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끼니 때를 맞추어 예일 로스쿨 학생 식당에 가 보면 학생중 많은 수가 예일대 학부생들이다. 로스쿨 학생들이 하루 수업이 끝난 저녁 무렵에라도 법대 건물을 벗어나 집이나 레스토랑에서 여유 있게 식사를 즐기고 싶어하는 반면, 학부생들은 새로운 분위기에서 맛이 좋은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로스쿨 식당을 자주 찾는 것 같다. 고풍스럽고 분위기가 아늑한 예일 로스쿨 도서관도 학부생들이 좋아하는 자습장소 중 하나다.
그런데 예일대 학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로스쿨 입학 설명회에 나가 보거나 하면 이렇게 로스쿨을 지근거리에 두고 자유로이 드나들며 낯을 익혔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거주하고 미국 대학을 다니는 등 ‘홈그라운드 이점’이 있는 예일대생들도 로스쿨 진학 준비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미국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어련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많이 알면 알수록 막막함과 두려움이 덜어지게 마련. 그런 의미에서 로스쿨 지원자들의 큰 관심사인 원서 심사 절차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예일 로스쿨 원서 심사 과정은 대학 신문에 그 절차의 일부가 공개된 적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신비를 벗고 있는데도 불구, 그와 관련하여 로스쿨 밖에서 근거없는 소문이 돌기도 한다. 나도 그런 루머를 몇 가지 들은 바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특히 재미있어서 소개하기로 한다. 소문에 의하면, 원서 심사가 마무리될 무렵에 입학처장이 책상에 합격과 불합격 원서를 높이 쌓은 후, 눈을 꼭 감고 각 원서더미에서 원서를 한 부씩 빼 그 두 개를 서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예일 로스쿨에 지원해 심사과정을 통과할 만한 학생이면 다른 우수한 로스쿨에도 합격했을 확률이 높고,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예일 로스쿨을 거치지 않고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학생이리라는 것이다. 한편, 합격선에서 비껴났던 학생을 학교에 들이면 그 학생의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니 얼마나 좋으냐는 거였다. 물론 농담 수준의 이야기이긴 하나 ‘적선(積善)’ 내지 ‘재분배’의 논리를 펴는 셈이어서 참 어이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쨌든 이 루머를 듣고 로스쿨 동기들과 ‘그렇다면 작년의 행운아는 바로 너였을 걸’하고 서로 우기면서 깔깔 웃었던 기억도 난다.
예일 로스쿨에는 J.D. (Juris Doctor / Doctor of Jurisprudence), L.L.M.(Master of Laws), J.S.D (Doctor of the Science of Law), M.S.L. (Master of Studies in Law)등 크게 네 가지의 학위 과정이 있다. 이 중 J.D. 과정은 총 3년으로 미국 로스쿨의 주축이 되는 학위 과정이다. 학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면 대학 전공에 관계없이 이 과정에 지원할 자격이 주어진다. 미국에서 로스쿨에 들어간다고 하면 보통 이 J.D. 과정에 입학함을 말한다. 180명 정도의 학생을 선발하는 예일의 J.D. 과정에는 매년 평균 4500~6000통의 원서가 접수된다.
예일 로스쿨의 입학관리실(Admissions Office)은 법학관의 러튼버그 홀(Ruttenberg Hall)이라는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사무실이다. 우리 학생들이 ‘조시’(Josie)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던 조세핀 엘리엇(Josephine Elliot)이라는 체격도 넉넉하고 마음좋은 여자분이 담당자다. 로스쿨 원서가 접수되는 9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는 어드미션 오피스 출입문에 “1월 19일 현재 4930통의 원서가 접수되었습니다” 와 같은 공고가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어 나붙게 된다.
로스쿨 첫 학기에 미국 문화나 학제에 익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 주로 시행착오를 통해 모르는 것을 배워가며 워낙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나처럼 우리 나라에서 예일 로스쿨로 유학 온 후배를 맞아 그가 공부하고 생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고 항상 바랬는데, 그 소망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년 입학철이 되면 기대를 갖고 “혹시 합격생 중 한국 학생은 없어요?” 하고 물으러 어드미션 오피스에 여러 차례 들르곤 했던 기억이 있다. 조시가 “원선이 또 왔어?” 하고 방긋 웃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좀 유난스럽지 않았나 싶다.
