 지주의 의향을 들어보기 전에는 고친다든가 고치더라도 언제부터 시작한다고 자기는 단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때만 아니라 그 후에도 여러 번 만났으나 김주사는 관리인인 제 책임도 없지 않아 그런 엄청난 손해를 지주에게 말하기조차 힘들어 아직 우물쭈물하고만 있는 눈치였다. 그런 김주사만 믿고 있을 수 없는 소작인들은 직접 지주와 의논해보자고 벼르는 중이라고 한다.
“씨파 나야 머 아무리 텃물받이래두 큰애기 궁둥판만 한 거 있으나 없으나지만 우리 이 아즈바닌 그때 녹아서. 텃물받이가 그렇게 된 댐부터는 태가 가서 쇠뗑이 같던 녕감이 단박 늙어서……”
하는 춘식이는 다시 붙인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그러나 곧 실랑이를 않고는 못 매기는 그였다.
“그래두 이 아즈바닌 그놈의 사태 때문에 욀루 한 걱정 덜었디……”
한다. 죔손이 영감은
“듣기 싫다니까나 또 무슨 수작을 할나구서…….”
하며 손을 젓는다.
“씨파 아즈바니 그럼 안 그렇단 말이오. 글쎄 이 녕감은 만날 메눌아이 발이 작다구 원 고 발을 어떻게 하노 하노 걱정하구서는……”
건 또 무슨 말인가 하면 죕손이영감은 자기 아들과 정혼해둔 장래 며느릿감인 처녀가 나무랄 데 없이 하도 귀엽다 못해 결코 병신스럽다거나 보통 이상으로 작은 것도 아니지만
“흐흐흐 발이 고렇게 조개비만 해서야 우리 텃물받이에서 어떻게 일을 하노. 못해두 뽐가웃⁶⁹ 신을 신으야 빠디딜 않을데.”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춘식 이의 험구지만 죔손이영감은 지나던 길에 마침 우물에서 그 처녀가 물을 긷거나 빨래하는 것을 보면 궁둥이가 팡파짐하니 나날이 커가는 그 처녀를 세월없이 보고 서서 흐흐흐 웃는다는 것이다.
“글쎄 그것들밖에는 귀한 것이 없으니까나!”
변명하듯 말하는 죕손이영감은 역시 그 앞니 빠진 뻥한 입으로 흐흐흐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귀여운 며느리를 하루바삐 성례하고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해는 실농으로 남의 귀한 자식 데려다가 밥 굶길까 봐 못 데려왔고 지금은 징병에 걸려서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아들이
“공연히 우리 욕심만으루 데려왔다가 아버지 어머니가 두구두구 가슴 아픈 꼴이나 볼라구요.”
하여 지금은 아주 단념하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하긴 그것의 말두 옳애. 자갸가 돌아올 것 같디 않은 길을 가니까나·….”
*
그때 아무리 춘식이가 이야기 시초부터 이런 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속으로 상처에다 동당⁷⁰을 문지르듯이 거친 말투와 익살로 농쳤고 죔손이영감마저 남의 일이나 같이 제 감정을 흐흐흐 웃음으로 웃어버리려 했으나 아무리 동당을 칠하고 칠해도 구냥 피가 내배는 그 생생한 깊은 상처의 인상은 아직도 상진의 마음을 저리게 하였다.
그것들밖엔 귀한 것이 없으니까나!
너무도 절실한 심정이 어린 말이라 아직도 귀에 쟁쟁한 그 한마디만으로도 지금 나란히 걷고 있는 인갑이가 단지 길가에서 처음 만난 길동무만일 수는 없었다.
귀한 아들! 물론 죔손이영감의 둘도 없는 귀한 외아들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민족적으로 위기에 선 숱한 조선의 아들이 아니냐. 뿌리 깊은 과오의 역사로 어쩔 수 없이 차마 끊지 못할 인연을 생가지 찢듯 버리고 억울한 희생의 길을 갈밖에 없는 조선의 한 젊은이일 것이다. 이 희생에 책임질 자는 다 과거로 돌아가 없다고 하여야 옳을까. 그리고 이 무참한 희생을 지금부터나마 막을 자는 없는가. 너도 나도 아니니 앞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리자는 것인가. 이런 상진의 생각은 언제나 그렇듯이 또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말았다. 진공관 속을 걷는 것같이 답답하였다.
“그 텃물받인가 하는 논은 저간에 복구됐소?”
그때 들은 말이 있어 물어본 것이다.
“웬걸요.”
인갑이는 무슨 골몰한 생각에서 놓여난 듯 상기된 얼굴을 들며
“복구가 다 뭡니까.”
한다.
그들은 벼르던 대로 두 번이나 지주를 찾아갔다고 한다. 작년 가을에 갔을 때는 그 엄청난 손해에 지주는 펄쩍 뛰기만 하였다. 김주사한테서 이미 기별은 있었으나 그렇게까지 큰 피해일 줄은 통 몰랐다는 것 이었다.
“안 될 말이지 남의 돈을 버려놓구는 또 품삯까지 내래니 이미 버린 건 고사하구 님자네는 날 못살게 하자는 수작인가.”
이렇게 지주는 단박 화를 낼 뿐이었다. 그때 시세로 70원이나 하는 품을 수백 자루나 사서 고친다면 아이보다 배꼽이 크다는 격으로 논값보다 품값이 많다는 것. 그 논에서 나는 소출을 공정가격으로 공출하면 지주의 수입이 대체 몇 푼이나 되기에 당초에 어림도 없는 수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구 그 아까운 논을 아주 쑥밭을 만들 수야 있소.”
하는 말에
“그렇게 아까운 논을 못쓰게 한 건 누군데!”
하여 장마가 지고 사태가 난 것까지도 소작인들의 책임이나 같이 역습을 하였고
“님자네가 그 논이 정 아까우면 우선 일을 다 치워놓게나. 그러면 낸들 소방이⁷¹ 모른다구야 하겠나.”
하는 투의 생색이었다.
그해 실농으로 당장 풀칠할 것도 없는 그들이었다. 그날그날 품팔이를 해서 먹어가는 처지에 자기네 힘만으로는 1년을 해도 끝이 안 날 일을 하잘 수는 물론 없었다.
지난 따지개머리⁷²에 갔을 때도 지주의 태도는 매한가지였다. 고작 다른 것이라면 사실 그럴 가망이 있어선지 그 당장을 꾸려가는 말인지
“식량 증산이 국책이니까 혹시 ‘당국’에서 보조나 주면 몰라도…….”
하여 소위 ‘당국’을 팔았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끝나서 품삯은 내리고 낟알은 자유 처분하게 되어 수지가 맞게 되는 때까지 기다릴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뿐이었다.
“지주는 니(利) 보자는 땅이니깐 타산해봐서 니 없으문 아깝디 않게 내버려두 그만이디만 우리 농사꾼은 어데 그래요. 농사꾼은 땅 없인 못살디 않아요. 그래두 우리 농사꾼이야 어데 힘이 있어야 그 논을 다시 살리디요.”
하는 인갑의 이야기는 둘째배미를 부치던 사람네는 벌써 어느 탄광으로 떠나갔고 자기네도 벌써 노동판으로라도 갔어야 할 형편이지만 인갑이 자기는 내일이라도 끌려 나가야 할 사람이라 뒤에 남는 늙은 부모는 같은 품팔이일 바에는 손에 익은 농사일이 나으리라고 하여 그냥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갑의 이야기는 더 진정할 여지가 없이 무거운 한숨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몇 걸음 안 가서 인갑이는 다시 머리를 들며 말한다.
“이번 일은 우리만이 아니야요. 이 근경에 그렇게 돼서 묵는 논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래서 나는 머 우리가 부티는 던장의 디주만이 나빠서 그런 거라군 안 해요. 땅에 대한 디주들의 니해(利害) 관계와 생각은 우리 농사꾼들과는 애초에 다르니까니요.”
