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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성근 부산 그린트러스트 사무처장 구포역에서 명지 신포까지의 갈맷길 6-1구간 약 14km의 시작은 6코스의 분기점인 도시철도 구포역이다. 구포(龜浦)는 그 생성이 꽤 오래된 지역이다. 동래에 버금가는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양산군지(梁山郡誌)>에 따르면 ‘창(倉)을 설치(숙종9년)하였으므로 남창(南倉)이라고 하며 범방산(泛舫山) 한 줄기가 낙동강 물을 향하여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 거북이와 같다’는 연유에서 구포 지명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범방산은 갈맷길 6-2코스를 휘감는 백양산(운수산) 줄기로서 강변 쪽으로 뻗어 내린 구포의 남쪽 구남마을 뒷산을 말한다. 또 구복동(龜伏洞)이란 지명도 있는데, 낙동강 제방이 생기기 전에 구포나루터(甘同津)가 있었던 곳으로 남창에 공물을 하역하던 곳이다.
이는 구포가 지형학적으로 낙동강 하류 지역에 위치함으로써 바다와 내륙을 잇는 물산의 교역 장소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물선(貢物船), 상선(商船), 어선(漁船)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남창 근처의 강변 일대에서 3일, 8일 오일장이 섰던 구포장(場)은 낙동강 유역의 생활물자를 집산(集散)하는 교역지(交易地)로서 구한말에서 광복 전후까지 크게 번창했다. 여기에 장바닥을 누비던 각설이들이 장타령을 부르면서 문전걸식(門前乞食)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들이 불렀던 장타령은 지역의 재현된 축제를 통해 다시 살아나고 있다.
▲ 삼락체육공원을 지나면서 삼락둔치 수변길이 열린다. 샛바람 반지 하단(下端)장 엉덩이가 시러버(워)서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釜山)장 질(길) 못 찾아 못 보고/ 나리(루) 건너 맹호(鳴湖-명지)장 선개(船價)-뱃삯) 없어 못 보고/ 벌판 같은 김해(金海)장 여빗돈이 없어 못 보고/ 강건너 떡돌(德斗)장 나릿(룻)배가 없어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龜浦)장 허리가 아파 못 보고/ 고개 너머 동래(東萊)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미지기 짠다 밀양(密陽)장 싸게를 묵(먹)어서 못 보고/ 아가리 크다 대구(大邱)장 너무 넓어서 못 보고/ 이산 저산 양산(梁山)장 산이 가리어서 못 보고/ 울루루 갔다 울산(蔚山)장 하도 바빠 못 보고/ 언제 볼까 언양(彦陽)장 어정어정 못 보고/ 남실남실 남창(南昌)장 물이 짚(깊)어서 못 보고/ 들락날락 입실(入室)장 문이 닫혀 못 보고/ 코 풀었다 흥해(興海)장 미끄럽어서(러워서) 못 보고/ 똥 쌌다 구례(求禮)장 구린내가 나서 못 보고/ 깎아 말린 감포(甘浦)장 딱딱해서 못 보고/ 이리저리 못 보고 장꾼 신세가 말 아니네/ 이장 저장 못 보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품 - 품 - 각설아/ 이장 저장 다 다녀도 우리 구포장이 제일일세
구포장이 가진 교역의 지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물산의 이동이 근동의 알려진 장에서 멀리 경북 흥해로부터 전라도 구례까지 연결된다. 하기사 수운의 발달은 멀리 상주, 안동까지도 가능했던 때다. 그때 장터를 떠돌며 유랑하던 이들도 강변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 흔적 자취 없지만 강물의 흐름은 유구하다.
‘가람은 세월 따라 끝없이 흘러’ 한편 구포의 또 다른 명물로서 구포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구포교(龜浦橋)를 빠뜨릴 수 없다. 1933년 가설 당시에는 나라 안에서 길이가 가장 길었던 관계로 낙동장교(洛東長橋)라 불렸다. 14번국도가 지나는 이 다리도 2003년 태풍 매미 때 교각이 유실된 이후 새로 만들어졌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다리를 밝히던 가로등의 전기료 때문에 김해 사람들과 구포사람들이 줄다리기 시합을 벌였던 적도 있다고 한다. 양쪽이 질러대던 그 함성, 참으로 장관이었을 법하다.
