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군지(陰城郡誌)에서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년 ~ 1533년)와 관련된 음애동기(陰崖洞記) 원문을 옮기고 번역문을 실었다. 1963년에 나온 것과 1996년에 나온 郡誌를 참고했는데 그리 길지 않은 글인데 둘다 원문에 문제가 많았다. 이를 일일이 수정하였고 번역문을 실었다.
음애(陰崖) 이자(李耔)는 《계탄서원기(溪灘書院記)》에서 언급하였었다. 음성에서 살다 충주 팔봉마을 인근 토계(兎溪)에서 살았다. 조선시대에 지금 음성군 소이면은 충주목(忠州牧)에 속했다. 문집 《음애집(陰崖集)》에 실려 있는 글은 다음에 소개한다.
◇음애동(陰崖洞)
---《陰城郡誌, 1996년》에서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중종조(中宗朝)에 한성판윤, 형조판서, 우참찬을 지낸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년 ~ 1533년)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어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음애동(陰崖洞)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이곳 반석(盤石)위에 재실(齋室)을 짓고 수업(修業)하였다고 한다. 암벽면에 “탁영선탑 음애동(濯纓仙榻 陰崖洞)”이라 각자(刻字)하였다.
조선후기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낸 박종영(朴宗永)의 ‘음애동기(陰崖洞記)’를 참고로 적는다.
원문
《陰崖洞記》縣監 朴宗永 撰
君子之去己遠而後之望之者仰首翹足若將朝暮
過(遏, 원문에 遏자로 써있으나 過로 고친다. )者盖(蓋)爲其老成(원문에 盛자로 써있으나 고친다.)之典型長存愷悌之遺澤不泯故也 是或得於國乘野史寢遠斷爛之餘猶且憾慨傾暮不能忘情况(況)乎 過(원문은 遏이나 過로 고친다.)其門壇之舊墟親攀杖屨之遺躅其風韻德光僾然於巖泉林木之間者乎 昔在中廟己卯有哀貞北門之禍一時善類盡入網打如靜菴趙先生之道德學文正大忠直者卒不免奇禍時陰崖李公首居黨籍擯逐鄕里遂屏居忠州田廬優游以終世傳公先(원문 充을 先으로 고친다.)行人之役赴京時副於南袞 袞踵病頗死公知其非古人而萬里原濕旣與件行也 故誠心救治得愈 袞因此德之遂緩其禍得者終于家以是謂公幸 余謂每(원문 母를 每로 고친다.)非公之幸乃不幸也 公昔當其禍作也 若得與趙靜菴同歸章章卓卓垂耀後世不其榮矣哉 而今因 一逆袞之右護得以安軀保子孫謂公幸於是云則是以小人之腹度君子之心也 惡見其有得哉 公所居址今爲樵牧鋤犁之地 父老猶指默曰彼乃陰崖相公之宅墟信乎 典型之尙有遺澤之不泯能使百世之下曠感而若將過(원문 遏을 過로 고친다.)之也 傍(亻房, 원문에는 사람 인변에 방 방자가 합쳐진 글자다.)有溪澗小洞跨巉巖有柱礎痕意公觀源泉息偃之所然 無可爲徵 余嘗一至其所周覽興情彷徨躑躅於空山荒谷之間慨嘗小之戕賢悲前修之被齮(원문은 巉이나 齮로 고친다. 巉자는 巉巖으로 붙였다.) 見其古巖竪立風磨而色潔則有以想公平日介石之志不磷之操(원문은 授자나 操로 고친다.) 竟千載而彌貞聽共鳴泉汩汩澈澈流瀉不息則亦 足以想公清時放逐排憤不平濯纓行吟之遺蹟 余然後知公之精(원문 淸을 精으로 고친다.)神奕靈不昧常存留斯洞感發鳥獸之聲音衣被草木之光華不與夫腐 土游氣同歸斯滅也 明矣 噫此舊荒廢幽潛無足爲賞 而余之未能遺棄者非但以公之德之名而已 余之先祖治川先生與公有同禍之誼余又入公門爲舘(館)甥其尊慕景仰不可比擬於尋常往古之哲則今見公盤桓傲(원문 舊를 傲로 고친다.)居 惡得不記(원문 書를 記로 고친다.)其一二以誦公賢於無窮遂爲之記
<표점정리>
《陰崖洞記》 縣監 朴宗永 撰
君子之去己遠, 而後之望之者, 仰首翹足, 若將朝暮過者, 蓋爲其老成之典型長存, 愷悌之遺澤不泯故也. 是或得於國乘野史寢遠斷爛之餘, 猶且憾慨傾慕, 不能忘. 情況乎過其門壇之舊墟, 親攀杖屨之遺躅, 其風韻德光, 僾然於巖泉林木之間者乎!
