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호에서 / 물고기의 상징성
석촌호반을 걷다가 멈춰서서 물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를 본다. 바쁜지 한가한지 모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도대체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을 찾는지, 잠자는 일 쉬는 일도 없이 한없이 지느러미를 흔들어대지만 눈망울은 초롱초롱하기만 하니 말이다. 저들이 보내는 신호는 무엇일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선종이 5세기 경 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다. 이어서 우리나라에도 전해와 오늘날 선종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당나라의 어느 불자가 조주스님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어냐고 물었다.(祖師西來意) 이때 조주가 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라 했다고 한다.(庭前柏樹子) 이것이 화두가 되어 오래 전해 내려오지만 스스로 깨우치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사찰에 들려면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상을 만나야 한다. 그다음엔 불문사물인 목어, 운 판, 범종, 법고를 지나야 불당에 이르게 되는데, 그중 나무로 만든 목어(木魚)는 쉼 없이 깨우치라는 상징성도 갖는다고 한다.
김해의 수로왕릉엔 쌍어(雙魚) 무늬가 있다. 그 부인 허 황후가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설이 있지만 그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나 그 뜻이 무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허 황후가 남방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 배를 타고 왔는지 비행기를 타고 왔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만 물을 건너온 것만은 확실하다 하겠다.
기원 1100여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신화에 엔키 신(神)이 나타난다. 엔키는 대지의 신이자 물을 관장했는데, 지구에 대홍수가 났을 때 인간들에게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주어 인류문명이 이어지게 했다. 이런 엔키 신은 수메르에서 앗시리아에서 바빌로니아의 문화로 이어지면서 물고기 복장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물고기 모양이 현재 교황이 쓰는 주교관으로 이어졌다고도 한다.
바빌로니아의 신화가 인도로 전해져 인도 대홍수 때에도 물고기가 인류를 구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성한 것으로 숭배받던 이런 물고기의 모양과 그 의미가 허 황후에 의해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으로 이어진 것으로 비정한다면 한 마리의 물고기는 기원전 2천 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까지 닿게 되니 아득하기만 하다.
다시 석촌호 속에 자맥질하는 물고기를 본다. 수평으로 움직이는 건 지느러미를 흔들면 된다지만 위로 오르고 아래로 가라앉으려면 부레(공기주머니)를 작동해야 한단다. 부레에 바람을 넣으면 부풀려져 부력이 커지니 위로 오르게 되고, 바람을 빼면 부력이 작아지니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는 거다.
홍자성의 <채근담>에 이런 글이 있다.
心不可不虛 虛則義理內居(심불가불허 허즉의리내거) 心 不可不實 實則物慾不入(심불가불실 실즉물욕불입)
마음은 불가불 비워야 한다. 그래야 가슴속에 정의와 진리가 들어앉게 된다. 반대로 마음은 불가불 채워야 한다. 그래야 가슴속이 허하지 않아 물질적 욕망이 들어오지 않게 된다. 서로 상반되는 말 같지만 물고기가 부레에 바람을 넣고 빼듯 때로는 마음을 비우고 또 때로는 마음을 채워 물고기처럼 오르고 내린다면 제약된 환경 속에서도 자유자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
첫댓글
쉼 없이 깨우치라는 상징성의 목어가
김수로왕의 왕비에 의해
아유타국에서 가락국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
석촌호의 물고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에서
글을 시작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心不可不實 實則物慾不入
心不可不實 實則物慾不入
되새겨 보는 의미 있는 글,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빈주머니 채우려 발버둥치느니 그게 훨씬 편하겠지요.
기온이 많이 내려갔네요.
내복을 꺼내야겠어요.
물고기가 목어로 태어나는 전설은 인류 문명의 발상에서 부터 시작되었나봐요.
인류 문명이 강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강에는 물고기가 사니까 그런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선배님 글을 읽으면서 해 봤어요.
'비우면서 채우는' 작업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울 것인가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인간이기에 취향이 맞는 사람들을
소위 말해서 코드가 맞는다고 하는가봐요.
깊이 있게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선배님 말씀에 감사드려요.
생명은 바다에서 탄생했다고 합니다. 그중에 반반한게 물고기니까 거기서부터 연상작용이 일어났겠지요.
가끔 너무 많은 것이 제 머리 속을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비워도 비워도 새로 차오르니 제대로 비울 대책이 막막합니다.
그건 저도 비슷한데요
그래서 단 몇 분이라도 명상을 해보라 하데요.
물고기의 상징성에 대해서
공부하는 아침입니다.
사찰의 목어에 대해서도 그냥
보기만 했고 교황이 쓰는
주교관에 대해서도 생각없이
보기만 했는데 그런 상징성이 있었군요.
비우고 채워야 하는 마음.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워야 함을
물고기를 통해서
배웁니다.
네에, 고맙습니다.
채우고 비움을 적절하게 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 채우려고 하니 집이 비좁습니다. ㅎㅎ
비움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누구든 늘 수양해야 하겠지요.
물고기의 부레처럼 마음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면
바로 득도의 경지가 아닐런지요.
저는 도심의 호수에 있는 물고기들이 자유롭지 않게
보이던데,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는 방향이나마 그렇게 잡아보는 것이겠습니다.
마지막 채근담의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마음에 두지않고 보고 왔던 물고기한테도 인간의 도리를 배우게 됩니다. 비우고 살기는 참 어렵습니다. 오늘 낮에 50여년만에 고등학교때 다니던 교회 고등부 학생들을 사당역 족발집서 만났습니다. 여고생이 할머니가 되어 족발집을 하고 있어 거기서 만났습니다. 다른 여학생은 남편이 3년전 별세하여 상속세에 치여 너무나 고생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살면서 있는것 아낌없이 쓰고 비워야지 갑자기 죽으면 남은 재산은 모두 정부에 바친다고 푸념했습니다.
좋은 모임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돈도 써본 사람이 쓸줄을 안다고 하데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쌓아가다가 그냥 사라진답니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이 채워지고
그 적합한 시기와 방법이 깨달아질 수 있으려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마음의 행로라도 그리 잡아보는 거겠지요.
잉어가 효자를 상징한다고도 하여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도 하고 낚시로
예전엔 잡아볼라고 했지만, 한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지요.
마음을 비운다는것과 채운다는게
동시 다발적으로 가능해야 할텐데,,
무언가로 꽉차 있는듯해서 여전히
중생에 머무르는가 봐요~
누구나 중생이긴 하지요.
그래도 마음만이라도 자유자재하는게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