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마태오7,21,24-27)
Everyone who listens to these words of mine
and acts on them will be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rock. The rain fell,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uffeted the house. But it did not collapse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시대가 오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온 산에서 주님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것이라 예고한다. 그날이 오면 힘없는 이들이 오히려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믿음이란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겉모습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내적인 자세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차이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만큼이나 크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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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인데,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면, 모래 위의 집은 무너지고 반석 위의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뜻하지 않은 풍파를 겪는다 해도, 심지어 죽음의 물결이 밀려온다 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쓰러지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시각과 청각의 중복 장애를 가진 키릴 악셀로드 신부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악셀로드 신부는 선천적으로 청각 장애를 안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시각마저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가 강연할 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청각 장애인 박민서 신부가 통역하였습니다. 악셀로드 신부가 영어 수화를 하면 박 신부가 우리나라 수화로 표현하였습니다. 악셀로드 신부는 박 신부의 두 손을 잡고 그의 영어 수화를 몸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강연하는 동안 두 사제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 어떤 만남보다도 아름답고 평화로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두 사제의 육체적 고통을 이기게 하였을까요? 악셀로드 신부의 강연의 제목은 ‘이 세상에 할 일이 있다, 나도!’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더욱 폭넓게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의 고통을 이겨 내며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온몸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반석 위의 집처럼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 평화를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시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하고 깊은 신앙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충분치 않습니다. 입으로 하는 신앙 고백에 행동과 활동이 따르지 못하면, 그러한 신앙은 공허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신앙은 우상 숭배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은 결코 그 집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반석이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그 말씀들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그 사람은 거짓 신앙인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었을 때 그 집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신앙심이 깊다고 자만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태도로 주님의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기쁘고 떳떳하게 생활 속에서 그 믿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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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짓는 집은 기초가 튼튼합니다. 웬만한 지진에도, 어지간한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런 집을 원합니다. 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기초가 약해 쉽게 무너집니다. 일부러 그곳에 집을 지을 사람은 없습니다. 복음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반석 위의 집’인지 ‘모래 위의 집’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미래를 믿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흔들립니다. 돈과 재물에 매달립니다. 건강이 최고라고만 생각합니다. 불안이 원인입니다. 평범하게 맡길 수는 없는지요? 미래도 건강도 아버지께 맡기며 살 수는 없는지요? 그렇게 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맡기면 보호해 주십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됩니다. 맡기지 못하기에 은총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맡기며 사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내세우는 이가 복음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는 행위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그분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일 때’맡기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보호는 원하기만 해선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맡길 때 적극적인 보호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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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튼튼한 신앙생활을 바랍니다. 반석 위의 집처럼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바랍니다. 그런데도 실천이 어려운 까닭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석은 기초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결실 역시 견고해집니다. 신앙의 기초는 겸손입니다. 인생을 겸허하게 사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첫걸음입니다. 별것 아닌데도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별한 자리도 아니건만 대단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자리가 빛내는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자리가 사람을 빛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 자리가 그를 어둡게 합니다. 그를 비천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자리만도 못한 사람이 되는 결과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첫 번째 반석 위의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기쁘게 사는 생활입니다. 언제나 기쁨과 함께해야 믿음의 기초가 튼튼해집니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지만 본인이 즐겁지 못하다면, 역겨운 위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면 신앙의 기초는 흔들립니다. 하늘 나라에는 겸손한 이들이 갑니다. 기쁘게 살았던 이들이 갑니다. 기쁘면 감사하게 되고, 감사드리면 겸허해집니다. 이 세상에서는 환영받고, 저세상에서는 영광 속에 있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기쁨과 겸손을 신앙생활의 기초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몇몇 주부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너희 애, 피아노 학원 보낸다면서?”
“남들도 다 보내는데 나만 안 보내는 것 같아 항상 불안하더라고. 그래서 보내는 거야.”
“많이 늘었니?”
“우리 애는 소질이 없나봐, 그저 그래.”
“괌으로 피서를 갔다 왔다며?”
“그래, 남들도 다 가는데 빠질 수는 없잖아.”
“재미있었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죽는 줄 알았어.”
많은 주부들의 대화 내용이라고 합니다. 피아노도 좋고 피서도 좋지만, 남이 보내니까 또 남이 가니까 나도 따라한다는 식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나는 절대로 같지 않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자신에게 적합한 고유한 길을 가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가 똑같이 행동하며 살기를 원하셨다면 지금처럼 서로 다른 모습이 아니라 차이가 전혀 없는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각자 자기만의 길을 존중하시고, 그 다양한 길을 통해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나가서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남들이 하니까 나 역시 해야 한다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척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분들은 자그마한 시련만 찾아와도 금방 흔들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진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고통이나 시련이 와도 전혀 흔들림이 전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제일 부족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나를 가장 나답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하느님 작품은 바로 ‘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일은 버려야 합니다. 가장 최고의 모습인 나를 존중하고, 나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열심히 생활하는 사람이야 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 아닐까요?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고, 가능성이자, 꿈이라고 할 수 있다(신영복).