▲ 이곳을 쉼터와 먹이터로 이용하는 겨울철새들, 기러기떼 한 무리 편대를 지어 비행 중이다. 이제 삼락둔치와 연결된 구포제방으로 향한다. 흔히 구포둑이라 불렀던 이곳은 1980년대만 하더라도 사상공단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즐겨 나들이 왔던 곳이다. 포장마차가 있고 강 가장자리에는 잉어며 장어구이집이 있어 소주 한잔으로 피로를 풀곤 했던 곳으로, 나 역시 이 강둑 풀밭에서 소주병 나발깨나 불었다.
소주 이야기가 나왔으니 소주와 관련된 구포이야기를 하나만 더 얹어 본다. 그러니까 광복 직후(1946년) 구포에서는 부산 소주(燒酒)의 원조(元祖)격인 ‘낙동강’소주와 ‘낙동학(洛東鶴)’이란 청주가 만들어졌는데, 낙동주조주식회사(사장 박건자)가 낙동강에 대한 외경심(畏敬心)과 향토애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부산의 일간신문에 ‘낙동강’ 가사를 모집했다고 한다. 응모 원고 심사를 부산의 문인 김정한, 정진업, 이주홍, 장하보, 언론인 손풍산 등이 했는데 요즘 각축전을 벌이는 소주시장의 광고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서라벌 옛 터전을 적시어 주던/ 가람은 세월 따라 끝없이 흘러/ 갈대에 나부끼는 두덩을 메고/ 장기에 날을 세워 옥토를 갈던/ 겨레의 자손들이 여기에 산다.
흘러라. 아 - 구비쳐라./ 바다로 가자!/ 어머니의 젖가슴인/ 낙동의 강아-. 낙동강의 강아-!
이 가사를 음악인 이상근씨에게 작곡을 청탁해 노래를 완성한 다음 술병에 악보와 가사를 붙여 더욱 유명해진 낙동강 소주는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내려온 피란민들이 낙동강 소주 한잔을 마시면서 시름을 달래었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일까.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생활상이 반영된 시인 김수영과 박인환 등의 평전을 비롯해 황순원의 소설 ‘별’에서 소주 낙동강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과연 낙동강 소주는 어떤 맛일까.
1980년대 일요일 구포둑에는 강바람에 치맛자락 펄럭이며 걷던 묘령의 여인들이 많았다. 유난히 얼굴빛이 하얗던 그들은 실은 ‘사상공단 공순이’로 불리던 신발공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부산은 한국경제의 30%를 점유했고 그 중심에는 신발산업이 있었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름난 신발 메이커는 부산에서 그 토대를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일등공신인 그들이 처했던 환경은 열악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기 위해 그들은 유독성 유기용제와 먼지구덩이 속에서 장시간 일해야 했다. 그 흰 얼굴들은 한국의 고도성장의 그늘이었다. 구포둑에 서면 그들과 마주치던 시간이 벤치에 머물고 있다.
▲ 일몰의 순간, 밤 마실 나가는 새들의 비상이 시작된다. 구포역으로부터 1km 지점, 삼락둔치로 가기 위해 다대 배후도로 아래를 지나는 굴리를 관통한다. 교각 끝부분에 모라에서 유입되는 소하천이 있다. 구포 범방산에서 발원한 범방천이 모라 운수천과 합류해 샛강인 유두강이 되었는데 모라동, 덕포동과는 멍에개(가포)나루터에서 배로 왕래하고 낙동강 본류 쪽 진등뫼(잔등)에서는 김해 덕두로 왕래하는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옛날부터 유두리는 퇴적사질토로서 땅이 기름졌는데 제방 안쪽 둔치지대에 일제 말기부터 우기를 피해 생산되는 딸기를 재배했다. 1970년대까지 삼락 딸기밭은 봄철에 낙동강 제방을 찾는 부산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였다. 그래서 삼락동의 지명을 강상청풍(江上靑風:낙동강 위의 맑은 바람), 노전낙조(蘆田落照:갈대밭의 저녁노을), 누하표전(樓下田:원두막 아래의 딸기밭)의 삼락으로 칭송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옛일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물닭 몇 마리가 말해 주는 것 삼락체육공원에서 낙동강 수변 쪽 갈밭 오솔길로 들어선다. 물닭 몇 마리와 청둥오리들이 강 가장자리에서 멀어지고 있다. 야생이란 이유 때문이다. 길들여지지 않았음의 증거다. 수많은 샛길이 있는데 1번 길에 해당된다. 다행인 것은 이 구간만큼은 아직 살아 있음이다.
