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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온산 제단(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한 논리로 완전해독) 원문보기 글쓴이: 티끌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찌할꼬(1)
<이사야 52:5>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이사야 52장 전체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여러 가지로 위로하시며
마침내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시는 한량없이 부드러운 하나님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중에 본문 5절 상반절에서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라는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 회한으로 얼룩져
눈물이라도 흘리고 계시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심정적으로 뜨거워져서 예사로운 대목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하나님,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라고 가까히 다가가 여쭤보고도 싶다.
그렇다! 분명히 무슨 색다른 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평소에 늘 우리를 죄인이라고 다그치고 두둘겨 패시며,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심판의 몽둥이가 되는 이방 적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가도록 하신 심판관 하나님임을 만천하가 알도록 수수천년을 성경은 온통
엄한 법정으로 장식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여기서는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라고 우리를 애처러워 하시고 있다.
뿐만 아니라 5절 하반절에서는
[그들을 관활하는 자들이(하나님백성을 짓밟고 있는 적그리스도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더럽히고 있다] 라고 하신다.
적그리스도는 자칭 메시야들이며 사이비 하나님들로서 짝퉁이가 명품을
몰아내는 요란 법석을 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떠들며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더럽히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까닭 없이) 잡혀간 그곳에서(자칭 메시야집단에서)
고생하고 있다고 애처러워 하심과 동시에 교만하게 하나님 노릇하고 있는
자칭 메시야집단에 대해서는 노여움을 나태내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다?] 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죄 없이 잡혀갔다는 말이 된다.
다시 이 말을 간략히 정리하면 우리는 죄가 없다는 말이 된다. 정말일까?
정말 우리는 죄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까닭 없이 잡혀간 것이 되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죄가 없는 것인가?
깊은 사색이 요구되는 이 말씀에 반드시 주목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열과 성을 다한 작품이다.
창조주의 작품인 피조물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물론 있다.
하지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도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서의 자유의지이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행사되는 행동반경이 하나님의 손바닥 안을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범한 죄인으로서
어둠의 자식이 되었는데,
그 어둠의 근원이 빛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뜻이다.
어둠의 자식 뿐 아니라, 세상만사 소 오줌 말 똥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이 짓지 아니하신 것이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빛이다. 빛 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실 때
첫째날 창조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고 했다(창1:3).
그런데 보시기에 좋은 창조된 그 빛을 [빛과 어둠으로 나눴다] 라고 했다(창1:4,5).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빛 속에서 부정적인 죄악의 어둠도 함께 나왔던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 및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45: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출4;11]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2-3]
이렇게 세상의 좋고 나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알려주고 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불구자가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그 불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태내고자 하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었다.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이런 세상이 하나님이 지으신 처음 하늘과 처음땅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창조의 마침이 아니다. 창조의 시작인 것이다.
즉 창조가 진행상태에 있는 창조미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빛 속에
어둠을 동반하고 있는 처음 하늘 처음 땅인 것이다(알파).
하나님이 빛을 지으시자 동시적으로 어둠이 등장하게 되는 필연 때문에
예수님은 어느 소경된 자가 본인의 죄(어둠)나 부모의 죄로 인하여 소경된 것이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시면서
소경된 자를 고쳐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태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지금도 창조를 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장애가 있는 자를 정상으로 고쳐주셨다는 것은 창조미완에 있는 자를
창조완성으로 이끌어내어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다. 이를 본질적으로 확대하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사망의 몸을 영생의 몸으로 완성시키신다는
뜻이 담겨 있다(오메가).
사망의 몸도 하나님이 지으시는 것이고, 영생의 몸도 하나님이 지으시는 것이다.
처음엔 사망의 몸이요(알파), 나중은 영생의 몸으로 완성하신다(오메가).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는 죄악의 사망의 몸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고(알파)
의의 영생의 몸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오메가).
그렇기 때문에 자기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다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 피조물 인간의 편에 서서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면 까닭 없이 잡혀간
것이 되고 만다. 피조물 인간이 무슨 힘이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하나님 형상대로까지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그것이 아직 창조미완에 있으면
죄악의 어둠에 처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창조완성에 도달하면 의의 빛으로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완성의 영광도, 창조미완성의 고난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관계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다고
빙산의 일각처럼 아주 살짝 드러내셨다.
그렇다면 성경전체를 뒤덮고 있는 자기백성의 죄악에 대한 호된 책망과 질타와
심판하심으로 인하여 사로잡혀 가게 하심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귀(어둠)를 잡기 위해서다.
어디 그 뿐인가. 물론 같은 말이 되겠지만 성경을 비유비사로 감추어 놓은
이유도 완전히 마귀를 잡기 위해서다.
우리 인류는, 아니 집약적으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은 아직 창조 미완에 있는
어둠에 처해 있기 때문에, 말로는 빛 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마귀(어둠, 반역천사)의 추종자가 되어 있고 사망의 몸에 처해 있다.
마귀도 어둠이요, 인간도 어둠이니 유유상종 아닌가.