숭배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
-이중섭 신부-
복음서를 읽어 보면, 그리스도께서‘따르는 사람follower’이라는 표현을 시종일관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숭배자나 지지자들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고 당신의 삶을 따르는 제자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가 따르는 대상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사람은 그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그분에게서 약간 떨어져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분은 마치 무대 위의 배우와도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극장에서처럼 차분히 앉아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합니다. 보통 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과 숭배하는 사람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 상황이 되자 유다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 숭배만 했다는 게 드러납니다. 유다는 숭배자였고, 나중에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숭배자는 어려움이나 문제가 있으면 생각을 바꾸기 마련입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자기부정과 포기의 요구,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요구는 분명히 위험하다. 그 위험은 따르는 사람과 숭배하는 사람을 갈라놓기에 충분하다. 따르는 사람의 삶 때문에 숭배하는 자가 누군지 명백해질 것이다.”
들음과 행함
-상지종 신부-
믿음은 입으로 고백되지 않고, 다만 삶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믿음을 삶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요한 마음과 양심을 통해, 성경과 지혜로운 이들의 글을 통해, 힘든 삶 속에서 예수님의 고통과 영광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벗들의 삶을 통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주님의 모든 표징을 통해서 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이제 이 말씀과 뜻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증언할 수 없습니다. 온갖 단절의 벽을 허무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점점 삭막해지는 세상을 녹이는 햇살 같은 사람들의 지난한 몸부림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실 아름다운 내일에 대한 희망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잉태하는 희망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에 지친 벗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지 않는다면, 사람이 되어 오시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바쳐 하느님과 벗들을 껴안은 이들의 사랑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모든 이를 살리는 두려움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우물」 가족이 바로 지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살아 있는 증거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가 종과 객으로 바뀌지 말아야!
-김찬선신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열려라 참깨! 이렇게 말로 주문을 외면 하느님 나라 문이 열리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어제 오늘 새터민을 위한 김장을 합니다. 어제 김장 준비를 하면서 자매님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젊은 것들이 가만히 앉아서 나이 먹은 어머니를 시켜먹는답니다. “엄마, 물!” 이런 식이지요. 일생 그렇게 엄마를 시켜먹고 엄마는 들어주었습니다. 엄마도 어떤 때는 약이 올라 한 마디 하려다가 “어디 장가들고서도 그러나 보자.”하고 참는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도 그러지 않은가 반성합니다. 말로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며 극존칭의 청원을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다 주님을 종 부려먹듯 시켜먹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그저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 소원 뒤치다꺼리나 하는 분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시고 그래서 그분의 종으로서 내 할 바를 할 때 하느님께서 당신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빈 말로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이 실제로 우리의 주(主)가 되지 못하고 우리의 객(客)이 되실 뿐이며, 이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서 날라가 버립니다. 주인이 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3인칭 또는 객관적(客觀的)으로 계셔선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하지만 객(客)으로 계신다면 “하느님? 그분 호주에 계셔.” 뭐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만 어디에 객관적으로 계셔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시고 그래서 나도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산다면 하느님 나라는 나에게 도래하지 않고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2인칭, 나의 당신으로 우리에게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고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주님께서 오시면 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탄생하실 때 베틀레헴의 여관집 주인처럼 “이 세상에 오시기는 오시는데 나에게는 오지 마시고 저기 헛간이나 마구간으로나 가슈!” 이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자신이 아는 모든 조리법을 저장하기 위해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을 구입했습니다. 그러고는 낡은 나무 상자에 넣어두었던 코팅된 조리법 카드를 몽땅 꺼내 서재에 있는 컴퓨터 옆으로 가져갔지요. 그리고는 몇 시간에 걸쳐 그 조리법 카드에 기록된 내용을 모두 컴퓨터에 입력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념비적인 작업을 끝낸 기념으로 21세기에 어울리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첫 요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어떤 요리를 할 것인지 입력하자, 컴퓨터는 그 요리의 조리법을 척척 찾아 스크린에 쭉 펼쳐놓았습니다. 그녀는 조리법을 확인한 후 주방으로 가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가 놓인 서재와 주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요리를 하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시간대로 오래 걸리고 요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요.
그녀가 생각해 낸 해결책은 바로 조리법을 종이에 인쇄해서 주방으로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분 후, 이것 역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조리대에 어지럽게 널린 갖가지 재료들이 조리법이 인쇄된 종이만 솜씨 좋게 피해갈 리는 없었지요. 종이는 곧 얼룩지고 젖어서 읽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실망해서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컴퓨터에 저장된 조리법을 전부 다 인쇄해서 물이나 얼룩이 묻지 않게 코팅해야겠군!”