昔在中廟己卯, 有哀貞北門之禍. 一時善類, 盡入網打. 如靜菴趙先生之道德學文, 正大忠直者, 卒不免奇禍. 時陰崖李公, 首居黨籍, 擯逐鄕里, 遂屏居忠州田廬, 優游以終.
世傳公先行人之役赴京時, 副於南袞. 袞踵病瀕死, 公知其非古人, 而萬里原濕, 旣與伴行也, 故誠心救治得愈. 袞因此德之, 遂緩其禍, 得者終于家. 以是謂公幸, 余謂每非公之幸, 乃不幸也.
公昔當其禍作也, 若得與趙靜菴同歸, 章章卓卓, 垂耀後世, 不其榮乎哉? 而今因一逆袞之右護, 得以安軀保子孫, 謂公幸於是云, 則是以小人之腹度君子之心也, 惡見其有得哉!
公所居址, 今爲樵牧鋤犁之地. 父老猶指默曰: “彼乃陰崖相公之宅墟.” 信乎! 典型之尙有, 遺澤之不泯, 能使百世之下, 曠感而若將過之也.
傍有溪澗小洞, 跨巉巖有柱礎痕, 意公觀源泉息偃之所然, 無可爲徵. 余嘗一至其所, 周覽興情, 彷徨躑躅於空山荒谷之間. 慨嘗小之, 戕賢悲前修之被齮.
見其古巖豎立, 風磨而色潔, 則有以想公平日介石之志, 不磷之操, 竟千載而彌貞; 聽其鳴泉汩汩澈澈, 流瀉不息, 則亦足以想其淸時放逐, 排憤不平, 濯纓行吟之遺蹟. 余然後知公之精神奕靈, 不昧常存留斯洞.
感發鳥獸之聲音, 衣被草木之光華, 不與夫腐土游氣同歸斯滅也, 明矣!
噫! 此舊荒廢幽潛, 無足爲賞, 而余之未能遺棄者, 非但以公之德之名而已. 余之先祖治川先生與公有同禍之誼, 余又入公門爲館甥, 其尊慕景仰, 不可比擬於尋常往古之哲. 則今見公盤桓傲居, 惡得不記其一二, 以誦公賢於無窮? 遂爲之記.
<번역문>
《음애동기(陰崖洞記)》
글: 현감 박종영(朴宗永)
군자(君子)가 나에게서 멀어진 지 오랜 뒤에도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머리를 들고 발꿈치를 들며 마치 아침저녁으로 그분의 곁을 지나가는 듯이 여기는 까닭은, 그 노성(老成)한 덕의 전형이 오래도록 남아있고 온화하고 덕스러운 유택(遺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더러 국사(國乘, 國史)나 야사(野史)의 세월이 오래되어 단절되고 산멸된 기록 속에서 얻더라도 오히려 탄식하고 흠모하며 차마 잊지 못하는 법이다. 하물며 그 문단(門壇)의 옛 터를 지나며 손수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 노닐던 남겨진 자취를 오르고(情況乎過其門壇之舊墟, 親攀杖屨之遺躅, 장구지소(杖屨之所)는 지팡이[杖]를 짚고 짚신[屨]을 신고 노닐던 곳이란 뜻으로 많이 쓰는 표현이다.구(屨) 대신 리(履)를 써서 장리지소(杖履之所)라고 하기도 하는데 같은 뜻이다. ), 그 풍운(風韻)과 덕의 빛남이 바위와 샘물, 숲과 나무 사이에 어렴풋이 드러나 있음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옛날 중종(中廟) 기묘년(1519)에, 절의를 지키다 애통하게 화를 입은(哀貞) 북문의 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때, 일시(一時)의 선량한 선비들(士林)이 모두 그물에 걸려들 듯 화를 입었다. 정암(靜菴) 조광조 선생과 같이 도덕과 학문이 곧고 크며 충직한 분조차 끝내 기이한 화를 면치 못하였다. 당시 음애(陰崖) 이공(李公, 李耔)은 당적(黨籍)의 으뜸에 올라 시골로 배척되어 쫓겨났고, 마침내 충주의 전원 시골집에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다가 생을 마쳤다.