이런 말에 상진이는 주춤할 지경으로 인갑이의 얼굴만 새삼스럽게 쳐다볼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정확한 지적이냐.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미루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지만 그러나 인갑에게는 논리(論理)로써보다 쓰라린 체험으로 얻은 자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제 이야기로 흥분하여 더욱 소년답게 얼굴이 붉어진 그를 보는 상진은 아, 이 젊은 농민! 그의 현실을 정확히 보는 눈과 제 위치에 대한 명백한 자각―그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새 역사의 창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 상진은 전에 읽은 책 중에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외침이 지금 인갑이의 말소리로 연상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한 고개를 념 었다.
“나는 또 좀 쉬야겠는데.”
상진은 저린 무릎을 문지르면서 벌써 몇 번짼가 또 쉬자기가 미안하였다.
“바쁠 텐데 미안하오.”
“바쁠 것두 없구 바쁘잘 것두 없구…….”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리는 인갑의 말에 상진은 웃었다. 하도 젊은이답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상진이가 권하는 대로 담배를 피워 문 인갑이는 소년다운 호기심으로 상진의 책 꾸러미를 뒤적이다가
“저두 이전에 선생님의 소설을 더러 읽었어요.”
한다.
“허 어느 겨를에 그런 걸!”
인갑이는 일껏 입학한 학교에는 못 가게 되고 뭘 좀 배우고는 싶고 하여 한 하숙에 있던 동무에게 부탁하여 다 본 잡지와 소설책을 보내달래서 모를 한문자는 춘식에게 배워가며 동석이랑 같이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 2년 계속되나 마나 하여 조선말 책을 읽는 생도를 취체하는 바람에 책을 못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갑이가 처음부터 눈인사를 하였고 또 이렇게 자기 마음을 얼어 보이는 것은 벌써부터 그런 인연이 있은 탓이려니 하였다. 그러고 보면 그만한 정도나마 자유가 있던 때에 자기는 왜 좀더 계몽적으로 이런 젊은이에게 친절한 글을 쓰지 못했던가. 새삼스레 후회되었다.
“참 선산님 주의하시라우요.”
하는 인갑이는 이번에 상진이가 불려갔던 까닭을 짐작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소위 시국 강연회가 있은 날 인갑이는 경방단의 당번(當番)으로 강연 끝의 연회 때 시중을 했었다. 그때 술이 취한 모양인 본서 고등계 주임이 이상진이란 자는 지금 여기서 뭐 하느냐고 하는 말로 시작하여 각기니 심장이니 하는 것도 건병⁷³일지 모른다는 둥 어쨌든 쓸데없는 귀찮은 것이라 하였고 ‘강본’ 주임은 그따위 놈은 잡초니까 언제든 뿌리째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계엄령만 내려보라고 별렀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가택 수색이 바로 그 후였다.
“야미쌀두 선산님이 직접은 사시디 마시라우요.”
하는 인갑의 말은 강본이는 언제나 건방진 놈들이라면서 상진이를 위시하여 외처에서 ‘소개’해온 사람들을 주목한다는 것이다.
언제는 안 그랬으랴만 이런 말을 듣고 보면 더욱 숨 막히게 답답한 세상이었고 구차한 목숨이 아닐 수 없었다. 날개가 있으면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어디든 왜놈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인갑이도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저편 하늘 끝닿은 먼 산을 바라보다가 옆에 누워 있는 상진이를 돌아본다.
“선산님.”
“음.”
“데 김일성 부대는 상게두 백두산에서 왜놈하구 싸우갔디요?”
이런 인갑이의 말에 상진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김일성 부대!”
인갑의 말을 받아 외는 상진은 서슴없이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 이 젊은이는 날개가 있구나!’ 속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막힌 진공관 속에서 김일성의 존재를 생각해내는 것만도 얼마나 씩씩 한 비약이요 찬란한 낭만일까.
“물론 싸울 거요. 지금이야말로 그분이 더욱 힘 있게 싸울 때니까!”
청구(靑丘) 조선의 산머리 우러러 선조의 웅대한 가지가지의 전설을 지니고 있는 백두산에서 동포의 의사를 대표하여 조국 해방의 봉화를 높이 들고 싸우는 한 영웅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며 상진은 대답하였다.
“전 이번에 북지나 만주루 가게 되문 달아나다 죽드래두 그리루 갈래요.”:
“참! 잘 생각했소. 으레 그래야 할 게요.”
“이전에 신문에서 볼 젠 그저 무심히 봤어두 지금 저희는 달아나기만 하문 믿구서 찾아갈 덴 김일성 부대밖엔 없어요. 그리루 가기만 하문 우리두 개죽엄은 안 할 터이니깐요.”
이 역시 이들 젊은이의 절실한 지각이 아니고 무엇이랴. 헤어날 구멍이 없이 암흑과 질식 속에서 허덕이던 이 젊은이들은 더듬고 더듬어 제 의지와 판단으로 마음의 들창을 찾아 열어놓은 것이다. 그 들창으로 멀리 영웅 김일성이 높이 든 민족의 봉화의 광명이 흘러들고 젊은 심장을 충동하는 그 부대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이려니 하면 상진의 맘에도 또한 들창이 열리는 듯하였다. 민족의 자유와 해방은 지금 우리 동포의 힘으로도 전취되고 있는 것이다. 즉 김일성 하나가 있으므로 우리는 염치없는 민족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걸으며 상진은 마음의 들창으로 들어오는 광명에 싱그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심호흡을 하였다. 결코 나약한 한숨이 아니었다.
다시 한 고개를 넘자 고개 밑 주막 앞에서 앞서 가던 축들이 서로 쫓고 쫓기고 하며 날파람과 실랑이를 하고 있다.
“데 애들, 또 탁주 먹구 취했나 부군.”
인갑이는 제가 오히려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린다. 아닌 게 아니라 가까이 가본즉 그들은 닥 홍당무 같은 얼굴에 땀을 흘려가며 농지거리를 하고 덤비었다. 누가 몽치를 들고 따라가서 총창으로 찌르는 시늉을 하면 저편은 양손을 쳐들고 머리를 저으며
“워 쓰 항궈린 워 뿌쓰 을버린” 한다. 그러면 이편은
“흐흐.”˙
하고는 와하하 웃고 떠들었다. 그런 한편에 저기 길가에는 두 젊은이가 어깨를 겯고 앉아 서로 이마를 맞대고 울고 있었다. 석주와 동석이었다. 웬일인지 석주의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러면서도 석주는 오히려 마주 껴안고 우는 동석이의 눈물과 콧물을 제 소매와 손등으로 훔쳐주며 느껴 우는 것이었다.
“이 자식 아……”
“응 이 자식아……”
“죽어두 같이 죽자.”
“응 죽어두 같이 죽자.”
이렇게 그들이 정답게 부르며 서로 마주 보는 눈에서는 또 새로운 눈물이 흘렀다. 그들은 또 이마를 마주 대고 느껴 우는 것이다.
“웬 일이오.”
상진이는 옆에 와 서는 길손이에게 물었다. 그러나 길손이는 그 역시 홍당무같이 된 얼굴을 숙이고 대답이 없다. 마침내 그의 어깨가 들먹거리더니 눈물이 핑 돈 눈으로 상진이를 쳐다본다. 그 벼슬 자국 있는 콧살이 찌푸려지고 입 가장자리가 푸들푸들 떨리자
“우리야 늘 설운 걸 참아왔디요.”
하고 얼굴을 돌리며 느끼기 시작한다.
“길손군!”
상진이는 흐득이는 그의 어깨를 짚고 흔들며 나직한 소리로
“길손군. 니 쓰 항궈린.”
하였다. 희망을 가지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 말을 듣자 다시 상진을 쳐다보는 길손이 눈은 한순간 웃었다. 그러나 곧 그는 어린애같이 “와ㅡ” 울음을 터뜨리며 상진의 가슴에 안기듯 쓰러진다.
“선산님……”
“?”
“우린 술두 먹구 쥐정두 하구……”
“……“
“이 전 다 타 타락했시오.”