예일 로스쿨 입학사정위원회는 입학처장과 부처장, 그리고 예일 로스쿨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입학처장 선에서 75~80%의 원서가 걸러져 휴지통으로 들어간다. 또, 이 단계에서 입학처장이 보아 정말 놓치고 싶지 않다는 판단이 서는 몇몇 학생들의 경우에는 교수들의 검토를 거치지 않고 단기간 내에 합격 통보를 하기도 한다. 이런 재량권을 갖는 입학처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아무나 앉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입학처장으로 있는 메이건 바넷(Megan Barnett) 씨는 나의 예일 로스쿨 선배인데, 변호사로 일하다 영입된 젊은 여자분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성품으로 두루 신임이 두텁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입학처장의 눈에 든 극소수의 행운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1차 심사 통과자들의 원서에는 소위 ‘점수제(point system)’가 적용된다. 약 80통 정도의 원서를 한 뭉치로 하여, 그 원서 한 뭉치를 세 명의 교수가 검토하도록 한다.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여 최대한 공평정대한 심사결과를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예일 로스쿨 교수진 전원이 참여하는데, 어느 교수가 어떤 지원자의 파일을 읽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지며, 같은 원서 뭉치를 심사한 교수 세 명도 자신들이 같은 원서를 검토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서류를 분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교수들은 원서를 자택으로 가져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수들은 보통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혀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운 상태로 원서 한 장 한 장을 주의깊게 읽는다고 한다. 이런 긴장된 광경을 머릿 속에 구체적으로 그려 보면서 원서 준비를 하면 심사위원들이 쉬 흥미를 잃지 않고 관심있게 읽을 수 있을 법한 생동감 있는 원서를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예일 로스쿨에 들어온 학생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합격시켜 준’ 교수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어디선가 내게 ‘표를 던진’ 교수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조금 으스스한 기분까지 들곤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교수는 한 원서 당 2에서 4까지의 점수를 줄 수 있다. 원서 한 부가 교수 세 명의 손을 차례로 거치게 되므로 12점이 만점인 셈이다. 12점이나 11점을 받은 지원자들은 자동적으로 합격선에 들게 되며, 사정위원회는 10점 이하의 원서들을 놓고 순서대로 대기자 명단(waiting list)을 작성한다. 일단 예일에서 합격 통보를 받게 되면 다른 학교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대기자 명단으로부터 합격자 그룹으로 편입될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예일 로스쿨에는 외국인이라거나 사회적 소수자를 반드시 특정 수 이상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의 쿼터제(minority quota system)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여느 교육기관처럼 다양성(diversity)을 중시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배경은 입학 심사 과정에서 중요한 고려 요인 중 하나가 된다.
‘YLS material (‘딱 예일 로스쿨감인 사람’ 이라는 뜻이 된다)’의 1차적인 조건은 좋은 학부 성적이나 뛰어난 LSAT(Law School Admission Test·로스쿨 입학시험) 점수만은 아니다. 어느 학교든 그렇겠지만 예일 로스쿨도 무엇보다 예일에 진학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학생, 그리고 굳은 의지와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을 원한다.
일반적으로 미국 로스쿨 입학원서는 지원서 기본양식, 추천서 2~3 통, LSAT 성적(여기에 추가적으로 TOEFL 성적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학부 성적표, 자기소개서(personal statement), 간단한 이력서(이력서 제출은 선택 사항인 경우가 많다) 등의 서류를 갖추어야 한다. 이 중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서류는 아무래도 로스쿨에 지원하게 된 동기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공간인 자기 소개서일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글을 더 보내길 요구하는 학교도 있는데, 예일도 그 중 하나다. 예일에 원서를 내려면 자기소개서 이외에 250자 내외로 짤막한 에세이를 한 편 더 써내야 한다. 주제는 자유다. 어느 모임에서 바넷 입학처장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예일을 그냥 지나치기는 서운하니 원서나 일단 한 번 넣고 보자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 얌체 지원자를 솎아 내는 첫번째 관문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바로 이 250자 에세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나는 여섯 군데의 로스쿨에 원서를 냈는데, 그 학교들 중 자기소개서 이외에 추가 에세이를 요구하는 로스쿨은 예일뿐이었다.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는 입학 에세이인 만큼 쉽게 써내려갈 수도 없는데다 접수 마감일은 자꾸 다가오고, 마음은 급하고, 그 250자 에세이 이외에도 처리해야 할 일은 태산이니 골치가 아팠다.
나중에는 나머지 다섯 학교도 좋은 학교들이니 예일에는 원서를 보내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잠깐 해봤다. 선생님과 선배들을 통해 알게 된 예일의 자유롭고 온화한 분위기와 공익 활동에 중점을 두는 학문적 전통 등등 여러 가지 요소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예일을 일찌감치 포기함으로써 첫번째 관문에서 탈락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을 보면 모든 도전은 결국 여러 가지 유혹에 맞선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게 되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명문 로스쿨의 입학 절차는 합리적이지만 엄격하고 깐깐하며, 촘촘한 그물과 같이 빈틈이 없다. 그러나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개개인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미국 입학제도의 장점이기도 하니 말이다. 유학 선배의 입장에서 미국 로스쿨 진학이 자신이 정말 바라는 길이라면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배짱을 갖고, 제대로 된 정보를 수집하여, 성실하게 준비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다.
▲ 정원선씨 | |
예일 로스쿨에서는 ‘예일 로스쿨의 역사(The History of the Yale Law School)’ 라는 강의가 개설돼 있다. 수강신청 자격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주로 모교인 예일 로스쿨의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인 학생들이 듣고자 하는 소규모 세미나 강의이며, 담당교수도 그런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수강 기회를 주고 싶어한다.
학생들은 미국 법학교육의 흐름 속에 예일 로스쿨이 어떤 위치를 점해 왔는지를 공부하고 예일에 몸담은 학자들과 그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간 여러 학파의 이론을 고찰하면서 모교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자부심을 기른다. 내가 재학중일 땐 예일대 사학과에서 학위를 받고 예일 로스쿨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여교수가 그 수업을 맡았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매우 좋았다.