결국 그녀가 찾은 최선의 방법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외쳐도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 취급만 당할 뿐이지 사람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방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철모르는 아이의 행동 취급만 받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비록 2천 년 전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야말로 참된 진리임을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래된 조리법 코팅 종이가 더 요리사에게 효과적인 것처럼, 2천 년 전의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힘주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하늘나라에 내가 들어가는 것, 또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서 들어가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편한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가장 편한 방법이고, 가장 쉬운 길입니다.
믿음을 버리면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수많은 사람이 생각하는데 그것은 엄청난 오해다.(L.크로넨버거)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양승국신부-
삼년 동안 돌 하나를 입에 물고>
아가톤이라는 큰 스승이 계셨습니다. 형제들, 후배들과 함께 하는 수도생활, 하루하루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100% 다 완벽하게 만들어주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분에게도 큰 고민거리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수도자들, 다들 큰 뜻을 품고, 다들 선한 의지를 지니고 수도 공동체에 들어왔지만, 인간적 나약함이나 부족함, 상처를 모두 다 떨치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들 아직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한 ‘약점’ 한 가지씩 다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살아갈수록 점점 더 형제들의 약점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식탁에서, 또는 노동시간에 형제들의 부족함에 대해서 평가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남의 말도 자꾸 하다 보니 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인 모르게 ‘속닥속닥’ 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에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스승 아가톤은 절대 동료들에 대해서 험담하지 말자고 크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던지 교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크게 실망한 스승은 중대 결심 한 가지를 세웠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답니다.
동료들을 심판하지 않고 침묵을 잘 지키게 되기까지3년 동안 큰 자갈 하나를 입에 물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대단한 의지요, 정녕 대단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우리가 아무리 큰 믿음, 산을 옮길만한 신앙, 원대한 꿈을 지녔다할지라도, 그 믿음, 그 신앙, 그 꿈이 현실 생활 안에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시대 너무나 많은 말들이 넘쳐흐릅니다. 오늘도 수많은 강연대 위에서 펼쳐지는 강론들, 설교들, 귀가 솔깃한 공약들, 당장이라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 단 꿀 같은 약속들, 그럴듯한 학문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실제 삶 안에서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실제로 살지 않는다면 별 쓸모가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결실이 뒤따르는 행동입니다.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인 것입니다.
정성껏 기도했다면, 그에 따른 결실이 필요합니다. 열심한 신앙인이라면 그에 따르는 결과가 요구됩니다.
열심한 기도의 결과는 온유함와 자비로움입니다. 온유와 자비는 참된 영성과 그릇된 영성을 판단하는 잣대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그 결실로 온유와 자비를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쉽게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상처받지도 않습니다. 쉽게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하고 자비하신 그분의 모습을 따라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을 품에 담습니다.
말씀 맛들이기 -김찬선신부-
밥을 먹고 바로 뱉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있다면 밥을 먹은 것이 아무런 영양 섭취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밥은 먹어서 위장을 다 통과하고 똥으로 나와야지만 영양 섭취가 됩니다.
그런데 밥을 먹고 도로 뱉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밥이 맛없다고 뱉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밥이 맛이 없는 것은 사실은 그 맛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 맛을 모르는 것은 그 밥에 맛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맛을 들이지 않은 것은 그 맛을 들이기 전에 먹는 것을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젖을 먹던 아기가 젖을 떼고 밥을 먹을 때 처음부터 밥맛을 알고 맛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먹으면서 점점 밥맛을 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밥을 먹고 도로 뱉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곧 다른 쪽 귀로 내보는 것이지요. 말씀을 듣고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체화하고 마침내 실천까지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말씀으로 영적인 양분을 취하는데 전혀 양분이 되지 못하게 바로 내보내는 것이지요. 왜 이러하겠습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말씀이 맛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말씀에 맛을 들일 때까지 자꾸 말씀을 듣고 묵상해야 하는데 그 맛을 들이기 전에 말씀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밥이건 말씀이건 맛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내보내면 맛들일 수 없습니다.
이제 또 다른 경우를 보겠습니다. 밥을 먹고 도로 뱉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은 밥을 먹고는 토하고, 토하고는 또 먹고 하였답니다. 사실은 먹기 위해서 토한 것이지요. 식욕과 식도락을 끊임없이 만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러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부려 성서를 많이 읽고 여기저기 성경공부 쫓아다니고 말씀이 참 맛있다고 탐닉하지만 실천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영적 양분을 취했다고 생각을 하지만 착각입니다. 실제로는 영적 양분이 하나도 섭취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 삶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고 실제 행동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어리석다 하심입니다.
