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머리에 위치한 백두산, 각종 종교ㆍ우상숭배주의 발원지 돼 현장르포 팀은 2년 전부터 지리산에서 시작해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중요한 영적현장을 차례차례 밟아 올라왔다. 원칙상 금강산을 통해 백두산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남북분단의 현실 앞에 남한에서는 설악산을 끝으로 백두대간을 마감하고 이번 호에서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의 머리에 해당하는 백두산을 탐방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중국의 연변, 심양 현장에서 지역과 사람들의 사상까지 장악한 용ㆍ불교ㆍ도교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 뒤에서 역사하는 흑암세력의 실체를 파악하고 북한복음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 심양을 거쳐 백두산의 문 이도백하에 이르러르포 팀은 한국 인천공항에서 출국하여 중국 도선(도유센) 공항에 현지 시간 9시10분(한국보다 1시간이 늦음)에 도착해 현지 가이드와 합류했다. 공장이 집중되어 있고 석탄을 가정 난방의 주요 원료로 쓰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매연으로 가득했다. 고속도로로 40여 분을 달려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심양의 서탑 한 민박집에서 중국에서의 첫날을 보낸 르포 팀은 다음날 백두산을 오르기 위한 길목에 있는 이도백하로 가기 위해 심양북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 한 가운데 커다란 독수리와 해 모양의 우상이 마치 심양을 상징하듯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사단이 태양신 숭배 사상을 이용해 중국의 중요 거점마다 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기차로 12시간을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중국의 모습은 한국의 여느 들판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논보다는 옥수수 밭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중국현장에서도 르포 팀에게 이도백하로 가는 기차 속에서 한족 임향(32) 자매와의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셨다. 19세에 결혼하여 한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임향 자매는 남편과 이혼 후 심양에 있는 남자친구를 만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공산주의 사상(유물론)이 사상화 되어 영적 세계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였던 임향 자매는 르포 팀의 복음을 듣고 자신의 영적인 배경을 말했다. 자신에게 귀신이 들어왔다고 말하는 어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아 정신분열증 환자로만 취급했다고 하면서 영적인 존재를 믿기가 무섭고 인정하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르포 팀의 조선족 집사는 중국어로 복음을 전하며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다. 마음이 열린 임향 자매는 강하게 부인하던 처음과는 달리 관심을 갖고 시인하며 집중해서 듣다가 평상시 궁금하게 생각했던 중국에서 큰 문제가 됐던 법륜공에 대한 질문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표는 거기까지였는지 자매의 목적지인 선인초 역에 도착하게 됐고 어쩔 수 없이 연락처를 교환하고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르포 팀은 이도백하 역에 내려 다음날 백두산에 오르는 것이 단순한 관광이 아닌 영적인 큰 의미를 지닌 발걸음임을 되새기고 현장을 장악하고 있는 흑암의 세력을 꺾는 기도를 드렸다.
1. 개산툰에서 바라본 두만강과 북한 땅.
2. 현장르포 팀이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3. 심양 고궁의 대표건물 대정전.
4. 르포팀이 두만강 건너 100여 미터 앞 북한의 기차역과 집들을 바라보고 있다.
5. 백두산 소천지 옆의 손삼요 우상 앞에 절하고 있는 중국 한족. 왼쪽 빨간 옷을 입은 아이의 옷을 들추면 다리가 아닌 뱀 꼬리의 모양을 하고 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영적현장을 밟으며다음날 일찍 르포 팀은 버스를 타고 잘 닦인 2차선 산길로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좌우로 미끈하고 곧게 뻗은 백두산의 진귀한 소나무 미인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기로 유명한 백두산은 이날 청명한 날씨로 르포 팀의 출발을 순조롭게 했다. 백두산은 해발 2750m의 장군봉(병사봉)을 주봉으로 16개의 거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천지를 정상에 품고 있는 산이다. 과거로부터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 민족을 비롯한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숭배되어온 영산으로 ‘신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불함산이라고도 불리었다. 가장 성령 충만이 임할 수 있는 자리가 그동안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귀신에게 속임을 당하는 자리요, 사단을 숭배하고 귀신을 받는 자리가 되어 온 것이다. 천지 또한 단지 산위에 있는 큰 호수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의 놀랍고 깊은 섭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자리인 것이다.
