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살롱 등에서 손님 노래에 그때그때 반주를 맞추던 이른바 '오부리 밴드'들은 어디로 갔을까? 40~50대로 접어든 이들은 '출장 밴드'라는 이름으로 회갑·칠순 잔치, 각종 노래자랑과 운동회 등에 출몰한다.
제멋대로 불러재끼는 손님 입맛에 맞게 음정·박자를 즉석에서 조정하는 순발력은 여전하다. 다만 기타·건반 갖춘 밴드는 옛말이고 노래 악보가 입력된 건반 악기를 홀로 두드리며 때로는 사회자·연주자 1인2역을 오락가락한다. 이들에게 음악은 예술에 훨씬 앞서 밥줄 이어주는 소중한 기술이다.
100명 이상 모이는 잔치에서 밴드는 이른바 '국악인'과 한 조를 이뤄 뛴다.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데 '국악인'의 몫이 크다. 그래서 지난 20일 오후 1시께 서울 화곡동 강서부페에서 회갑잔치를 앞둔 밴드 김경현(50대)씨는 한 짐 던 듯한 표정이었다.
붉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국악인' 이보라(40대)씨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잔치 주인공을 보자마자,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며 소맷자락을 잡는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길 다하여라" 시조를 뇌까리다 농담을 던지다 좌중을 어르는 이씨의 말 솜씨는 청산유수다. 그 리듬을 따라 김씨는 팡파레·꽹과리 등 효과음을 넣다 뺀다. 딸·아들 삼배 올릴 때 이씨는 목소리 한껏 꺾으며 권주가를 부른다.
"불로초~ 만수산~" 끝자락은 들릴락 말락, 쉴 틈 안주고 바로 '놀자' 분위기로 전환한다. 김씨와 이씨, 눈빛조차 주고 받지 않지만 "아리아리 쓰리쓰리" 노랫가락은 어느 참에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간다.
1980년대 '오부리밴드' 의 추억
남녀노소 흥 돋우는 데는 디스코로 변신한 트로트가 절대 강자다.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사랑의 트위스트) 왜 상하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여하튼 몇몇 사람은 이미 무대로 나와 고속버스춤을 춘다. 김씨는 "쿵짝 쿵짝" 전체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간다. 색소폰으로 때때로 방점도 쿡쿡 찍는다. 어디서나 그러하듯이 '동반자', '찰랑찰랑', '소양강 처녀' 등은 빠지지 않는 영원한 신청곡이다.
이미 불콰해진 중년 남성은 이씨에게 장난을 치지만 이를 괘념할 이씨가 아니다. 이렇게 고속버스춤과 찌르기춤, 한손 맞잡고 돌기, 엉덩이 흔들기 등이 어우러지고 핏대 올린 노랫가락이 좌중을 한 순배 돌아야, "1시간 30분 잘 놀았다"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전체가 한 노래인양 신청곡을 줄줄이 엮는 기술, "빠르다 느리다 높다 낮다" 자기 노래 실력엔 귀 막고 밴드 타박하는 사람들에게 은근 슬쩍 웃음을 날리며 '못 들었네' 넘어가는 기술…. '오부리 밴드' 생활 30년이 빚어낸 내공이다.
김씨는 "멋져 보여"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통기타를 쳤다. 색소폰은 동네 형이 1주일에 한번씩 3주 동안 핵심만 요약 정리해 초고속으로 전수해줬다. 20살 때 친구 따라 '비어홀'에서 일한 게 밴드 생활의 시작이다.
그의 기억에 70년대 후반부터 88서울 올림픽 전후까지는 불야성이었다. "그때 우린 특히 점퍼 차림의 건설업 종사자들을 좋아했죠. 정말 물 쓰듯 팁을 줬거든요. 우리한테 고맙다고도 하고요." 그들이 침 튀기게 싫어했던 부류는 술에 취해 시비 거는 사람들이다. "'딴따라'라고 무시하죠. 손가락질 하면서 필요하면 또 찾아요. 웃기죠." 그리고 80년대 후반, 부산부터 기지개를 펴던 노래방의 세력 확장에 밴드들은 밀려났다.