하며 다시금 느껴 운다. 그것을 보는 인갑이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돈다. 아직 익히지 않은 술에 취해서도 그렇겠지만 얼마나 안타깝고 기막히면 초면이다시피 한 나에게 자기의 설움을 쏟아놓을 것인가. 그런 길손이를 안고 등을 어루만지는 상진이 역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인갑이와 길손이들이 입영(入營) 하기는 유월 중순이었다. 그때는 유럽 전쟁은 이미 끝났고 충승본도⁷⁴도 점령이 된 때였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는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을 하며 덤비는 때였다.
철기로는 이른 밀보리갈이가 시작되는 때였다. 말하자면 춘궁(春窮)의 한고비 보릿고개를 넘어서 농민들은 한숨을 내쉬는 때였다. 그러나 한 이삭 한 톨이라도 다칠세라 순사 경방단 면서기 구장 반장이 동원되어 농가와 밀보리밭을 감시하였다. 농사는 지어놓았으나 농민의 턱을 받치는 보릿고개는 끝없이 높아만 갔다. 이 마을 저 동네서는 징병 적령자들과 순사 면서기 경방단 사이에 작은 충돌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즐거잡이를 해 먹었다고 형이나 아버지가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적령자들의 반항이었다. 경찰은 내일모레라도 전쟁으로 끌려 나갈 그들이지만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극단의 예로는 유치장에서 바로 옷이나 갈아입고 입영할밖에 없는 젊은이도 있었다. 인갑이도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 입영하였다. 떠나기 전에 그는 두 번 상진이를 찾았다. 첫번에는 정혼해둔 처녀를 이편에서 자진해 파혼하고 떠날 생각인데 어떠냐고 의논하러 왔었다. 그 이유는 우선 저편에 자유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저편이 자의로 자기를 기다려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았다가 자기가 다시 못 돌아오는 경우면 이런 시골 인습으로 청승맞은 처녀 과부라 하여 흠이 잡히면 저편은 일생의 불행이요, 그만치 이편은 죄스러운 일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편 당자의 뜻을 알아보고 하는 말이냐고 상진은 물었다. 인갑이는 저 혼자의 생각이라고 하며 물어보나마나 아직 어린 처녀니까 무슨 제 고집이나 주견이 있을 것도 아니므로 이편에서 하자는 대로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상진이는 반대였다.
“인갑군이 어데까지나 저편을 아끼는 뜻은 잘 알겠소마는 저편의 심정을 알아보려고도 않고 그러는 건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잔인한 일이 될지두 모르오. 그뿐 아니라 인갑군의 말에는 어쩐지 왜놈의 냄새가 풍기는 듯도 하오. 그 싸우기 즐기고 사람 죽이기 좋아하던 사무라이 적부터 싸우러 나갈 때는 뒤에 미련을 안 남긴다구서 제 처자까지도 죽이던……”
상진이는 조선 젊은이들이 할 수 없이 끌려 나가 일본 놈과 같이 전선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입장과 생각은 근본적으로 왜놈과는 다르므로 미리부터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은 당치 않은 생각이요 그뿐 아니라
“인갑군일랑은 따로이 큰 포부가 있지 않소.”
하였다.
그 후 며칠 지나서였다.
“요좀 아이들은 니약⁷⁵두 해…….”
“니약 안 하문. 아무리 오래비 말이라두 저 싫은 노릇을 왜 할래갔소.”
“그래두 우리가 그랬을 적에야 제 혼인반자에 들어서 어디 개굴⁷⁶ 할 뻔이나 쉐니까.”
이런 동네 노파들의 이야깃거리는 유감이었다. 인갑이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지 유감이의 오빠에게 제 의사를 말했던 모양이다. 유감이네는 늙은 어머니가 있으나 아버지가 없으므로 모든 것이 오빠 주장이었다. 유감이 오빠는 그 당장에는 건성으로
“그런 걱정은 말게.”
하였으나 그날 저녁에 술이 취해 들어와서는 당장 인갑이의 사주와 청간⁷⁷을 돌려낸다고 서둘렀다는 것이다. 그때 유감이는 어느 결에 사주 청간을 품고 빠져나오다가 오빠에게 매까지 맞아가면서도 종시 내놓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입영하기 이틀 전에는 춘식이와 같이 왔었다. 인갑이가 같이 온 것이 아니라 춘식에게 끌려온 셈이었다.
춘식이는 들어서자마자
“선산님 아 이련 보릿자룰 봤소. 보릿자루문 제 깐에 국으로 가만있디나 않구 복을 방치⁷⁸루 테내쫓아두⁷⁹ 푼수가 있디 제 허리띠에 목매구 늘어디는 색씰 어드랬다구 덧떨려서 말썽을 맨드니 원원……”
하고 두덜거린다. 잠잠히 말은 없으나 인갑이는 퍽 후회하는 모양으로 그새만 해도 여위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인갑이 이 사람 내가 적은이⁸⁰ 님자 속을 모르는 거 아니야 내 더 잘 알디.”
춘식 이는 담배 연기를 후 뿜고
“걱정 말게 님자 처남 순질이두 타이르문 알아들을 사람이니 낀. 술을 너무 좋아해서 흠이디만 씨파 타일러서 안 들으문 씨파 내 주머구질⁸¹ 해서라두 님자 돌아오두룩 기다리게 할 테니 건 넘려 말게.”
한다. 어쨌든 인갑이는 그 일로 우울한 심정을 한 가지 더 더쳐가지고 떠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인갑이가 떠날 때 상진이는 그들이 타고 갈 트럭이 기다리는 신작로 기슭에 서 있었다. 주재소 앞에까지 가면 강본이를 만나게 될 것이 싫어서였다.
인갑이의 누이인 듯한 젊은 여인에게 부축된 죔손이영감이 있었다.
춘식이가 “건 따라댕게 뭘 하갔소. 여기 서 있으소.”
하여 주재소 마당에는 안 가고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 뒤에 몇 걸음 떨어져 비스듬히 모로 서서 외면하고 있는 처녀가 혹시 유감이가 아닐까 하였다. 날씬한 키 파인 목 위에 총명한 얼굴, 언젠가 궁둥이가 팡파짐하다던 춘식이의 말을 연상케 하는 방년 처녀였다. 인갑이의 어머니인 듯한 노파는 보이지 않았다.
중낮 째질 듯한 첫여름 햇살에 따갑도록 더운 날씨건만 다 해진 솜저고리를 입은 죔손이영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이마와 뺨에 더욱 깊이 팬 주름살로 쪼드러진 얼굴에 눈물이 지적지적한 눈을 내리깔고 땅만 굽어보고 있는 그의 다복솔 같은 몽당수염도 떨리고 그 무쇠 갈고리 같은 손도 푸들푸들 떨렸다. 그리고 그 이마에는 깨알 같은 땀이 아니라 보기만도 소름이 끼치는 싸늘한 성에가 불려 있었다. 상진이는 그런 노인에게 어엿이 말인사를 하기조차 안되어 그저 눈인사를 할 뿐이었다.
“우리 갸는 늘 선산님의 말씀을 했소옵디 흐.”
오히려 그런 죕손이영감이 인사를 한다.
주재소 앞에서 ‘반자이’ 소리가 나고 소학생들의 창가 소리가 들려오자 여러 폭 드림⁸²을 앞세운 행렬이 거리를 지나 이리로 온다. 인갑이 길손이 석주 동석이 그 밖에도 두 사람이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가족들은 모두 눈이 부었고 지금도 소리를 내어 느껴 우는 여인들이 많았다. 여등 장사 행렬이다. 드림은 만장같이 무겁게 펄럭인다. 트럭 앞에까지 온 그들은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되었다.
인갑이는 아버지 앞에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선다. 서로 말이 없다. 그의 누이인 듯한 젊은 여인이 달려들어 인갑이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참을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었다.
“너이 오만은 내가 나오디 말라구 그랬다.”
고목한암(枯木寒岩) 그보다도 썩은 장승같이 서 있던 죔손이영감의 말이다. 인갑이는 모든 생각을 떨어버리듯 한 번 머리를 흔들고 상진이를 본다. 상진이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상진의 귀에 입을 대듯이 가까이 다가서며
“워 쓰 항궈린.”
