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 빛깔의 보름
김혁분
손톱을 깎았다
아버지 기일 날 묻어뒀던 꽃술을 꺼냈다
손가락에 동여매 주던 봉숭아꽃 같은 빛깔의
보름,
그때, 손가락마다 보름달이 뜰 거라고, 달이 뜨면 희소식이 올거라고
아버지 술 냄새가 여름밤의 은하수처럼 엄마의 빈 자리마다 꽉 차 있었다
골목에 아이들이 흩어지고 내가 가리키던 북극성은 손끝에서 지고
손톱 속 보름달이 뜨기도 전에 보름
보름은 가고
화단에 봉숭아꽃이 돌아와 피었다
빈집 가득, 저녁노을이 꽃술 냄새처럼 내려 앉았다
바람 멈춘 여름밤이면 뒤척임이 길어
봉숭아꽃물 손끝에 물들 때까지,
삼베 이불 한 귀퉁이에 봉숭아 꽃물이 들었다
엄마 없이 찾아온 첫 달거리처럼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봉숭아는 인도와 말레이시아와 중국 남부가 원산지이고, 쌍떡잎 식물이며 갈래꽃이다. 봉숭아는 키가 60cm정도이고, 1년생 화초로서 관상용으로 아주 많이 재배된다. 꽃은 7-8월에 2~3개씩 피며, 좌우로 넓은 꽃잎이 퍼져 있다.
그 옛날에 한 여자가 봉황의 꿈을 꾸고 봉선이라는 딸을 낳았다고 한다. 봉선이는 아주 훌륭한 거문고 연주자로서 임금님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궁궐에서 돌아와 앓아 누웠다고 한다. 어느날 임금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봉선이는 병석에서 일어나 거문고를 연주했고, 임금님은 봉선이의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명천에 백반을 싸서 동여매 주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봉선이가 죽은 뒤 그녀의 무덤에서 빨간 꽃이 피어났고, 사람들은 그 빨간 꽃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그 꽃을 봉선화(봉숭아)로 불렀다고 한다.
김혁분 시인의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시’이며, 이제는 제일급의 시인으로서 그 ‘존재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손톱을 깎고, 아버지의 기일 날 그동안 묻어두었던 꽃술을 따르며, 아버지가 동여매 주던 봉숭아꽃물을 생각해 본다. 손톱은 봉숭아꽃이 되고, 봉숭아꽃은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달이 된다.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임금님)가되고, 그 아버지는 엄마를 일찍 잃은 어린 딸에게 “손가락마다 보름달이 뜰 거라고, 달이 뜨면 희소식이 올 거라고” 한 여름밤의 은하수처럼 수많은 꿈과 희망을 뿌려주셨다.
하지만, 그러나 “골목에 아이들이 흩어지고 내가 가리키던 북극성은 손끝에서 지고/ 손톱 속 보름달이 뜨기도 전에” 보름달은 지고 말았다. 시인의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여주며, 한여름 밤의 은하수처럼 수많은 꿈과 희망을 뿌려 주셨던 아버지 역시도 하늘나라로 떠나가셨고, 이제는 머언 후일 날, 아니, 해마다 아버지의 기일 날이 되면 또다시 봉숭아꽃으로 피어나셨다. “빈집 가득, 저녁노을이 꽃술 냄새”로 내려 앉으면 “엄마 없이 찾아온 첫 달거리처럼” “삼베 이불 한 귀퉁이에 봉숭아 꽃물이 들었다.” “바람 멈춘 여름밤이면 뒤척임이 길”었다는 것은 엄마와 아버지를 일찍 잃어버린 어린 소년의 만고풍상의 삶을 뜻하고, “봉숭아꽃물이 손끝에 물들 때까지”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이제는 제일급의 시인이 되기까지의 그 기나긴 시련과 고통의 삶을 뜻한다. 김혁분 시인의 존재의 역사는 봉숭아꽃의 역사이고, 봉숭아꽃의 역사로서 그 존재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그 꽃이 활짝 피어난다.
시인은 언어로 말하고 언어로 꿈꾸는 사람이며, 언어는 그의 붉디 붉은 피이자 생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봉숭아꽃은 그녀의 존재의 꽃이자 기둥 말이며, 그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은 영원히 계속된다.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으로 존재의 싹이 움트고,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으로 엄마와 아버지를 생각한다.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으로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으로 시를 쓰고, 그 존재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한국어의 꽃밭을 가장 아름답고 환하게 가꾼다.
엄마 없이 찾아온 첫 달거리처럼 핀 봉숭아꽃, 그 봉숭아꽃으로 피어난 보름달의 역사는 영원히 계속된다. 추억은 아버지를 성화시키고, 첫 달거리의 소녀를 미화시키며, 그 아름답고 슬픈 꿈 많은 소녀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김혁분 시인의 여름은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이며, 사계절의 변화 없이 일년 내내, 아니, 한평생 그 꽃술에 취해서 그 아름답고 슬픈 행복한 삶을 산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하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슬픈 그녀의 이야기는 ‘천일야화’처럼 계속되고, 그녀는 언제, 어느 때나 영원히 늙지 않는 첫 달거리의 소녀가 된다.
아아,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이여!
아아, 영원히 늙지 않는 첫 달거리의 소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