수업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수강중인 선배를 졸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얻어듣곤 했다. 예일 로스쿨이 세드 스테이플즈(Seth P. Staples)라는 판사 소유의 작은 도서관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얘기도 그 선배를 통해 처음 들었다.
사실 이것은 예일 로스쿨에만 한정된 일은 아니다. 책이나 종이 등 자원이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 미국의 도제식 법률가 양성 제도하에서는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그나마 잘 갖춰진 곳에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지식을 다져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도서관 같은 장소가 교육기관의 역할을 병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예일대 학부를 나온 스테이플즈 판사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아미스타드’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아미스타드(Amistad)호 선상 반란 사건에서 자신들을 노예로 팔아 넘기려 했던 백인 선원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흑인들을 변호하여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변호인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는 유능하고 명망 있는 법조인이었을 뿐 아니라 1800년대 당시 미 동부 지역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개인 서재 겸 법학 도서관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 서재 겸 도서관에는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의 영국법주석 (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등 당시 법학도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명저들이 무려 몇십 세트씩이나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도서관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던 예일대학 측은 스테이플즈 판사 사후 4,188 달러 65 센트에 이 도서관을 매입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정식 법학 교육 기관의 틀을 갖춘 로스쿨을 운영하기 시작하여, 1843년에 처음으로 지금의 J.D. 학위에 해당하는 L.L.B. (Bachelor of Laws) 학위를 수여하였다.
한때 작은 도서관 하나로 학생을 받았던 예일 로스쿨이 지금은 훌륭한 법학도서관 외에도 여러 가지 시설을 고루 갖춘 어엿한 법학 교육 기관으로 거듭났다. 현재 예일 로스쿨 도서관의 정식 명칭은 릴리언 골드먼 법학도서관 (Lillian Goldman Law Library) 이다. 예일 로스쿨 도서관은 약 80만권의 장서와 1만여종의 연속 간행물 이외에도 수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이중 외국법, 국제법, 비교법 관련 서적은 20만권에 이른다. 작년 5월 로스쿨에 폭발사고가 나면서 수도관이 파열되어 고서적과 희귀서적을 소장하고 있는 로스쿨 도서관의 희귀도서실(Paskus-Danziger Rare Book Room)이 물에 잠기는 일이 생겼는데, 이때 예일대의 고서적 도서관인 바이니키(Beinecke Library)의 기술자들이 출동해 글씨가 번지거나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젖은 고서적들을 급속 냉동시키는 등 노력을 기울여 다행히 피해가 크지 않았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예일 로스쿨 동창으로 만나 부부가 된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위원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진 것도 예일 로스쿨 도서관에서였다. 힐러리가 밝힌 바에 의하면 도서관에서 넋을 놓고 자기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빌에게 자신이 먼저 다가가 자기 소개를 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학생들이 입학하게 되면 사서의 안내로 도서관을 구경하면서 어떤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배우게 된다. 미국 로스쿨에서는 사서들이 로스쿨 출신인 경우가 많고 도서관에서 오래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법률 리서치 과목을 강의하기도 한다. 예일 로스쿨 도서관 사서 중에는 예일 로스쿨 정교수인 사람도 있다. 사서들은 학생들이 자료를 검색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어떤 점을 힘들어 하는지, 무엇을 가장 궁금해 할 것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논문을 쓰거나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야 할 때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내가 신입생이었을 때 우리를 안내해 준 예일 로스쿨 도서관의 한 노(老)사서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는데, 갓 입학한 어린 학생들을 보니 흐뭇하기도 하고 새삼 옛 기억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는지 ‘힐러리와 빌’이 함께 도서관을 오가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다고 회상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고 배필도 구할 수 있으니, 학교에 다니는 동안 도서관에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하고 우스개 소리를 해서 새로운 환경에 던져져 잔뜩 얼어 있던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생에서의 소중한 인연이 그렇게 한 순간에 만들어지기도 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했었다.
비록 배필은 구하지 못했지만 로스쿨 3년 내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에서 로스쿨에 들어가자마자 거쳐야 하는 여러가지 관문 중 하나로 ‘도서관 과제’(library assignment)라는 것이 있다. 온라인 법률문헌 데이터베이스인 LEXIS와 Westlaw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자료를 검색하면 간편하지만, 이들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어, 법학도서관에서 직접 자료를 찾아내는 능력을 길러 놓지 않고는 학교 생활을 도저히 제대로 해 나갈 수가 없다.
도서관 과제는 이를 염두에 두고 학생들로 하여금 마치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 직접 발로 뛰면서 이 책 저 책을 뒤져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동시에 도서관 구석구석을 익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내주는 것인데, 로스쿨 신입생들에겐 결코 만만치 않은 숙제다. 내 경우, 숙제를 받아 보니 ‘Using Shepard’s, provide the cite for the most recent case questioning the continued validity or precedential value of Batson v. Kentucky (1986).’처럼 알쏭달쏭한 문제가 수십 개였다. 아니, 셰퍼즈란 무엇이며 대체 뭘 찾으란 말인가? 지금이야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떤 책의 어느 부분을 보아야 하는지 감이 금방 오지만 입학한지 겨우 나흘째였던 그날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었다.
