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가잿골 사요.”라는 말이 있다.
지금이야 천수답이 거의 없지만 하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천수답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장날 읍내에 나가 큰소리치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손전화다 인터넷이다 해서 연락수단 편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자는 너나없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오죽하면 재래시장 살리기 운동 같은 것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 옛날엔 읍내장날 사람을 통해 서로간의 안부를 전하거나 애경사의 기별도 하고 생활용품도 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장날은 생면부지에게도 “어디서 왔는가?” “어디서 사는가?”를 묻는 것은 아무런 흉도 아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가뭄이 심한 해에는 장바닥에서 만나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유독 큰소리로 아랫배를 쑤욱 내밀면서 “ 나, 가잿골 사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가뭄은 흉년, 흉년은 배고픔이던 시절 가잿골은 산골 마을이지만 산세山勢나 수림樹林이 좋아 가물어도 개울물이 마르지 않으니 제때 모내기를 할 수 있어 가뭄이 들수록 풍작이 되어 가뭄이 드는 해에는 읍내장날 나가면 가잿골 사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그랬다고 한다.
누구나 출생지, 출신학교를 자랑스레 생각하며 살고 있다지만 과연 무엇이 자랑스러운 것인가를 알고 있을까?
우리고장에서는 명량대첩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명량해전鳴梁海戰이 대승으로 이어지게 된 전초전이 있었던 「옥천성산전투玉泉城山戰鬪」 혹은 「옥천대교 들 전투玉泉大橋들 戰鬪」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옥천은 크고 작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진 분지 형태를 갖춘 지형이면서 넓은 들을 가졌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쌀을 생산하는 곳으로 청와대가 그 쌀을 대통령의 하사품으로 사용할 정도라는 소문도 들은바 있다. 그런데 그 너른 들판은 丁酉再亂 당시 유명했던 명량해전의 전초전지前哨戰地로서 치열한 격전지였다는 사실이다.
정유년 왜적은 재침을 하면서 전라도를 침공한 후 북진할 계획으로 병력을 수륙水陸으로 나누어 육군은 보성 장흥 강진을 거쳐 벽파진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해남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길목이 바로 지금의 강진과 해남의 경계를 이루는 병치兵峙재(옥천면 성산리)였으며 재를 넘으면서 펼쳐지는 너른 들이 옥천 들(平野)이다.
이곳에서 해남 송지 현산 강진 영암 장흥 보성 등지에서 모인 의병 1만여 명은 정유년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간 왜군 2만여 명을 맞아 치열한 격전 끝에 거의 전사하고, 왜적 또한 크게 패하여 달아나게 된다.
명량대첩 하루 전의 일로 이날의 격전을 충의사록忠義士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군사郡史 등 참고문헌에는 「옥천성산전투」 또는 「옥천대교들 전투」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편 이순신 장군은 같은 해 9월 12일 진도벽파진에 도착하여 같은 달 16일 역사적인 명량해전의 대첩을 거두게 되는데, 이는 육로를 통하여 이순신장군의 후방을 공격하려던 2만 왜군을 옥천성산전투에서 사흘간의 치열했던 격전의 결과로 저지, 격퇴시킨 것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 날 「몰(沒)무덤」이라고 하는 만의총(萬義塚)은 적이 물러 간 뒤 시신을 거두어 합장한 것으로 옥천면 성산리 해남에서 강진으로 가는 18번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명량대첩을 이야기할 때 울돌목 바다에서의 이순신 장군의 승리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 승리의 이면에는 우리고장 이름 없는 1萬 義兵의 옥천성산전투玉泉城山戰鬪에서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자랑해도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2008. 3. 8)
첫댓글그런 역사가 있엇구만요^^잘보고 갑니다.^^
옛날 부터 우리 강진사람이 똑똑하고 야물고 그리고 용감했단말이 사실인갑네요 덕분에 공부했습니다 감사요
건덕굴양반님 멋진글 잘 보았습니다.옥고창필 하시길...
님이 갖고계신 향토사학을 향한 대단한 조예와 깊이가 느껴집니다. 고맙습니다.
옥천성산전투의 의병을 이끌었던 윤윤, 윤신,윤익경, 윤치경,윤동철 의병장은 강진군 군동면 화방리 "화암사花巖祠"에 배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