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단장의 능선
애를 끊는 아픔
중동부 전선에서 가장 큰 군사적인 역량을 지닌 아군의 부대는 미 10군단이었다. 바로 앞에서 소개한 ‘피의 능선 전투’에서도 미 10군단은 한국군 5사단 등과 함께 매우 고생스럽던 고지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피의 능선 전투와 함께 그 무렵의 대표적인 고지전으로 손꼽히는 것이 ‘단장의 능선’이라고 불렀던 싸움이다. 원래 당시 싸움을 부르던 호칭은 영어가 우선이었다. 미 10군단 예하의 미 2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를 마친 뒤 곧장 북상해 피의 능선으로부터 북방으로 11㎞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시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그 역시 다른 고지전처럼 매우 많은 인명의 희생을 수반했다.
당시 전투의 참혹함을 목격했던 서방의 종군기자가 그 접전을 ‘Heart Break Ridgeline’이라고 적었다. 심장이 찢기는 듯 비통했던 능선이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이를 단장의 능선이라고 옮겼다. 맥락이 같은 말이고, 나름대로 우리식의 정서를 담은 번역이다. 단장(斷腸)이라는 말은 임진왜란의 구국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작품이라는 곳에서도 나온다.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보이는 ‘애를 끊다’라는 말이 한자로는 단장(斷腸)이다. 창자가 끊기는 수준이니 그 고통과 비통함이 대단할 것이다.
애를 끊는 아픔
중동부 전선에서 가장 큰 군사적인 역량을 지닌 아군의 부대는 미 10군단이었다. 바로 앞에서 소개한 ‘피의 능선 전투’에서도 미 10군단은 한국군 5사단 등과 함께 매우 고생스럽던 고지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피의 능선 전투와 함께 그 무렵의 대표적인 고지전으로 손꼽히는 것이 ‘단장의 능선’이라고 불렀던 싸움이다. 원래 당시 싸움을 부르던 호칭은 영어가 우선이었다. 미 10군단 예하의 미 2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를 마친 뒤 곧장 북상해 피의 능선으로부터 북방으로 11㎞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시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그 역시 다른 고지전처럼 매우 많은 인명의 희생을 수반했다.
당시 전투의 참혹함을 목격했던 서방의 종군기자가 그 접전을 ‘Heart Break Ridgeline’이라고 적었다. 심장이 찢기는 듯 비통했던 능선이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이를 단장의 능선이라고 옮겼다. 맥락이 같은 말이고, 나름대로 우리식의 정서를 담은 번역이다. 단장(斷腸)이라는 말은 임진왜란의 구국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작품이라는 곳에서도 나온다.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보이는 ‘애를 끊다’라는 말이 한자로는 단장(斷腸)이다. 창자가 끊기는 수준이니 그 고통과 비통함이 대단할 것이다.
- 1951년 9월 벌어진 단장의 능선 전투를 위해 기동 중인 미 2사단 9연대 장병들. /US ARMY 제공
쫓기는 쪽은 북한군이었다. 그들은 피의 능선에서 상당한 인명의 희생을 냈다. 아울러 후방 차단의 위기를 느끼고서 피의 능선 983고지에서 벗어나 급히 북상한 참이었다. 따라서 그런 북한군이 11㎞ 북방에 있는 단장의 능선 일대에 견고한 방어막을 형성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1개 연대 앞세워 공격
그에 따라 선두에는 우선 사단 예하의 23연대가 섰다. 1개 연대의 병력으로도 우선 등을 보이고 쫓기면서 북상했던 북한군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봤던 것이다. 나머지 9연대와 38연대는 피의 능선 전투에서 격전을 치른 부대였던 터라 선공에는 나서지 않았다.
사태리 일대에 있는 단장의 능선은 남에서 북을 향해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로 이어진 곳이었다. 미군은 공격을 벌이기 전 이곳에 대한 관측을 통해 고지 일부에만 북한군이 들어서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따라서 그곳이 주 방어선이 아니라 전초(前哨)에 해당하는 진지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런 미군의 관측과 판단이 사실이었다면 그곳 일대에서는 격전이 벌어질 수 없었다. 미군은 여전히 북한군을 압도하고도 남을 강력한 화력과 장비를 보유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군의 관측 및 판단과는 영 다른 현실이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이곳 역시 피의 능선 못지않은 인명의 희생이 나왔던 곳이다. 전투 기간으로 볼 때는 오히려 한 달 정도 접전을 벌여야 했던 진지였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미군은 역시 오판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북한군은 그곳에 피의 능선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방어망을 이어 놓은 뒤 아군의 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선의 지휘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실수였다. 들어오는 정보와 관측 자료 등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해도 그 안에는 적의 기만과 은닉에 의한 내용의 오류 등이 들어있을 수 있다. 지휘관은 그런 점을 감안해 늘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내 판단이 맞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방책 또한 많이 품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무튼 미군은 북한군의 방어망이 대단치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급히 23연대를 북상시켜 사태리 일대에 있던 험악한 산악 고지인 단장의 능선을 향하도록 했다. 북한군은 9월 5일 피의 능선 983고지에서 몰래 빠져 나온 뒤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 단장의 능선 일대에 방어망을 이루도록 했다.<②편에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