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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은총을 사는 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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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을 사는 법
오늘은 은총을 사는 법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은총을 사는 사람이 되면 좋을 텐데 그리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선 은총을 파괴하거나 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라고 말씀하시듯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임을 모르고 파괴하는 사람은 은총을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술, 담배, 마약으로 심신을 파괴하고 죄로 우리 영혼을 파괴하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성전이라면 우리 공동체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의 성전임을 모르고 복마전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은총을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은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시 이 사람들도 그것이 은총인 줄 모르기에 그것을 허비 또는 낭비하는 겁니다.
지금 꽃이 폈는데 그 꽃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지나쳐버린다면 은총의 허비지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데 꽃보다 더 아름다운 이웃을 원수로 여긴다면,
원수로 여기지 않더라도 공동체 형제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선물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은총을 허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지난 은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은총이었네!’라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젊고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데
젊음과 건강이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것을 모르고
은총을 살지 못하다가 그것을 다 잃고 난 뒤에야 은총이었다는 사람들입니다.
젊음이나 건강이 아니라 정반대의 시련도 은총인데
늦게야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아니라 하느님의 단련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이지요.
다음으로 은총을 현재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되고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성사적인 사람들입니다.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인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에서 하느님이 발생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함께 사는 사람과 하는 일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데 더 나아가 은총을 당겨서 산다면
이처럼 복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을 먹이기에 앞서
아이가 가진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 감사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적은 것이 이 많은 군중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안드레아와 달리
오병이어나마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이 적은 것으로
그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해주실 은총에 대해 미리 감사드리는 것일 겁니다.
우리도 뭔가 청탁한 뒤 꼭 들어주실 거라고 믿고 미리 감사드린다고 하듯이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철석같이 믿는 주님께서 미리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미래의 은총을 현재 믿는 것이 바로 은총을 당겨서 사는 법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그 모범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지금 젊지 않고 늙었더라도 그래서 약함과 병고뿐일지라도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믿는다면 천국 은총을 내다 보고 당겨 살라고 하시고,
그 어떤 경우에도 현재의 어려움 너머 미래의 은총을 당겨 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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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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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셨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표징 너머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해 걱정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셈법, 계산이 밝으니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 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은 곧 성체성사를 통해서 생명의 빵을 끊임없이 제공하시게 되리라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이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영적인 양식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18,15). 하였습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 것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인간적인 셈은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을 빵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지요?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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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 명예, 권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모하고 손해만 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굳이 찾아서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변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평화가 오기도 합니다.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이 있어서 따뜻해지기도 합니다. 작은 물방울이 떨어져서 큰 바위에 구멍을 내기도 합니다. 물방은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물방울이 시간을 만나면 단단한 바위에도 구멍이 납니다. 물방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서 큰 숲을 이룬 사람을 보았습니다. 매일 도토리를 심었습니다. 30년이 지나자 황무지는 울창한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숲에 개울이 생기고 새와 짐승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남미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부님을 따르지 않던 현지인들도 이제는 신부님을 가족처럼 대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성당의 열쇠를 내주지 않던 교우들이 지금은 성당의 모든 열쇠를 신부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따뜻함과 정성이 얼어있던 교우들의 마음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과테말라에 후임 신부님이 한국에서 오면 이제 더 힘들고 어려운 콜롬비아로 선교를 간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열정에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헌신에서 바위에 구멍을 내는 물방울의 힘을 보았습니다. 