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스 사도 -
☆ 2015년 나해 7월3일 금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청주] 믿는 이들의 행복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에페 2,19-22
† 복음 요한 20,24-29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렸다
(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강한 불신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교회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다루는 에페소서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을 이루고 있다고
선언한다. 예수님께서 그 건물의 모퉁잇돌이시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된다(제1독서).
★ 요한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 사도에 대해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토마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신다. 그러나 더 복된 이들은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에 과연 손을 넣었을까요, 아니면 넣지
않았을까요? 본문은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넣는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있고, 또 그의 손가락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도 하지요.
아주 쉽게 우리는 마치 토마스 사도보다 굳건한 믿음을 가졌다는 듯이
토마스 사도를 의심 많고 믿지 못하는 인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상처를 확인하려고 한 것은 그가 “보고 믿은”
세대에 속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토마스 사도를 포함하여
“보고 믿은” 사도들과 “보지 않고도 믿는” 후대의 신앙인들을 대비시킵니다.
물론 복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를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더구나 오늘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아 묵상한 이 복음은
이 사도를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그 믿음을 “보고 믿은” 이들에게서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우리의 생명이
조상들을 통해 대대로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듯이, 우리의 믿음은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에페소서는
사도들이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하는 교회의 기초라고 선언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강직하고 솔직하여 거짓과는 타협을 모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었으며, 확실하기만 하면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여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불신앙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키워 주고 돈독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사도를 기억하며, 우리가 받은 신앙에 감사드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
2015년 나해 7월3일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요한 20,25)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때때로 왕따 당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있었는데
나는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똑같은 체험을 공유할 수가 없지요.
자기들끼린 재미있었다고 깔깔대고 웃지만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해도
나의 체험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토마 사도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내가 없는 동안 주님이 다녀 가셨다네요.
분명한 사실일진대 기분이 나빠집니다.
난 도저히 못믿겠다고 고집불통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체험을 하였다면 함께 기뻐합시다.
토마 사도는 나가서 다른 제자들이 체험하지 못한
다른 체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응 그래 참으로 기뻤겠구나. 난 나가서 이런 체험을 했어."
내가 체험 못한 것 때문에 억울해하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좋은 체험을 나누고 공유하면 함께 성장하지 않을까요?
결국 나 혼자서만 좋은 체험을 다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내가 직접 다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간접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다른 사람의 좋은 체험을 나의 것으로 삼아봅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7월3일 금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의심과 믿음이라는 삶의 양면성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안에서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는 소중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만든 고정된 틀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참다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어리석은 의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믿음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신앙은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주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부활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통하여 타인의 아픔을
진정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여전히 우리의 이웃들의 고통을 통해 드러납니다.
아픈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더욱 선명해지는 십자가의 상처에서 뜨거운 부활은
더욱 환하게 부활합니다.
의심의 부활이 아닌 믿음의 참된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상처가 부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성 토마스 사도 축일
2015년 나해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9-22
복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4-29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엘
갔습니다. 아버지는 탕 속으로 들어가셔서 아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애야
들어와라 ‘시원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탕 속으로 들어갔다가
기겁을 하고 나옵니다. 시원하기는커녕 물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다.’ 아이의
피부에는 탕 속의 물이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목욕을 마치고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에 붕어빵을 1000원 어치 샀습니다. 아버지는 3개,
아들은 2개를 먹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을 합니다. 아들아!
‘배부르지!’ 아들은 말을 합니다. ‘2개먹은 아들 배부르면 3개먹은
아버지는 배 터지겠네!’ 아버지가 아들의 머리에 군밤을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그러더랍니다. ‘때려라, 때려 네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나!’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바람 풍자를 아버지가 바담 풍이라고 읽으면 아들은 당연히 바담 풍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가 바람 풍이라고 읽으라고
야단을 치면 아들은 그 말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늘 바담
풍이라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야단치기 전에 아버지는 자신의
발음을 교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의 신앙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박해의 시대에는
힘들고 어렵지만 신앙은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기쁨이었고,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정표였습니다.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면 더욱 열심히 살 것 같지만 역사는 꼭 그런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옷을 갈아입은 유럽교회는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열매를 먹으면서 참된 자유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점점
사라지고, 고색창연한 건물인 교회만 남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교회가
텅텅 비어가는 것은, 젊은이들이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옷을 입고 지내는
부모님들에게서 진리와 자유를 주는 신앙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도 그렇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서 갖은 시련과 박해를
겪었지만 신앙은 조금씩 열매를 맺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몇 시간씩
걸어서 성당엘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서 고개를 넘어 성당엘 갔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성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판공 때는 몇 시간씩 기다려서 성사를
보았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탄과
부활에는 성당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숨이 막히는 줄 알았습니다.
