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맹재범
마술사가 사라졌다
상자를 관통하는 칼날을 피해 잔뜩 구부리고 있는
마술사의 무릎을 본 적도
입에서 뽑아내는 리본 끝에 매달린
마술사의 울먹임을 들은 적도
비둘기가 날아간 마술상자 속에서 떨리고 있는 손을 본 적도 없지만
어제만 해도 모자랐던 은행이자를
마술처럼 채워 넣은 엄마의 밤을 본 적은 있다
그리고 다시 마술처럼 불어난 대출원금을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긴 맥락을 위한 가벼운 슬픔
순응을 위한 가벼운 슬픔
세상엔 마술 같은 일이 너무 많아서
검은 장막 속으로
비둘기와 토끼와 아이들과
아이보다 조금 더 자란 아이들이 사라지고
몇 년이 지나도 장막을 걷지 않는 걸 보면
마술사도 장막 뒤로 사라진 건지
미래도 장막 뒤에 있는 건지
이런 게 맥락에도 안 맞는 진짜 슬픔
말도 안 되는
마술 같은, 꼭 마술이어야만 하는
진짜 마술은 검은 장막을 걷으며 사라진 것들을 나타나게 하는 것
그게 진짜 마술사의 일이지
사라지게 하는 것은 힘 앞에 붙일 수 있는 나쁜 말들
권력, 폭력, 너무 까만 장막
마술사라면
장막을 걷기 위해
흰 무릎으로 울먹이며
손이 떨릴 만큼 장막과 싸우고 있어야지
그게 마술인데
마술사가 사라진 지 너무 오래
나쁜 힘이 장막을 잘라서 나눠준 지 너무 오래
눈앞에 장막으로 달고 산 지 너무 오래
그러나 능숙한 마술사는 관객석에 앉아있는 법
슈퍼아저씨와 김부장님과 홍어아저씨와 떡볶이할머니도 모두
이게 뭐야 하며
무심한 듯 장막을 열어버리는 것
갑자기 환해진 무대에 모두 뛰어올라버리는 것
엄마와 누나와 여보와 강아지와 행운목까지 모두
그깟 빚이고 누명이고 가난이고 제쳐두고
사라졌던 아이들과 껴안고 울어보는 것
알고 보니 마술사였던 것
이게 마술이지
마술은 이렇게 끝나야지
정말 마술이어야지
정말
—계간 《아토포스》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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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재범 / 1978년 서울 출생. 202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