공소 사목을 신청하는 선배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지낸다고 합니다. 오래되어 쓰러져가는 공소를 신축하기 위해서 농산물을 팔고, 서울에 가서 모금을 한다고 합니다. 공소사목을 신청하지 않았으면 굳이 신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서울로 가서 모금 강론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30년 넘게 사목을 하였으니 이제 어엿한 본당에서 모든 조직이 갖추어진 본당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배 신부님은 기꺼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주교님께서 본당으로 보내셨을 겁니다. 특수사목을 했으니 본당으로 보내는 것은 상식적인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마음은 아니지만 보좌 신부기간이 길어지는 후배 사제들을 위해서 본당은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은 저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4년 전에 이곳 뉴욕의 미주평화신문으로 왔습니다. 미주지역이라는 바위에 계란이 되어 신문홍보를 다니려고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태풍이 불었습니다. 그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미주가톨릭신문은 철수했습니다. 팬데믹 태풍은 끝나고 이제 신문홍보를 다니고 있는데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강좌 기획팀’입니다. 열정과 헌신만으로 사제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치밀한 기획과 노력으로 주교님의 마음도 열었습니다. 말씀과 영성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신부님들을 모시고 신앙강좌를 시작하였습니다. 팬데믹으로 지친 교우들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주교님을 모시고도 강좌를 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열정을 가진 분들과 함께하니 저도 기꺼이 계란이 되려고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쟁쟁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하기 힘들었던 ‘하느님나라’를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광주리를 모아보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솜털로 바위를 치는 열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고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군대로 불의한 자들을 심판할 수 있었지만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솜털로 바위를 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바위를 깨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이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편한 길 꽃길도 갈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계란’이 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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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의 설립자인 토머스 에디슨은 일명 발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으며, 특별히 음악과 영화 등 대중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그의 전기를 읽으며 꿈을 키웠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전혀 다른 길을 살고 있지만, 그의 삶과 열정은 어린 저에게 매우 흥미로웠고 닮고 싪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하겠지만, 저는 이 말이 더 인상 깊습니다.
“나는 평생 단 하루도 일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재미있는 놀이였다.”
오랫동안 특수사목을 하다가 본당사목을 맡으니 처음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본당 일이 적지 않은데, 여기에 신학교에서의 강의와 기타 외부 강의 등까지 겹쳐서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살다 보니, 체중도 많이 줄고 피곤함이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앞서 제시했던 토머스 에디슨의 삶 전체가 모두 재미있는 놀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체중이 줄고 피곤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하는 모든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은 당연히 힘듭니다. 힘들기 때문에 일에 대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재미있는 놀이는 될 수 없을까요? 놀이를 통해 자기 삶에 활력을 가져오는 것처럼 지금 삶 전체는 충분히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니 지금 하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역시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금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 재미있는 놀이와 같습니다. 일이라 생각하면 의무감에 차서 힘듦이 뒤따라옵니다. 희생, 봉사가 힘들다고 하는 이유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이면 보수를 받아야 하는데, 보수가 없으니 쉽게 포기하고 또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놀이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놀이동산에 가면 돈을 내지요. 놀이에 대한 보수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일이 아닌, 참 기쁨의 놀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봉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빵과 물고기를 늘리신 기적을 행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배불리 먹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작은 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이는 보통 삶 자체를 놀이처럼 즐깁니다. 그래서 봉헌도 놀이처럼 즐겼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봉헌을 하나의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역시 커다란 즐거움이며 기쁨입니다. 이 안에서만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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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갖는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많은 대가를 얻는다(알렉산드리아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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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력의 지혜
-모든 덕의 어머니-
어제 뜻밖의 인터넷 강의를 통해서 깊이 공감한 내용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물론이고 인간이 지녀야 할 세 자질,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중 특히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균형감각은 객관적 안목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바로 분별력의 지혜를 뜻합니다. 아무리 열정이 책임감이 좋아도 분별력의 부족으로 눈먼 열정, 눈먼 책임감이 된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가 강조한 것 역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지도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는 말 역시 분별력의 지혜를 뜻합니다. 매사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직시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베네규칙중 한 대목입니다.
