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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비화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자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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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해변에서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추는 드라비다안 청소년들. |
남인도 답사는 나의 오래된 열망이자 서원이었다. 작년 1월과 2월에 동인도 오릿사주를 중심으로 돌았던 답사보다도 더 기대해왔던 것이다. 어쩌면 15년 전부터 인도를 드나들기 시작한 이래 북인도와 중인도에 이어 마지막으로 남은 미답의 땅이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남인도는 데칸고원 아래의 땅을 통칭하고 그 땅에 사는 원주민은 드라비다족이다. 검은 피부 때문에 미개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으나 그것은 인류역사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드라비다인들은 인류 4대 문명발상지 중에 하나인 인더스문명을 일으켰던 뛰어난 종족으로서 기원전 10세기쯤 철기문화를 소유한 아리안들에게 밀려 데칸고원 밑까지 이동했던 것이다.
우리의 남인도 답사는 우선 기원전 3세기 때 활동했던 아쇼카대왕이 남긴 흔적을 찾고 확인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다 알다시피 부처님이 2500년 전에 바라문 귀족들이 공고하게 지배하는 사회에서 외도를 무너뜨리는 혁명과도 같이 정법을 드러내셨다면 아쇼카대왕은 부처님 열반 이후 200년 만에 불교를 세계화시킨 전륜성왕이었으니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남인도에는 불교의 유적만 산재할 뿐 그 세는 미미했다. 아쇼카대왕 시대부터 기원후 5, 6세기까지의 융성했던 불교문화나 의식은 모두 힌두교에 습합되었거나 희미한 그림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답사일행은 남인도 지리에 밝은 아제여행사 구광국 거사를 길잡이로 삼았고, 대원사 티벳박물관 관장 현장스님과 곡성 관음사 주지 대요스님이 법사로 참여했고 두 분의 비구니스님이 일행을 외호했다. 나는 답사를 총기획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다각(茶角)은 목포대 조기정 박사가 자청했고 두 분의 여 교장 선생님과 사회적으로 저명한 몇몇 분들은 신분을 내려놓고 물 흐르듯 꽃 피듯 동참했다.
아쇼카대왕이 전법사를 보낸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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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대왕의 전법사가 활동했던 까르마이 꾸탐 사원 터를 지키는 반쪽 부처님. |
남인도에는 안드라프라데시, 카르나타카, 타밀나두, 께랄라 등 4개 주가 있다. 일행은 아라비아해를 접한 인도 28개 주 가운데 가장 작은 께랄라주부터 답사하기로 했다. 께랄라 땅도 역시 아쇼카대왕이 전법사를 파견하여 불교를 일으킨 곳이어서다. 일행은 께랄라주의 주도(州都) 코친 국제공항에 자정쯤 도착하여 숙소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1555년 포루투칼인들이 코친의 왕을 달래기 위해 지어준 마탄체리 궁으로 찾아가 아치형 창문 의자에 앉아서 비로소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순식간에 끈 것은 17세기 때 그린 궁의 벽화가 아니라 궁전 앞에 선 몇 그루의 고목 아쇼카 트리다. 나뭇잎이 아쇼카대왕이 지녔던 칼과 흡사하여 이름이 그렇게 붙은 나무다. 우리나라 소나무처럼 인도인들에게 사랑을 받는지 어느 명소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가 아쇼카 트리다.
일행은 강행군하는 데 몸을 풀기라도 하듯 바닷가로 나간다. 바닷가에는 오래된 교회 건물들이 들어서 마치 유럽의 어느 해변에 온 듯한 느낌이다. 일행은 코친항구가 1503년 포루투칼에 함락되던 그해 수사들이 세운 ‘성 프란시스 성당’을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들른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하기도 했고 코친에서 생산한 후추 무역권을 따내어 돈을 번 바스코 다 가마의 초상화와 묘비가 보인다.