세상에 전하기를, 공이 일찍이 사신의 일로 경사(北京)에 갈 때 남곤(南袞)이 부사(副使)가 되었다고 한다. 남곤이 발에 병(踵病)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공은 그가 옛 도의를 지닌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만리 먼 사신길에 이미 동반하여 길을 떠난 사이(旣與伴行也)였으므로 성심으로 구치(救治)하여 낫게 해 주었다(誠心救治得愈). 남곤이 이로 인하여 은혜로이 여겨 마침내 그 화를 완화해 준 덕분에 집에서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공의 다행이라 말하지만, 나는 매번 이것이 공의 다행이 아니라 도리어 불행이라 말하노라.
공이 옛날 그 화를 당했을 때 만약 조정암(趙光祖)과 더불어 함께 죽음으로 돌아가 뚜렷하고 우뚝하게 후세에 빛을 늘어뜨렸다면 어찌 영광스럽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제 한 역적 남곤의 보호에 힘입어 몸을 보전하고 자손을 안존하게 되어 공이 이에 다행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소인의 배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니 어찌 얻은 바가 있다고 보겠는가!
공이 살던 옛 터는 이제 땔나무하고 소 치며 밭을 가는 땅이 되었다.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여전히 손으로 지목하며 잠잠히 말하기를(默曰), “저곳이 바로 음애 상공의 옛 집터라네.”라고 하니, 참되도다! 선현의 전형(典型)이 아직 남아있고 유택이 사라지지 않아, 능히 백 세(百世) 뒤의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깊이 감회를 느껴(曠感) 마치 그분의 곁을 직접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구나.
곁에 시냇가 작은 골짜기가 있고, 험준한 바위에 걸쳐(跨巉巖) 주춧돌 흔적이 있으니, 생각건대 공께서 물이 솟아나는 근원을 바라보며 쉬어 누우시던 장소(意公觀源泉息偃之所然)였겠으나 증명할 길은 없다. 내가 일찍이 한 번 그곳에 이르러(余嘗一至其所) 둘러보며 감회를 일으켜, 공허한 산과 황량한 골짜기 사이를 방황하고 거닐었다. 일찍이 그들(소인배)을 하찮게 여기며 개탄하고, 어진 이들을 해쳐(戕賢) 앞선 선현들이 모함을 입은 것(被齮)을 슬퍼하였다.
그 옛 바위가 우뚝 서서 바람에 갈려 색이 깨끗함을 보고는, 공의 평소 돌처럼 굳은 의지와 깎이지 않는 지조가 천 년이 지나도록 더욱 바름을 생각해보게 되고(想公) 그 울어예는 샘물이 맑고 깊게 졸졸 흘러 쉬지 않음을 듣고는, 역시 그 분이(想其) 맑은 세상에 쫓겨나 분함을 달래고 불평을 누르며 갓끈을 씻고 거닐며 시를 읊던 남긴 자취를 생각해보기에 족하다. 나는 그런 뒤에야 공의 정신이 밝고 영험하여 어두워지지 않고 항상 이 골짜기에 남아있음을 알았노라.
새와 짐승의 소리를 감발(感發)시키고 풀과 나무의 빛과 화려함을 입혀주어, 저 부패한 흙이나 정처 없이 떠도는 기운과 함께 쓰러져 소멸하지 않음이 명백하도다!
아! 이곳은 예전부터 황폐하고 깊숙이 묻혀 있어 족히 감상할 만한 것이 못 되지만, 내가 차마 버려두지 못하는 것은 단지 공의 덕망과 이름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선조 치천(治川, 박광우(朴光佑, 1495~1545) ) 선생께서 공과 함께 사화(士禍)의 화를 입은 도의가 있고, 내가 또 공의 가문에 들어가 사위(館甥)가 되었으니, 그 존경하고 경모함은 예전 보통의 옛 현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공께서 거닐고 유유자적 거처하시던 자취(盤桓傲居)를 보고서, 어찌 그 한두 가지를 기록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로써 공의 현명함을 무궁토록 기리지 않겠는가? 마침내 이에 기록을 남긴다.
1996년 《陰城郡誌》에서
1963년 《陰城郡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