을 속삭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상진이도 웃으며 더욱 그의 손을 힘 있게 쥐었다. 길손이가 달려왔다. 그가 속삭이는 인사도 역시 그것이었다. 세 사람은 때 아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그들이 트럭에 오르려 할 때 춘식이가 달려와서
“아 이 적은인 아무리 니여 단녀올 길이라두 데수님한테 인살하구 떠나디 않구 원 어드르누라구⁸³ 그러는디 모르갔네.”
하며 인갑이의 등을 밀어서 저편에 서 있는 처녀 앞으로 갔다. 그 처녀는 고추 꼬투리같이 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그것이 인사였다. 오히려 인갑이가 더욱 수줍은 모양으로 춘식의 손을 뿌리치고 트럭으로 뛰어올랐다. 둘러선 사람들은 한순간 자기네 설움을 잊고 이 한 쌍 젊은이를 위하여 웃을 수 있었다. 트럭이 떠났다. 뒤에 남은 가족들은 또다시 울었다. 상진은 멀어가는 트럭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제 고향 제 부모 형제 처자를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보며 트럭에 실려가는 젊은이들이 자기네 생명의 등잔불을 짓밟아 끄러 가는 길이 아니라 영웅 김일성이 높이 든 민족의 봉화에 그들의 생명의 등잔 기름을 부으려 가는 길이 되기를 축원해서 였다. 산모두리⁸⁴로 먼지마저 사라진 후에야 하잘것없는 가족들은 발부리를 돌렸다. 춘식 이와 나란히 걷던 상진의 눈에 많은 사람 사이에서 그 처녀의 치렁치렁 따 늘인 머리채를 매만져주는 젊은 여인의 정다운 손이 인상적으로 보였다.
그날부터 동네 노파들 사이에는
“요새 아이들은 니약두 하디!”
“저이 오래비가 그러니깐 더 좀 봐라 하구 우정 더 그랬는지도 몰라.”
“그래두 우리 어린 적에야 쇠집을 가서두 남 있는 데 저이 서방이라구 쳐 다보댔쉐니까.”
또 이런 투로 유감이가 배웅 나왔던 것이 한 이야깃거리가 될밖에 없었다.
*
그들이 떠나간 지 거진 한 달이 되어서야 인갑이의 편지가 왔다. 죔손이영감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들고 온 그 엽서에는 일본말로 다 안녕하시냐 묻고 자기도 몸 성히 잘 있다고 적었을 뿐인 간단한 문안 편지였다. 눈을 크게 뜨고 뒷말을 기다리는 죔손이영감에게 더 읽어 들려줄 말이 없어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 이상은 더 쓸 자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아직도 살아서 지금 대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도 그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경상도 대구니까나 여직 되선 땅에서 명을 부디해가는갑소옵디?”
하는 죔손이영감은 역겨운⁸⁵ 눈물을 흘렸다.
그 후 한 보름 만에는 순천(順天)서 엽서가 왔다. 역시 문안에 그치는 것으로 전번 것과 다른 것은 없는 돈을 새겨가며⁸⁶ 면회를 온다거나 할 생각은 아예 말라는 것이었다.
“아매 니어 전당으루 끌려 나가는갑소옵디?”
편지 사연을 듣자 죔손이영감은 절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구에서 순천으로 그 경로는 그들이 떠날 때의 지향과는 정반대 방향이 아닐 수 없다. 길손이 석주 동석이의 편지도 역시 그곳서 왔다는 것이다. 그때의 전국(戰局)의 초점은 여전히 충승도였다. 이미 나패(那覇)와 북리(北里)를 잃고도 역시 특공대니 육탄 돌격대니 하여 최후의 발악을 함으로써 자기네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제국주의자들은 저의 인민의 피를 절망적인 전장으로 아낌없이 부어 넣는 중이었다. 그러한 충승도뿐 아니라 구주(九州) 대판(大阪) 동경(東京) 할 것 없이 일본 전토는 지금 불비가 쏟아지는 하늘 밑이었다. 충승도가 아니더라도 일본이면 어딜 가나 살아 돌아오기를 바랄 수 없는 그들의 절망감과 초조는 더욱 심각하였다.
칠월 초순에는 태전(太田) 광주(光州)에도 폭격이 있었고 그와 전후하여 소위 ‘국민 의용대’ 결성으로 조선 전토가 금시에 전장화하는 듯한 불안으로 인심은 극도로 흉흉하였다. 그런 중에 또 그 살인적인 밀보리 공출이 시작되었다. 경관이 영솔한 경방단은 떼를 지어 매일이다시피 가가호호를 뒤져서 양식을 빼앗아가고 사람을 묶어갔다. 그 통에 춘식이도 잡혀가서 코가 깨져 나왔고
죔손이영감은 항아리 밑바닥에 한 되가 되나 마나 하는 입쌀이 드러나서 작년에 논농사도 안 한 집에 웬 쌀이냐 하여 얻어맞었다. 다시 못 볼지도 모를 '아들을 먹이려고 없는 돈에 마련했던 것을 다 먹지 못하고 떠난 아들이 남긴 것이라 차마 없애지 못하여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때따라 늙은이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 경방단 부단장인 그 뺨가죽 두터운 봉덕이라 그자에게 농민들이 얻어맞는 것쯤 의례건이언만 더욱 소문거리가 되고 더욱 듣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까닭이 있었다.
인갑이가 떠난 후에 유감이 오빠 순칠아는 전에 없이 봉덕이와 술타령이 잦게 되고 취해서는 인갑이의 사주와 청간을 내놓으라고 유감이를 달래고 시달리다가 나중에는 매질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덕이와 같이 저의 집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밖에서 먹었더라도 순칠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온 봉덕이는 제 집이나 다름없이 아랫목에 ‘드러누워서 유감이에게 실랑이를 하려 드는 것이었다. 그런 때마다 용하게도 (인갑이의 누이는 그런 기맥을 알았고 알면 곧 춘식이에게 연락이 되었다. 그러면 춘식이는 한밤중에라도 헛기침을 하고 찾아 들어가서는 무슨 딴전을 대서라도 그 자리를 흐지부지하며 봉덕이가 헐끔해 돌아가도록 수단을 피우는 것이었다. 한번은 취한 오빠의 매를 피하여 빠져나온 유감이가 두리번거릴 사이도 없이 집 모퉁이에서 나타난 인갑이의 누이가 손목을 끌고 춘식이네 집으로 피한 적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무렵이라 오금이 뎅뎅한 순칠이가 아직 징용이나 보국대를 안 나간 것을 봉덕이의 뒷대가 있는 탓이라는 새 소문이 새로웠고 또 봉덕이가 본시 그 텃물받이 첫배미의 샘으로 죔손이영감을 미워하던 터이지만 그 입쌀 한 되를 트집 잡아 손찌검까지 한 것은 역시 그런 짬짜미 속이 있어 그렇다고들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에 상진이를 찾아온 죔손이영감은
“턴디에 어디 살아갈 도리가 있소오니까.”
하였고
“언제나 망할내는디……” 한숨을 쉬었다.
그때뿐 아니라 죔손이영감은 며칠 만에 한 번씩 찾아와서는
“요새 신문엔 멜 했소옵디?”
한다. 말하자면 안간힘을 쓰며 기다리는 그 “언제나 망할내는디?” 가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그때마다 상진이는 흔히 붓장난을 하거나 이미 붓장난으로 시꺼멓게 된 신문에서 저간의 중요한 기사 중에 노인이 알아들을 만한 구체적인 것을 한두 가지 이야기 하고는
“뭐 그래 오래지 않을 것만은 뻔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 며칠 동안은 그 지난한 세월이 재촉되는 거라고 볼만한 뉴스는 통 없었다. 놈들은 아직도 해군 지원병 전사가 어떠니 송근유가 증산되느니 밀보리 공출 성적이 백 퍼센트니 목제 비행기가 매달 몇천 대씩 생산되느니 하여 전쟁은 앞으로 더욱 장기전이 된다고 떠들었다. 마지막 날까지 백성을 속이지 않을 수 없는 그자들의 거짓 선전이려니는 하면서도 하도 지난하게 기다려온 지금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는가만도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상진이는 살림 형편만으로 위협을 받은 지 이미 오래였다. 쌀 한 말에 백 원을 예상하기도 큰 상상력이 필요하던 때에 세운 3년 예산은 1년이 채 못 되어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 새우젓 한 보시기 김칫거리 풋배추 한 포기를 사는 데도 그의 아내는 여간한 안간힘이 아니었다.