길가 풀들은 겨울채비에 들었다. 몸을 최대한 낮게 하여 이른바 로제트 상태로서 겨울을 나는 나름의 생존 전략이다. 달맞이꽃, 냉이 등이다. 나는 이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
선외기 한 대 굉음과 물살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 바람에 잔잔하던 강변에 한 차례 너울이 몰려와 강변을 때리며 들썩인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강은 잠잠하고 대저둔치 남쪽 수변에 무리지어 있는 오리떼의 소란스러운 잡담만이 가득하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귓바퀴를 세워 본다. 고니의 울음소리도 들어 있다. 다섯 마리의 고니 가족이다. 반갑다.
▲ 낙동대교의 도심 끝은 남해제2지선 고속국도 104호의 종점구간이다. 강변을 따라 걷다 강물이 흘러드는 소습지에서 발길을 돌린다. 이곳을 살아 있게 하는 장치다. 주목할 일은 이 일대가 맹꽁이 서식처라는 점이다. 맹꽁이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2급 보호종으로 기존 논과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야생초지로 보전한 장소에 서식한다. 묵정논과 작은 웅덩이 등이 맹꽁이를 비롯한 양서류의 서식조건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런 말이 있다. 오늘의 흔한 종이 내일의 위기종이 되고 모레면 멸종된다는 말처럼 맹꽁이를 비롯해 수많은 양서파충류들의 존재는 오늘의 지구 생물다양성에 있어 지표종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 흔했던 개구리의 울음을 이곳에서는 봄부터 가을, 특히 흐린 날이면 만날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시 걷는다. 갈대밭 너머 백양산 자락이 새로이 보인다. 아마도 갈대밭 때문인 것 같다. 낯선 발자국들이 더러 보인다. 발자국은 뚜벅뚜벅 걷다 겅중겅중 뛴 흔적이다. 고라니다. 모퉁이를 돌자 족제비 한 마리 뛰다 말고 멈춰 섰다. 눈이 마주쳤다. 몇 초나 될까?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예전에 집 주변 밭머리에서 흔히 보던 노란빛의 앙증맞은 놈을 서로가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 삼락둔치의 매력인 듯하다.
또 있다.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기러기며 오리류의 비행이다. 가끔씩 큰 기러기들이 편대를 지어 남으로 북으로 날아간다. 길 양켠으로는 갈대며 억새가 하늘거린다. 거기에 이미 흩날린 갈꽃(盧花)의 씨들이 길바닥에 깔렸고, 햇살은 그마저도 빛나게 한다. 길은 S자를 그리며 굽이친다.
만약 이런 풍경을 오늘에 재현할 수만 있다면… 겨울, 이곳 삼락둔치 곳곳은 큰기러기를 비롯한 오리류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이웃한 염막둔치를 오가며 먹이를 찾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하구에서만 새들이 사는 줄 알고 이곳은 상대적으로 건드려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낙동강 하구의 철새도래지는 하구 모래사주와 둔치부의 수로나 호소화된 곳과 논 등의 경작지를 두루 총칭하는 표현이다. 문제는 하도 많은 개발이 이루어지다 보니 적어도 하굿둑 아래만은 ‘절대적’으로 보존하자는 바람일 뿐이지 삼락둔치나 염막을 개발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 (위)일부 구간 노선의 변경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억새들의 군무는 위안이 된다. / 낙동제방 30리길의 들머리지점인 명지 벚나무 가로수길
그런데 낙동강 살리기는 그 모든 재생 가능성을 뒤집어 놓았다. 이 길에서 진실로 바랐던 것은 사상팔경의 재현이었다. 물론 근원적으로 낙동강의 물길 자체를 이전의 삼차수 흘러내리고 강 건너 칠점산이 존재하던 시절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구둑을 비롯해 시방 하구를 지배하는 주요한 축에 대한 해체나 변화 없이는 요원한 일이다.
