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시는 그 사람과 같다
옛말에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과 만나면 마음속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시로 옮긴다.
이때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한 마디에도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시인과 만날 수 있다. 고려 예종 때 시인 정습명이 지은 <패랭이꽃>이란 작품을 보자.
* 한시의 제목은 석죽화(石竹花)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해서 (世愛牧丹紅 세애목단홍)
동산에 가득히 심어서 기른다. (栽培滿園中 재배만원중)
그렇지만 황량한 들판 위에도 (誰知荒草野 수지황초야)
예쁜 꽃 피어난 줄은 아무도 모르네. (亦有好花叢 역유호화총)
그 빛깔은 시골 연못에 달빛이 스민 듯 (色透村塘月 색투촌당월)
향기는 언덕 위 바람결에 풍겨 온다. (香傳隴樹風 향전롱수풍)
땅이 후미져서 귀한 분들 오지 않아 (地偏公子少 지편공자소)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맡긴다. (嬌態屬田翁 교태속전옹)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마당 가득히 심어 놓고 그 붉은 꽃처럼 부귀하고
영화롭게 살았으면 한다. 그렇지만 패랭이꽃은 그렇지가 않다. 다섯 개의 가녀린 꽃잎을 가진 패랭이꽃은
꽃잎도 작고 빛깔은 수줍은 분홍빛이다. 아무도 이 꽃을 마당에 심어 두려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오지 않은 들판의 오솔길 옆에서 바람에 맑은 향기를 날리며 피었다가 조용히 질 뿐이다.
그렇지만 패랭이꽃도 모란꽃만큼이나 아름답다. 아니 모란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모란꽃은 짙게 화장을 하고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영화배우와 같다. 패랭이꽃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순진하고 해맑은 산골 아가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도 패랭이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농사짓는 시골 농부들에게만 보여 주며 피어 있다.
하지만 시골 농부는 늘 농사일에 바빠 패랭이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분 높은 귀한 사람은
시골에 오지 않는다. 결국 패랭이꽃은 그냥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질 뿐이다.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패랭이꽃과 상관이 없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어여쁜 꽃잎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바람결에 흩날릴 뿐이다.
정습명은 이 시를 왜 썼을까? 그는 기이한 재주와 넓은 포부를 지녔던 뜻 높은 선비였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내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자기 소개서인 셈이다.
고려 예종 임금께서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뛰어난 시인이 있었단 말이냐. 어서 가서 그를 불러오너라.”
시 속에 담긴 내용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예종은 그를 만나보고는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늘 가까이 머물게 했다.
다음 시는 역시 고려 때 시인 최해가 지은 <시골집의 눈 오는 밤>이란 작품이다.
* 한시의 제목은 현재설야(縣齋雪夜)이다.
세 해의 귀양살이 병까지 들고 보니 (三年竄逐病相仍 삼년찬축병상잉)
한 칸 집에 사는 모습 스님과 비슷하다. (一室生涯轉似僧 일실생애전사승)
눈 덮인 사방 산엔 찾아오는 사람 없고 (雪滿四山人不到 설만사산인불도)
파도 소리 속에 앉아 등불 심지 돋운다. (海濤聲裏坐挑燈 해도성리좌도등)
최해도 높은 기상과 재주를 지녔던 사람이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의 능력을 뽐내어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 맡은 일에 큰 실수를 저질러 구석진 시골로 쫓겨나 있었다. 첫 번째 구절을 보면 그가 쫓겨나
이곳에 온 것이 벌써 삼 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에 병까지 들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가난한 스님과 같다고 했다. 하루 세 끼 끼니초자 잇기 어려운 힘든 형편을 하소연했다.
가뜩이나 살아가기 힘든데, 눈이 펑펑 내려서 춥기도 하고 밖으로 통하는 길이 다 막혀 버렸다.
군불도 때지 않은 추운 방에서 벌벌 떨고 있자니 창문 밖에서 엄청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했으니까 진짜 파도 소리는 아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소리가 마치
집채만 한 파도가 집을 덮쳐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는 잠을 못 이루며 오두마니 앉아서 등불 심지를 돋우고 있다. 예전 등불은 심지가 다 타면 다시 심지를
돋우어 주어야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등불 심지를 돋우는 것은 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는 행동이다.
눈이 펑펑 내렸다. 이 눈 속에 이곳을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등불 심지를 돋워서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한다. 등불마저 꺼져 버린다면 깜깜한 어둠 속, 집채만 한 파도 소리 속에
자신마저 휩쓸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물대는 등불 심지를 돋우는 모습에서 깊은 밤에
혹시 누군가 자신을 찾아 주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기다림의 심정마저 느껴진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앞서 패랭이꽃을 노래한 정습명이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습명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최해는 아무도 올 수 없는 눈 오는 밤중에도 누군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여 등불 심지를 돋우고 있다.
그는 오랜 귀양살이 끝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의 존재가 완전히 잊혀질까 봐 괴로워했던 것 같다.
결국 최해는 이렇게 불우하게 살다가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정습명과 최해의 시를 보면 이 말을 더 실감할 수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한자로는 ‘농가성진(弄假成眞)’이라고 하는데, 뜻 없이 한 말이 말한
그대로 진짜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말 속에 정령이 살아 숨 쉰다고 믿어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오늘 무심히 하는 말투와 행동 속에 내가 품은 생각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99-106.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1> 시는 그 사람과 같다|작성자 옥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