현장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께랄라주는 기독교 신자가 19%에 달하는 기독교문화가 왕성한 곳인데,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양치기 출신인 토마스(도마)가 아라비아해를 건너 인도로 와 께랄라 지역에 7개의 성당을 세우고 선교한 영향일 것이라고 한다. 그렇긴 하지만 부처님이 힌두교 비슈누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포섭된 것처럼 예수 역시도 언젠가는 범신론을 지향하는 힌두교의 비슈누 화신으로 습합되어 힌두사원에 봉안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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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마이 꾸탐 사원 터의 석양. |
문화는 물과 같이 흐른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문화의 특징이다. 나를 흥미롭게 한 풍경은 중국식 고기잡이 모습이다. 고정된 기중기 같은 것에 그물을 달아놓고 고기를 잡는 방법은 중국 광동성 어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오래 전부터 중국과 남인도 간에 열린 바닷길로 교역이 활발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쇼카대왕이 육로와 바닷길을 통해서 그리스까지 전법사를 보냈고, 기원 전 1세기 때는 남인도의 비단이 로마까지 갔다는 증거들이 있으니 남인도는 동서문화 교류의 허브였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식 고기 잡는 모습이 관광 상품화 되어 피부가 검은 드라비다족 어부들이 측은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중기 그물에 달라붙은 한 팀이 잡는 하루 어획량이 2kg밖에 안된다고 하니 어부들이 생계를 유지하려면 관광 상품이라도 돼야 할 형편인 것이다.
청년들의 말춤에 느낀 한국인의 저력
해변에서는 젊은이들이 우리 일행을 보자마자 갑자기 두 손목을 ‘X’자로 교차하더니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춘다. 흥을 돋게 하는 말춤 역시도 문화이동의 방증이다. 예전에는 문화이동이 육로나 해로를 통해 퇴적물 쌓이듯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전파를 타고 즉각적으로 오간다는 사실이 차이점이다. 남인도 드라비다족 청소년들에게 강남스타일의 말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청년대중문화를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남인도 께랄라주 해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자못 유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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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중기 원리를 이용한 중국식 대형그물로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 모습. |
일행은 다시 알라라 뿌자 힌두사원으로 가본다. 오래된 힌두사원은 하나같이 고대 불교사원이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종교란 삶의 지혜를 주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힌두의식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게 하나 둘이 아니다. 사원 안쪽에 저울이 하나 있는데 부자는 힌두 신에게 자신의 몸무게만큼 금은보화를 보시해야 하고, 갓난아이는 자신의 몸무게만큼 과일을 보시해야 한다는데 이 정도면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 종교가 아닐까 싶다. 더구나 저울 뒤편으로 인공연못이 있는데 목욕을 하면 멸죄가 된다고 하여 한 사내가 몸을 씻고 있는 게 보인다. 이는 일찍이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멸죄를 위해 아침저녁으로 목욕하는 바라문 산가라바에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충고한 바 있지만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다만, 상의를 탈의한 몇몇 힌두 사두들에게는 존경의 염이 솟구친다. 하의는 검은 도티(남자용 치마)를 입고 있는데, 그 이유인즉슨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니까 검은 도티를 입고 있는 기간에는 금욕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달마대사처럼 머리가 훌렁 벗겨지고 통통한 매부리코에다 구레나룻수염이 얼굴을 감싸고 있는 한 힌두 사두는 3년째 금욕생활을 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 수행자와 비교해도 조금도 뒤질 것이 없는 듯하다.
일행이 아쇼카왕의 전법사가 활동했다는 까르마이 꾸탐 사원 터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이 야자수 너머로 지고 있었다. 남인도에 파견된 전법사의 이름은 라키타(Rakkhita). 전법사는 법사 신분이면서도 왕을 대신하는 고위외교관이었을 것 같다. 전법사가 머무는 사원은 불법을 펴는 도량이자 치외법권 지역이었을 터이다.
까르마이 꾸탐 사원 터에는 상반신 한쪽이 훼손된 좌불이 봉안돼 있다. 이교도의 훼불인지 자연적인 파손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상적이다. 일행은 석양을 등지고 참배한다. 일행뿐만 아니라 남인도의 여인들도 합장하며 고개를 숙인다. 부처님이 반쪽 몸임에도 불구하고 께랄라 사람들에게 불심(佛心)의 불을 지펴주고 있다. 아쇼카대왕 명령으로 파견된 전법사의 혼이 반쪽 부처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일행도 좌불 주위를 탑돌이 한다. 언젠가는 부처님 법신이 온전하게 복원되는 날이 올 것이고, 그때는 께랄라 땅에 불법이 흥기하리라.
[불교신문 2884호/2013년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