물을 멀리할 것
-최용진 신부-
우리 신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점집에 가지 말라.’는 것일 겁니다. 그만큼 점을 보는 것은 한국 사람의 삶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점집에 가면 사람의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해 줍니다. 잘될 일도 말해 주지만 큰 위험도 미리 알려줍니다. 아마도 그 위험을 피해 보고자 가지 말라고 해도 자꾸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하는가 봅니다. 그리고 결국 부적을 받아오거나 아니면 물을 멀리하라는 등의 주의 사항을 듣고 옵니다. 집에 돌아오면 점집에서 들은 것을 잘 지키고, 그 말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앞날에 닥칠 불행을 막거나 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용한 점쟁이일수록 그의 말을 더 열심히 지킬 겁니다. 그대로 하면 앞날의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싸워 이겨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당에 오고 점집에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피해 갈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용한 점집에 가더라도 아무리 성당에 자주 나와 기도하더라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굳은 믿음을 통해 나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싸울 수 있다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도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고통도 주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의 어떤 절망도 주님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나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겠지만, 주님과의 강한 결합이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당당히 싸워서 이겨낼 수 있게 해줍니다. 군인들이 힘든 훈련을 받는 것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듯 우리의 신앙 실천 또한 고통과 아픔, 유혹에 직면했을 때 승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지금 편하자고 그 실천을 게을리 하면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지행일치
-김현태 신부-
지행일치(知行一致) 나 지덕일치(知德一致)는 최고 가는 덕성 중에 하나입니다. 학계에는 주지주의(主知主義)와 주의주의(主意主義)가 만연한 적도 있었습니다. 주지주의는 먼저 알아야 행한다는 것이고 주의주의는 백 개를 알아도 하나를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이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에라스무스는 그를 두고 성인이라 불렀습니다. 이유는 이 희랍 철인이 지행일치의 완벽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성 소크라테스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하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알면서 행하지도 않고 알지 못해도 막무가내로 행동합니다. 소크라테스적 지식이 아닌 소피스트적[雜學的] 지식이 범람하는 사회, 부도덕한 측면이 만연하는 사회이다 보니 온전한 삶을 찾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된 앎은 자기 안에서 출발합니다. 진리는 세상 밖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찰의 삶, 내적 반성의 삶은 자기 영혼뿐 아니라 하느님을 알게끔 합니다. 영혼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에 자기 영혼이 있습니다. 그때의 행위는 완벽합니다.
뒤로 돌아!
-장재봉신부-
오늘, 주님의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모두 구원된다 하시더니
오늘은 “주님, 주님!” 하는 일만으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다 하시니까요.
결국
하늘나라에도 테스트가 있다는 말씀이고
삶의 성적표가 제출될 것이라는 의미이니
고민스럽습니다.
+++
하느님나라 문 앞, 골인지점을 상상해 봅니다.
때문에
남보다 빨리 닿는 일도 중요하고
남보다 잘 달리는 일도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를 제치고 혼자만 뛰는 사람,
뛰느라 너무 바빠서 용서를 미루고 달려온 사람
뛰기만 하느라고 사랑을 놓친 사람들이
다가설 즈음
하느님의 호각소리가 들릴 것이라 싶습니다.
“모두 뒤로 돌아!”
사랑하느라
돕느라
함께 하느라
뒤미처 들어오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꼴찌가 서있는 바로 자리에
하느님의 골인깃발이 꽂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야말로 꼴찌가 첫째 되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아닐까요?
이제사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우리 모두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위의 기쁨일 수 있도록
천천히 살펴
더불어 함께하는 사랑의 행위일 때
좀 늦어도
좀 뒤떨어진다 해도 아무 염려 없습니다.
그분의 호각소리는
모두를 뒤로 돌아서게 할 것이니까요.
사랑하느라 꼴찌로 들어선 이에게 주실
그분의 넉넉한 축복을 생각하니
참으로
야무진 삶을 살아야겠다 싶습니다.
+++
하느님을 향한
모든 것들은
형식적으로 때우는 모습이나
참의미를 잃은 가식으로 속여 넘길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생성되지 않은
모든 것,
가짜의 허상을 깨뜨릴 것을 강권하십니다.
껍데기 신앙에 젖은 모습에
진저리를 내십니다.
판에 박힌 믿음생활이라면
낡은 가죽부대신세라는 뜻입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결코 주님의 생명력을 지니고 감당할 수 없어
터지고 말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관을 가진 사람을 안타까워하신
그분께서는
입에 발린 말이나 마음에 없는 행위는
모두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헛되다 이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루에, 얼마나 많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찾으며 살았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그 행위가 참으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인지를
짚어봐야 할 것을 이르신 것이라 믿습니다.
매일 새로운 그분의 힘을 공급받는
새로운 신앙인일 때에만
어제
말하지 못했던 용서를 밝힐 수 있고
감히 생각지 못했던 사랑을
고백할 힘이 생길 것이라는 일깨움으로 마음에 새깁니다.
