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2 맥추감사주일
신명 8:1-4/히브 11:32-40/ 마태 6:25-34
일 년의 중간, 인생의 중반에서
저는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는 또래 친구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SNS나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지만,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직접 만나기도 합니다. 10대 혹은 20대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이라 이해관계에 얽매임 없이 편하게 소소한 일상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저는 세월의 흐름을 체감합니다. 젊었을 때는 진로와 학업이 주요 화제였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직장과 결혼으로, 그 후에는 돈 버는 이야기와 자녀양육을 이야기했다면, 최근에는 아프신 부모님 봉양과 성인이 된 자녀와의 관계 그리고 곧 있을 은퇴와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다가 이런 무거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자고 오래 전 풋풋하고 꿈 많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하고 이야기할 때면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가정 안에서는 위로는 부모님 아래로는 자녀들 사이에서 책임을 지고, 사회에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덧 은퇴가 멀지 않았음을 느끼면서 은퇴 후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씁쓸해합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감사드리는 주일이기도 하면서 한 해의 절반을 무사히 보낸 것을 감사하며 남은 절반을 잘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년의 중간에 있는 맥추감사주일에 지난 세월 내가 걸어온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갈 미래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이것은 단지 나(我)라는 개인뿐만 아니라, 작게는 내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내가 다니는 일터, 그리고 우리 교회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申命記)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민족이 40년 간의 광야 여정을 거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지난 날을 회고하고 장차 새로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상기시켜 주는 책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생에 비유하자면, 이집트 탈출이 부모님 슬하에서 독립한 젊은이라 할 수 있다면, 40년 광야생활은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경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중년의 모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마감을 준비함과 동시에 곧 있을 가나안 정복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앞둔 모습은 삶의 패턴이 어느덧 익숙해졌지만 머지않아 은퇴이후 새롭게 전개될 노후의 삶에 대하여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심리로 살고 있는 장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독서에 모세는 광야생활 40년간을 회고하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거기에는 고생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너희 몸에 걸친 옷이 떨어진 일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신명 8:4)”고 극단적인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다만,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신명 8:2)”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단련시키시는 궁극적 이유는 히브리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며 번성할 것이고 …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신명 8:1)”할 역량을 갖추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말씀은 우리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혈기왕성한 10대, 20대 시절 우리는 부모님과 기성세대의 모습에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 사춘기시절에는 이유없는 반항을 하기도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지식을 습득함에 따라 보수적이고 불합리한 기성질서에 나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그 질서에 반발하고 이상사회를 향한 탈출을 감행합니다. 마치 이집트 치하에서 히브리백성들이 용감하게 홍해바다를 건너 탈출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막상 홍해를 건너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왔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로 얻는 것이 아니라, 건조하고 척박한 광야가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매일매일 행복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젊은이, 열심히 공부해 원하던 일터에서 일하게 되면 두둑한 봉급과 탄탄대로처럼 펼쳐질 것 같은 사회생활을 기대했던 사회초년생들이 결혼의 현실과 사회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음에 적잖이 당황스러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이집트 노예생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처형을 당하거나 더욱 더 심한 노예생활을 할 것입니다. 인생의 시간은 이처럼 우리를 혹독히 훈련합니다. 이 훈련의 시기, 우리는 광야에서 살아남거나 아니면 중도에서 포기하고 죽거나 하는 갈림길 속에서 생존을 향해 몸부림치며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가혹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온갖 세상걱정에 짓눌려 삽니다. 이 광야생활은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신앙인이건 비신앙인이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생의 여정입니다.
그럼, 우리 신앙인들은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깨우쳐야 할까요? 저는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길 권합니다. 하나는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믿음과 신뢰가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해하고, 그것은 삶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단련의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과 신뢰가 생긴다면, 우리는 감사하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마태 6:32)”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안배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긍정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잘되면 내 탓, 안되면 남 탓!’이란 속담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선 이러한 마음상태를 ‘투사(projection)’라고 합니다. 투사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죄의식, 열등감, 공격성과 같은 감정을 돌리는 일종의 방어기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한 나(眞我)’를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상대방과 비교하면서 나의 가치를 찾기 때문에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 허상(虛像)입니다. 또한 이들이 인식하는 나는 관계성 속에 있는 나가 아닌 독선적인 나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도 상하고 상대도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느님과 관계 속에서 나를 인식합니다. 그 하느님은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 그래서 나를 입히시고 먹이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런 하느님께 빚진 자입니다. 그 고마운 마음을 나도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인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내 이웃에게도 보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결과 나도 살고, 남도 살고, 우리모두가 살게 뵙니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주의기도가 실현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한 해의 중반 맥추감사주일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또한 오늘날 내가 있기까지 나의 노력 못지않게 주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과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기도가 있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감사와 겸손의 자세로 다가올 시간을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으로 충만하도록 기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결실을 맺게 해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