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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주일설교 사랑은 영원합니다(고린도전서13:8-13)
본문: 고린도전서13:8-13
제목: 사랑은 영원합니다
오늘은 고린도전서13:8-13의 말씀을 가지고
“사랑은 영원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하는 모든 일의 가치는
사랑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 어떤 능력과 얼마나 큰일 일지라도
사랑에 따라 그 중요성은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이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을 빛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빛이 반사하는 만큼 밝은 존재로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은사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의 근거와 기준이 되는 것은
사랑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은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떨어지다.’는 말은 시효가 다하여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인간은 영원 속의 우주에서 변화를 거듭하며
불멸하는 영혼의 소유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말이 있음을 믿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정해진 마지막
혹은 목표를 행해 달리는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오늘의 본문을 전하고 있는 바울도
재림과 마지막 심판의 사건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이 종말은 몸의 부활, 하나님 나라의 상속, 영생 등으로
묘사되는 구원 혹은 심판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이 미래의 구원을 바라보는 삶,
곧 구원을 향한 소망의 삶입니다.
구원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이 최종 목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미래를 향한 관심과 소망은
결코 현재의 삶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재가 구원의 이르는 과정인 만큼,
미래를 소망할수록 현재의 무게는 그만큼 생생해집니다.
빗나간 사람들은 현재의 삶이
미래 구원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의 심판과 구원은
오늘 우리의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밝히는 빛입니다.
오늘의 삶이 내일의 삶을 결정하듯이
오늘의 내가 어떻게 사는가가
미래의 심판과 구원을 결정합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을 보면
미래를 향한 소망은
오늘의 삶을 견고하게 붙잡는 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이라는 삶을
그 소망에 따라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이어갑니다.
부활에 관한 잘못된 신념은
오늘의 삶을 망치는 결과를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구원이라는
목표의 빛 아래서 조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의 표현처럼 우리 삶은
“그의 나라와 영광에 들어가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는”삶입니다.
이 소망의 끈을 놓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헛된”것으로 전락합니다.
우리에게는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사랑은 ‘결코’
‘어느 때든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은 지금뿐 아니라 미래에서도
그 가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영속성에 관한
이 한마디에 진술로 만족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의 절대적 중요성을
훼손하는 방해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과 분리가 되면
그것은 자기 과시하는 욕망의 수단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천사가 자기를 높이려고 했을 때 사탄이 되었습니다.
은사라고 하는 것은 한시적이거나 임시적입니다.
우리는 임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현재의 은사는 아무리 대단한 것일지라도
종말적인 상황 곧 심판이나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든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은
신자들이 집착하는 모든은사들은
언젠가는 떨어진다는 말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예언이든, 방언이든 지식이든 능력이든
다 필요 없게 됩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나 능력이나 쓸만하지만
종말의 때에는 아예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과 예언은
매우 훌륭하고 소중한 은사로 여깁니다.
그만큼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가뭄에는 물이 소중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가진 예언이나 지식은
그야말로 부분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예언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안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며 비교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알아 보았자 별로 알지 못하는 지금 우리에게
예언이나 지식의 은사는 소중합니다.
그래서 가지기를 원하고 가진 분들을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영원을 향해 여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완전한 것 같아도
부분적일 뿐입니다.
10절에서 말씀하듯이
그날에는 완전한 것을 보게 되고 완전하게 됩니다.
완전하게 되는 날에는 부분적인 것들은
무용지물이 될 뿐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신자들의 지금과 그때를
어린아이 시절과 어른의 때로 비유합니다.
어린아이 시절을 지나며
긴 성장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입니다.
어린아이는 꼭 자기 수준만큼
말하고 깨우치고 생각합니다.
하준이에는 두 개가 전체인 듯 합니다.
물론 숫자는 열을 넘어서 세지만
몇 개냐고 물어보면 두 개 이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준에게 기도하라고 하면
뭐라 뭐라 하고 아멘 합니다.
물론 그것도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은사라고 해도 지금은 대단한 듯 보여도
항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처럼 소란을 떨 일이 아닙니다.
그저 잠시 사용되다가 용도 폐기 될 것이기에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사랑에 비하면
이것은 하찮은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은사에 대해서 대단하게 여기고
그것으로 소란을 떨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와 미래의 의미를 좀 더 선명하게 규정합니다.
지식과 예언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부분성과 미래의 완전함의 차이는
그저 조금 알고 전부 아는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버렸습니다“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 알게 되었다고 부분적인 지식을
폐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적분을 안다고 더하기 빼기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식이나 예언의 은사는
현재 우리의 위상이 가진 더 깊은 한계를 건드립니다.