“이편은 바늘 한 갤 ‘야미’를 못하면서두 사들이는 건 다 ‘야미’니.”
이래서야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걱정하는 아내의 탄식이다. 그 당시의 생존 경쟁의 슬로건은 ‘야미’는 ‘야미’로 대항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당신 알우?”
조용한 때면 상진이는 흔히 신문지에 붓장난을 하였고 그 옆에서 바느질을 하는 아내는 흔히 또 이렇게 살림 걱정을 하자는 것이다.
“글쎄…….”
‘글쎄’ 여부가 없을 것이나 이런 때마다 상진이는 할 말에 궁한 나머지 대답도 말도 될 리 없는 대담을 하며 담배를 꺼내 무는 것이다. 또 그 아끼는 성냥을 찾는 눈치에 화로를 가져다 놓는 아내는
“참 당신은 태평이시우.”
하고 웃을밖에 없었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 이마가 벗어지게 뜨거운 화롯불에 담배를 붙이고 앉은 제 꼴에
“하로동선(夏爐冬扇).”
하고 상진이도 혼자 껄껄 웃었다.
“?”
쳐다보는 아내에게
“하로동선 모르우? 여름 화로 겨울 부채…… 지금 내가 그런 사람이오.”
상진이는 태연히 이런 긴치 않은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과는 걱정도 의논도 해보잘 여지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도 웃고 마는 것이다.
해야 소용없는 걱정. 아직도 의릉 옷가지가 남았으니 그것을 팔아서라도 해방이 되기까지 속반고장(粟飯苦醬)으로 연명이야 못하랴. 이런 예산이 OO○ OO을 가지는 상진이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오직 무엇을 좀 읽었으면 ○ OO○ 저번에 가택 수색을 당한 후부터는 그의 아내는 상진이가 숨겨두고 읽던 책들을 그야말로 압수해가지고 어느 때 또 경관이 들어설지 모른다며 영 펴놓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새 시대를 위한 준비와는 그 역 하로동선 격인 붓장난을 시작한 것이다. 다소 골동 가치가 있는 세전(世傳) 벼루에 ‘마묵여병부(磨墨玖口病夫)’ 격으로 고요히 하세월하고 먹을 갈아 비록 신문지쪽에다나마 글씨를 익히는 것은 이 난세를 넘길 때까지 한때 오세객⁸⁷으로 자처할밖에 없는 상진에게는 지루한 세월 지난한 더위를 잊게 하는 좋은 소일거
리 였다.
*
장마는 완전히 개어 푸르게 트인 높은 하늘에는 멀리 가을빛이 엿보이는 때가 되었다.
이날도 상진이는 붓장난을 하고 있었다.
“아니 또 글씨요? 어데루 좀 피할 생각은 않구.”
이 며칠째 두고두고 걱정하는 아내의 말이다.
지난 9일에 소련군은 드디어 동서 양방으로 소만 국경을 넘고 또 두만강을 건너 조선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전후하여 일본에는 광도(廣島)와 장기(長崎)에 신형 폭탄으로 피해가 막대하다 하였고 10일에는 동경을 중심으로 계엄령이 내렸다는 것이다. 그 다음 11일에는 소련군이 벌써 웅기(雄基)에 들어왔었다. 실로 파죽지세였다. 그리하여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 조선의 해방은 붉은 군대의 위대한 힘으로 북방에서부터 시시각각으로 실현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만큼 왜놈의 최후의 발악도 정히 이때가 아닐까. 강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빼앗았던 것을 고스란히 곱게 내놓고 물러설 리는 없을 것이다. 대규모의 파괴와 아귀도의 대살육이 연출된다면 바로 이때일 것이다.
계엄령만 내려봐라―언젠가 이곳 주임 놈이 벼른다던 계엄령은 벌써 일본에는 발령되었다. 본시 늦던 신문이 요즘에는 사흘 나흘씩이나 묵어 오고 라디오도 없는 곳이라 까맣게 모르고 앉았지만 그동안 서울 같은 데는 벌써 계엄령 이 내렸을지도 모른다는 의구도 없지 않았다.
그 이성을 믿을 수 있어야 사람인데 이같이 깜깜소식으로 앉았다가 그 알코올 중독자 강본의 주정에 죽어! 안 될 말이었다. 그래서 일시 어디로 피해볼까 벼르는 중이지만 갈 데가 없었다. 평양이나 서울 같은 도시는 오히려 거기서 피해 나와야 할 때요 설혹 간뎄자 여관에 드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요 찾아갈 만한 친구는 역시 소개했거나 혹시 남아 있더라도 이때의 불안은 피차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더욱이 반년 넘게 편지 거래도 없으므로 친구들의 동정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 딴 촌으로 갈 데도 없었다. 이런 궁리 저런 궁리 하면 할수록 신경만 과민해져서 종당은 내가 무슨 큰 주의 인물이기로 이런 걱정을 하는가 하여 좀 피해망상의 상태가 아닐까도 하는 것이나 역시 그 이성을 믿을 수 없는 총칼을 가진 알코올 중독자는 미친개같이 안심이 안 되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조반을 먹기가 바쁘게 뒷산을 넘어 장마물이 흐르는 산 개울에 발을 잠그고 해를 보냈으나 광솔 머루덩굴 참나무 싸리 껍질 등 공출감을 하러 헤매는 사람들과 아직 미진한 공출 독려로 쏘다니는 경방단의 눈에 허구한 날 목욕만 하는 사람의 꼴은 또 무엇이랴 싶어 어제 오늘은 어차피 집에 붙박여 있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 이 며칠째는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다는 아내는 태평인 양 봇장난만 하고 있는 상진에게 벌써 몇 번이나
“글씬 무슨 글씨요. 하다못해 또 뒷산에라두 가 있지 않구.”
하였고 지금도 그 해쓱해진 얼굴로 문밖의 신발 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건 또 뭐요. 누가 보나다나 해두.”
하며 상진 이가 쓰고 있는 ‘무가무국거장안지 (無家無國去將安之)’를 나무라는 것이다.
그때 문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자
“선산님 계시웨니까?”
하며 땅거미 진 뜰 안으로 들어선 것은 춘식이었다.
“어서 들어 오슈.”
“선산님 무슨 말 못 들었소.”
“무슨 말?”
“하 이젠 다 됐쉐다.”
“?”
“이거야요.”
춘식이는 허리를 굽실거리고 손을 빌며 ‘그저 살려줍쇼’ 하는 시늉을 한다.
“아니 이거라니?”
상진이는 붓을 던지고 나앉으며 물었다.
“항복. 무도건 항복이오. 오늘 일본 턴왕이 라디오루 항복한다는 연설을 했답네다.”
상진이는 잠시 눈을 감고 몸서리치듯 머리를 흔들며 ‘침착하리라’ 설레는 가슴에 심호흡을 하고 나서
“거 어디서 난 말이오?”
물었다.
춘식이의 말은 좀 전에 평양서 자전거로 나온 사람이 오늘 12시에 방송하는 것을 제 귀로 듣고 와서 전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금방 버스로 K읍에서 온 사람의 말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일까?”
너무도 허황한 꿈 같은 이날이 1945년 8월 15일이었다.
*
이것이 사실일까? 반생 동안 바라고 기다리던 이날이 그저 그리던 꿈이 아니고 목전에 실현할 수 있는 역사였던가? 지금부터의 앞날 앞길이 하도 양양하고 찬란하매 지금까지의 어둡던 과거가 더욱 암담하였다. 암흑과 압박 속에서 속절없이 소모된 청춘과 반생이 상진이는 그 이튿날도 그저 황홀한 꿈속을 헤매는 듯만 하여 좀처럼 생각이 현실적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좁은 방과 뜰을 얼빠진 사람같이 거닐고만 있었다.
