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의 눈으로 본 황우석사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와 국회의 국정조사를 앞두고 있는
황우석사태는 이미 약 4개월이 경과되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2005년 11월 섀튼의 결별선언과 의 보도 이후 그야말로
‘핵폭탄’처럼 터진 이 대형 과학사기 사건은 단지 과학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온 국민을 혼란과 논쟁 속에 몰아간 중대한 사회적 사건이
되었다. 다른 나라라면 과학계 내부의 검증과 자정 메카니즘으로 비교적 쉽게 처리되었을 과학적 부정행위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사회적인 대혼란을
야기한 것은 한마디로 황우석교수가 단지 한 과학자가 아니라 이른바 ‘국민적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이 노벨상 후보로 여기며 나라의
자랑으로 삼던 영웅이 하루아침에 한낱 과학 사기꾼으로 전락하게 된 상황을 사람들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을 것이며, 사실 황우석 지지자들은 아직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황우석사태는 또한 황교수와 깊숙이 연결된 수많은 이해관계 집단들--과학·의료계와 난치병 환자뿐 아니라
정부, 정치권, 언론, 기업, 종교계 등-- 때문에 그의 몰락은 단지 한 개인 과학자의 몰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구조적 변동을 초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황우석사태가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황우석 개인의 잘못과 비리는 물론 그동안 누적되어 왔던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구조적 취약점 역시 한꺼번에 적나라하게 노정이 되었다. 즉 황우석사태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자 문제해결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된 것이다. 나는 황우석사태 이전과 이후의 한국사회는 불가피하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우석사태는 어떤 식으로든 결국 종결이 되겠지만, 그 종결의 방식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한국사회의 미래는 희망적일 수도 또는 절망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특히 황교수를 국민적 영웅으로 부풀려 결국 지금과 같이 걷잡을 수 없는 황우석사태를 야기시킨 일차적 책임은 정부를
비롯한 정치권에게 있다. 황교수 자신이 과학적(및 정치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정치권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 역시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황교수를 적극 지원하고 활용하였다. 정치권력과 과학권력 사이의 이러한 동맹이 황우석사태를 통해 파국을 맞음으로써 과학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림은 물론이고 이미 권위를 상실한 정치권은 더욱 심각한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민주(또는
개혁) 정권’에 대한 실망과 염증 그리고 더 나아가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는 매우 우려스러운 결과이다. 이 때문에 황우석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냉철히 살펴보는 데 있어서 이 사태의 저변에 깔린 정치적 차원에 대한 성찰은 필수적이다. 아직 국회의 국정조사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황우석과 정치권과의 깊은 관계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대부분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지만, 이미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도 황우석사태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기본 골격의 파악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이 글은 위와 같은 관점에서 황우석사태의 원인과 의미를
정치적 차원에서 짚어보고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이 사태의 해결방향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황우석사태의 발단 및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자세히 다루어졌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꼭 필요하지 않는 한 생략하기로 하겠다.
2.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의 ‘황우석 영웅 만들기’
황우석교수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자질과 업적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부와 언론이 손을 맞잡고 이끌어 온 ‘황우석 영웅 만들기’의 결과 때문이다.
황교수를 과학계의 영웅으로 의도적으로 띄우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정부 시절부터였다.
그는 원래 생명공학에서는 주변적 분야에 속하는
동물복제의 전문가였다. 그가 처음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5년 수정란분할에 의한 소 복제에 성공하면서부터였고, 1997년 2월말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체세포 복제동물 ‘돌리’의 탄생이 발표된 후 국내에서 그러한 기술을 추격할 수 있는 유망한 복제 전문가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황교수의 명성은 미미한 편이었으며, 그가 생명공학의 스타로 떠오른 것은 1998년 김대중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정치적
후원자를 갖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이미 몇 년 전에 만남이 있었던 이해찬의원(황우석과 서울대 72학번 동기)이 교육부 장관이
되었고, 또 황교수의 대전고 선배인 강창희 자민련의원이 과학기술부 장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체세포 복제소의 연구를 진행중이던 황교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고자 하였고, 이는 이듬해부터 시작된 ‘두뇌한국(BK)21’ 사업에 황교수의 서울대 농생명연구팀이 선정되는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지원에 보답하듯 황교수는 1999년 2월에 복제 젖소 ‘영롱이’를, 4월에는 복제 한우 ‘진이’를 연이어
