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오늘 시간 있어요?"
서클 집회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정담 나누기에 바쁘던 대구시민회관 지하다방.
삶이 우연이냐 필연이냐를 물어 보았던 후배 여학생 하나가 다소 조심스러운 얼굴로 면담을 청하더니, 다른 자리로 옮기자마자 물어온 말이었다.
오월쯤이었으니 아직 신입생들이 서클에 완전히 마음을 굳히기 전이라, 혹시 서클 그만두겠다고 하려나 싶어 약간 긴장했었는데 다행이었다.
"내야 있는 게 시간 뿐인데, 내 시간 주까? ㅎ"
긴장이 풀리니 대답도 쉽게 나갔다.
세상 어려움이라고는 전혀 겪어보지 않은, 귀하게 자란 티가 역력히 드러나 보이는 후배라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는데, 내 대답을 듣고 환해진 얼굴을 보니 다소 대하기가 편해졌다.
"선배님을 초대하고 싶은데요..."
기대하는 눈빛으로 응답을 바라는 눈치.
"나를...? 초대...? 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 미안. 웃어서 ㅎㅎ. 귀하신 몸도 아닌데 초대라고 하니 영 어색해서..."
"양식 먹는 데로 초대하고 싶어요. 저 오늘 돈 많아요."
'허~ 참. 초대라니...
그런 고상한 표현은 나고 처음 듣는데, 표정을 보니 진지해보여 자꾸 농담으로 받을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다...?
제대로 된 양식은 이날 이때까지 먹어본 적도 없는데...'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만든 생각들이었다.
"초대는 고맙지만, 양식은 싫은데... 우짜지?"
"양식이 왜 싫은데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
그렇다면 이실직고가 최선이다.
"양식은 먹어본 적도 없고, 안 먹던 그런 비싼 음식 먹으면 배탈 난다데."
"제가 가르쳐드리면 되죠. 쉬워요~ 배탈 안나요~"
킥킥댄다.
"그라지 말고... 무슨 이유로 날 초대하고 싶은 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초대하는 거라면 초대받는 사람이 기분 좋은 곳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선배님은 어디에 가고 싶은데요?"
새로운 호기심으로 밝아지는 눈빛.
처음으로 간 곳은 동성로 초입의 제일극장이었다.
<라스트 콘서트>.
그 당시 꽤 유명했던 영화였으니 대부분 아시겠지만, 영화 제목처럼 라스트 신이 아주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무명 피아니스트에게 빛처럼 다가온 여자.
그 빛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곡을 선보이는 콘서트장.
그 여자는 객석에서 서서히 숨을 거두어 가고...
사랑하는 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라스트 신.
영화관을 나서는 우리들 눈은 너무 밝은 햇살에 핑계를 대며 빨갛게 충혈 되어있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내가 즐겨가던 칼국수 집.
할머니 손맛이 잘 우러나는 칼국수였는데 후배는 반도 먹지를 못하고 남겼다.
"다 묵지 와?"
"배불러요~"
배가 생기다 말았나...ㅎㅎ
"내가 먹다 남긴 건데..."
내 것 다 비우고 그릇을 바꾸어 먹을 채비를 하니 놀란 눈으로 물어본다.
"없어서 못 먹지~ 초대받아 먹는 음식을 남기마 죄 받는다."
열심히 먹고 있는데 후배는 신기한 일을 보듯 빤히 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그 후배의 초대는 끝이 났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 초대의 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리 긴 인연의 시작이었음을, <라스트 콘서트>가 우리에겐 <비기닝 콘서트>였음을 우리 둘은 꿈에도 몰랐다.
아마 하늘도 그때는 몰랐었지 싶다.
인연은 그런 것인가 보다...
첫댓글
글 속에 마음자리님이 다 있어요.
글 속의 대화를 보고도
제가 알고 있는 님의 마음 자리가 다 보입니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남자~
초청자의 입맛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기분을 따르게 하는 완력의 남성.
청순한 아가씨들,
그 매력에 빠져들어 결혼까지 골인 하지요.
같은 지방끼리 결혼한 여성은 불평을 하면서도
잘 살아 가지요.^^
마음자리님 글, 귀하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제 기억 속의 일이라 제가 보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저 나이 땐 한창 좌충우돌 할 때라 더러더러 날이 서있곤 했었습니다.
나는 이런 기회가 있을수가 없는
남자들만 있는 공대 학생이니
부럽다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저도 공대생이었는데 서클이다보니 타 과나 타 대학 여자 동기생들과 여자 후배들도 있었습니다.