그런 때 찾아온 춘식이는 용강 비행장으로 보국대 갔던 사람들이 다 돌아왔고 또 어느 광산으로 징용 갔던 사람까지도 몇몇이 돌아왔다며
“인갑이랑 일본으루 갔던 병덩들두 살았기만 하면 니여 오갔디요?”
한다.
“그야 물론이죠.”
이렇게 대답은 하면서도 인갑이의 소식은 궁금하기보다 암담한 편이었다. 그때 순천서 온 엽서뿐으로 그 후에는 통 소식이 없고 말았다. 사위스러워 서로 말들은 않지만 춘식이 역시 같은 생각으로
“이렇게 돼서 징용 갔던 사람이랑 돌아오는 결 보구 죔손이 아즈바닌 더 속이 타는 모양이야. 이제두 가니낀 암 말두 않구 퍽퍽 담배만 태우구 있을 젠…….”
한다.
“안 그렇겠소.”
하는 상진이는 지금이 꿈은 아니구나 하였다. 반생 동안 꾸겨진 인생만을 살아온 탓일까 황홀한 경지보다도 꼬집히듯 아픈 사실에 부딪혀서야 ‘세상사불여자십상팔구(世上事不如者十常八九)’라고 지금도 안 할 수 없는 근심이 있으니 생생한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랴! 비로소 실감적으로 현실 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 이튿날은 S면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주재소 주임 강본이는 겁을 집어먹고 그날 밤으로 처자까지 버리고 도망하였다. 뒤이어 학교장 우편국장도 자취를 감추었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살던 일본 놈들은 다 없어진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학교 우편국 주재소를 집수하였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높이 휘날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국가와 만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같이 판국이 뒤집혀 해방의 기쁨으로 온 인민이 날뛰는 중에 유독 그 기쁨을 같이할 수 없는 것은 면장을 비롯한 몇몇 일제의 주구배들이었다. 그자들은 오히려 왜놈의 세력이 거꾸러질 때 실색하는 표정으로써 자기네의 정체를 폭로하였고 따라서 인민들의 복수욕은 더욱 격앙되어 춘식이와 몇몇 젊은이들은 호되게 제재를 한다고 단단히 별렀다i 그러나 기름 강아지 같다던 면장은 그날 밤으로 매끄러운 처세가 아니라 매끄럽게 빠져서 도망하고 말았다. 퍽 후에 들은 소문이지만 그는 또 매끄럽게 삼팔선 이남으로 빠져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동안 상진이는 건준의 부탁으로 일간 개학하는 학교에서 가르칠 국어 교재를 만들고 있었다. 상진이 자신부터 철자법에까지 자신이 없고 같이 의논하는 몇몇 교원들은 지금까지 우리말 우리 글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라 변변한 교재가 될 리 없으나 전혀 없느니보다는 도움이 되리라 하여 착수한 것이다. 물론 중앙에서 권위 있는 전문가들이 일을 하겠지만 그 결과가 이런 벽지에까지 오기는 퍽 후의 일이라 할밖에 없었다.
시작하던 날 상진이는 참고 서적을 찾기 위하여 헛간으로 들어가서 표해두었던 조선책 상자를 터뜨리고 쏟아놓았다. 『임꺽정』 『고향』 같은 장편과 『까마귀』 『소년행(少年行)』 같은 단편집과 『조선어 사전』 『표준어 모음』과 『문장(文章)』 같은 옛 잡지들이 수북이 쌓였다. 모두 반가운 것들이다. 하나하나가 손때가 오르고 오늘을 기다려 자기와 같이 피난해온 책들이다. 광속 샛단 밑에 묻혀서 장마를 두 번이나 치른 것이라 곰팡이 슬고 책장은 물론 책과 책이 설기 도래⁸⁸같이 눌어붙은 것이 많았다.
“자 이젠 나가서 버짓이 햇볕을 보자.” 상진은 혼자 중얼거리며 해방된 우리말 우리글을 한 아름 안고 멀리 엿보이는 가을빛에 더욱 해양한⁸⁹ 툇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교재를 만들면서 그들은 처음 몇 과째의
나라.
우리 나라.
에서나 진도(進度)가 좀 높아져서
조선은 우리나라
우리는 조선 어린이
씩씩한 어린이
이렇듯 단순한 글을 써놓고도 스스로 감격할밖에 없었다.
*
교재를 끝낸 상진이는 그 이튿날 평양으로 떠났다. 아직도 인갑이와 또 같이 갔던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작별할 때 죔손이영감은
“우리 갸가 돌아오기만 하문 어련히 선산님을 차자보입디 않소오리까.”
하였고
“이전 우리나라를 찾았으니까나 우리 텃물받이두 곤티야갔으니까나 그래 더군다나 제 에미가 우리 걀 기두룹소옵디.”
한다. 지적지적하던 눈물이 종시 그 다복솔 같은 몽당수염 끝에 맺히고야 말았다. 옆에 섰던 춘식이는
“이 아즈반은 또 그런다. 지금 우리나라엔 운이 돌아왔는데 한창 일할 젊은 사람들이 설마 어떻게 됐갔다구 그럽네까:”
하였고
“선산님 우리 인갑이 적은이 잔체 땐 아무캐두 나오시야 합네다. 씨파 그땐 아무캐두 봉덕이 놈을 인접⁰을 앉힐랬더니 어제 고만 면상이 깨데서……”
한다. 면장을 분하게 놓친 젊은이들은 그 뺨가죽 두터운 경방단 부단장이나마 호되게 골려준 모양이었다.
*
상진이가 평양으로 들어간 이튿날 소련 군대가 입성하였다. 유럽에서 파시 스트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꺼꾸러트려 자기의 조국을 지켰을 뿐 아니라 침략자의 소굴이던 백림에까지 진격하여 그 어간의 약소 민족을 해방한 소련 군대는 다시 동양의 강도 일본 제국주의자의 군대를 무찌르고 지금은 평화와 자유의 옹호자로서 입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군경은 무장 해제가 되었고 우리
는 완전히 해방되었다.
*
시월에는 김일성 장군이 개선하였다. 세계 민족 반열에서 우리 3천만의 면목을 혼자서 유지 하고 개선한 김장군을 민중 대회에서 멀리 바라볼 때 지난봄 일을 생각하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인갑이의 소식이 새삼스럽게 마음 키였다.⁹¹ 그때 어둡던 마음의 들창으로 멀리 그리던 김장군이 지금은 우리 눈앞에 친히 나타난 것이다.
*
그 이듬해 정월이었다. 북조선예술총연맹 회관으로 인갑이가 찾아왔다. 그야말로 꿈이 아닌가 하였다. 길손이도 같이 왔다. 일본 관서 지방에 가 있었다는 그들은 김장군을 찾아가기 위해서 배웠던 ‘워 쓰 항궈린’은 물론 써볼 기회가 없었고 ‘아이 앰 어 코리앤’도 저편이 공중에서 폭격만 하고 가는 비행기라 역시 써볼 기회가 없었다고 하며 웃었다.
10여 일 전에 돌아왔다는 그들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씩씩하였다. 역시 젊은이들이었다. 인갑이는 물론 고자리 먹은 개똥참외라던 길손이도 몰라보게 어깨가 커지고 통지게 앞가슴이 나와서 정정한 장정이 되었다. 석주 동석이도 다 무사히 같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어느 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이 새 조선에서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냐고 상진은 물었다. 역시 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해야 할 사정이요 또 하고 싶다는 인갑이는 그 텃물받이 문제로 평양 오자 곧 지주를 찾아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주는 역시 아직도 수지가 안 맞는다 하였고 그뿐 아니라 있는 땅도 주체스러운 이 세월에 이미 버린 땅을 생돈을 들여서 고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 북조선의 공기가 못마땅하여 언제나 경보로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현금만이 귀한 눈치였다.