아멘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 -김지현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나라,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그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자신도 그곳에 갈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그곳으로 안내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순탄하지 않은 그 길을 어떻게 걸어왔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서 받을 심판의 결과가 좌우됩니다.
복음에서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친다”는 말씀은 종말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이 가져올 엄청난 재난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모진 심판 앞에서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은 모래가 아니라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뿐입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어떤 재난도 심판도 이겨낼 수 있는 든든한 바위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 밖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기준이고 원칙이며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똑같은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많이 흔들리게 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신문이나 방송이 내려주는 평가에 우리들 생각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어떤 상품이나 음식에 대한 평가도 좋다고 하면 좋은가보다 그저 유행 따라 가기 쉽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리의혹, 유언비어에 아무런 원칙도 기다림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쉽습니다...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확고한 반석으로 삼지 않는다면 흔들리다 못해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는 이야기들은 그저 착하게 살아라, 하는 단순한 말들이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단호하고 냉정하게 처신하고, 어떤 때에는 따듯하고 온화하게 처신하고, 또 어떤 때는 정확하게 판단하고 일을 처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 삶의 가장 작고 미세한 부분에까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세세한 부분에까지 주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대 원칙을 우리의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토대로 삼고 그 대원칙을 삶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원칙이 없다느니, 상식이 안 통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확고한 원칙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확고한 원칙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온갖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차분히 자신이 믿는 바를, 그리고 진리가 드나날 때까지 원칙을 지키며 기다릴 줄 압니다.
확고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리고 그 믿음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들을 찾아 나서며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주님을 맞은 준비 -조욱현신부-
예수님의 성탄과 재림을 준비하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준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21절)고 하신다. 이 말씀은 지금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탓하시는 말씀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분의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악을 일삼는 자로서(23절) 그 나라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던 거짓 예언자들이다(22절). 악을 일삼는다는 것은 율법을 거스른 잘못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지 아니한 잘못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 악과 위선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겠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들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그분의 뜻은 어디서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살 때, 알아들을 수 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지 생각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서를 자주 대하고 그 안에 말씀의 뜻을 잘 알아들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모두 머리로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잘은 모른다 해도 그 한 구절이라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성서 전체를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새벽을 열며
어제 끝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루 동안 들은 말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간단한 인사의 말,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말, 상인들의 물건 사라는 말, 라디오에서 들리는 디제이의 말, 부탁과 청원의 말, 칭찬의 말, 남에 대한 비판의 말, 서로 목소리 톤을 높이며 싸우는 말 등 많은 말들을 어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말들 중에서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을까요?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을까요? 당연히 긍정과 사랑이 담긴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아졌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과연 어떤 말을 듣기 원하실 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와 달리 부정적이고 원망과 저주의 말을 듣기 원하실까요?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말들 중에 많은 부분을 부정적이고 원망과 저주가 섞인 말들로 채우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듣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긍정과 사랑이 담긴 말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바로 하느님께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말하고, 그 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긍정이 담긴 말을 하고, 그 사랑과 긍정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말들을 언제 해야 할까요?
어느 날 마귀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들을 주님과 멀어지게 할까하는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합니다. 제일 처음 젊은 엘리트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죽이자고 했지요. 조용히 듣고 있던 노인 마귀가 순교는 교회성장의 뿌리가 된다면서 반대합니다. 또 젊은 마귀가 이번에는 감옥에 모두 가두자고 했습니다. 이에 노인 마귀는 감옥에 가두면 찬양과 기도를 더 열심히 해서 처음보다 더 커진다고 반대했습니다.
이런 저런 의견 중에서 노인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이런 말을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에 심어 넣기로 결정했답니다.
“봉사, 기도, 전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내일 하자.”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말, 그 말은 바로 지금 해야 하는 말인 것입니다. ‘내일 하자’는 마음을 품고 있을 때, 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점점 주님과 멀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좋은 말, 긍정적인 말, 사랑의 말만 하도록 하세요. 지금 당장!