녹산수문이 들어서기 전인 1917년과 1930년대 김해평야 일원의 지도는 지형적 배치로 보아 천혜의 습지대임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강서구와 북구, 사상구 일원에 막힘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물길은 일대의 생태적 건강성을 담보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시각으로서 김해 녹산지역을 관통하고 있는 서낙동강과 갈래지어 나간 평간천, 조만강, 맥도강에서 지금의 사상구와 북구의 다양한 낙동강 지류들은 사상팔경에서 노래한 원포귀범(遠浦歸帆: 멀리 포구에 돌아오는 돛단배), 평사낙안(平沙落雁: 하늘 날다 모래펄에 내려앉은 기러기), 칠월해화(七月解火: 칠월의 갈대밭에 게를 잡기 위해 밝힌 횃불), 팔월노화(八月蘆花: 팔월의 강변에 피는 갈대꽃) 등의 경관이 실재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만약 이런 풍경을 오늘에 재현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해가 지고 있다. 미련처럼 서쪽 하늘이 붉다. 그 하늘에 고니 일가족이 북상한다. 큰고니(천연기념물201호)들이다. 그들도 이 항로가 안전하기에 비행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날갯짓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아이들이 같이 있었다면 이 순간을 나눌 텐데 하는 아쉬움이 스친다. 자연과 어울리지 못한 아이들이, 숲과 강과 바다와 교감하지 못한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삭막하다. 통찰(洞察)은 이런 길에서 번뜩인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라보는 눈을 뜨이게 하고, 인간 삶의 질의 근본인 자연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터득하는 것이다. 겨울 문턱, 인적 드문 갈밭 길에서 시베리아 귀객들을 만남은 이렇듯 맘을 들뜨게 한다.
주변 소습지에서 난데없이 물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인기척 때문이다. 그렇다. 이 길에서는 조용히 걸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라. 그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적과 평화는 이미 박살이 나버렸다. 유두강으로부터 3km 남짓한 지점부터 수변부는 절토되었고, 같밭과 버드나무 군락은 제거되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대신 요트계류장이며 인공수로를 넣는 것과 함께 사방으로 콘크리트 도로가 났다. 손상되지 않고 원형을 지키고 선 것은 1991년 이곳에 세워진 국궁장인 낙동정(洛東亭)이다. 1939년 당시 이 지역(동래구 사상면)에 있던 전통 국궁장인 육원정(六原亭)을 재건 및 개정(덕포동 소재)했다가 199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눈여겨보지 못했다. 활터의 예절을 비롯해 집궁(執弓)제원칙은 활쏘기에 국한될 일은 아닌 듯하다. 예컨대 주변의 지형을 살피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살펴 가슴을 비우고 복부에 힘을 준 다음, 줌손은 태산을 밀듯 앞으로 밀며, 각지손은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듯 당긴다 등인데 혹이나 화살이 목표물을 빗나갔다면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다시 살핀다는 내용은 삶의 자세에도 적용될 법한 이야기들이다.
▲ (왼쪽)염막생태 수로변 테크에서 만난 뉴트리아.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는다. / 예전에 삼락둔치는 사람과 철새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사상팔경을 노래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국책사업의 일방성만 흉터처럼 남았다.
궁사 구청천(62)씨가 짬을 내어 시범을 보였다. 그의 손을 떠난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 3~4초 후 붉은 과녁에 쿵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도 화살이 되어 날고 싶었다. 예서 낙동대교까지의 3km 구간은 일부 존치시켜 둔 갈밭을 빼곤 사람구경이다. 자전거, 산보, 인라인을 즐기거나 단체로 행사를 벌이는 사람들의 행위가 만들어 내는 소음만 가득하다. 서둘러 이 갑갑 지대를 벗어난다. 낙동대교로 가기 위해 낙동강사문화마당을 가로질러 다시 굴다리를 향한다. 길이 있으되 단절이다. 좌우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음을 뒤로하고 남해2고속지선의 종점부인 낙동대교를 건너간다.