▲ 천문봉에서 바라본 천지르포 팀은 천지 기상관측소에서 서남쪽으로 400여m, 해발 2670m 높이의 천지 북쪽에서 가장 높은 산마루인 천문봉에 올라 천지를 볼 수 있었다. 천지는 말할 것도 없이 백두산에서 가장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는 명승지이다. 화산이 분출되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화산분출구 호수인 천지는 해발 2257m이고, 제일 깊은 곳은 373m로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은 호수이다. 천지의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싸여있는 산봉우리들은 맑고 깨끗한 천지 물속에 비치는 기암괴석, 하늘과 물, 구름과 산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천지를 내려다보며 백두산의 영적 의미를 복음적으로 재해석하며 기도와 찬양으로 복음의 문화를 선포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가 끝나자 바람이 조금씩 거세지더니 멀리서부터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르포 팀은 천지를 내려가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천하 절경의 장백폭포, 그러나 아쉬움 남아장백폭포를 거쳐 천지로 올라가는 나무로 된 계단을 따라 한참을 걷자 탁 트인 협곡에 천지로부터 떨어지는 거대한 장백폭포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깎아지는 절벽과 검은 흙, 파괴되지 않은 자연환경이 노랗고 빨간 가을의 정취와 함께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천지 북쪽 1250m의 낭떠러지에 위치해 있는 장백폭포는 중국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폭포로서 낙차가 68m나 된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처럼 걸려있는 폭포를 하늘로 통하는 강이라는 뜻의 대통천하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두산 천지호수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던 르포 팀은 뜻하지 않은 장벽을 만나게 됐다. 8월 1일부터 낙석의 위험성 때문에 출입을 금한다며 관리인들이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원래는 가파른 들판이었던 곳을 한국 기업이 투자하여 편하고 멋진 길을 만들고 30년의 계약기간을 약속 받았지만 출입이 전면통제 되면서 결국은 손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그런 식으로 중국정부는 온천, 호텔 사업에서도 부당이익을 취하기로 유명하여 지금은 유럽 투자자들도 조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 소천지와 지하삼림르포 팀은 큰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 가운데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소천지를 향해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용을 얻는 천’이라는 뜻의 83도 온천수 취룡천이 수증기를 뿜으며 흐르고 있었다. 이름대로 마치 용의 기운을 얻은 양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형상이 매우 신비로워 보여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둘레 260m, 수심 10m의 소천지는 장백폭포 하류 3km 지점에 위치한 자그마한 2개의 호수로 주변이 벚나무에 둘러싸여 매우 고요했다. 하지만 소천지 옆에는 당나라 때 중국 중약의 창시자였던 손삼요 약사를 모셔놓고 향을 피워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었다. 우스운 것은 어떤 한국 사람이 해마다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찾아와 우상의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제사를 지내고 간다는 것이었다. 내려오는 마지막 길에 울창한 숲과 협곡을 이루는 지하삼림을 거쳐 백두산 탐방을 마무리지었다.
◇ 연길 연변 지역의 복음 가진 언약백성과의 만남곧바로 르포 팀은 버스를 바삐 타고 이도백하에서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송강과 안도를 지나 연길까지 5시간을 달렸다. 연변 지역의 다락방 멤버들이 복음가진 목회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연길 중앙교회로 모여 르포 팀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길에 도착한 본지 편집국장 장일영 목사와 배혜숙 교수는 여독도 풀기 전에 80여 명의 조선족 및 한족들이 모인자리에서 복음 메시지를 전했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자리가 됐다. 연변은 조선족 자치주로 주도는 연길이다. 면적은 남한 크기의 반 정도이며 길림성 동북부에 위치한다. 지역적으로 북한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인구 약 211만 명 정도가 살고 그 중 조선족이 50%를 차지한다. 연변의 거의 모든 옥외 광고는 한글로 되어 있으며 사람들이나 옷, 집, 길거리를 봐도 전혀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게 했다. 연길은 아주 가난한 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외국이나 각 지역의 대도시로 떠나는 추세였지만 이곳이 중심이 되어 모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센터로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족들이 연길로 모이면서 대부분의 상점들을 한족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들은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는 한족이 무조건 들어와서 차지하고 있고 심지어 농촌도 거의 한족화 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6. 심양에서 이도백하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한족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7. 용정시의 용두레.