"수고했단 말 들을 때 보람 있어요. 가수가 박수 받는 것처럼요." 그는 "출장 밴드 생활에 만족 한다"고 말했다. 한때 록과 포크를 좋아해 청계천을 쏘다니며 앨범 2~3천장을 모았고, 가수 꿈 꾸며 발라드 10여곡을 만들어 봤지만 말이다. "끄적이는 수준이었죠. 젊은 혈기에.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 가는 가랑이 찢어지죠. 하긴… 운만 따라줬다면 제가 황새가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김씨의 말 끝엔 아쉬운 여운이 얼핏 스며있지만 10년차 '국악인' 이씨에게 그런 그림자 따위는 없다. "제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화통 삶아 먹도록 쩌렁쩌렁, 이씨는 말했다. "재미있고 예쁜 옷도 입고 행사 끝나면 칭찬도 많이 듣잖아요. 제가 인기가 제일 좋아요. 만날 좋은 날만 보니까 많이 웃잖아요. 오늘 주인공 어르신도 저 처제 삼고 싶데요. 천직이에요."
"그래봤자 55살이 한계에요"
전남 무안이 고향인 그는 5년 동안 간호사로 일했다. 대학 때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판소리에 "정신 팔아먹었다"고 한다. 처음엔 취미로 배우다 무대에도 서게 됐다. 연줄이 닿아 잔치 행사에서 노래한 게 줄줄이 새끼를 쳤다. "저는 원래 무선 마이크 잡고 장내를 휘어잡아버려야 직성이 풀려요."
게다가 이 일은 8녀1남의 셋째인 그가 여동생 5명의 엄마 노릇도 하게 해줬다. "서울로 불러 들여 학교 마치게 했거든요." 자리잡은 동생들 자랑이 이어진다.
지난 19일 저녁 6시 서울 강서구 목동 스카이뷰 부페 릴리홀에서도 비슷한 흥이 넘실거렸다. '사랑의 트위트스', '남행열차' '소양강 처녀'는 그대로다. 다만 밴드는 전성현(48)씨, '국악인'은 오유화(35)씨였다. 8남매의 막내로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전씨는 18살에 서울로 올라와 "먹고 살려고" 밴드를 시작했다.
"한곡 히트하면 평생 먹고 산다는 트로트 가수"의 꿈은 못 이뤘지만 그는 이 바닥에서 꽤 잘 나간다. 그가 단장을 맡고 있는 '고고 밴드'엔 회원이 170명이다. 하지만 전씨가 내다보는 '출장 밴드'의 미래는 희뿌옇다. "그래봤자 55살까지가 한계에요. 밴드에서 가장 어린 축도 40대 초반이에요. 맥이 끊긴 셈이죠. 핵가족이 많아져서 회갑 잔치도 점점 줄겠죠. 결혼 피로연 쪽으로 뚫어보려고요."
이날 오유화(35)씨의 어깨춤과 트로트 메들리에 맞춰 전씨는 악과 깡만 있고 음정, 박자는 사라진 노랫가락에도 디제이처럼 맨트를 날렸다. 쿵작쿵작쿵작….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술을 하고 계십니다. 아싸. 쏴~"
글·사진 김소민 기자 / 한겨레
■ 오부리
대중음악 혹은 고전음악 연주에 종사하거나 거의 전문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 '오부리'가 있다. 이는 악보 없이 반주를 즉석에서 하는 일, 곧 '즉석 반주'를 뜻한다.
그러나 뜻이 더 번져서 밴드가 나오는 유흥주점 반주나 혼례식 음악 연주를 일컫기도 한다. 노래방이 생기기 전에는 '오부리 밴드'가 성행했는데, 이제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편, 노래 반주이건 아니건 연주 사이사이 악보 없이 생각나는 대로, 느낌대로 하는 즉흥 연주를 뜻하는 말로는 '애드리브'(ad lib)가 있다.
'오부리'의 어원은 흔히 이탈리아말 '오블리가토'(obbligato)로 알려졌다. 이것이 일본말에서 '오부리'가 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엔 미심쩍은 면이 있다.
본디 이 말은 '꼭 해야 되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정도의 뜻인데, 음악용어로서는 '피아노 또는 관현악 따위의 반주가 있는 독창곡에 독주적 성질을 가진 다른 악기를 곁들이는 연주법', '꼭 연주해야 하는 악기 선율'을 뜻한다. 이런 말이 어떻게 '즉석 반주'를 뜻하게 됐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말을 통해 왔다는 생각은 말 꼬리를 없애면서 'ㄹㄹ'을 살리지 못하는 '오부리'라는 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말 사전에는 이 말이 없는데, 우연이 아니라면 '카브라'처럼 유래가 분명하지 않아 어디서 온 말인지 밝혀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전설의 86세 오부리 기타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