예일 로스쿨 도서관은 열람실과 서가로 나뉘어 있는데, 로스쿨 학생 두 명 당 하나씩 도서 열람용 책상(study carrel)이 배정된다. 나도 단짝 친구와 열람용 책상을 함께 썼다. 내가 입학한 이듬해인 2001년은 예일대가 개교 300주년을 맞는 해였기 때문에 행사도 많았고 또 그만큼 공부를 접어두고 구경나가고 싶은 유혹도 많았다. 하루는 대경기장에서 ‘사이먼과 가펑클’의 전 멤버인 폴 사이먼이 전설적인 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불렀는데, 로펌 1차 면접 준비가 겹쳐 안타깝게도 가지 못했다. 도서관 책상에 자료를 펴놓고 앉긴 했지만 정작 마음은 콩밭에 가 있으니 집중이 될 리 없었다. 내 책상 맞은편에는 작은 창문이 나 있었는데, 그날 밤 내내 창밖에선 300주년을 기념하는 불꽃이 팡팡 터졌고 그걸 멀리서 바라보는 내 가슴도 따라 뛰었다. 지리하고 피곤할 때마다 창밖을 살짝살짝 내다보는 걸로 마음을 달래며 그렇게 도서관에서 지샌 밤이 참 많다.
2학년때부터는 법학지 활동 때문에 도서관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미국의 거의 모든 로스쿨에는 그 학교에서 펴내는 학술지가 있는데, 이를 로리뷰(law review)라 부르기도 하고 로저널(law journal)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 법학지의 편집위원단은 해당 로스쿨 학생들 중에서 선발된다. 학생 편집위원들은 학술논문을 받아 그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고, 논문에 인용되는 판례들을 꼼꼼하게 읽어 인용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등의 다양한 작업을 거쳐 글을 다듬어서 출판하는 역할을 한다. 로리뷰나 로저널에 글이 실린다는 것은 큰 영광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앞다투어 명성이 있는 로리뷰나 로저널에 논문을 싣고자 한다.
나는 예일 로저널(The Yale Law Journal) 과 예일 법인문학저널(Yale Journal of Law and the Humanities) 등 두 종류의 법학지 일을 했다. 예일 로저널은 예일 로스쿨을 대표하는 법학지여서 법학관에 위치한 사무실도 널찍하고 재정도 넉넉했지만 법인문학저널은 규모도 작고 사무실도 단칸으로 로스쿨 정원 한쪽의 꽃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법인문학저널 일이 개인적으로 조금 더 재미있었다. 문을 열어놓으면 다람쥐가 들어오기도 하는 아담한 사무실에도 정이 갔고, 무엇보다 법과 문학, 법과 예술을 접목시킨 논문을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한 번은 내가 감명깊게 읽었던 ‘The Moonstone’ 이라는 고전 추리소설을 분석한 논문이 들어와서 잔뜩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좋은 글이긴 했지만 주제가 그리 신선하지 못해 편집회의에서 찬반 투표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반대 의견을 냈던 적도 있다.
편집하는 일에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후에야 이처럼 글의 내용과 관련해 나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햇병아리 시절에는 주로 하는 일이라는 게 연필을 잔뜩 깎아 놓고 다른 편집위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깨알 같은 글씨로 달린 수많은 논문 주석을 전부 읽고 거기에 인용된 책이나 논문의 제목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또는 문장부호의 용법이 틀렸거나 문법상의 오류는 없는지 짚어내 하나하나 표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주석에 인용된 책을 일일이 찾아다 주석의 내용과 비교해 보며 확인하는 과정이 필수였으므로 이런 종류의 편집 작업은 주로 법학도서관에서 했다.
이런 일을 싫증이 나도록 하기 때문에 미국 로스쿨 학생들끼리는 농담삼아 로저널 편집위원은 10m밖에서도 마침표나 쉼표가 이탤릭(italic)체인지 아닌지 귀신같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법학지 활동을 통해 글을 비판적으로 읽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미국 법학계에 발자취를 남길 훌륭한 논문들의 초안을 접할 수 있어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었다.
졸업 후 예일 캠퍼스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로스쿨 건물에 들어가 습관처럼 도서관 입구 쪽으로 발을 옮기다가 문득 이젠 졸업을 해서 외부인이 되었으니 이전처럼 마음대로 도서관에 드나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마음이 아팠다.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 라는 푸시킨의 시처럼, 도서관에 앉아 피곤함을 떨쳐버리려 애쓰면서 멍하니 학교 밖의 세상을 꿈꾸곤 하던 그 시간들도 이젠 오히려 돌아가고 싶은 추억으로 남았다.
[예일법대 이야기⑥] 학창 시절의 추억중에서…
입력 : 2004.01.14 09:30 37' / 수정 : 2004.01.14 09:42 05'
▲ 정원선씨 | |
수업 시간에 한 교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예일 로스쿨을 ‘예일 헌법대학원(The Yale School of Constitutional Law)’ 이라고 부르곤 했던 것이 생각난다.
