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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 35 빛이 있을 동안에 - 요 12: 37 표적을 행하셨으나
요 12: 35 빛이 있을 동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을 상징한다. 반면에, 어두움은 무지와 죄악과 슬픔을 상징한다.
신자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동안에는 어두움이 그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혹 죄에 잠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다니는 자는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만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여기 "잠시 동안"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가리킨다. 기회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두근거리며 긴장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기회는 언제나 잠간 동안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기회라는 것은 사람이 당면한 현재 밖에 없다.
사람은 미래를 자기의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미래는 그에게 감취어 있다. 혹 그것이 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것이 되지 못할 수도 잇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받은 기회는 현재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회를 잠간 동안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다.
청년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지금 준비하는 시기이고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부나 하고 이 다음에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뒤에 신앙생활을 바로 해 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은 생각이다. 청년들은, 그 준비하는 중에도 그 준비가 역시 정규적 살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준비가 바로 살림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도 하나님 없이 살지 말아야 한다.
이 다음에 잘 믿겠다고 하는 것은, 다음에도 잘못 믿을 것을 약속함과 같다.
노인들은 낙오자의 심리를 가지고 기회를 허송하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시대는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노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을 좋은 환경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한 평생 모든 것을 다 지내보고 헛된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처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만하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70세 때에 선교사로 출발하였고, 크랜멀(Cranmer)은, 60세 때에 비로소 복음 진리를 크게 깨닫고 그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2]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 "빛"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여기서 "빛"은 그리스도를 비유한다.
36절에 말하기를,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유하였을 때는 그 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 중에 빛을 가장 먼저 지으셨으니, 그것을 보아도 빛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이 없는 세계에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슐라텔(Schlatter)은 말하기를, "생명은 존재보다 높고, 빛은 그 중에도 가장 높다. 그 이유는, 그것이 생명에게 깨닫는 내적 성정(內的性質)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Hoher als das Dasein ist die Lebendigkeit, und das Hochste ist das Licht, womit dem Leben die bewusste, enkennende Innerlichkeit verliehen ist. - Der Evangelist Johannes, p.6).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보여주시는 빛이신가?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실 때에 어떤 이론에 의하여 보여주시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보여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 속에 모실 때에는 하나님이 환하게 우리에게 알려진다.
슐라텔(Schlatter)은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교훈에서 교훈을, 또는 신학에서 신학을 해설하시는 이가 아니다. 그는 빛으로 역사하신다"라고 하였다. (Er hat nicht Lehre durch Lehre, Theologie durch Theologie ersetzt. Er wirkt als Licht. - Der Evangelist Johannes, p. 273).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참으로 접촉하는 자마다 참되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보다 귀한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을 수 있는 기회처럼 중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 보다 그 분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전파할 때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행 20: 24에 말하기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생각한 원인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니만큼,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제일주의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죽으셨던 분으로 내 영혼을 구원하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3]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빛이 없는 어두움은 사물을 분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많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어둠에서 길을 가는 자는 자기가 나아갈 길의 형편을 알지 못하므로 실수할 수밖에 없다.
요 12: 36 빛을 믿으라 -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
우리는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야 한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다. 내일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시간이다. 죽음은 언제든지 갑자기 찾아온다. 또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문이 닫히는 시간이 곧 올 것이다.
노아 시대에도 그러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고 죄악의 낙을 누리던 모든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다 기회를 상실했다.
어떤 청년들은 아직 인생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면서 믿는 일을 내일로 미룬다. 입시 준비 때문에, 취직 준비 때문에, 또는 취직한 지 얼마 안 돼서, 집 장만을 해야 하기에 믿는 일을 뒤로 미룬다.
어떤 노인들은 이미 인생의 날들이 다 지났다고 생각하면서 믿음의 일을 포기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온 세상에 아직 비치고 있다. 빛이 있을 동안에 죄인들은 빛을 믿어야 한다. 구원은 결코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1]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여기서 "빛"은 윗 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신 만큼, 예수도 빛이시다.
* 요일 1: 5 -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요 8: 12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심은 그 때 팔레스타인에만 한 번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는 중에 있었다.
그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귀한 기회를 놓치는 불행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 뒤에는 그가 육신으로 세상이 계실 수는 영원히 없을 터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아 그를 믿어야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별세 후에는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기회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던 주님을 오랫동안 보면서도 그렇게 완강하게 끝까지 배척하던 자들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라고 두 번이나 역설(力說)하신 것이다(35절 참조).
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는 빛에 대한 말씀을 주시고 그들을 피하여 잠시동안 숨으셨다. 이는 예수님이 방금 가르쳤던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유대인들로부터 잠시 몸을 숨겼을 수 있다.
그 교훈은 이제 곧 빛이 그들에게서 떠나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에게 결정적 타격을 줄 것이다.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고 장차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파하실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의 구원 사역이 실제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자들의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2천년 동안 온 세계에서 충만히 이루어졌다.
온 세계의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다.
셋째, 죄인들은 빛이 있을 동안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아직 문이 열려 있고 구원받으라는 부르심이 들릴 때,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방주 문이 닫히고 40일간의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듯이,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다.
더 이상 복음을 들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믿을 만한 때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6. 백성의 불신 ( 12: 37-43 )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사람들이 선지자의 전한 바를 믿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고 그들로 회개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심판 중에 아주 무서운 심판의 하나는 버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시면 사람이 그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 유대인들처럼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것이다.
요 12: 37 표적을 행하셨으나 -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앞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요한복음 2장은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4장에서는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5장은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을, 6장에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것과 그 밤에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을, 9장에 예루살렘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신 것을, 11장에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 등을 증거했다.
이 외에도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0: 30에서 그 사실을 증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기적들을 유대인들 가운데서 또 그들 앞에서 행하셨고 그들은 이 모든 일들을 잘 알고 있었고(행 2: 22), 그들은 실상 그것들의 증인들이었다.
1]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예수의 많은 표적은 단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자 원했던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활동을 드러내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말씀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알려주는 하나의 실물교육과 같다. 즉 예수님은 자연 현상, 사탄, 질병, 죽음을 다스리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에 마음을 연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단지 호기심으로 접한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었다.
2] 그를 믿지 아니하니
요한복음의 특징 중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탄식함이다.
* 요 1: 5, 10-11 –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인간의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메시야심을 보여주시는 표적(곧, 증표)이다.
그것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았으니, 그들 자신에게 죄책이 돌아갈 것 밖에 없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어떤 기적을 보거나 경험함으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기적을 전하지만 기적주의는 아니다.
영혼의 구원과 참된 교회의 건립은 기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말씀하신 대로(눅 16: 31), 사람은 죽은 자가 살아나 전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적이 구원의 동기가 될 수는 있으나 사람의 구원은 기적 경험 없이도 이루어진다. 기독교 2천년의 확장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가 아니고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믿음은 단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으로 생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생긴다.
사람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이 없어도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그러하다.
* 엡 2: 8-9 –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심지어 기적을 행해도 믿음이 없이 불법을 행하다가 심판 날에 멸망 당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 마 7: 22-23 –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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