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이 시간에는 삼국유사 기이편 백제와 관련하여 세계 인류문화 유산이 된 백제 역사문화의 뿌리인 공주와 부여를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듯 말입니다(落葉歸根). 공주와 부여를 먼저 충우회 일행은 먼저 공주시 석장리의 구석기 박물관을 찾아갔습니다. 1965년 무렵 일본 사람들의 역사 왜곡을 뒤엎는 결정적인 증거 곧 구석기 유물 유적이 석장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삶을 엿보게 하는 이러한 유물의 터전은 누누 천년을 흘러온 금강을 앞에 자리하였습니다. 금강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본디 웅천하(熊川河) 곧 고마내(곰내)였다가 뒤에 금강이라고 고쳤습니다. 또한 공주를 용비어천가(권3-15)에서 웅진(熊津) 곧 고마나루(곰나루)라 했습니다. 고마나루에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웅녀(熊女)와 단군 신화와 흐름을 함께 하는 곰나루 전설이 곰나루 숲에 자리한 웅신단(熊神壇)과 빗돌에서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웅신단이 있는 그 어름의 지명이 웅진동(熊津洞)입니다. 공주의 옛 이름이 웅진-웅천주-웅주(熊州)라 했다가 뒤에 공주(公州)라고 고쳐 불렀지요. 말하자면 곰골이 공골로 다시 공주로 굳혀 쓰인 것입니다. 웅진 백제시대 초기에는 공주를 한성(漢城)이라고 했는데요, 이는 아마도 백제 문주왕 시절 한성 백제에서 공주로 오면서 그렇게 잠정적으로 한성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일행은 입을 모아 가늠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허황한 거짓말로 치부해 버리고 2천 년 우리 역사를 짓뭉개고 칼질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 고조선의 기록과 함께 구석기 시대의 유물 유적이 나왔고 금강의 이름에서도, 공산(公山) 곧 곰뫼의 이름에서도 단군신화의 발자취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일행은 공산성 서남쪽에 자리한 야구선수 박찬호 기념관을 잠시 들렀다가 공산성으로 올라가 진남루 앞에 돌로 쌓은 성황당 터를 보고 다시 조선왕조 인조대왕이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서 머물렀을 때, 두 그루 나무를 벗하였다 하여 거기에 정자를 세워서 쌍수정(雙樹亭)이라 했답니다.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린 상수리나무 옹이를 보면서 사람들이 두들겨 흔든 상처라고 풀이하는 만권당 구 시인의 설명이 흥미로웠지요. 저무는 공산성을 뒤로 하고 동학혁명군이 순국한 자리에 세운 기념탑을 보며 옷깃을 여미고 밤하늘에 별을 바라보며 영령들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어둠이 내린 시골길을 지나 부여 백마강이 흐르는 부소산성을 보면서 그렇게 하룻밤을 산성이 가까운 숙소에서 안개 자욱한 꿈 꾸는 백마강을 보면서 새벽잠을 청하였습니다. 다음 날 일행은 백마강 건너 자리한 백제 역사문화 재현 단지를 찾아서 강가에서 옮겨 만든 석실고분군이며 나무로 만들어 봉안한 목조불상의 능사(陵寺)며 무령왕의 왕비의 아버지 사택적덕(沙宅積德)을 비롯한 귀족의 집도 돌아보며 서동요의 설화를 회상하였지요. 오랜만에 제기도 차보고 투호도 함께 던져 보고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했답니다. 고향의 봄을 휘파람으로 불기도 했답니다. 역사박물관을 돌아보며 일행은 다시 수상 버스를 타고 백마강을 반 시간쯤 새로운 개념의 짧은 여정을 느껴 보았지요. 고란사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정사암, 호랑이 바위도 강에서 본 것이지요. 먹는게 하늘이라고 구드래 쌈밥집에 들러 이틀 동안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정림사지를 들러 다섯 사람 모두가 서로 다른 귀로에 올랐습니다. 부소산성을 맴도는 철새처럼 우리는 그렇게 백제 역사문화에 대한 상상의 날개짓을 손으로 흔들어 서로의 건행을 빌어주었습니다. 옛날은 가고 없어도 그리움은 강물처럼 흘렀더이다.
첫댓글 https://youtu.be/QE357tk5F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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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11.23 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