8. 백두산 장백폭포◇ 두만강 따라 회령과 인접한 삼합지역 북한복음화 기도해다음날 아침 9시 르포 팀은 용정일대와 두만강가의 개산툰으로 차를 몰았다.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국경지역으로 개산툰 건너편이 북한의 삼봉지역이다. 이곳은 두만강 자체가 국경이고 철조망도 없었지만 건너편에는 100m 간격으로 북한주민들이 중국으로 몰래 넘어가지 못하도록 보초를 서는 북한군들이 보였다.
두만강의 발원지는 백두산이다. 총길이는 490km로 한반도에서 3번째로 긴 강이다. 폭이 100여m 남짓으로 르포 팀의 기대와는 달리 광석채취로 오염되어 거품을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두만강 너머로 마치 모델처럼 만들어 놓은 마을이 보였는데 사람은 하나도 없는 전시용 마을이라고 했다. 두만강 상류로 강을 따라 1시간 정도를 올라가 삼합에 도착한 르포 팀은 강 건너 회령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망강각에 올랐다. 북한과 중국을 오갈 수 있는 무역로인 두만강 다리를 중심으로 북한의 회령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르포 팀은 조선족 허봉녀씨(64)와의 만남을 갖게 됐다. 회령 뒤 청진에 고모와 친척 언니들이 살고 있어 통행증을 만들어 자주 북한을 들어간다는 허씨는 자신들 1년 먹을 양식을 북한친척은 5년을 먹을 정도로 힘겹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민족시인 윤동주 생가 있는 명동, 렘넌트 사역 활발히 했으나 사회주의로 빠져르포 팀은 북한복음화를 기도하며 버스로 40여 분을 달려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명동에 도착했다. 현재 중국정부의 동북공정으로 윤동주라는 이름이 들어간 모든 단체를 분해시키고 있어 윤동주 시인의 생가마저 없어질 위기에 놓여있는 상황이었다. 동북공정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라는 미명하에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이다. 실질적인 목적은 한반도가 통일되었을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고구려·발해 영토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다.
생가 바로 옆에는 명동교회가 있는데 윤동주 시인의 외할아버지인 김약연 목사가 세운 연변지역 최초의 교회이다. 김 목사는 신문화 운동을 통해 많은 렘넌트들을 배출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이다. 두 사람은 같은 동네의 동기동창으로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김약연 목사의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행동철학은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후대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지 못해 용정 지역자체가 용 문화로 완전히 뒤덮이게 됐고 후대 또한 민족 해방에 대한 사회운동이라는 한계를 맞게 됐다. 현재는 기념관이 되어버린 명동교회를 보며 민족과 후대들에게 바른 복음만을 전해야만 나라와 지역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 용 문화 기원으로 만들어진 용정르포 팀은 용삼 수금소를 지나 용정시 용두레 우물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광복운동의 중요한 본거지였던 용정. 황무지였던 이곳에 1879년 조선족들이 이주해오면서 처음 발견한 우물이 그 속에서 용이 나왔다는 용두레이고 지금의 용정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됐다. 이 지역 자체가 용 문화로 가득했으며 용 문화와 함께 오는 것이 바로 음란으로 용정은 작은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유흥가로 유명하다고 했다. 타락과 음주 문화가 주를 이루며 연길에서부터 유흥을 즐기기 위해 용정까지 오는 사람들이 많고 예전에는 용정의 유흥가 때문에 용정에 돈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용문교를 통해 해란 강을 건너며 예약된 기차시간 때문에 노래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야했던 르포 팀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던 우리 조상들의 분노, 잃은 나라를 찾겠다는 의지가 이 머나먼 간도 땅에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심양으로 가는 기차 안에 선포된 복음연길에서 대련으로 한국어능력 시험을 보러 가는 한족 왕기 자매(26)는 연길에서 동생 등록금을 보내주기 위해 일을 하는 성실한 자매이다. 한국에 오고 싶은 마음이 많아 늘 한국드라마를 보고 관심을 가졌는데 기차 안에서 들리는 한국말을 듣고 르포 팀에게 이야기를 걸어왔다. 르포 팀과의 대화 도중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으며 이후 연길의 교회와 지속적인 만남을 약속했다.