탄생시켰다. ‘영롱이’는 영국의 복제 양 ‘돌리’ 이후 미국과 일본에 이은 세계 5번째 체세포 동물복제이자 젖소로는 세계 최초의 성공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은 당시 IMF의 여파 속에서 실의에 젖어 있던 국민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고 성과에 목마르던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도 커다란 선물로 여겨졌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황교수가 출석해 "세계 최초로 한우 소를 복제했다"고 보고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시대를 초월해 칭송받는 작품을 남긴 황진이처럼 국민의 사랑을 받는 소가 되라"는 뜻으로 이 소에 '진이'라는 이름까지 손수
붙여주었다. 이렇게 마침내 대통령의 총애를 받게 된 황교수는 심지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복제한 백두산호랑이 새끼를 대통령이 북측에 선물할
계획(결국 실패하였지만)에 관여할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황교수가 2001년 2월 7일 농림부 업무보고에서 "생명체 복제기술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선도국으로 이른 시일 안에 실용화되도록 하겠다"고 대통령께 보고하자, 김대통령은 "생명산업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이 돼야 우리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며 "동물 체세포복제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개발했다는 말을 들으니 대단히 기쁜 일"이라고 치하하였다. 이어서 김대통령은
그 해 4월 북한과의 과학기술 교류 활성화를 위해 황교수가 당시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복제 젖소와 한우 20마리의 북송 계획을 승인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그 해 6월 8일 황교수를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현 정보통신부 장관) 등과 함께 임기 2년의 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했고,
문화관광부는 같은 해 10월 황교수에게 세종문화상 대통령상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동물복제에서 확고한 위치를 굳히며 스타과학자로
부상한 황교수는 마침내 줄기세포 분야로 그의 영역을 야심차게 확장한다. 2000년 8월에 그는 소 난자에 인간체세포의 핵을 이식한 배아복제
실험을 한 것으로 언론에 알려졌으나 생명윤리 위반이라는 비난이 두려워 공식적으로 이를 시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2001년 가을 경에 여의도의
전경련회관에서 전경련이 주최한 생명공학 관련 강연을 마친 후, 이 건물 지하 다방에서 강연에 함께 참석했던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문신용교수와
미즈메디병원 노성일이사장을 만나 체세포복제를 통한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논의하면서 새로운 계획은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2004년
10월11일자 세계일보에 황교수가 직접 쓴 칼럼 <인간배아 복제연구 '드림팀'>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2001년 어느 날 전경련회관 지하다방에서 서울대의대 산부인과 문신용교수, 미즈메디병원 노성일이사장과 나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상호간의 역할이 정해졌다. 이미 불임 관련 실험으로 일가의 경지를 이룬 문교수님 팀은 총괄조정과 복제배아의 배양 등
기초부분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노성일원장께서는 윤현수박사와 같은 백전노장의 베테랑으로 줄기세포 수립과 그 이후 배양을 책임지기로 했다. 우리
팀은 10여년 간 소와 돼지 등 동물복제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었으며, 각 팀의 역할치고는 꽤나 잘 짜여진 그림이었다. 우리
연구팀은 연전에 이미 류영준·이유진씨의 의사, 간호사 부부가 합류하여 줄기세포 분야에서 무언가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열의가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구계획은 당시 배아복제연구에 대한 시민단체와 생명윤리학계 및 종교계의 반발이 심해 비밀리에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2000년 10월 출범한 과학기술부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마련하여 이듬해 8월에 공표한 ‘생명윤리기본법 골격안’에 따르면 인간배아복제와
종간교잡행위는 금지되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골격안이 생명공학계의 강한 반대로 인해 법안으로 제정되는 데는 실패했다 하더라도,
황교수팀이 사회적 논란이 많은 연구를 공공연히 추진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황교수는 물밑에서 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진행시키는 한편, 대통령선거 시기인 2002년에 여당은 물론 야당의 대통령후보와도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노무현정부가 들어서자 대통령인수위에 참여한 박기영 순천대 교수와 서울대 72학번으로서 정권의 핵심인사였던 정동영, 이해찬
의원 등이 다시 황교수의 정치적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박교수는 2004년 1월 대통령 과학기술보좌관에 임명된 뒤 2월에는 ‘황금박쥐’
모임을 결성하고 황교수의 2004년 <사이언스> 논문에 공저자로 이름이 올랐으며, 2005년 논문 발표 후에는 ‘황우석 연구지원
모니터링’의 운영, 황우석 지적재산관리팀의 구성, ‘최고과학자상’의 신설, 황교수 연구에 대한 지원금 확대(2004년 65억원→2005년
265억원)를 주도하는 등 황교수 지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중 '황금박쥐' 모임은 황교수(=황)를 지원하는 정부와 청와대측의 주요
인사들로서, '노대통령의 권력'을 상징하는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금) 및 박기영 보좌관(=박)과 '삼성과 정권'의 힘을 가진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쥐)의 성을 따서 지은 '황우석 지원 이너써클'이다. 이들은 황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적극 지원하고 한국을 세계줄기세포허브로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 관련 정책을 추진했으며, 막대한 정부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실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즉 박기영, 김병준이라는 청와대의
힘과 진대제 장관을 통한 삼성의 힘이 결합해 황교수를 지원했다고 볼 수 있다. 진 장관은 '황우석 기념우표'까지 발행하기도 했다. 그 밖에 오명
과학기술부 장관도 끝까지 황교수를 옹호하면서 과학기술부 예산 380억원을 그에게 지원한 주요 후원자다.