예일 로스쿨에는 브루스 애커먼(Bruce Ackerman), 제드 루번펠트(Jed Rubenfeld), 잭 볼킨(Jack Balkin), 아킬 아마르(Akhil Reed Amar)를 비롯해 훌륭한 헌법학자들이 특히 많고 자연히 예일의 헌법 관련 강좌는 매우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아킬 아마르 교수의 연방법원 (Federal Courts) 강의다. 아마르 교수는 국민을 국가 권력의 원천으로 보는 민중주의 헌법론(populist interpretation of the Constitution)을 주창한 젊은 인도계 학자다. 그는 스물 일곱의 나이에 예일 로스쿨 교수가 되었는데, 너덜너덜한 휴대용 미국헌법 책자를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칼 뽑듯 척 꺼내들곤 하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아마르 교수의 연방법원 수업은 예일 로스쿨에서 가장 공부량도 많고 어려운 강의 중 하나여서, 교수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1학년 학생들이 이 수업을 듣지 않도록 권유한다. 나 역시 로스쿨 생활에 충분히 적응한 3학년 때 이 강의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웬만큼 공부해선 진도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미 연방대법원 판결문을 읽고 꼼꼼하게 분석, 토론하는 것이 수업 내용의 주였다. 우리가 사용한 교과서인 하트와 웨츨러(Hart & Wechsler) 공저 ‘연방법원과 연방제’(The Federal Courts and the Federal System)는 현직 연방 대법관들 중 다수에게 로스쿨 재학시절 직접 연방법원 과목을 가르쳤던 교수들이 집필한 책이기도 한데. 이 분야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는 저서이다.
아마르 교수는 읽을거리로 내 준 케이스 중 거의 한 건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없이 수업 시간에 꼭 짚고 넘어갔다. 주로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강한 비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보통 때는 귀를 바짝 곤두세우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에 느릿느릿 말하는 버릇이 있는 아마르 교수이지만 수업 중에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온 교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열강을 했고 말도 학생들이 도저히 다 받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하루는 ‘노던 파이프라인 건설회사 대(對) 마라톤 파이프라인회사’(Northern Pipeline Construction Co. vs. Marathon Pipeline Co.)라는 케이스를 공부하면서 평소처럼 아마르 교수가 대법원의 판결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듣고 있던 한 친구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연방대법원은 엄연히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법원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주 잘못된 판결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아마르 교수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쎄, 케이스마다 경우가 다르기 때문에 일반론을 제시하기는 힘들지요. 하지만 연방대법원을 거쳐가는 케이스가 1년이면 수천 건에 육박하지 않습니까. 업무량이 과중해 대법관들이 한 건 한 건 충분히 숙고하고 소화해 내기가 벅차다는 견해도 있어요.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에 그와 관련한 논문이 한 편 실린 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 다음 시간에 가져오도록 할께요. 또 연방대법원 대법관직은 임명직인 만큼 정치적인 요인도 있겠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 수업 시간에 차츰 그런 얘기도 나눌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는 장난기 있게 빙긋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것들을 논하기 전에 먼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 대법관들이 아니라 바로 나일 가능성도 고려해 주어야지. 물론 난 학자로서 내 학문적인 신념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 수업도 하는 것이지만, 아직 배우는 입장인 여러분은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견해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려니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대법관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는 내 의견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인데다 아마르 교수가 그렇게 얘기한다는 게 재미있기도 해서 함께 와르르 웃었다.
예일 로스쿨 건물에는 로스쿨 학생이나 교직원이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로스쿨 측에서 직접 운영하는 보육 시설이 있다. 마침 내 기숙사 방 창문 아래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있어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질 때 창틀에 팔을 괴고 내다보곤 했다. 아마르 교수의 아들도 이 놀이방에 다녔는데, 아마르 교수는 수업이 없을 때 틈틈이 나와 아들을 안아주기도 하고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가정적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예일 로스쿨에선 180 여명의 한 학년 학생들을 여러 섹션으로 나누고 한 섹션을 또 다시 12명 정도의 학생으로 구성된 소그룹(small group)으로 나누어, 1학년 1학기에 필수로 들어야 하는 네 과목 중 한 가지는 반드시 이런 소그룹 형태로 진행한다는 설명은 이미 한 바 있다.
소그룹 친구들은 함께 수업을 받고 같이 고민하고 부대끼면서 끈끈한 정을 쌓게 된다. 예일 로스쿨은 이렇게 소그룹 단위로 진행되는 강의를 염두에 두고 꼭 15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강의실을 7~8개 정도 지어 따로 마련해 두었다.
소그룹 학생들끼리는 함께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소그룹이 다른 소그룹을 초대해 식사 모임을 갖는 등 (우리는 이것을 ‘inter-small-group mixer’ 라고 불렀다) 재미있는 이벤트도 많다.