라스트 콘서트가 비기닝 콘서트가 되고...
넘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해피 엔딩이라 글을 읽는
제 기분도 좋습니다.
동성로.
친구랑 자주 다녔던 곳이라
정겹게 느껴지는 지명입니다.
라스트 콘서트로 끝내지 않고
비기닝 콘서트가 된 인연.
아름다운 인연입니다.
동성로... 가끔 꿈에서도 걷는데
그 길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겠지요? ㅎ
학창시절 이야기죠?
어설프면서도 척척 궁합이 잘 맞아 돌아가던 풋풋한 추억이네요.
오래 품고 가면 춥지않겧어요
네. 스무살 초빙 이야기입니다.
그 후배가 우여곡절 끝에 제 아내가
되었으니, 인연 그 시작도 끝도 미리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라스트였지만 현실은 비기닝
영화보다 해피엔딩인 현실이 넘나 좋아요^^
ㅎㅎ 제 마음이 그 마음입니다.
여자는 먼저 마음을 내보이면 안되는 줄 로만 알았던
그 시대에
상대에 대한 좋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먼저 초대라는 형식으로 표현을 한 여자도
양식 식사가 익숙치 않음을 솔직히 고백한 남자도
담백하고 신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원형 테이블에서 빵과 물을 실수할까봐
좌빵우물 외웠던 옛날이 기억나서 웃습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그 후배가
훗날 저와 인연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ㅎ
좌빵우물? ㅎ 전 처음 들어봅니다.
@마음자리
당연 두 분 순수 선후배로서의 식사였지요.
학교 선후배든 직장 동료든
당시 시대분위기로서는
동성이 아닐 경우
내 맘이 순수, 사심 없을수록
호감으로 오해 할 까봐 소심 진부할 수도 있는데
깊은 통찰을 요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선배에게 하는 식사 제안이
신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음입니다.
좌빵우물
여러 인분의 식기가 셋팅된 양식 테이블에서
내 자리 기준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빵과 물이 놓여 있지요.
왼쪽 빵이 내 빵
오른쪽 물이 내 물이라는 뜻입니다.
@헤도네 아... 그런 뜻이었군요.
미국에 산지 16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양식 예절은 잘 모릅니다. ㅎ
좌빵우물, 외우기도 쉬우니
잘 기억해두었다가 한번 써먹어봐야겠습니다. ㅎ
절묘한 제목입니다.
양식보다 털털한 칼국수를 즐기는
선배에게 마음이 더 끌렸나 봅니다.
지금은 그때 왜 그랬지 하며 후회가 된답니다. ㅎㅎ
소싯적 옛날 이야기를 감칠맛나게 썼습니다. 어느덧 이제 우리나이가 라떼는 말이야~ 를 자주 하니 많으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봅니다. 즐거웠습니다.
길 위에 있으면 달릴 길보다
지나온 길에 대한 기억이 더
또렷합니다.ㅎ
마음자리님은 정말 기억력이 대단합니다.
기억속의 이야기만 꺼집어내도 한참 글의 소재가 되겠습니다.
라스트 콘서트. 그 영화 속의 소녀 스탤라.
나도 눈물 맺힌 고운 얼굴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영화 라스트콘서트와 달리 현실에서는
마음자리님의 가정에서 비기닝 콘서트가
아름답게 연주되고 있군요.
어릴 때 모르고 벌였던 여러 일들이
다 추억거리가 되네요. ㅎ
호기심이 워낙 많다보니...
중년의 남자와 젊은 아가씨가
여행길에서 만나 짧은 사랑을 하는 스토리.
남자는 피아니스트로 뭔가의 슬럼프에 빠져서..
여자는 시한부 인생..
그러한 여행길에 만나 사랑을 하고
슬럼프를 이겨낸 남자는 콘서트를 하고
여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늘나라로 가는 스토리.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기억해요.
경음악이었던 영화의 ost가 무척 유명하지요.
너무 아름다운 영화를
너무 아름다웠던 청춘이었던
두분이 보시고
푸르렀던 젊은날 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계시군요.
두분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참 아름다운 추억도 많고 기억도 잘 하십니다.
저는 20대 젊은날이 신산스러웠기에 고생한
기억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
해피엔딩으로 끝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네요
영화는 못봤지만 주제곡은 많이 좋아했습니다
https://youtu.be/Ct0Q4hJ8_zQ?si=k_FuSXXMRNirAzz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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