그래서 인갑이는 할 수 없이 오는 봄에는 고향을 떠나서라도 달리 농터를 구할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같이 농터 없는 사람은 말할 것두 없지만 시재 농사하는 사람들두 해방 전이나 후나 마츤가지야요. 새 나라가 됐대두 촌 농사꾼들이야 머 새로운 희망점이 하나나 있으야디요.”
한다.
형이 둘씩이나 농사를 하므로 자기는 한번 딴 방향으로 나가보려고 보안서원을 지원해왔다는 길손이는
“사실이야요. 이번에 돌아와 보니낀 해방이 돼서두 남의 땅을 소작이나 해먹는 농사꾼이야 독립이 되나 마나라구들 하멘서 일제 시대나 마츤가지루 틈틈이 튀전⁹²들이나 하구 술 먹구 쥐정이나 하구……·(그는 지난봄 일을 생각했음인지 얼굴을 붉히며) 사실이야요. 우린 다 죽었다 살아 돌아오면서는 해방이 됐으니낀 다 달라졌갔디 했댔는데 오래간만에 고향에 찾아와서두 새 기분은 요만큼두 없어요.”
한다.
이러한 그들의 말은 지난봄에 길에서 만났을 때 인갑이의 말로 연상했던 ‘토지는 농민에게로’ 하는 외침 그것의 다른 표현이라 할 것이었다. 어쨌든 전 민족의 80퍼센트나 되는 농민들은 아직도 해방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길손이는 평양 있게 되면 자주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하였고 인갑이는 언제 결혼하느냐 묻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글쎄요.”
할 뿐으로 작별하였다. 아직 무한 궤도의 춘궁을 벗어나지 못한 처지라 수줍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는 ‘글쎄요’일 것이다.
*
이월에는 전 인민의 지지로 김일성 장군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성립되었다.
*
해방 후 첫 삼일절을 맞이하였다. 거리 중심에는 ‘피의 날’이라는 탑이 섰다. 역전에서 기념식이 끝나 거리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상진이는 북조선예술총연맹의 깃발 아래서 행진하였다. 중앙당 앞에 이르렀을 때 저편 갈래길로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낫과 호미를 든 농민의 행렬이 나타났다. 문화인의 행렬은 그 농민의 행진에 선봉을 양보하고 서서 “조선 농민 만세”를 불러 성원하였다.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기치를 높이 든 행렬은 앞으로 앞으로 계속되었다. 그중에 ‘K군 S면 농민동맹’ 이라는 깃발이 보였다. 상진이는 한 걸음 나서서 살폈다. 맨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죔손이영감이다. 상진이의 발걸음은 어느새 그리로 달렸다. 무심중 팔을 붙들린 죔손이영감은 우선 찔끔 놀랐고 자기를 붙든 것이 상진인 것을 알아보자 더욱 놀랐다.
“허― 용하게 죽디 않구 살았으니까나 이런 기쁜 날 선산님을 또 만나게 됐소옵디.”
하고 흐흐흐 웃으며
“우리 인갑이가 데 뒤에 있소옵디.”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인갑이가 달려와 손을 잡는다. 그의 이편 손에는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커다란, 드림이 들려 있었다. 혹은ㅗ 암시적으로 혹은 역설적으로 혹은 그보다도 그 자신 채 말을 이루지 못한 막연한. 의식뿐이었을지도 모를 그의 요구를 오늘은 명백한 구호로 그리고 또 구체적으로 밝혀 내세울 때가 된 것이다. 거기는 석주도 동석이도 있었다. 그들은 잠시 행렬을 떠나와서 뱐갑게 인사한다. 그때 말 탄 보안서원이 달려왔다. 약간 흐트러진 행렬을 정돈하러 온 모양이다.
“미안합니 다.”
하며 상진이가 쳐다보는 그 보안서원은 길손이었다.
“길손이 일마 너 우리 모루간?”
석주의 반가운 인사였다.
“이 자식! 누가 인민을 보호하는 보안서원보구 일마 아무개야 한대 던?”
길손이의 대답이다. 모두들 웃었다. 길손이는 몸을 굽혀 동무들과 악수한다. 상진이도 그의 손을 잡았다.
인갑이는 지금 S면에서는 면 인민위원회를 비롯하여 농민동맹과 민청이 주체가 되어 오래지 않아 중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고 하며,
“농민동맹에서는 춘식이형님이 서기장으루 학교일에 열심히 활동하는 중이야요.”
한다. 그리고 개교할 때에는 꼭 한번 나오라고 하였다.
그들은 다시 행렬로 돌아갔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만세.”
“김일성 장군 반세.:’
그리고
“토지는 농민에게.”
를 외치면서 행진한다. 농민 출신 보안서원 길손이는 그 농민의 행렬을 호위하며 천천히 말을 몰아 따라간다.
상진이는 자기 행렬로 돌아와서, “조선 농민 해방 만세”를 선창하였다.
*
그 후 나흘이 지난 3월 5일에는 농민 대중의 요구에 응하여 인민의 정권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여사적인 ‘토지개혁법령’을발표하였다. 이날부터 농민은 해방되어 자유와 토지를 가지게 되었다.
*
4월 초순이었다. 춘식이와 인갑이가 동봉한 편지를 받고 상진이는 S중학교 개교식을 보러 갔다. 교사(校舍)는 아직 이전 경방단 건물을 대용하여 내일부터 개학한다는 것이다. 학교 뜰에서 목수가 생도들의 신장 만드는 것을 돌보던 춘식이는
“선산님 훌륭한 구경 좀 안 하실라우?”
한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즉 동구 밖 들에서 몇십 명 농부들이 무슨 역사들을 하고 었는 중이었다. 춘식이의 설명을 들으면 이번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이 토지를 분배할 때 그 덧물받이와 죔손이영감이 문제였다고 한다. 본시 여벌 땅이 있을 리 없으므로 그렇다고 사태에 묻힌 폐답(廢沓) 된 텃물받이를 그냥 줄 수도 없어 죔손이영감에게는 좀 많은 편인 사람의 땅을 조금씩 갈라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죔손이영감은 그것을 달가워 안 했고 아무래도 텃물받이를 단념 할 수 없는 눈치였다.
“나두 다른 땅을 가지문 아무두 안 부티게 되니까나 그 아까운 텃물받인 영 쑥밭이 되구 말갔소옵디? 것두 우리나라 땅이니까나 그렇가문 우리 농사꾼의 도리가 아니 갔소옵디.”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네 땅 내 땅을 가르기에만 골몰하던 농민들은 한순간 멋쩍게 주춤했다는 것이다.
“자 그럼 우리 이렇가는 것이 어떻갔소?”
그때 민청 간부들인 동석이와 석주가 이런 제의를 했다. 그 텃물받이를 복구하기에는 품이 3백 자루가량이면 넉넉할 것이라 백여 명 민청원이 제각기 두 자루나 세 자루 품을 내면 완전히 복구할 수 있을 것이므로 한두 집 농가의 힘으로는 못할 일이지만 전 민청이 다 협력하면 쉬운 일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아직 농번기가 아니므로 매 사람이 품 두세 자루씩 내는 것쯤 결코 힘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완전히 복구한 후에 죔손이영감에게로 돌리자는 것이나 그렇다고 죔손이영감 개인을 위해서 한다는 것보다 우리나라 땅을 살리기 위해서 일하자는 것이었다. 민청 맹원들은 모두 그 제안에 찬성하였다.
우리나라 땅은 우리 농민의 손으로 살리자―이런 새 구호가 자연 생기게 되었다. 이것을 본 농민동맹에서도 협력하기로 하였다. 그 새 구호는 곧 실현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지금 저기 보이는 것은 농민들이 우리나라 땅을 살리는 역사였다.
상진이는 춘석이를 따라 그 훌륭한 구경을 하러 현장으로 나갔다. 텃물받이 논엘 가려면 죔손이영감이 그 앞 돌창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았다던 우물가를 지나야 했다. 마침 석양녘이라 우물에서는 물 긷고 동네 여인들이 모여 쌀 씻고 혹은 냉이 소리채⁹³ 미나리 같은 풋나물을 씻기도 하였다. 한 걸음 앞서서 되는대로 치는 활기세에 더욱 절름거리며 가던 춘식이가
“아 녀성동맹 데수님…….”