이들의 조언과 뒷받침으로
결국 노대통령 자신이 '황우석 영웅 만들기'에 적극 앞장서 왔다. 이는 황교수의 연구성과들에 대한 노대통령의 연이은 극찬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2003년 12월 10일 세계 최초로 광우병내성 복제소와 무균 미니돼지를 개발했다고 발표하자 대통령은 "기술이 아니라
마술이라 느꼈다. 동북아시대, 2만 달러 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확실히 발견했다"고 칭송했다. 또 같은 날 황교수의 실험실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감동과 느낌이 넘쳐서 몸이 떨릴 만큼 감전됐다"고 말했다. 또한 노대통령은 황교수의 체세포복제줄기세포 논문이 처음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후인 지난 2004년 6월에는 황교수 연구팀 11명에게 과학기술 최고훈장을 수여하면서 "여러분이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줬다"고 추켜세웠다. 이에 황교수는 "대통령이 평소에 과학도에 베푸는 애정과 성원이 가슴에 와 닿는다"며, "노벨상 수상자 20명의 첫 페이지를
여는 대통령으로서 2015년 사회 교과서에 당당히 기록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화답했다. 더 나아가 노대통령은 지난해 10월 19일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세계줄기세포허브' 개소식에 참석해서는 "이 시기에 제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 여러분과 이 일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척 큰 행운"이고, "옛날에는 제가 별로 도움이 안됐지만 지금은 좀 돕고 있고 앞으로 확실히 밀겠다"며 스스로 '황우석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심지어 노 대통령은 이날 준비해간 연설원고 내용까지 수정했다. 즉 그는 즉석연설을 통해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가지 논란이 훌륭한
과학적 연구와 진보를 가로막지 않도록 잘 관리해나가겠다"며, 생명윤리를 과학 진보의 장애요인일 뿐 아니라 한낱 정부에 의한 ‘관리’의 대상으로
격하시켰던 것이다. 대통령인 그가 2005년 1월에 발효된 생명윤리법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3. 한국사회의 지배구조 변화와 황우석사태
1) 과학기술정책의
‘박정희패러다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황우석교수를 ‘국민적 영웅’으로 띄우는 정책은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의 산물이지만 사실 그러한
정책의 뿌리는 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적어도 박정희 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을 줄곧 지배해 왔던 성장주의, 애국주의,
과학주의, 그리고 결과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낳은 소산이기 때문이다. 즉 과학기술은 국가목표인 경제성장의 도구이고, 따라서 과학기술자들은
조국의 선진 근대화에 기여하는 핵심적 역군이며,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과학기술자들은 오로지 전문지식과 기술만 열심히 추구하면 될 뿐
과학기술의 사회적 역할이나 영향은 몰라도 된다는 생각이 우리 과학기술정책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다. 따라서 남보다 빨리 소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의 정당성을 종종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즉 과정보다는 결과를 훨씬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과학기술 분야에도 어느덧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를 과학기술정책에서의 ‘박정희패러다임’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동안 정권은 여러 차례 바뀌었으며 정치의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과학기술정책에 관한 한 이 패러다임은 근본적 성격에서 전혀 바뀐 적이 없다. 국가가 수십 년간 조장한 이
지배이데올로기에 마취되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자와 일반 국민은 과학기술이 마치 사회적 가치나 권력과는 무관한 어떤 순수한 전문지식의 영역으로
간주하였고, 과학기술은 단지 우리를 선진국으로 인도해줄 어떤 비법과 같은 것으로만 신비화되어 왔다. 그 결과 과학기술정책 및 과학기술연구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생명윤리와 연구윤리, 과학기술의 사회적 성격 이해 등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매우 소홀히 취급하여 왔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황우석교수가 정부와 언론 및 대다수 국민에게서 환호를 받았던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를 누구보다 잘 체화한 과학자가 다름아닌 황우석교수이며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적 업적으로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해준 진정한
과학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를 노벨상을 받을 만한 스타과학자로 띄워 집중지원을 하고 이에 뒤질세라 언론 또한 경쟁적으로 그의 업적과
인물됨을 실제보다 엄청나게 부풀림으로써 그에게는 마치 종교적 열광과도 비슷한 대중의 맹목적 환호와 추종 현상이 뒤따르게 되었다. 한마디로
‘박정희패러다임’은 그 화신인 황우석을 통해 확실한 성공의 증거를 보여준 것으로 믿어졌다고 할 수 있다. 황교수가 어떻게 ‘박정희패러다임’을 잘
체화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국민에게 호소력을 지니는지는 그의 발언과 행동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금방 나타난다. 예컨대 그는
<사이언스>지 논문발표를 마치고 돌아온 2004년 2월18일 귀국회견에서 "미국의 심장부에서 생명공학의 고지 위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오는 길이다"라는 말로 애국주의를 자극했다. 또 2005년 <사이언스> 논문발표 후에 열린 관훈클럽 초청토론회(6월 7일)에서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며 “난치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 복제기술이 한국인으로 열매를 맺어 한국기술로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고 싶어 보안을 지킬 뿐”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논문조작 사건이 터지고 난 한참 후인 2005년 12월 23일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중간발표
뒤에도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세포는 대한민국 기술임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린다. 국민 여러분들이 이를 확인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민의
애국주의에 호소한 바 있다.