지금 당장 실천하라
-조명연 신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다. 단지 위대한 사랑을 갖고 작은 일들을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작은 일들의 실천에서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들은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곤 합니다. 하지만 계획만 세울 뿐 지금 당장 해야 할 사소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꿈입니다. 물론 아직은 여력이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크게 성공하면 어려운 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작정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계속 계획만 세우다가 인생의 마지막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김인숙 수녀-
여행할 때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행동 몇 가지를 열거해 본다. 첫째, 일인당 가지고 갈 수 있는 물건의 무게가 기준치를 훨씬 초과했는데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져가려는 사람. 둘째, “컴퓨터를 꺼주십시오. 휴대전화를 꺼주세요. 지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십시오.” 계속 방송이 나오는데도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똥배짱으로 일어나는 사람들. 나는 몰래 그들을 향해 눈을 흘긴다. 왜냐하면 여행자 모두의 생명, 아니 내 생명과 직접 관련되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작은 규칙을 무시하여 큰 사고가 일어난다면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얼마나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가장 슬기로운 여행자는 안내방송이나 가이드의 말에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개인적으로 매력까지 느낀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 자체가 내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의 일이다. 나는 무거운 짐과 200여 명이 넘는 사람을 싣고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불안해서 몹시 힘이 들었다.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가 하늘에 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서…. 수녀원에는 보일 듯 말 듯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처럼 살아가는 수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작은 것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소리 없이 실천하며 산다. 이 세상에, 우리 사회에, 깊은 수녀원 울타리 안에는 오늘도 풀꽃처럼 작고 드러나지 않게 진리를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주님께서 만약 너희 가운데 의인 몇 명을 찾아보라고 하신다면 분명 우리는 풀꽃처럼 사는 그들을 선택할 것이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슬기로운 사람들을. 이 지구상에 그들이 있기에 세상과 사회, 수도회가 오늘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 변성수 신부 -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마귀를 쫒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키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불순명하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난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주님의 뜻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과 판단 안에 존재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의 반석위에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반석 위에 집을 짓지 않고, 모래 위에 집을 짓어나 가는 어리석은 모습들을 참 많이 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요즘 문제가 되는 나주 윤율리아 사건입니다.
윤율리아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은사들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자기 혼자서 잘 낫다고 주장하고 있는 아주 불쌍한 영혼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거기에 함께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부산교구에서 제일 많이 찾아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눈먼 사람들인지…, 사제로서?양을 이끄는 목자로서 그 이야기만 들으면, 속이 다 쓰립니다. 나주 윤율리아가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적 계시를 듣고, 오상과 많은 이상한 기적들을 일으킨다고 하는데,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광주교구의 조사위원회에 따르면, 그 어떤 것 하나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교회가 기적이나 사적계시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정말 철저한 검증과 조사를 하고 난 후에 그것들이 사실임을 인준합니다. 하지만 나주 윤 율리아 문제는 교회의 그 어떤 검증과 인준도 없이 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가톨릭교회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고 교회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자기는 지금 박해받고 있다고 하는데, 얼토당토 안합니다. 그것을 홍보하고 숨어서 사람들을 모으고, 또 순례하는 행위 자체가 교회의 순명 정신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정말 문제는 사탄의 장난에 놀아나는 사제들이 거기에 간다는 겁니다. 그 사제들이 그곳을 찾아감으로써 수많은 신자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 사제들과 신자들이 하루빨리 회개해서 하느님의 품 안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진정으로 나주 윤 율리아가 예수님과 성모님의 계시를 받았다면, 교회의 말에 순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친히 세우시고 예수님 당신께서 활동하시는 교회에 예수님께서 반대하여 끝까지 저렇게 행동하고 주장하겠습니까? 온 생애를 하느님께 그리고 교회에 순종하신 성모님께서, 교회에서 하지 마라고 한 것에 불순명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성모님께서는 절대 그러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지체에서 떨어져 나가서 자기가 잘 낫다고 설쳐 되는 것은 100% 사탄의 짓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나주 윤 율리아에 현혹되지 마시고, 제발 주님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 주님!' -정 호 신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달콤한 유혹은 그 종교에 믿음을 두는 순간 무엇인가 이루어졌다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믿음을 두게 되면 그 이루어졌다는 것의 확신을 가지기 위해 많은 정성을 바쳐야 하고 끝까지 그 긴장감을 놓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그 믿음 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고 그 종교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참 종교의 의미를 단순한 결과만을 약속하는 형태로 전하는 것이 잘못일 겁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단어는 최종 목적이 됩니다. 하느님께만 주어져 있는 이 구원의 권한이 때로 사람들에게 주님께 믿음만 고백한다면 그래서 어떤 예식을 통한 신자라는 자격을 얻는 순간 이미 얻게 된 것으로 사람들에게 설명되곤 하지만 그런 식의 신앙관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생각할 많은 것을 던져 줍니다.
정말 아쉽게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주님!'하고 목소리 높여 믿음을 고백하고 찬양을 드린다고 해서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이 이미 이루어진 듯 믿는 우리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는 말씀입니다.