쾌청한 날/ 낙동대교에 서면/말이 되고 싶다 보아라/ 수수만년 물길이 만든/ 저 편한 땅과 바다에 누운 하늘을 마냥 달려도 모자랄 듯/ 가슴을 온통 열어두어도/ 에누리가 없는 곳 쾌청한 날/ 낙동대교에 서면/ 나는 말이 된다(1985)
그렇다. 낙동대교에 서면 가슴을 온통 열어두어도 막힘이 없는 평평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분단의 허리 잘린 국토에서 기껏 400~500km 달려봤자 바다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현실에서 낙동대교가 보여주는 낙동강 하구의 지평선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 낙동대교가 보여주는 지평선의 파노라마는 부산이 품고 있는 또 다른 ‘보석’이다. 그 보석은 하늘빛이 다를 때마다 물빛도 달리하며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선다. 때로 ‘멀리서 용틀임하는 해일의 바다를’ 몰고 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까닭 낙동대교에서 보이는 지평선은 다대포의 아미산 자락과 가덕도 연대봉 사이에 펼쳐진 공간으로 낙동강이 천삼백리를 굽이쳐 흐르다 마지막 용틀임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다. 밤이든 낮이든 그냥 펼쳐진 경관을 즐기면 된다.
삼락 남단 갈대밭 습지에 기러기들이 내려앉는다. 그나마 이곳은 손 대지 않음으로 인해 경관적으로나 생물서식처로서는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낙동대교를 경계로 두 공간의 그림은 극과 극으로 변했다. 어둠속에서도 미국미역취 군락의 노란빛이 출렁인다. 저 너머 일직선의 불빛이 만들어낸 선이 하구를 점령했다. 예전에는 없던 불빛덩어리다. 있다손 치더라도 드문드문 있어 적막하기까지 했는데 하구 곳곳에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굵은 띠를 형성하게 됐다.
▲ 갈맷길 6-1구간 개념도 약 1.5km의 낙동대교를 건너 맥도생태공원으로 내려선다. 맥도생태공원에서 염막까지의 약 5km 구간 역시 삼락둔치와 비슷한 상황이다. 물길을 끌어 들인 것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었는데, 수로 가운데 얼기설기 설치된 데크의 목적을 납득할 수 없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휴식을 취하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게 미안하여 ‘벚나무 30리 낙동제방’으로 올라섰다.
넘쳐나는 것은 외래종들이다. 이미 지역 신문을 통해 일대가 귀화식물의 천국임을 밝힌 바 있지만 수중과 그 언저리에 살고 있는 동물 또한 자생종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배스와 불루길은 기본이다. 붕어는 어쩌다 잡힌다고 한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포즈까지 취해 주고는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뉴트리아(늪너구리) 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놈으로 인한 피해가 하도 커서 환경부는 뉴트리아를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했다. 졸지에 마구 잡아도 되는 짐승이 된 것이다. 생물종 고유의 특성과 본디 서식처를 무시한 무분별한 외래생물종 도입이 야기한 결과치고는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환경부는 박멸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글쎄다. 그런다고 황소개구리가 사라지고, 배스가 없어졌던가? 허망한 물음이다.
염막을 거쳐 명지 근처, 잿빛개구리매 한 마리 너울거리며 난다. 불빛이 피어난다. 귀가를 종용한다. 이제 희미하게 길이 보일 뿐, 저녁놀 바람에 살랑이던 갈대며 억새의 몸짓조차도 어둠에 묻혔다. 새들의 뒤척임도 없다. 문득 외롭다. 그럼에도 이 길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야 할 미래이기 때문이다. <연재 끝>
길잡이 명지-염막-맥도생태공원-낙동대교- 삼락둔치-구포역 14km
교통 도시철도 3호선 구포역
시내버스 | 급행 1009번(김해공항) 일반버스 59번, 15번, 110번,126번 종점 | (하단방면)일반버스 58, 58-2 /좌석버스 58-1 /마을버스 강서구 10~17번
출처 : 월간산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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