성장주의에 대한 발언도 이에 못지 않다. 예컨대 2005년 1월13일 조선일보가 준비한
첨단과학기술산업 발전을 위한 실천적 대안토론에서 그는 "당분간 반도체산업을 기반으로 한 IT산업이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 반도체·IT의 '외끌이
성장'이다. 이어 BT(생명공학)산업이 IT(정보통신)산업과 함께 우리 경제를 이끄는 '쌍끌이'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반도체산업을 일굴 때
가졌던 기업 오너들의 애정을 이어가야 한다. 국가와 국민들이 오너가 돼 BT 강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직접 그가 한 발언은
아니지만, 그의 줄기세포연구 관련 경제적 가치가 향후 10년간 33조에 이를 것이라는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보고서의 예측은 언론에 보도되어
유명해졌다. 아울러 2004년10월 22일 뉴욕에서 정부관계부처 공무원들 및 언론사 특파원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체세포복제를 금지하자는
생명윤리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남대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남대문을 자세히 묘사한 대표적 사례다"고 언급한 것은 그가 지닌
과학주의(전문가주의)를 잘 드러낸다. 줄기세포 치료로 척수환자를 일으켜 세우겠다든지, 광우병내성 복제소 개발로 광우병을 극복하겠다는 주장은
과학만능주의에 가깝다. 또 부안 핵폐기장 설치가 한창 문제이던 2004년 1월 그가 나서서 일부 서울대 교수들과 함께 관악산 핵폐기장 유치를
발의한 일은, 마치 핵발전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과학적 무지에서 나온 것인 양 과학자의 권위로 주민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다. 마지막으로
결과지상주의에 대해서는, 그의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 논문들 자체가 난자제공의 윤리위반과 터무니없는 논문조작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최종발표 뒤인 2006년 1월 12일의 기자회견에서도
“논문데이터 조작에는 사과하나, 원천기술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말로 다시 한 번 결과지상주의적 사고를 드러낸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2월 21일 청와대가 홈페이지를 통해 양극화 기획시리즈 두 번째 글로 올린 “압축성장, 그 신화는 끝났다”에서 현 정권이
‘박정희패러다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자기모순적 사고를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청와대는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불균형 성장전략이 압축성장을 가져왔지만 이와 동시에 양극화 문제를 낳았다고 비판을 하였다. 현 시국에서의 정치적 목적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이러한
주장이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며 좀더 깊이 분석과 성찰이 필요한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사실은 이와 똑같은 사고를 왜 현
정부는 자신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적용하지를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즉 현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은 황우석교수에 대한 집중지원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소위 ‘선택과 집중’을 통해 불균형 압축성장을 지향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초래되는
과학기술계의 양극화와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왔는데 왜 현 정부는 이에 눈을 돌리지 않는가 하는 점이 정말 의아스럽게 여겨진다. 한마디로 현
정부는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박정희패러다임’을 극복하고자 하면서도 정작 과학기술정책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스란히 지속하고자 하는 커다란 자기모순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인다. 2)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과 과학기술 엘리트
따라서 황우석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을 지배해온
‘박정희패러다임’의 산물이며 황우석사태는 단지 한 과학자의 개인적 동기에 의한 부정행위나 스캔들이 아니라 이 패러다임이 초래한 대표적인 병리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만일 그것뿐이라면 우리는 과학기술 부문에서 수십년 동안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는 ‘박정희패러다임’의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고 그 대안으로서 보다 민주화되고 세계화된 사회현실에 걸맞으며 환경친화적 발전을 지향하는 새로운 가치와 이념을 과학기술에
대하여 마련하고 이를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작업은 지금 반드시 그리고 시급하게 필요하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황우석사태는 ‘박정희패러다임’의 지속에서 나타난 현상일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의 발전단계와 지배구조 변화를 함축하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장집교수는 2006년 1월 12일
성공회대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가 주최한 학술포럼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란 제목의 논문을 통하여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최근의 황우석사태는, 다른 어떤 요소보다 노무현정부의 과학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퇴행할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잘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정부가 무언가 업적을 만들어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이 정부가 한국을 세계 생명공학의 중심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과학정책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의 업적을 매개로한 민족주의/애국주의의 동원은, 민주정부의 정책지원과 운동의
열정이 결합하면서 진실과 비판이 억압되는 일종의 “총화단결” (Gleichschaltung)을 실현하는 듯한 유사파시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상황을 통하여 우리는 민주정부를 지지하는 과거 민주화운동세력의 일부와 극우적 세력간의 연대를 목도할 수 있었다.