내 단짝 친구의 소그룹이 돈을 모아서 ‘우리 담임 교수님 엉덩이는 너무 예뻐요’ 라는 문구가 새겨진 새빨간 티셔츠를 맞추었다길래 설마 그걸 입고 학교에 올까 했는데 하루는 그 소그룹의 담임 교수와 조교, 학생들이 전부 그 티셔츠를 입고 야외 수업을 하러 예일대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으로 우르르 몰려나가는 광경을 보고 놀란 적도 있다.
나의 경우 소그룹으로 들은 수업이 헌법이었는데, 담임 교수는 헌법학자이자 예일 로스쿨의 중국법 연구소(China Law Center) 총책임자인 폴 거워츠(Paul Gewirtz) 교수였다. 거워츠 교수는 동양의 문화와 법제도에 대해 깊은 애정과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헌법 수업 중에 중국의 ‘중’자만 나와도 눈을 반짝이며 “여러분, 우리 잠깐 미국 헌법은 접어두고 중국 얘기를 좀 하면 안될까요?” 하고 우리에게 부탁하기도 했었다.
가볼 만한 중국 관련 강연이나 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그가 친절하게 공지를 해 주어서 친구들과 함께 찾아다니며 중국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고, 외국 사람들이 동양의 법제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배울 수 있었다. 거워츠 교수는 외국 학생이 유학와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도 깊은 사람이어서 여러모로 담임 교수를 참 잘 만났다는 생각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거워츠 교수는 꼼꼼한 성격이라 정규 수업 시간에 미처 못 한 얘기가 있다 싶으면 저녁 늦게라도 꼭 보충 수업을 했다. 하루는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금요일 밤에 보충 수업을 잡고,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어 오도록 하여 우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 책은 권세에 집착하면서 가정의 소중함이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 주는 자애로움과 같은 미덕을 경시하던 러시아의 한 법관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공허한 삶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거워츠 교수는 그 책을 펴더니 “여러분은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머리도 좋으니 아마도 부나 명예를 손에 쥐기란 그리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것에 너무 미련을 갖지 마세요. 예일에서 보내는 3년 동안 부나 명예에 대한 욕심을 뛰어넘은 삶의 목표를 설정하길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해내기 어렵고, 또 가치있는 일입니다” 라고 말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거워츠 교수의 보충수업을 두고 우리 소그룹 친구들은 서로 상의를 해서 ‘예일 로스쿨의 헌법 보충 수업은 과연 합법적인가?’ 라는 주제로 수업 시간에 배운 여러 가지 헌법학 이론을 응용하고 이런저런 연방대법원 판례를 끌어다 붙인 우스꽝스러운 가상 판결문을 작성해 예쁘게 표구를 해서 헌법 수업 마지막날 거워츠 교수에게 선물했다. 거워츠 교수는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며 무척 기뻐했다. 지금도 이 액자는 거워츠 교수의 연구실 한쪽 벽에 소중히 걸려 있다.
미국 로스쿨 학생이라면 대부분 모의법정 변론(moot court oral argument)을 거쳐야 한다. 예일 로스쿨에서는 이 모의법정 변론 및 그 변론에 대한 평가가 1학년 1학기 때 소그룹 단위로 이루어진다. 우리 소그룹의 모의 법정은 미국 연방대법원으로 설정되었고, 거워츠 교수가 대법원장 역할을, 두 조교 선배들이 대법관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다.
거워츠 교수는 소그룹 학생들을 두 명씩 짝지워 주고, 자신과 조교들이 입을 법복까지 구했다면서 실제 변호사가 되어 연방 대법관들 앞에 선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준비하라고 말했다.
모의법정은 스릴감 넘치고 재미있는 경험이지만 동시에 이제 갓 법서를 읽기 시작한 새내기 법대생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검증 받는 첫 시험대인 만큼 적잖이 긴장되는 관문이기도 하다. 학생 한 명 당 10~15분 정도로 약식 변론 시간을 갖는 교수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우리 소그룹은 한 명 당 연방대법원에서의 실제 변론 시간인 45분에다 변론이 끝난 후 교수와 조교 선배들이 자세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시간까지 30분 정도 따로 두었기 때문에 상당한 분량의 발표를 준비해야 했다. 변론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그 중 몇 가지를 꼽는다면 판례 인용의 적절성, 주장의 명료성과 논리성, 자신감 있는 태도와 목소리, 판사들을 예우하는 정중한 자세 등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맡은 케이스는 당시 연방대법원이 심리중이었던 ‘Bartnicki 대(對) Vopper’ 케이스였다. 불법적으로 도청 녹음된 전화 통화 내용을 도청의 주체가 아닌 제 3자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개한 경우 그 방송 내용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미 연방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가 논점이었다 (연방대법원은 이런 경우 방송 내용은 미국 수정헌법 1조의 보호를 받는다고 추후 판시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브리프 (brief), 즉 변론요지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이 변론요지서를 근거로 변론이 이루어지며, 변론요지서를 통해 어떤 주장을 하려면 반드시 그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케이스를 열거해야 한다.