2천년 전의 말씀이라면 더더욱 이 말씀이 단순히 종교의 선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순전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란 우리의 신앙적 표현 자체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정확한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열쇠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과 그것을 살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길은 종교라는 일정한 선택의 영역이 아닌 우리 삶이라는 생활 전체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사는가가 구원의 열쇠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이라, 아버지라, 주님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그분의 뜻대로 스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생활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일상의 삶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유명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이와 그렇지 못하는 이가 짓는 집의 비유에서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이고 그렇지 못하는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그 집에는 아무런 우환도 없어야 하고 하는 일은 무엇이든 잘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주님, 주님!'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우리는 쉽게 신앙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전혀 그렇질 않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 튼튼하다는 것은 그 집에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반대로 모래 위의 집이 부실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그 집이 어디에 지어졌건 우환은 닥친다는 것입니다. 바람도 불고 물도 들이닥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 집이 어떤지 드러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누구나 겪게되는 삶의 여러 일들이 우리에게 피해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겪게되는 비극적인 일 마저도 우리에게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나 아프듯 우리도 아파야 하고 누구나 슬프듯 우리에게도 눈물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 참으로 믿는 이들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에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동시에 이 세상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님을 부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피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접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한 생을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당히 겪고 그 속에서 사랑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품고 말입니다.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나의 바위요 산성이신 나의 하느님 -경규봉신부-
예언자는 메시아 시대에 하느님 백성이 기쁨에 넘쳐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것을 예언한다. 그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도성에 함께 계시어 도성을 지켜주시며,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한 사람,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당신만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한결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을 구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번영과 평화를 주신다.
하느님은 영원한 바위이시다(8,14; 신명 32,4; 1사무 2,2; 1고린 10,4). 하느님은 바위와 같으셔서 위급할 때 도피하는 피난처가 되시고,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지켜주는 요새가 되시며, 사람을 뒷받침해주는 토대가 되신다. 영원히 당신 백성의 피난처이며, 요새와 토대가 되신다.
주님 앞에서는 난공불락(難攻不落)처럼 보이는 산성(바빌론)도 이내 무너져버린다. 하느님을 거스르고 스스로 높아진 교만한 도성은 심판의 그날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사람들의 눈에는 불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그 산성은 먼지가 되었지만, 그로부터 억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영원한 바위로 삼고 의지한 백성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바빌론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거대한 산성과 같았다. 바빌론은 강한 군대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많은 재물을 약탈했다. 그리하여 도시에는 풍요로움이 넘쳐흘렀고, 온갖 보석을 세공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밤을 낮처럼 환하게 밝혔으며,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향락에 취하고 도시의 화려함에 사로잡혀 언제나 흥하리라고 생각했다. 주위에서 바빌론을 대적할 나라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처럼 인간적으로 화려하고 거창한 바빌론도 결국 허무하게 무너져 멸망하여 먼지처럼 없어져버리고 만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제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한 것도 이 세상의 것은 결국 없어지고 만다. 세상에서 사람이 영원히 의지하고 몸 붙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사람이 영원히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분, 사람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분, 사람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나의 방패, 승리를 안겨 주는 뿔, 나의 산채, 나의 피난처”(시 18,2: 2사무 22,3)라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노래했다.
우리는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많은 재물을 원하고, 강한 힘을 구하며, 무소불위의 권력과 지위를 가지기를 바란다. 우두머리가 되고 꼭대기에 서서 남을 지배하며 거창하고 화려하게 살기를 꿈꾼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점차 소진되고,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한다. 자신의 미모가 시들어지고 사람들로부터 잊혀져가는 것을 힘들어한다. 이것만이라도 꼭 붙들고 놓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것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드셨다. 세상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화려함과 거창함에 혹하지 말자. 내가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그것이 사실은 먼지요 재임을 깨닫자. 그리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의 손을 잡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자.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자...............◆
기본
-민경철 신부-
제 삶의 모토 중의 하나는 ‘기본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기본이란 것이 어떤 일에든 가장 중요한 것인데 때론 가장 소홀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기본은 기도, 전례와 성사 중심의 사목, 강론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지요. 이것들은 신부 아닌 그 누구도 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부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신부로서의 기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본을 지키기가 제일 어렵더군요. 스스로 가장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을 때 내 삶을 들여다보면 이상하게도 이 기본이 무너져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바쁜 것이 곧 열심한 것이 아닌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 생활이 흐트러져 있었고, 어떤 일을 정신집중해서 다급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내 속은 몰라주고 느닷없이 고해성사를 청하면 짜증이 날 때가 있더군요. 그때 아차 싶은 것이지요. 오늘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로서의 기본은 ‘아버지의 뜻을 정말 아버지의 뜻’으로 받들어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마음에 품고 산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생기는 게 우리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참 기본에서 시작합시다.