12절에서 우리는 ’본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성경은
우리가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본다고 번역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거울 속의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거울은
고대 녹슨 청동 거울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에 유통되었던 청동 거울은
우수한 품질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렇기에 희미한 영상이 아닙니다.
여기서 희미하다는 말은 수수께끼로
곧 이해하기 어렵게 란 뜻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삼손이 불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래서 불레셋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해
삼손의 아내를 압박해 삼손으로 말하게 해서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라고 답을 알려 줍니다.
삼손은 자신의 경험을 수수께끼로 내서 자신은 알지만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본 사람과 수수께끼를 들은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지식이나 예언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라면
주님 앞에 듣게 될 말씀은 직접 보고 듣는 말씀이 됩니다.
환상과 계시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듣고 본 것이기에
그리고 누군가 전달해 주는 것이기에
해석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얼굴로 보고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해석자가 필요 없이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듣고 있는 지식이나 예언은
누군가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알고 있는 부분적 지식과
미래 주님께로부터 알게 될 완전함의 차이는
단순한 양이나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들려주고 보여주고 전달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 예언 방언 등이 중요합니다.
현재로서는 그런 방식으로 밖에는
하나님을 알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날에 주님을 만나게 되면
더 이상 그 어떤 도움도 매개도 필요 없이
주님으로부터 듣고 보게 되어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현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불완전하고 간접적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을 통해 중재되는 믿음의 현실이지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물리적 현실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의 현실 경험은 불안 염려 근심 등은
강력한 주님의 부재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몸을 집으로 삼은“ 현재의 삶은
”주님이라는 집을 떠나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고후5:6)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
곧 현재 우리에게 경험되는 현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의”부패할“ 몸으로
하나님 나라와 같은 ”부패하지 않을“
실존을 상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5:50)
주의 ”함께하심“을 말하기 좋아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주님의 ’부재‘ 이야기가
믿음 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이것이 현재의 삶에 대해
바울이 가졌던 가장 솔직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 몸에서
“놓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간절한 자신의 열망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교인들을 돌보아야 하는 열망과
주님 앞에 있기를 원하는 것 사이에
자신은 살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도 역시 이런 현재의 한계에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해야 합니다.
용감하게 현재의 ”몸을 떠나 주님을 집으로 삼으려는“
소망에 기댄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신의 집에 살든지
떠나 주님과 함께 살든지 중요한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는 삶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그때는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보던 거울로 보듯
간접적으로 보던 지식과 예언과 방언의 은사들은
임시방편으로 어릴 적 추억 정도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 한계 속에서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아이들에게 막대기 하나 돌멩이 하나는
참으로 소중하듯이 지금의 우리에게 은사는
적극적으로 추구할 가치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목적지를 망각한 채
마치 이 임시 은사를 자체가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는 형태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이런 한시적 은사들에 집착하면서
“언제나 없어지지 않”을 사랑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 되겠습니까?
지식이나 예언과 방언의 은사들은 소중합니다.
현재의 부분성을 채워주고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을 알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은사 자체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오면 이 은자들은 시효를 다하고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반면 현재의 삶을 미래의 영광과 연결하는
진정한 끈은 사랑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사랑은 그리스도의 현재적 부재와
미래적 임재를 연결하는 소중한 이음줄입니다.
지금의 거룩한 삶을 미래의 영생과 연결하는데
이 거룩함의 핵심에는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천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사랑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남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삶에서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이나 소망에 기댄 불완전한 삶을 삽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확실하게 보이는
생생한 현실을 누릴 때에는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사랑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까?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핵심 성품에 속하기 때문에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나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몸가짐입니다.
반면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 그분께 토대를 둡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신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신자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최종 결론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소중하지만
그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도 중요하지만
고린도 교회처럼 문제가 있는 곳에서는
사랑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문제는 은사만 강조하고
믿음과 소망은 강조하지만
사랑을 팽개치는 상황이기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은 믿음과 소망을 넘어서
사랑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옛 선인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손가락은 달이 저기 있음 가르쳐 주는 매개체입니다.
달을 보았다면 더 이상 손가락이 멋지네 아름답네하며
자랑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가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나갔다며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을 만나야 하며
그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 없이 그 어떤
예언이나 지식이나 헌신이나 소용없는 것이며
사랑이 없다면 어떤 믿음이나 소망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신앙생활에서
그 어떤 것도 사랑을 으뜸으로 여기고
모든 일을 행하는 성도님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