세상 창조 이전에는(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흑암(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고 있다고
알려 주고 있다(창1:2).
이는 창조주가 되실 본디의 하나님이 흑암과 빛이 함께 있는 혼원무극임을
뜻하고 있다.
그 하나님이 자기 속에 있는 흑암을 몰아내는 일이 창조세계의 펼침이다.
그 하나님이 자기 속에 있는 흑암과 결별하고자 함이 창조세계의 현현이다.
따라서 창조란 반드시 내 생명의 피가 요구되고 있는 고난도의 일이다.
여기서 생명의 피란 육체의 피를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비본질적 육체의 피를 흘려주셨으므로 비유라고 함)
영적 생명의 피를 뜻한다.
(오늘에 오신 재림주는 본질적인 영적생명의 피, 즉 말씀의 피를 흘려주신다)
이렇게 내 속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내가 죽고 다시 거듭나야 한다.
혼원무극에 계셨던 하나님이 최초의 그 죽음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첫째날의 창조에서 [빛이 있으라!] 라고 외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창조 다섯째 날에 오신 예수님은 비유로 오셨으므로 육체의 피를 흘려주셨다.
창조 여섯째 날에 오신 오늘의 새 이름은 본질적 말씀의 피를 흘려주신다.
일위 하나님, 이위 예수님, 삼위 새 이름, 모두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를 위해서 영적 피이든 육체의 피이든 생명을 바친
것이다. 창조란 반드시 생명의 피가 요구되는 최고도의 고난의 일인데,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일을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시고
우리도 그 뒤를 따라오라 하셨다.
창조하시는 하나님도, 창조를 받는 우리도 모두 생명의 피를 흘려야
창조는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내 생명의 피(비유로 주신 예수님의 복음)를 흘리지 않고
곧장 비유로 주신 예수님의 복음으로 영생을 하리라는 선악과를 범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비유로 주신 예수님의 복음으로 곧장 영생하리라는
선악과를 범하면 그 날로 죽게 된다. 왜냐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선악과를
범하는 그 순간부터는 비유가 명백히 풀어지는
오늘의 진리의 새 말씀에는 일별의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범한 자기백성(기성교단)에게 하나님은 그 죄를 물어
오늘의 혹독한 자칭 메시야들에게 붙여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생하게 하신다.
거기서 눈물 콧물이 쏙 빠지도록 고생을 해보면
영특한 자들은 조금 철이 들어서 오늘의 진리의 새말씀을 행여 들어볼
여지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목이 빳빳하기로 유명한 자들이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마귀(어둠)를 몰아내고 광명의 빛으로 자기백성을 찾아오려는
피눈물 나는 전략이다. 하나님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누워 떡 먹기로
넉넉하게 이기시는 게 아니고, 박빙의 승부수를 던져 마지막 한 수로
이기시는 것이다.
박빙의 승부수인 마지막 한 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을 감추어 놓음과 동시에
그 일로 자기백성을 적그리스도에 낚시밥으로 던져서 자칭 메시야 노릇을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칭 메시야들이 성경을 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화려한 그들의 집권 중에 오늘의 새이름의 재림주가 오셔서
그들의 거짓을 폭로함으로 말미암아, 만인 앞에 현행범으로 잡아서 무저갱에
던져 넣는, 그 일이 아득하게 성경역사 6천년이 걸린 승리이다.
(성경역사 6천년이 걸렸다는 것은 창조 셋째날 아담의 족보가 나오는
창4장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형상의 남자와 여자가 나오는 오늘날
창조 여섯째날 중반 때까지를 말한다.
창조 첫째날과 둘째날은 우주과학과 지구과학이 말하는 수백억, 혹은
수십억년의 나이를 먹고 있다)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창조의 고난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창조란 온갖 고난과 질곡이 아니던가.
피조물들이 당하는 창조의 고난이 원천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대상인 자기백성을 향하여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다] 라고 애처러워 하신 것이다.
창조란, 창조를 하시는 분이나 창조를 받는 인간이나 동일하게
내 속에 있는 흑암(마귀, 죄악)을 몰아내고, 몰아낸 그 자리에 빛으로 채워서
완전한 빛으로만 남을 때까지 피 흘려 이겨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오늘은 오늘의 분량만큼 내일은 내일의 분량만큼 끊임없는 고난의 연속선상에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새롭게 거듭나는 부활을 전제한다.
어둠의 내 생명을 죽이는 것이 피 흘림이요, 피 흘려 죽은 그 분량만큼
내가 새롭게 빛나는 새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의미이다.
어제의 내가 죽고 내일의 나로 부활하는 미래지향적인 것, 이것이 창조이다.
따라서 창조에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기성교단은 그 교리의 생명에서 죽기는커녕
기성교단의 교리(당장에 구원받았다는 바울의 교리)로만 구원 받고
복을 받았다는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그게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요, 그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큰 바벨론의 바벨탑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창조의 모든 고난의 과정들이 원천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다] 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류의 노골적인 말씀은 아주 희귀하게 딱 한번 기록되었다고 사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