모의법정 변론 날 거워츠 교수가 지시해 준 대로 변론 요지서에 인용한 관련 케이스를 모두 읽고 기억 환기용으로 인덱스 카드(index card)에 알파벳 순으로 이들 케이스의 개요를 꼼꼼이 적어 지참하고 발언대에 나갔지만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메모해 간 내용을 참고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방 대법관들은 변론 도중 변호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판사석이 후끈 달아올라 있다’ 는 의미인지, 이것을 말해 ‘hot bench’ 라고 한다. 우리 소그룹 모의법정의 판사석이야말로 핫 벤치여서, 워낙 질문을 많이 받아 그 질문에 응하다 보니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릴 뻔 한 적도 있었다.
이런 경우 질문자인 판사가 말을 마쳤다 싶으면 선수를 쳐 자기가 원래 펴고자 했던 주장의 맥을 계속 이어 가는 요령이 필요한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할 말을 다 해야 하므로 이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상대측 변호인 역할을 한 친구 앨리슨의 변론은 매우 날카로웠다. 이후 앨리슨이 현직 판사들을 모시고 열리는 예일 로스쿨의 공개 모의법정인 모리스 타일러 모의법정(Morris Tyler Moot Court Competition)에서 선발 과정을 거쳐 본선진출을 한 학생 중 하나였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그때 우리 소그룹 학생들 중 가장 만만치 않은 맞수를 만나지 않았었나 싶다.
모의법정 준비 기간은 보람이 있긴 했으나 로스쿨 3년을 통틀어 가장 힘겨웠던 시간이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의법정을 잘 치러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에 얼마 안 있어 치르게 될 첫 시험에 대한 부담감까지 더해져 한 학기 내내 쌓여 온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시간도 흘러가 버리게 마련이다. 모의 법정이 끝난 후 우리 소그룹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Bartnicki 케이스의 실제 대법원 공개변론을 경청하기 위해 거워츠 교수와 함께 워싱턴 D.C.로 향했다. 이곳에서 거워츠 교수와 친분이 있는 스티븐 브라이어(Stephen Breyer) 연방 대법관과 뉴욕타임즈의 연방대법원 출입기자이자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린다 그린하우스(Linda Greenhouse)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린하우스 씨는 기자의 눈으로 본 대법원에 대해 솔직한 얘기를 들려 주었고 브라이어 대법관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한 명 한 명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대법관들이 케이스에 대해 논의할 때 모이는 회의실로 안내했다. 이곳에는 아홉 명의 대법관들이 앉는 의자가 테이블을 빙 둘러 놓여 있었는데 의자 등받이에는 대법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평소 존경하던 샌드라 데이 오커너 (Sandra Day O’Connor·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 대법관) 판사의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찾아 앉았다. 브라이어 대법관은 ”현재 심리중인 케이스에 대해서는 사견을 밝힐 수 없지만 그 외엔 어떤 질문을 해도 좋아요” 하고 말문을 열더니 책이나 신문을 통해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가 모의법정 준비를 위해 직접 공부했던 케이스였기 때문에 대법원 변론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대법관들은 변론이 있기 전 이미 양측의 변론 요지서를 읽고 어느 정도 입장을 확고히 해 둔 상태이므로, 연방대법원 변론은 대법관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기 보다는 대법관들이돌아가며 변호인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들 서로의 입장을 확인 또는 재확인하는 간접적인 논의의 장에 가깝다는 견해도 있다.
특이하게도 예일 로스쿨 선배인 클래런스 토머스 (Clarence Thomas)대법관은 이러한 변론 과정 자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대법원 변론 무용론자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토론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그날도 모든 대법관들이 주의깊게 변론을 경청하고 활발히 질문을 했는데, 토머스 대법관만은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어서 우리 소그룹은 미 법무부를 방문, 역시 예일 로스쿨 선배이자 당시 미국 법무 차관(Solicitor General)이었고 Bartnicki 케이스에서 미국 연방 정부의 대리인으로 소송을 수행했던 세드 왁스먼(Seth Waxman)씨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가졌는데 왁스먼 전 차관에 의하면 제 아무리 능수능란한 소송 변호사라 해도 연방대법원 변론 시에는 평소보다 더 긴장을 하게 마련이고, 믿기 힘들지만 가끔씩 그 긴장감이 극에 달해 혼절해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연방대법원 견학은 사법권의 권위가 오랜 검증과정을 거쳐 자리잡았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뉴헤이븐에서 워싱턴 D.C.까지 운전을 해 오느라 지쳐 있던 소그룹 친구 한 명이 대법원 변론을 지켜보다 잠깐 졸았던 모양인데, 관리인이 다가오더니 준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졸면 안 됩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다시 이런 모습을 보이면 규정상 나가 주셔야 하겠습니다.”