그는 노무현정부에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 이 정부가 자신의 사회적 지지기반을 대표하려 하기보다 신자유주의에 기울어짐으로써 스스로 약체 정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특징될 수 있는데,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히 유해하고 퇴행적인 상황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최교수에 의하면 여기서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란 구래의 박정희식 생산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접합한 새로운 한국적 성장중심 경제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 정부 하에서는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이라고나 할 새로운 하나의 정치적 연대를 발견하게 되는데, 선출된 노무현정부―국가의 관료기구(특히 이 경우 경제행정관료기구)―수퍼
재벌기업 삼성이 그것이다. 이를 중핵으로 하여 지배적 담론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헤게모니의 생산-소비구조가 형성된다”고 최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나는 최장집교수처럼 황우석사태를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에 따른 민주주의의 퇴행과 노무현정부의 약체화가 초래한 결과로서 무언가 업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빚은 결과라고 보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말한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의 핵심에 황우석사태가 배태되어(embedded)
있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다. 즉 이 새로운 한국적 성장중심 경제체제를 위해서는 성장을 주도할 동력산업이 필요한데, 앞서 황우석의 언급에서도
나오지만 현재 그것은 반도체를 필두로 한 정보통신산업(IT)이라고 볼 수가 있으며 미래의 후보로 정부가 택한 것이 바로 줄기세포기술을 포함한
생명공학산업(BT)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자본주의경제는 이제 기술혁신에 기초한 국제경쟁력을 갖지 않고서는 더 이상 성장이나 생존을 할 수 없는
단계로 진입하였고,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점점 더 과학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대중정부에서는
IMF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IT를 집중지원하였지만, 노무현정부에 와서는 이에 더하여 BT가 ‘미래 성장동력산업’으로서 연구개발 면에서는 더
많은 국가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앞 절에서 살펴본 정부의 ‘황우석 영웅만들기’는 두 정권의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인 정책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발전단계에 부응한 나름대로의 전략 선택의 산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과학기술화되면서 과학기술자의 위치와
사회적 역할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박정희 시대 이래 한국사회에서 과학기술자는 국가의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을 위해 동원되고 이용되는 전문인력이었을
뿐 결코 파워엘리트에는 포함되지 못하였다. 설사 과학기술계의 상층엘리트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료, 군, 정치권, 재벌, 언론 등 지배권력의 하위
파트너로서 이들의 요구(흔히 ‘국가발전 목표’로 간주되는)를 수행하는 정도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에 만족해야 하는 주변적 권력이었을 뿐이다.
그들에겐 진정한 권력도 그렇다고 전문가집단으로서의 자율성도 주어지지 않았고 또 그들이 그런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정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생겨났다. 한국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과학기술자의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할의 증대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그들의 요구와 발언권이 점점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그동안 경제성장에 기여해온 몫만큼 그에 상당하는 지위와 권력을 달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이러한 요구는 먼저 경제부문에서 시작되어
주요 기업의 최고경영층에 이공계 출신이 진출하는 변화로 이어졌다. 최근 한 월간지의 특집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1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
중 이공계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40%로서 전공분야 중 최대 비중을 차지하였다(<월간중앙>, 2006년 2월호). 또 과학기술부가
올해 1월 30일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676개 상장법인의 전체 임원 8천482명의 출신을 전공별로 볼 경우 이공계열이
39.8%(3천376명)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상경계열 37.7%(3천201명), 인문계열 12.2%(1천38명), 법정계열
7%(591명)의 순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특히 대표적인 기업의 올해 신규임원 가운데 이공계 출신은 삼성의 경우 69%, LG는 62%,
현대자동차는 63%로 각각 나타나, 시간이 갈수록 대기업들이 치열한 기술경쟁 하에서 과학기술자를 경영진의 최상층에 배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정부에서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위치 상승은 마침내 정부 및 정치 부문에까지 확대되었다. 새 정부가 국가의 비전이자 핵심
국정과제로 내건 슬로건이 바로 ‘과학기술중심사회’였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로서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의 신설, 과학기술자의 공직진출
확대, 황우석의 국민적 영웅화와 ‘황금박쥐’ 체제의 등장, 과학기술부 장관의 부총리 격상 등이 바로 과학기술자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의도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과학기술인력의 양적 증대와 IMF 위기 등으로 인해 하층에 속한 평범한 대다수 과학기술자들의 고용조건과
사회적 지위는 오히려 열악해진 측면이 없지 않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정부 초기에 ‘이공계 위기’가 사회적 쟁점으로 크게 부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과학기술부문의 최상층 엘리트에게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지배권력의 하위 파트너가 아니라 지배권력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이 정부는 ‘이공계 위기’를 극복하는 유력한 정책방안 중 하나로 이공계 학생들이 본받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역할모델(role model)로서 사회 각계에서 성공한 ‘스타과학자’ 양성을 적극 추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면에서 최장집교수가 앞서 언급한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을 대표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좌우하였던 인물 중에 황우석과 김우식, 진대제,
박기영, 오명, 이희범 등 과학기술자 출신이 대거 포함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이 정부의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으로 사회적 양극화만이
아니라 과학기술계의 양극화도 일어났다고 지적할 수 있다.