◇ 도교 문화, 불교 문화, 용 문화 혼합된 심양의 영적 현장새벽 6시30분 심양 역에 도착한 르포 팀은 다시 심양의 영적현장으로 출발했다. 심양은 2000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이며, 1625년부터 1644년까지 청조의 도읍이었으나,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봉천으로 불렸다. 항일전쟁에 승리하고 중국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후에 다시 심양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곳은 조선의 왕 태조부터 순종까지 27명의 조선조에서 유일하게 17대 왕인 효종이 불미스러운 병자호란으로 인해 바로 이 심양에서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난과 일제의 학정을 피해 많은 조선족 사람들이 심양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특히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서탑 지역이다.
▲ 황사 광장에 전시된 12황제의 동상르포 팀이 제일 처음 찾은 곳은 황사 광장이었다. 12명의 황제를 동상으로 만들어 광장에 전시였는데 다른 왕의 보좌에는 모두 용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청나라의 마지막 비운의 황제 부의 자리에는 황제로서의 자격이 모자라서인지 용 모양의 조각이 없었다.
황사(煌寺)의 원래 이름은 ‘연화정토 실승사’로 청 태종 누르하치의 황실사원이었기 때문에 “황사”로도 불린 것이다. 황사는 황제의 가족궁으로 건축을 하였고, 심양지구 최초의 라마사원이다. 숭덕원년 1636년에 지었고 3년 후 8월에 완공됐다. 이때부터 황족이 라마교를 신봉하게 된 기초가 됐다. 특별히 “황사명종”은 “심양 8경”의 하나이다.
▲ 도교사원 태청궁(타이친궁)중국에서 도교는 매우 오랜 역사시기를 거쳐 발전해온 종교 체계로서 수많은 지파를 형성하여 왔으며, 이들 지파는 각각 자신의 본산과 도장을 가지고 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도교는 36개의 동천과 72개의 복지가 있다고 하는데 태청궁은 선허구 시청대로와 서순성가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도교의 사원이다. 동북 도교의 제 1근거지로 청나라 강희2년(1663년)에 곽수진 도사가 창건하였다.
태청궁은 남향 건물로 앞뒤에 4개의 정원이 있다. 제 1정원에는 영궁전(산문), 10방당, 운수당, 관제전이 있고, 제 2정원에는 객실, 성심실, 집사실, 경당이 있고 정전은 임금전이다. 제 3정원에는 재당, 여주루, 산공사, 구조루가 있고 정전은 옥황대제 궁전이며, 제 4정원에는 원조 곽수진의 탑과 비석이 있다. 태청궁은 도교의 특색과 동북 민족의 특징을 통합한 건축물로 현재 도교협회의 소재지이자 심양 시민들이 많이 찾는 점을 치고 복을 비는 관광명승지가 되어 있었다. 르포 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자신의 소원성취와 문제해결을 위해 검은 옷을 입은 도사 앞에 줄을 서서 점괘를 받고 받은 점괘를 불로 태우며 복을 빌고 있었다. 특별히 관운장을 모신 관제전 앞에는 관운장이 타던 적토마를 만들어 놓은 마조단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말 다리와 눈을 만지고 자신의 발목과 눈을 만졌다. 자신의 다리와 눈이 말처럼 좋아지기를 비는 행위였다.
9. 심양 태청궁에서 도사가 관광객에게 점괘를 설명하고 있다.
