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와 자물쇠
이 수 영
청명한 봄 날씨다. 뉴스에서는 미세먼지가 어떻고, 외출 시 마스크를 해야 하느니 마느니, 말이 많지만 이 화창한 봄에 그냥 집에만 있다는 것은 엄청난 벌이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달비골 산책길을 지나 원기사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여기서부터 해발 658미터 앞산 정상까지는 숨이 턱에 와 닿는 가파른 오름이다. 중턱에 있는 원기사 관음전 동굴 입구의 맑은 샘에서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절 입구의 툇마루에 앉아 아픈 다리도 쉴 겸 숨을 고른다, 가끔은 절을 찾거나 산을 오르는 객을 위해 떡 혹은 과자 등의 간식을 내놓기도 하는데 오늘은 내가 너무 일찍 찾아 왔는가보다.
다시 길을 오르면 8부 능선쯤에 달비골과 그 건너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제법 잘 생긴 바위가 있다. 이곳은 원기사 쪽에서 앞산을 오르는 객들의 쉼터이다. 거기서 숨 몇 번 크게 쉬고 잰 걸음으로 오르면 몇 분 안 되어 앞산 정상에 이른다. 대도시의 가까운 곳에 눈만 뜨면 이런 멋진 산을 바라보고 오를 수 있는 대구 사람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이다.
정상을 밟고 안지랑 골 방향으로 내려가면 케이블카 종점이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면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앞산 전망대에 닿는다. 시원하다. 대구 시내 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어느 도시의 전망대도 이처럼 대도시의 드넓은 시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는 흔치 않다. 한참을 머물며 안내도에 표시된 주요 건물과 주변의 산들을 관망하다 언제 부턴가 전망대에 걸리기 시작한 자물쇠를 바라본다. 이게 어느 나라의 풍습인지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렇게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풍광이다.
헤어지지 말자고, 영원히 한 몸이 되자고 자물쇠를 거기 그렇게 꽉 잠궈 놓고는 열쇠는 찾을 수도 없는 곳에 내던져 버린단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사랑의 맹세가 허망하다. 아무리 묶어두고 싶어도, 영원히 그곳에 그렇게 있으라고 묶어 놓아도, 거센 비바람에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녹슬고 망가진 흉물로 전락한 자물쇠의 무덤들을 보면 그냥 슬퍼진다.
인간이 의지가 겨우 그 쇳덩이 하나에 의지할 만큼 약해졌다는 말일까! 그렇게 변해버린 자물쇠를, 한번 버려진 열쇠가 다시 찾아가는 것은 가능하기나 할까? 누군가 보듬어 주기를 기다리면서 잔인한 세파를 견디고 있는 자물쇠의 무덤 앞에서 나도 누군가의 가슴을 잠궈 놓고 떠나버린 열쇠는 아닐런지 밑도 끝도 없는 상념에 젖어든다. 전망대의 난간도 그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의 무게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 본 전국의 어느 곳이든 전망이 좋은 곳에는 그 자물쇠의 무덤이, 사랑의 무덤이, 잊혀진 언약들이 녹슨 쇳덩이로 전락한 흉물이 되어 거기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매달아 놓아야만 안심이 되는 사랑의 약속이라면, 몇 년이 안 되어 녹슬고 흉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랑의 징표라면 인간의 사랑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옛날의 자물통은 지킴이로서의 기능에 인간의 염원을 담고 있는 주술적 장치였다. 가장 많은 것은 ‘이리 오너라’의 상징인 대문 빗장부터 곳간이나 반닫이, 문갑 등에 채워지는 물고기 모양의 자물통이었다.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재물을 잘 지켜주고 다산을 기원하거나 집안의 누군가가 용으로 승천하는 것처럼 과거에 급제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연꽃이나 모란, 당초무늬나 매화 나비 등의 문양을, 그리고 거북이를 비롯한 십장생의 모양으로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자물통에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의 경제권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안방마님의 열쇠 꾸러미가 그러했다. 사대부가 돈을 밝히거나 재물에 연연하는 것을 곱지 않게 보던 시절 선비는 그냥 책만 읽으면 되었고, 곳간의 살림이나 모든 경제의 실권은 안방마님의 허리춤에 매달린 쇳대 꾸러미에 있었다. 그걸 가지지 못할 정도의 가난한 집이라 하더라도 안방 주인은 삯바느질이나 품을 팔아서라도 살림살이를 감당해야 했다.
요즘은 열쇠가 거의 없어졌다. 디지털시대가 되면서 디지털 키나 도어락의 기능은 대부분 열쇠 대신 비밀번호로 바뀌었고 지문 인식기 등 첨단의 기기들이 생겨나면서 젊은이는 좋을지 모르지만 노 인들은 또 한 번의 수난시대를 맞았다
아들집에를 가도 깜박깜박하는 기억력 때문에 한번 나오면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단다. 그래서 아예 집안에 구속(?)되기 일쑤이고 모든 아파트 이름은 이니셜과 외국말로 바뀌고 동네 이름도 옛날의 무슨 동이 아니고 무슨 길 몇 번 로로 바뀌고부터 더욱 더 생소하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아들네 딸네 집에는 안 간단다.
은근히 그것을 노려 최첨단의 디지털 키를 달지는 않겠지만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열쇠나 자물쇠는 뭔가 비밀스러운 것,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을 감추거나 혼자서만 즐기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물건이다.
자물쇠형 인간이 인내와 칩거,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닫힌 인간형을 상징한다면, 열쇠형 인간은 개방적이고 왕성한 호기심으로 모든 사물과 사람들을 두루 품으려는 인간형이다.
개인적으로도 우리는 각자의 가슴속에 몇 개씩의 자물쇠와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 열쇠와 자물쇠가 조화를 이루어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끝 -
2017. 4. 5.
첫댓글 열쇠의 변천사와 명소에있는 열쇠 더미를 새로운 문화로 보았으나, 다른측면에서 살펴보니 열쇠 무덤으로 흉물입니다. 예리한 통찰력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자물쇠의 무덤이란 말에 공감합니다. 그렇게 맹세하고 꼭꼭 잠겨놓은 명세가 지금도 유효한지, 버려져 찾을수 없는 열쇠는 되지않았는지, 녹슨 자물통의 다짐보다 굳게 닫힌 마음을 상호 열수있는 열쇠가 필요한때 입니다.감사합니다.
열쇠전망대에 열쇠를 메달아 놓는 것이 좋지만 한 것은 아니군요! 예리한 관찰력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한다고 무조건 따라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위 환경에 어울리지 않게 녹쓴 자물통이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면 흉물스럽고 환경에도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관광지는 상인들의 상술이 연인들의 심리를 교묘히 자극하여 이런 현상을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자물쇠와 열쇠의 조화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대구 앞산은 시민들이 싑게 찾아 쉴 수 있는 보배로운 휴식처... 잘읽었습니다. 최상순드림
산속이나 전망이 좋은 곳에 흉칙하게 메달려 있는 자물통들. 사랑의 언약으로 메달아 놓은 것 같지만 녹슬은 모습을 보면 사랑도 녹슬어가고 있지 않을 까 하는 의구심을 느낍니다. 자물통을 풀어 청소도 하고 가꿀 수 있도록 열쇠가 필요함을 공감합니다.
'좌물쇠형 인간과 열쇠형 인간' 나는 어느 쪽에 속할까? 열쇠형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봄이 찾아 온 앞산의 아름다운 골짜기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고 자물쇠 무덤, 열쇠 꾸러미, 열쇠형 인간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혀주시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등산하신 길을 따라 봄이 가기전에 저도 등산할까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