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
문희봉
결혼하기 전 이런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결혼해 보라. 당신은 후회할 것이다. 그러면 결혼하지 마라. 당신은 더욱 후회할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와 나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 처음 눈빛이 나를 사랑하겠노라 말하고 있었으므로 나도 아내를 사랑하기로 했다. 처음 눈빛이 살아 있었다. 사랑과 존경과 믿음과 인격이 그대로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평생을 같이해도 괜찮을 사람이라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 사람과 만나 금혼식(金婚式)을 맞고 있다. ‘맘 놓고 갈 만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질문에도 이젠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나무는 사시사철 변한다. 계절에 맞춰 의상을 달리하는 지혜를 갖고 있다. 평상복 차림의, 야유회 차림의 의상도 갖출 줄 안다. 그러면서도 겸손하다. 나서지 않는다. 뽐낼 줄을 모른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선지자(先知者) 같다. 우리가 그렇다.
이십 대 초반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넓은 화판에 그렸었다. 나의 2~30대는 불확실성 속에서 초록빛 꿈을 완수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불사른 시간들이었다. 비록 그 꿈을 달성시키지는 못하였을지라도.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남은 시간도 못다 이룬 꿈의 실현을 위해 초심을 잃지 않고 성실과 최선을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갈 것이다.
내가 전직을 해서 멀리 떠나 있어야 할 때였다. 그때 아내는 천식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발령 소식을 접하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 나도 승진이란 걸 하게 되는구나.’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로망은 바로 승진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내는 나를 멀리 보내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들도 중·고등학생이고 자신까지 아팠기 때문이다. ‘여보, 승진 안 하면 안 될까요? 당신을 멀리 보내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이 말은 그냥 쉽게 내놓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낮에는 괜찮다가 기침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는 입장이었던 아내로선 당연히 할 수 있는 얘기였다. 고민고민하다가 간신히 허락을 받고 1년을 밖에 나가 있었다.
대전에서 155㎞ 거리에 있는 태안까지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하는 즉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전화를 받는 아내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됐다. 저녁에 또 전화를 하고, 편지를 쓰고… 지금 그 편지들은 두 권의 책으로 제본이 되어 책꽂이에 유물처럼 꽂혀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자신의 얼굴 표정을 거울로 보기 전에 먼저 살필 것이 있다. 하나는 습관이다. 찡그린 얼굴, 찡그리며 말하는 버릇을 없애는 것이다. 환히 웃는 모습의 얼굴을 갖는 일이다. 늘 그런 얼굴을 갖는다는 것은 대인관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다. 또 하나는 마음이다. 불평과 불만, 남의 단점 찾기 등에 익숙하다 보면 행복은 달아난다. 자족과 감사, 칭찬, 격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거울이 필요 없다. 능금 꽃 같은 웃음이 그 얼굴에 잔잔히 배어있는데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랴.
초심은 첫 마음이자 새 마음이다. 새 마음은 곧 새 출발이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다. 초심이 변하면 사람이 떠난다. 백년해로를 약속한 사이라도 그걸 갈라놓는 것은 순간이다. 그래서 초심은 중요한 것이다. ‘부부’란 단어는 실낱같은 외줄을 타며 생의 끝까지 가서 바닥을 치고 살아 돌아온 인생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이름이다.
돈은 더러운 것이라고 젓가락으로 밀쳐내던 뼈대 있는 선비 가문의 후손도 마음을 바꾸면 황금 앞에 허리가 굽고 눈이 흐려진다. 그러다 보니 가문에 먹칠을 하게 된다. 무당 공돈 아니 먹는다.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신기가 떨어진다. 맞는 말이다.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말과 같이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을 마르게 한다.
시원스런 물살을 자랑하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여울목에서 자란 어미 숭어같이 싱싱하고 윤기 나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초심을 유지해야 한다. 작은 햇살을 받고 영롱이는 아침이슬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항상 초심을 유지해야 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초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우리 둘은 남은 생애 서로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살기로 했다. 말이 많고 지적이 많은 사람하고는 같이 못 산다. 얼굴과 낙하산은 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려고 다짐하고 있다.
나이 든 아내는 얼굴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 했다. 어느덧 검은 머리 파 뿌리 되고, 그 곱던 얼굴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지만, 평생을 함께하며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키웠으니 이보다 장한 일이 또 있을손가. 지금 내가 한겨울에 입는 조끼는 몸이 많이 아팠을 때 나를 그리워하며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짠 것이다. 난 그 조끼를 나를 위한 아내의 기도문이라 생각하며 비록 해졌지만 지금도 즐겨 입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