“아빠스는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한다.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베네딕도의 중용사상을 대표하는 구절입니다. 분별력은 과격하거나 지나치지 않음이요, 깊은 생각에서 나온 절도있는 태도입니다. 베네딕도는 이 중용사상의 핵심인 분별력의 지혜를 모든 덕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물론 일상의 삶에서 모든 이들에게 참 중요한 것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주목되는 바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라는 대목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공성이불거, 즉 공이 이루어져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내 자리가 아니다 싶으면 지체하지, 집착하지 않고 떠나는 것을 의미하니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후의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 분은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6,14-15)
눈먼 대중의 광신적 행태에 휘말리거나 휩쓸리지 않고, 대중의 덧없는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유혹이다 싶을 때는 지체없이 그 자리를 훌훌떠나 즉시 외딴곳을 찾았던 참으로 분별력의 대가였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멋진지요! 참으로 눈먼 군중의 무지를 일깨우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이렇게 제자리를 아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이기도 합니다. 겸손과 일맥상통하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온 백성의 존경을 받던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사도들에 대한 조치는 얼마나 지혜로운지요! 다음 한마디로 혼란한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는 가말리엘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名不虛傳), ‘분별력이 대가’답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5,38-39)
얼마나 멋진 통쾌한 분별력의 지혜인지요!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무관심의 방치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두루두루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하느님께 맡기고 때가 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며 불필요한 간섭의 행위는 일체 배제하고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건드리지 않는 것 이 둘은 무책임의 방임이나 방치가 아니라 깊은 분별력 지혜의 소산이자 공동체의 평화 공존을 위해서도 필수적 요소들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중세기 영국 베네딕도회 수도회 출신으로 ‘스콜라학의 아버지’라 칭하는 성 안셀모 주교 학자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안셀모는 “주님을 보호하는 도구”, 또는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사람, 도구”라는 이름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름뜻대로 영국 국왕의 간섭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신 성인으로 다음 평가를 통해서도 뛰어난 분별력을 지니신 성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신앙은 극히 깊었고 예지는 뛰어나고 그의 행위는 거룩하고 마음은 경건했으며, 그의 웅변은 유창했고 생활은 타인의 모범으로서 충분했다. 그는 전력을 기울여 사업을 행하고 끊임없이 성서를 묵상하고 모든 덕에 출중했다.”
성 안셀모와 동시대를 살았던 성 도리도네오의 증언입니다. 안셀모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76세를 사셨으니 당대로 보면 장수하신 편인데 병세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삶을 사신 것을 보면 참 경이로우며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들인 성인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좋은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하시어 참나의 성인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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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군중이 몰려듭니다. 주님은 필립보에게 음식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공관복음은 이 대목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제자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쓰고 있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음식의 주인을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아이’였다고 말합니다.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의 주린 배 앞에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 앞에 이 작은 음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성적인 생각으로 말하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보잘것없는 음식이 예수님께 바쳐지고 예수님은 그것을 다시 나눠 주시자 큰 무리의 굶주림이 해결되었다는 얘기가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는 묻지 마십시오. 오병이어보다 더 큰 기적을 우리는 보았고 그 기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 인류가 천상에 들 수 있다는 희망의 사건 말입니다.
주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누가 이룬 것입니까? 우리의 봉헌을 통해 주님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기적을 이루십니다. 아이에게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끼 식사로는 많은 양입니다. 또 일주일 양으로는 적은 양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음의 아이처럼 자신의 것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선뜻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세상의 기적을 만들어 가십니다. 나를 통해 가정에 기쁨을 주시고 나를 통해 행복을 선물하십니다. 나를 통해 위로를 세상에 전달해 주십니다. 나눔과 봉헌 그것이 기적이 시작입니다. 또한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첫걸음입니다.
다시 살리는 주님
작년부터 독학으로 배운 것이 있습니다.
일본말로 ‘킨츠키’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금을 바르다. 혹은 입히다.’정도로 번역됩니다.
‘킨츠키’는 깨진 그릇이나 항아리를 다시 붙이는 예술입니다.
물론 다시 붙은 그릇은 대부분 이전처럼 사용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붙여진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물론 저는 그릇을 붙이려고 배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깨진 성상들을 다시 살리려고 배웠습니다.
넘어지고 떨어져서 한쪽이 깨지거나 떨어져 나간 성상을
다시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깨어진 선 위로 더 멋진 금분을 입혀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깨졌어도 괜찮아요.
제가 더 멋진 작품으로
세상이 하나밖에 없는 작품으로 만들어 드릴께요.
깨지면 어떻습니까. 부서지면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다시 붙이시고 멋진 옷을 입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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