과학기술자가 이처럼 경제부문과 정치부문에 걸쳐 한국사회의 파워엘리트로
진출한 것은 한국 자본주의경제의 객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뿐, 그 자체로서 선악을 따지거나 우려해야 할 사항은 아니다. 그간의 폐쇄적인 국내
파워엘리트 구성과 충원기제가 어느 정도 개방화되고 다원화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환영해야 할 현상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파워엘리트가
된 과학기술자들이 한국사회의 지배구조를 과연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인가, 아니면 출신과 얼굴만 바뀌었을 뿐 기존의
파워엘리트가 지녀왔던 문제점들을 지속하거나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할 것인가에 있다. 이 점에서 이번의 황우석사태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이 단지 자신이 지닌 전문적 지식과 인맥 등을 무기로 하여 파워엘리트에 진출하고자 하는 시도가 어떤 불행을 초래하는지 잘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파워엘리트는 아직 부정부패와 권위주의를 청산 못하고 있기 때문에, 철저한 윤리의식과 민주적 가치관을 갖추지 못한
과학기술자는 그대로 기존의 구조에 영합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만일 과학기술계가 이번의 사태를 귀감으로 삼아 진지한 자기성찰을 하지 못한다면
파워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과학기술자의 열망은 또 하나의 추한 권력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더 나아가서 황우석사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이 얼마나 불안한 기반 위에 서 있으며 ‘박정희패러다임’을 청산하지 않은 정치권력과 과학권력의 유착이 어떻게 쉽게 부패의
함정으로 빠져들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4. 한국 정치에 던져진 과제: 민족주의 과학정책 vs. 민주주의 과학정책
황우석사태는
현재 한국사회의 여러 모순과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그 직접적 원인은 IMF 사태를 배경으로 김대중정부에서 시작되어
노무현정부에서 정점에 달한 ‘황우석 영웅 만들기’ 정책에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와 같은 ‘황우석 영웅 만들기’는 이 두 정권의
우연적 선택의 산물이거나 황교수의 개인적 노력이 낳은 결과만은 아니다. 그 근저에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에서 지난 40년간 면면히
유지·계승되어온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박정희패러다임’이라는 오랜 역사적 뿌리가 있다. 더 나아가서 현재 이런 정책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구조적
요인으로서 한국사회의 지배구조가 노무현정부에 들어와서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황우석사태’는 단지 황우석 개인의 실패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정책에서 ‘박정희패러다임’의 실패요, 더 나아가서는 현
정부가 추진해온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의 정당성 위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이러한 위기 국면이 어떻게 전개되고 종결되느냐에 따라 황우석사태
이후의 한국사회 모습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선 ‘황우석 영웅 만들기’처럼 어떤 특정한 과학자를 국민영웅으로 만들려고 국가가
기획하고 개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행한 결과만을 낳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옛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정통 유전학을 비판하고 획득형질
유전과 이를 이용한 농업증산을 주장하여 ‘사회주의과학’의 영웅으로 국가가 떠받들던 리센코, 그리고 북한에서 1960년대 초 원자물리학적 방법으로
경락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주장하여 ‘주체과학’의 영웅으로 한 때 칭송받았던 김봉한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은 모두 과학적 연구성과가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당하게 부풀려져 과학계에서 제대로 검증받을 기회를 못가졌던 것이 치명적 문제였다. ‘영웅 만들기’는 과학계 안에서 학문적
실력보다는 정치권과의 연계로 권위를 얻으려는 폐해를 낳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과학자 내지 그의 분야에 국가의 연구자원이 집중되어 과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큰 부작용을 초래한다. 더 나아가서 국민적 영웅이 된 황교수의 연구에 대하여 생명윤리나 연구윤리의 측면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 그리고 배아줄기세포의 기술적 위험과 다양한 사회적 영향 등에 대하여 성찰하려는 노력들은 모두 황교수의 연구나 생명공학을
시기하여 “발목잡는 사람” 또는 심지어 미국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매국노”, “기독교 맹신자”라고 온갖 음모론에 의해 싸잡아 매도되었다. 그
결과 황교수를 따르며 애국주의의 광풍에 휩쓸린 대중은 BRIC과 서울대 조사위원회 등 과학계의 합리적 검증과 논리적 결론을 부정하고 ‘국익’을
위해서는 ‘진실’도 덮을 수 있다고 강변하는 그야말로 ‘유사파시즘’적인 상황을 연출하였다. 이것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에도 커다란 위협이 되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이는 황교수의 연구와 생명공학 전체에 투명하고 객관적인 검증시스템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특정 권력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황우석사태가 한국의
정치 전반에 던지는 더 핵심적인 문제는 그동안 한국의 제도정치권에서는 물론이고 민주화운동과 진보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왔던 전통적 과학기술관의 한계와 모순이다. 그동안 과학기술은 정치적·이념적 좌/우를 막론하고 합리성의 화신이자 사회진보의 토대라
일반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제도정치권에서 이러한 사고는 박정희 시대 이래 ‘과학기술입국’이라는 구호에서 보듯이 과학기술은 국가발전의 열쇠이자
이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데올로기로 굳어졌고, 진보운동권에서도 이른바 민족자주파(NL)와 민중민주파(PD)를 막론하고 과학기술은 민족과 노동의
해방을 위한 진보적 생산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산업화 추진과 민주화운동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수십 년간의 한국사회를 되돌아보면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쟁점들에 대해서는 좌/우 세력 및 그 안의 다양한 분파들이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표출해왔지만, 유독 과학기술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의견의 대립과 갈등이 거의 없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을 전폭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 세력 모두가 드물게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드문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것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개화기의 계몽사상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역사적