물론 신성한 법정에서의 질서 유지란 매우 중요하겠지만, 그 친구가 코를 골거나 누워서 잔 것도 아닌데 나로선 납득하기가 힘든 조처였다. 그러고 보니 대법원 판사석도 청중석에 앉은 사람들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다. 국민들에게 가장 가깝고 열려 있어야 할 법제도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원선 변호사·심슨 대처 &바틀릿 법무법인 소속·2003년 예일로스쿨 졸업)
(정원선 변호사·뉴욕 심슨 대처 & 바틀릿 소속·2003년)
예일법대 이야기 연재를 마치며
입력 : 2004.01.18 08:59 37'
▲ 정원선 변호사 | |
이 글을 쓰면서 제가 무엇보다 염두에 두었던 독자층은 미국 로스쿨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나 유학을 꿈꾸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었습니다. 제가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던 때만 해도 로스쿨 유학생의 수도 적고 로스쿨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제 경우, 로스쿨에 재학중인 분들과 어렵게 연락이 닿았더라도 ‘이 정보가 상대방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보다는 ‘이렇게 얘기했을 때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를 어쩔 수 없이 먼저 고려하여 삼가게 되는 사람의 자연스런 본성 탓인지 로스쿨 생활이나 원서 준비 과정에 대하여 곧이곧대로 얘기해 주는 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게 답답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어서, 제 경험과 지식이 제한되어 있긴 하나 적어도 그 한도 내에선 제가 느낀 대로 꾸밈없고 솔직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3년 동안 다녔던 학교이므로 예일 로스쿨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야 많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신문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은 내용들도 많아, 기사를 쓰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뾰족한 수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땐, 만약 미국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나 미국 문화에 익숙치 못한 사람이 제 앞에 앉아 있다면 제가 그에게 우선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일 로스쿨 들어가기’를 쓸 때는 원서 준비를 하면서 외국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얘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졌던 과거 제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입학처 사람의 인상과 이름을 소개하고, 원서 처리와 심사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입학 서류를 다루는 측도 모두 로스쿨 지원자들처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고 사무실에 틀어박혀 원서 심사를 하기보단 가족이 기다리는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을 법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니 지나치게 거리감을 느끼거나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저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는 원서를 읽는 것이 기계가 아니고 사람인 만큼 유학원서 준비가 단순한 ‘숫자 싸움’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험점수나 학점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판단해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지레 기죽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적절하게 부각시키고 약점을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장점을 학교 측에서 발견해 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로스쿨 도서관 이야기’를 쓸 땐 학생 편집위원들이 학자들의 논문을 직접 편집하는 미국의 로리뷰/로저널 제도에 대해서 우리 나라 법대 교수로 계신 은사님과 나누었던 얘기를 떠올렸습니다. 선생님께선 평소 느끼시던 우리의 실정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물론 학생이 주체가 되는 학술논문 편집 제도에도 단점이 있겠지만 나이와 처지, 직위를 초월한 격의 없는 의견 교류의 문화만은 분명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하시며 외국의 학계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법학지 일을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생각, 그리고 저의 생각을 글을 읽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썼습니다.
제가 예일 로스쿨에 재학중이었던 3년은 미국 현대사 초유의 사회적 격동기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제가 직접적인 피해를 본 것은 아닙니다. 대학원 학생 정도 되면 지성인이고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외국인에 대한 가시적인 비난도, 따돌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인 만큼 국가의 위기 앞에서 똘똘 뭉치는 미국 사람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소외감을 느꼈고, 외롭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사고방식은 아니겠지만, 그런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We versus They’ 구도로 그들과 나, 그들과 우리, 그들의 문화와 우리 문화, 그들의 교육제도와 우리의 그것 등등 사이에 선을 긋고 비교, 대조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결론이 나는 부분들이 있었고, 더 고민해 보면 그들이 그렇게 앞서 가는 데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점을 배울 수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제 나름대로 판단한 내용들을 예일 로스쿨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부족하나마 이 글에 담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짧은 식견과 바쁜 직장인의 처지 탓에 그런 심경을 충분히 담아낼 만큼 글을 오래 싣지는 못하게 되어 아쉽기도 합니다.
글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이 고루 있었습니다. 이메일을 보내 주신 분도 많았고 팩스를 보내 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도움을 받았다는 분들도 계셨고 격려도 많이 해 주셨으며, 우리 사회에 대한 걱정이 담긴 염려의 시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소 원색적인 비난도 있었는데, 사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제겐, 경우에 따라 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글이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제 마음을 어눌하게밖에 담아 내지 못한 저의 불찰이며, 이미 저의 손을 떠나 대중 매체에 공개된 글은 더 이상 제 사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고 대중이 그 글에 어떤 판단이나 가치관을 투영하여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든 제겐 간섭하거나 질책할 권리도 이유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단, 혹시라도 제 글로 인해 시작된 논의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이 우리 모두가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발전적인 토의로 번져 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니 세상은 정말 넓고, 그 어느 때보다도 제 자신이 아주 작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직은 학생의 마음일 때도 있는데, 사회는 당연히 저에게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요구하니 그 괴리 탓에 다소 허둥대고 있는 요즘입니다. 최선을 다해 일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조금이나마 더 능력 있고 심지 깊고 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면을 허락해 주신 조선일보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고, 비록 개별적으로 답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이 연재기사를 계기로 제게 연락을 주신 분들과는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 한번쯤 스쳐가기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04년 1월 16일
뉴욕 맨하탄에서 정원선 드림.
첫댓글 10년전 글 같은데 로스쿨 생활에 대해 참조하시면 좋을꺼같네요 ^^^^
예일 로스쿨의 교육정신과 교수님들의 말씀이 정말 인상적이네요!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네에 그리고 입학원서 심사과정은 정말 눈여겨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