유년시절 만원버스를 탔던 기억과 비슷합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 연도는 누가 가르쳐 주시 않아도 가족들이 모이면 함께하는
일과였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은 어른들에게서 자주 듣던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많이 변했습니다. 성당이 5분 거리에
있어도, 미사시간이 자주 있어도 주일 미사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른
중요한 일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기도
빠듯하기 때문에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공부해야 하고, 좋은 대학에 가야하고, 성공해야 하는 것이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나누고, 봉사하는 것은 어른이
되면 해도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죽하면 봉사를 하면 점수를 준다고
합니다. 점수를 받는 봉사는 이미 봉사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다.’ 그리고 치유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어려서 신앙을 보고 배운 저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앙은
보고 배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보여주고, 가르쳐 주시 않는
신앙을 어찌 배울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곧 시들기 마련입니다. 화병의 꽃은 결코 아름다움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물질문명, 과학, 이성, 산업화, 자본주의, 성공, 출세,
권력이라는 격랑이 세차게 몰아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믿음은 어쩌면
바람 앞의 촛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뜨거운 신앙이 진리의 소금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체험적으로 알려준 토마스
2015년 나해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9-22
복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4-29
체험적으로 알려준 토마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 예수님 외에 몇 명 더 있으면 사후문제 어떨까요?
더 있다고 달라질 게 뭐 없다고 봅니다. 죽음 후의 문제는 같을 겁니다.
내가 어떤 걸 경험했다는데도 설명하기 힘들고 믿거나 관심도 안 둡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늘에 속한 사람 즉 신앙인과 비 신앙인 문제지요.
가톨릭인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앙하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알려준 토마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믿는 이들의 행복|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7월3일 금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요한 20,24-29)
제1독서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9-22
복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4-29
믿는 이들의 행복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영접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요한11,16) 거기에 있었고,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토마스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를 위한 배려를 볼 수 있고,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신 말씀이 ‘못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
고한 토마스의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그렇지 않든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임마누엘'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께 대한 깊은 사랑을 갖고
2015년 나해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9-22
복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4-29
3M이라고 하고 아마 포스트잇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실 3M의 연구팀은
강력한 접착제를 개발하려고 했지요. 그러나 직장동료의 책갈피가 자꾸
떨어져 불편함을 보고 ‘필요할 때 붙이고 자국이 안 남게 떼어내는’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포스트잇이 만들어졌고, 이 포스트잇은
3M의 대표 상품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계산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콜럼버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구의 둘레가 29,000Km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에 따라 자신이 가고자 했던 인도까지의 거리가
4,345Km라고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원을 위해 포르투갈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지구 둘레가 대략 40,000Km라고 주장했던
에라토스테네스의 이론을 내세워서 터무니없는 항해를 지원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사실 에라토스테네스의 계산은 거의 정확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확한 계산이 오히려 신대륙을 발견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지요.
반대로 콜럼버스는 잘못된 계산 덕분에 오히려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이 분명히 맞는다 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인간적인 계산을 내세워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계산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 좋은
쪽으로 분명히 흐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에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죽음 뒤에 갖게 되었을 절망감을
떠올린다면 이런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게 됩니다. 더군다나
인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기준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 사도에게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라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믿지 못하겠다고 외쳤던 사람이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인간적인 판단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바로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계산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대한 깊은 사랑을 갖고 주님의 관점에 맞춰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불신의 마음이 생겼을 때도 곧바로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헤아리지 않는다. 자기의 사랑 자체가 이미
확신이므로 헤아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사랑은 나누어 갖는 것이므로 반드시 넘쳐흘러야 한다
(G.아궤예스).
토마스 사도 동상.
행복해지는 방법
UN에는 매년 각 나라의 세계행복지수를 발표합니다. 그런데 2015년
올해에는 1위의 자리에서 벗어나 3위를 차지했지만, 몇 년 동안 계속해서
1위를 차지했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바로 ‘덴마크’입니다. 가보지
않은 나라이지만, 이 나라가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우선 비오는 날이 1년 중 절반이며, 겨울에는 하루 4시간 정도만 해가
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겨울에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살만한 나라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행복지수 1위에 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국민들의
대다수가 다음 세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이들은 초를 밝히고 명상의 삶을 좋아합니다.
둘째, 주위 환경 탓을 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다보니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행복해지는
방법, 어떻게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 같습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며, 남 탓을 하지 않는 생활태도, 또한 나 혼자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함께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진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행복을 향해 오늘 위 세 가지를 실천해 보았으면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김현수(토마스) 신부님의 은경축 미사가 오늘 5시
답동성당에서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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