10. 명동 윤동주 시인의 생가
11. 심양역 광장의 태양을 품은 독수리 동상
12. 심양시내에 위치한 삼자교회
13. 르포팀이 망강각에 올라 북한 회령시를 배경으로 허복녀씨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불교 도교가 황제우상화에 쓰여 진 심양고궁1600년대 건축물인 심양고궁은 청 태조 누루하치와 그의 아들 청 태종이 지은 황궁으로, 1625년에 짓기 시작하여 청나라 숭덕 원년 1636에 완공 되었고 도읍을 북경으로 옮긴 후에는 황제가 동북지방을 순방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심양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고, 총 면적이 6만 제곱미터로 북경 고궁(자금성)의 12분의 1에 해당하는 크기이며 현존하는 것으로는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심양고궁은 청나라가 중국 중원을 점령하기 전에 랴오닝성 심양에 만들었던 궁전이기도 하고, 불과 300만 명의 만주족이 1억 5천만 명의 한족을 260여 년간 통치하기 시작한 본거지가 된 곳이다. 현재 90여개의 건물에 300여 칸에 이르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으로, 지은 지 350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건물 안에는 당시의 궁정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의상, 보물, 문화재, 무기 등이 원형대로 전시되어 있으며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건축문화를 한데 혼합해 놓은 것에 그 가치가 있다고 한다. 특히 색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만주족의 습성이 많이 반영되어, 심양 고궁은 북경의 고궁과는 달리 청색 등 다양한 색이 사용되었다. 또한 각각의 건물들에는 당시의 궁정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보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숭정전의 지붕위에 있는 잡상들과 기둥의 용 조각이었다.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등의 잡상이 그것인데 신분에 따라 지붕에 놓이는 상들의 개수가 달랐고 그 중 황제가 있는 곳에는 9개가 있었다. 사실 잡상 중 삼장법사는 당시의 무당이었고,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는 모두 도교에서 제물로 쓰이던 동물들이다. 이 동물들이 현재는 아이들이 재미있게 보는 만화의 주인공으로 나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무속신앙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흑암의 숨겨진 전략으로 쓰여 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청태조는 금색이나 용 문양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 실제 건물에서도 나타나 있었다. 내부는 동중서로 크게 나뉘고 출구는 남쪽에 있다. 동로에는 고궁을 대표하는 대정전이 있는데 황제와 신하들이 정무를 보던 곳이다. 중로에는 숭정전, 봉황루, 청우궁 등의 주요 궁전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으며 숭정전은 특별한 의식이 있거나 알현할 때, 봉황루는 연회가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 서로에는 황제의 도서관이나 무대가 있고, 후세에 건륭제가 증축한 문소각도 있다. 특별히 심양고궁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정전은 이층의 팔각지붕이 특징인데 이 건물은 황제를 알현할 때나 특별한 의식이 있을 때 사용되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의식을 행할 때, 대정전 앞의 대로에는 우리나라의 고궁에서와 마찬가지로 문무백관이 일렬로 서있었다.
대정전 정면의 기둥에는 만주식 용 두 마리가 있는데 만주족의 용 문화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심양고궁은 전체적으로 온통 노란 지붕과 기왓장을 두었는데 이는 기와를 구울 때 황제를 의미하는 노란색이 나는 유약을 발랐기 때문이다. 노란색은 도교의 5방향 가운데서도 왕이 있는 중심을 의미한다.
◇ 삼자교회인 서탑교회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에 르포 팀은 서탑교회라는 삼자교회를 들렀다. 삼자교회는 중국 정부에서 인정해 주는 교회로 규모와 교역자 등 여러 가지가 부합되어야 승인을 받을 수 있다. 승인된다 해도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 거대한 빌딩건물을 교회당으로 쓰고 있는 서탑교회에 들어서면서 이 교회가 제발 심양 복음화에 귀하게 쓰임 받고 있는 교회이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경비를 통해 겨우 얻은 주보를 보는 순간 마음이 답답해 옴을 느꼈다. ‘자기승리의 비결’, ‘인간의 최상의 보배’라는 말씀제목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타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 나온 예화를 들어 “내조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쓰여 진 한 면의 글은 단번에 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현장을 돌며 많은 불신현장과 우상숭배 현장을 보았지만 가장 정확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가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성도들을 죽이고 있는 현장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못해 분노가 치민다. 특별히 중국의 많은 삼자교회들이 순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과 교회를 핍박하면서 폭발적으로 성도 수를 늘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교회를 나오며 바로 옆에 위치한 원래의 교회 건물 안에 부동산, 학원,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며 이 교회에 하나님의 복음 불씨가 떨어져 심양과 중국복음화에 귀하게 쓰일 교회로 변하게 해달라고 가슴깊이 기도하게 됐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전 세계 인구의 6분의 1, 그리고 말세지말의 세상 속에서 갈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중국, 사실 이번 현장 르포 팀이 방문한 연변 주변 지역과 백두산은 그야말로 중국의 가장 한 부분 중의 부분인 셈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며, 한민족의 흑암세력의 영적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백두산을 밟으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의 역사가 그대로 묻어있는 그 지역 현장을 밟으며, 또 공산주의라는 사상 우상 속에서 피폐해진 사람들의 불신자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시간표가 되었다.
/백두산 & 주변 지역 현장=주인욱 기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