하곤 그 여전한 익살로 누구에겐가 소리를 친다. 우물 둑 여인들은 모두들 웃었다. 그중에 물동이를 이고 방금 돌아섰던 젊은 색시가 이편을 돌아보자
“아 녀성동맹에선 이리케 갑자기 내우하기루 동맹했소? 이 니 선산님이 오신 것두 모른 척하니…….”
그 색시는 유감이었다. 작년에 인갑이가 징병으로 끌려 나갈 때 그의 누이가 정다운 손으로 매만져주던 그 머리채가 쪽으로 변하였을 뿐 언젠가 그것밖엔 귀한 것이 없으니까나! 하던 죔손이영감의 며느리였다. 인갑이는 얼마 전에 결혼한 것이었다. 그 색시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인사하였다. 처음 인사지만 상진이도 반가웠다.
텃물받이 첫배미 둑에는 삽자루를 든 쬠손이영감이 이마에 손으로 차양을 하고 이편을 바라보다가 언덕으로 올라왔다.
“오래간만입니다.”
하는 상진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쥐는 죔손이영감은 흐흐흐 웃다가 지적지적 한 눈물이 맺혀 흐르는 것을 소매로 훔치며
“하두 반가우니 까나.”
한다. 삽으로 가래로 들것으로 질통으로 모래 쳐내기에 바쁘던 수십 명 젊은이들은 일손을 멈추고 눈인사를 하거나
“아 언제 오셌습니까?”
하기도 한다. 몇몇이는 삽자루를 던지고 달려왔다. 그중에는 인갑이는 물론 동석이도 있고 석주도 있다. 손을 잡았다.
“여러분의 힘으로 못쓰게 됐던 우리 땅이 다시 살아나는군요.”
실로 상진이는 역겨웠다.
“영감님 얼마나 기쁘십 니까? 물론 수고두 많으시겠지만…….”
“흐흐흐 나야 머…….”
죔손이영감은 그새만 해도 앞니가 몇 개 더 없어져 더욱 뻥한 입을 벌리고 웃으며
“이제부턴 다 우리 농군의 땅이라구 이렇게 동네 젊은네가 제일처럼 수구해줍소옵디.”
한다.
“그래요 이전 우리 농민들은 다 네 일 내 일이 없이들 생각해요.”
석주의 말이다.
“그때 이 텃물받이가 못쓰게 될 적에 넘은트리⁹⁺ 뒷벌 할 것 없이 다 같이 못쓰게 된 채루 이태씩이나 묵혀오던 논들두 이번에 우리 민청들의 손으루 다시 살아나게 됩네다. 아마 금년엔 한 배미두 목는 건 없을 걸이요.”
하는 인갑이의 말은 명랑하다. 작년 봄에 우연히 같이 걷게 된 때 이 텃물받이 복구 문제로 그는 얼마나 침울하였고 분개하였던 것이랴.
“참 길손군은 평양 있군!”
이들 앞에서는 연상 않을 수 없어 상진이가 한 말에 동석이가
“고 녀석 이제 오래디 않아서 이리루 보안분서 주석으루 올 제 보라구 뻐긴답네다.”
하여 모두들 웃었다.
“자 어서 한 가랫밥씩 이라두 더 치우구 가디……”
뉘엇뉘엿 져가는 서산의 해를 쳐다보며 석주가 논으로 들어간다.
상진이는 죔손이영감과 춘식이와 같이 수돌 건넌둑에 가서 앉았다. 빨갛게 벗기어 무너졌던 그 둑은 벌써 보호가 되어 끊기었던 농로가 이어져 발담에 길들기 시작하였고 다시 푸르게 돋아나는 잔디 뿌리는 동둑을 또 누비고 흙을 단단히 얽어매기 시작하였다. 저물어가는 하늘 서쪽에는 내일도 역시 청명한 날씨를 약조하는 저녁노을이 불렸고 뒷산 밑에 아늑히 들어앉은 동네서는 제각기 곰방대나 피워 문 듯 집집이 굴뚝마다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쫑쫑쫑 아득히 들리는 날새⁹⁵ 소리에 하늘은 높고 음머 ―하는 묵중한 소 소리에 대지는 얼마든지 넓고나! 하는 느낌이 새롭다. 잔디밭에 다리를 뻗은 상진은 상쾌한 피곤과 유원한 희망에 몸도 맘도 포근히 잠들 듯싶다.
“우리 김장군님 안녕합시옵디?”
문득 죔손이영감이 묻는 말이다. 진심의 문안이었다. 단지 그가 상진이는 으레 김장군의 소식을 잘 알 사람으로 여기고 묻는 것이 거북하였다.
“자주 뵙진 못하지만 물론 안녕하십니다.”
“참 그 어른……그 어른 덕분에 우리 농민들은 움 안에서 떡을 받았소옵디. 하두 어긍하구⁹⁶ 꿈같으니까나 첨에는 곧이 안 들리더라니까.”
죔손이 영감은 또 흐흐흐 웃었다.
“텃물받이꺼정 이렇게 고쳐지는 걸 보믄 이전 정말이디요?”
춘식의 말이다.
“정말 이렇게 우리 농군의 손으로 쑥밭이 됐던 걸 다시 살리게 되구 보니까나 땅은 이제야 제 님자를 만났구나 합소옵디.”
그 말에 머리를 건득이면서 상진이가 바라보는 논에서는 열을 지어 늘어선 젊은이들이 모래를 벗겨 나가는 것이다. 모래를 밟아서 본바닥 흙에 섞일세라 또 깊이 찍어서 본바닥 흙을 건드릴세라 삽자루를 뉘어가며 모래를 걷어서는 기다리고 있는 들것과 질통에 담는다. 그런 한삽 한삽에 바랭이 쑥대 같은 잡초가 무성한 모래와 거친 흙이 걷혀 참먹같이 빛나는 텃물받이 논바닥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농민의 손으로 황폐에서 옥토로 갱생하는 우리 국토의 한 폭!’
상진이는 어떤 시의 한 구절이나 같이 혼자 속으로 읊조렸다.
그들이 앉아 있는 동둑 길에는 쇠스랑 호미를 들고 메고 혹은 소를 몰고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날 하루의 일이 끝난 농군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도 일손을 떼고 쟁기를 둘러메고 나섰다. 동둑을 지나 한길에 나서면 땅거미 진 길 좌우편에는 마뜩이⁹⁷ 등정가래질⁹⁸까지 하여 북신 피어오른 밭의 흙냄새가 풍겼다. 여기저기 밀보리밭이 보인다. 아직 푸른 물결을 치도록 자라지는 못했다. 길가에 아카시아꽃도 아직 피지 않았다.
“인갑군 이보다는 좀 늦어서지만 우리 첨 만났을 때 보릿고개가 아직두 까맣구나― 한 생각나우?”
“예 그래서요.”
“그땐 다른 뜻으루 한 말이지만 지금부터야말루 밀보릿고개는 정말 옛말이 되구 말지 않을까?”
“그 렇지요.”
“정말 그렇게 됐어요.”
인갑이와 동석이의 말이다.
“흐흐 참 보릿고개는 정말 넘기 힘든 고개드랬즈옵디. 그런 걸 우린 철 알아서만두 멫십 고비나 넘겼는디!”
죔손이영감은 암담한 과거에 후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는 또 흐흐흐 웃기를 잊지 않았다.
“그래두 이전 앞이 환하니 되었소옵디. 이전 다 넘었으니까나. 아마 이제 자라는 우리 자식네는 보릿고개는 옛말루나 듣게 됐소옵디.”
얼마나 변하였는가! 작년 봄까지는 그 얼마나 괴로웠고 지금은 이 얼마나 즐거운 봄이 되었는가.
북조선의 농민들은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그 넘기 힘들던 보릿고개 숙명인 듯 해마다 면할 수 없던 굶주림의 한고비 춘궁 맥령을 완전히 넘게 된 것이다.
-끝=
2016년 4월 2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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