충격을 준 것은 일제 식민지배의 쓰라린 경험이었으리라고 판단된다(박성래·신동원·오동훈, 2005; 김근배, 2005). 이에 더하여 해방 후
남북 분단과 외세 지배의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국가의 생존 및 발전을 어렵게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과학기술의 발전을 지지하는 일사분란한 사회적
태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이 아직 과학기술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정치 민주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에는 별다른 도전에 직면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과학기술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자본주의가 기술경쟁력을 핵심적 관건으로 하는 발전단계에 접어들고, 그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누적되어 왔던 환경문제(보다
정확히는 환경·보건·안전 문제)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으며 정치 민주화의 진전으로 이것이 시민사회에서 점점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면서, 과학기술은 이제 무시해도 될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발전을 지속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의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과학기술은 한국사회가
발전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뿐 아니라, 과연 어떤 발전을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근본적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
핵발전, 생명공학, 새만금 개발 등등이 국가적 과제이자 사회적 논쟁거리가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의존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그로 인해 초래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자각과 저항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에서 해방 이후 처음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도전하고 균열을 내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황우석사태는 과학기술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합의에 마침내 완전한 파산선고를 내리는 일대 혁명적 사건이다. 이제 제도정치권은 물론이고 진보운동권
내에서도 황우석사태를 둘러싸고 분명한 입장의 차이와 분화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단지 황교수의 과학적 부정행위에 대한 입장(=연구윤리)뿐 아니라,
체세포복제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입장(=생명윤리), 더 나아가서 생명공학 전반과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에 걸쳐 각자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과거에는 과학기술 발전을 무조건 지지하고 그 연장 상에서 황교수의 복제연구를 찬성하는 것에 이른바
좌/우 또는 보수/중도/진보세력 간에 큰 차이가 없었고 서로 어색하게 공존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황교수는 여·야를 막론하고 폭넓게 정치적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고 다양한 일반 대중에게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렇게 과학기술자나 과학기술이
몰정치(non-politics)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과학기술사회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치적 견해와 실천의
차이 즉 ‘과학기술의 정치’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학기술의 정치는 과거의 정치적·이념적 구분을 따르기보다는 그것을 종횡으로 교차하면서
차이와 대립이 나타나고, 그 결과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 차이에 따라 새로운 정치적 경계선과 동맹세력이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황교수에게 우호적인 세력에는 극우파(예: <인터넷 독립신문>)와 노무현지지파(예: <서프라이즈>), 진보운동 내
자주파(예: 민노당 NL, <자주민보> 등), 불교세력 등이 있으며, 황교수에게 비판적인 세력 역시 보수파(예: 한나라당 일부),
노무현지지파(예: <오마이뉴스>), 진보파(예: 생명공학감시연대, <프레시안>, 민노당 일부 등), 가톨릭, 그리고 젊은
과학도집단(예: BRIC, SCIENG, 디시인사이드 과학갤러리)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제 제도정치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차기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과학기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가져야 하고, 진보운동권도 이미 과학기술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누구와 무엇을 위한 과학기술 발전에 찬성하는지를 시민대중에게 제시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회운동으로서 존립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황우석사태를 통해
점차 분명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과학기술의 발전모델에 관해 두 가지의 상반된 선택지에 당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를 잠정적으로 ‘민족주의적 과학정책’의 길과 ‘민주주의적 과학정책’의 길로 부르고자 한다. 이 두 가지 모델은 과학 발전의 목표, 과학정책의
기획, 연구개발의 우선순위, 연구의 조직화와 관리, 연구공동체의 문화 등에서 대조적인 차이를 보인다. ‘민족주의적 과학정책’은 과학 발전의
속도를 높여 선진국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며, 이를 위해 성장을 극대화하는 연구분야와 우수한 연구자를 선택적으로 집중 지원하고, 노벨상
수상과 같은 국위선양에 큰 인센티브를 주면서 연구윤리·생명윤리 등에는 최소한의 관심만 기울이는 발전 중심의 전략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적 과학정책’은 과학 발전의 속도를 높이기보다는 환경친화적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 목표이고, 선택과 집중보다는 균형적 과학
발전을 추구하며 투명하고 공정한 연구관리와 민주적 연구문화의 실현을 강조한다. 특히 건전한 연구윤리와 생명윤리의 확보를 위해 시민참여를 허용하는
열린 과학공동체를 지향한다.
