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동학농민운동이 한참이던 1894년 19살에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하였으며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원래는 영어를 배우러 입학했으나 이곳에서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처음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에서 23살의 이승만은 연사로 나서
러시아의 이권 요구를 규탄했다. 이를 통해 그는 젊은 리더로 부상하게 된다.
1898년 4월에는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했다.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외국 소식과 개화 문명에 대해서도 실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대한제국 정부에 대하여
토지와 탄광에 관한 이권을 요구해 온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매일신문의 자금난 해결을 두고 갈등이 발생해 유영석과 이승만은 해임당하게 되는데
그 뒤 이 둘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신문을 창간했고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과 항일을 계속해 나갔다.
독립협회의 남궁억과 이상재 등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한다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이후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한 고종에 의해
남궁억 등과 함께 중추원 의원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한달만에 고종 퇴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그 전단지 내용 중 일부가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협회 시기 이승만은 박영효 계파와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박영효 내란 음모 사건에 연결되었다.
투옥되었을 때 같은 독립협회 동지였던 주시경이 몰래 넣어준 육혈포로 탈옥을 했다가 도중에 잡혀 종신형이 내려졌다. 홍종우가 그를 취조하였고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아버지가 이리저리 부탁하면서 목숨은 건졌지만 고문은 피할 수 없었다.
이 때 당한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해 평생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안면근육경련이 바로 이때 생겼다는 말도 있다.
그는 감옥에서 학문연마 및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성경을 들여와 읽으면서 간수 및 동료 죄수들에게
크리스토교를 전도했고, 많은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을 학습하고 발전시켰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내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다.
미완성이지만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까지 했다.
또한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비롯해서 여러 저술들을 남겼고,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도 계속 논설을 썼다.
이승만은 러일전쟁 이후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을 원했던
민영환과 한규설의 끈질긴 주청으로 29살이었던
1904년 8월에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끝으로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 요청이라는 임무와 함께
미국 유학을 결심한 그는 미국으로 떠난다.
1904년 12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한 이승만은 1905년 1월에 워싱턴포스트지와 기자회견을 열어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였다.
2월에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면제받았고, 생활비는 동양과 한국에 관한 강연으로 조달했다.
한국에 선교사로 있었던 미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의 도움으로 20일에
존 헤이 미 국무장관을 만나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존 헤이는 몇달 뒤 사망하고 만다.
1905년 8월 5일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독립보전을 위한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루즈벨트는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문서로 절차를 갖춰 제출하면 검토해보겠다"며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은 이미 일본과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기라
공식적인 절차로 제출하라는 말은 그저 외교적 수사일 뿐 애초에 그런 요청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던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미 일본에게 포섭되어 있어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포기하지않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워싱턴의 커버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햄린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는 '이런 공적 성격의 일은 정식 외교 경로를 통해야하며 1882년 조미조약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고 미국 정부와 대통령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이다.'는 답변을 해왔고 김윤정을 처음 주미 조선 공사관에 소개시켜준 조지 워싱턴 대학교 총장인 찰스 W. 니드햄 박사 또한 '이런 중대한 문제는 김윤정 공사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고 본국에 먼저 물어보고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뿐이라며 자신은 김 공사를 신뢰한다'고 하며 이승만에게 단념할 것을 권하였다.
한편 이 루즈벨트와의 면담소식은 국내에서도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황성신문에서는 "이승만은 한국 국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전자요, 애국열성의 의기남자요,
청년지사"라며 극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