우리가 과학기술사회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대체로 이 두 가지의 모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황우석에 열광했던 애국주의 과학은 이중 ‘민족주의적 과학정책’ 모델과 부합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박정희패러다임’의 연장
상에 있으며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 역시 근본적으로 이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 황우석사태는 이 모델이 안고 있는 허점을
드러내면서, 이제까지 잠복해 있었던 두 모델 사이의 갈등이 밖으로 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오로지 ‘국익’을 최상의 가치로 강조했던
황우석 지지자들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연구윤리와 생명윤리를 중요한 규범으로 제시하며 황우석팀의 부정행위에 비판적이었던 생명공학감시연대의 입장이
그것이었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과학기술화가 진전될수록 이러한 갈등은 더욱 뚜렷이 구체화되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점점 더 널리 인식 및 확산될
것이다. 더 이상 과학기술에 대한 과거의 사회적 합의로 되돌아갈 길도 없지만 또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상 ‘민족주의적
과학정책’의 압도적 지배로 특징지어졌던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마치 과학기술에 관한 한 대안적 발전경로는 없는 듯이 우리 눈을 가리고 과학기술을
신비화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 우리 스스로가 모든 대안들을 알고 선택한 진정한 ‘합의’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두 모델
사이의 갈등이 앞으로 더욱 첨예하게 표출되어 사회적 논쟁과 정치적 의제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오히려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더 바람직한
사태 전개라고 보는 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과학기술의 정치’는 이제 단지 과학기술 부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과학기술 시대에는 사실상
한국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주요 과제이기 때문이다.
|
첫댓글 이 글 앞부분을 보면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와 국회의 국정조사를 앞두고 있는 황우석사태는 이미 약 4개월이 경과되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황우석 사태에 관한 국회의 국정조사를 앞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당시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야당인 한나라당 모두 황우석 사태에 관한 국정조사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여당과 야당이 노리는 목적은 달랐습니다.
게다가 황빠들 중에도 국정조사를 하자는 주장이 꽤 많았습니다. 고준환 안나푸르나 등이 주동이 되어 황우석을 지지하는 17개 단체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박사님 의중파에서 반대를 했지요. 황우석 박사가 반대했으므로.
고준환 교수는 국정조사니 특검이니 등에 대해 앞장선 사람중 하나였는데 황우석 면담 후 황우석에게 설득당하여 입장이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국정조사니 특검이니 불려다니면 연구에 지장이 있다면서 그거 하지 말자고 황우석이 설득을 한 것이지요.
동상이몽의 여당과 야당 역시 처음에는 적극적인 듯 하다가 수뇌부의 반대와 다른 사안들에 밀려 흐지부지 되고 말았어요.
국정조사나 청문회 같은 것을 했더라면 황우석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왈가왈부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우석의 실체가 일찍 드러났을 것이므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제 4차 공판과 황우석 박사와의 만남 - 고준환
http://minchori.org/v3/board.php?keyset=0&board_id=23&no=10474&mode=view
황박사님 프로젝트에는 애당초 관리팀이 있어야 했다고 하니 황박사는 “그렇습니다.” 라고 말씀하셨고, 4개월여에 걸친 혹독한 검찰 수사시 변호인들이 왜 방치했느냐는 질문에는 답변이 없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심이유에 대하여는 모른다고 황박사는 답했습니다.
(...)
황박사님은 특히 이번 사건해결에 관하여 체제적 한계를 느끼며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연구를 열심히 하여 성과물을 내면서 세월이 가기를 기다려야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황박사님은 이어서 진실은 밝혀야 하나 지금 특검이나 공개청문회등을 해서 자꾸 불려 다니면 연구에 지장이 있어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얘기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