도와줄 수 있을 때
-신금재-
◆“사람은 말이지, 남을 도와줄 수 있을 때 도와주어야 해.” 남편은 늘 내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아침에도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면서 그 한마디를 빼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연히 알게 된 한 유학생을 내가 일하는 곳의 매니저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오늘 아침에 인터뷰가 있기 때문이다. 오후에 매니저한테서 인터뷰 결과를 들었다. 그 유학생은 취업비자가 없어 우선 다른 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당장 일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취직을 할 수 있는 징검다리를 밟게 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민을 준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준 캘거리에 대한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캘거리에서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도착한 지 2주 만에 직장을 잡았고 지금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요즘 캘거리는 석유붐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아직도 인력난이 심하다. 어린이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시로 일할 사람을 뽑는다. 이러한 현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준다면 내가 진 빚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내일 아침 내 연배의 자매님이 인터뷰를 하도록 주선해 놓았다. 늘 일하고 싶어했던 그녀가 인터뷰를 잘하면 좋겠다.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먼저 소개한 유학생이다. “선생님, 인터뷰 잘했어요. 먼저 다른 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으면 매니저가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추천서를 준대요. 감사드려요.” 주님, 당신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 김웅태 신부-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라"고 하신다. 어느 가정에서든지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일러주는 말씀이 있다. 한 예로 "밖에 나가서는 행동과 말에 조심하며, 단정하고 예의를 지켜 부모 욕 먹이는 행동을 하지 말고, 시간에 늦게 다니지 말라" 등등 아마 잔소리 같지만, 남부럽지 않게 자기 자녀를 키우고, 자녀를 위하며, 성숙시키고자 하는 부모님들의 마음과 뜻일 것이다. 또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에 무심하거나 애메기는 짓을 하면서, 서로 신의를 지키며 지낸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시험을 잘못 치루고, 원하는 곳에 합격하기를 바라기가 어려울 것이고, 능력도 없으면서 어떠한 지위를 갖고자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이같은 말씀을 하신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겠는가? 이것을 알아 들으려면, 먼저 부모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는 자녀들은 어떻게 사는 자녀들인가를 생각해 보는것이 더 쉬울 것이다. 즉, 가정에서나 밖에서나 한 인간으로서 또 그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자녀답게 처신하며 행동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요, 자녀된 도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되겠다.
그와같이 부모님 모시듯이, 주님을 모시는 것, 부모님께 효도하듯이 주님을 공경하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서의 다른 곳에서 "나와 같이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흩어버림 이니라"하셨다. 아버지가 심부름으로 "담배를 사와라"하시는데 비누를 사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 들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은 어디서 들을 수 있고, 그분의 뜻을 어디에서 알아 들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성서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서를 하루 한 페이지 한 장이라도 자주 대하고 그 안에 말씀의 뜻을 잘 알아들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손
-이찬홍 신부-
복음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일까요?
주일 미사와 의무 대축일에 빠지지 않는 것일까요? 교무금과 헌금을 충실하게 내는 것일까요? 교회가 정한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과 교무금과 주일헌금을 내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신자로서 지녀야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요, 반석위에 집을 짓는 모습일까요? ‘아름다운 손’이란 예화가 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소녀 앙리에뜨... 그녀에게는 나이 어린 동생이 셋이나 있었고... 그녀는 어린 동생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으려고 어린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된 생활을 해 왔답니다.
잘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과로가 겹쳐 그녀는 결국 병으로 쓰러지게 되었고... 몸이 워낙 쇠약해진 상태에서 걸린 병이라 소생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죽음이 가까워져 마지막 성사를 해 주기 위해 신부님께서 그녀의 병상을 찾자, “신부님! 저는 성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동생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그 동안 주일을 지키지 않았으며 기도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신부님의 눈길이 문득 그녀의 손에 멈추었답니다. 그 손은 도저히 어린 소녀의 손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답니다. 과도한 일로 인해 손마디는 울퉁불퉁 불거져 있었고 손 여기저기에 찢긴 상처들이 나 있었답니다.
신부님께선 소녀의 두 손을 감싸 쥐고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셨답니다.
“걱정하지 마라 앙리에뜨야! 하느님께서 너에게,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시거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이 두 손을 하느님 앞에 내어 보이거라, 이 아름다운 손만을...” ㅡ김윤덕의 뒤주 속의 성자들 중에서-
그렇습니다. 먼 훗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하느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생각해 봅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너는 왜, 주일 미사에 자주 빠졌니? 왜, 레지오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고, 그렇게 많은 잘못을 했니?’ 라고 물으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니? 네가 만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간 나를 얼마나 사랑했니?’ 라고 물으시지 않을까 합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기본적이고 의무적인 것에 뿌듯해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비록, 외적인 계명에 좀 소홀히 한다 하더라도, 내적인 계명, 의무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미사와 교무금을 내는 것이 외적인 계명이라고 하면, 내적인 계명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본받으려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라는 말씀을... 남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요, 반석위에 집을 짓는 모습입니다.
예화의 소녀는 주일미사 참례와 교무금을 내라는 외적인 계명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쉬는 교우나 행불자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내적인 계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렇게 충실했기에, ‘나는 주님을 위해 한 일이 하나도 없어요.’ 라고 흐느끼는 소녀에게, 신부님께서는 ‘예수님이 너에게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했니?” 라고 물으시거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너의 손만 보여 주거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분명, 내적인 계명과 외적인 계명 모두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외적인 계명과 내적인 계명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며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적인 계명은 개개인의 양심법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 마음이 어떠하신지 잘 아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삶이 아니라, 흐뭇해하실... 만족 하실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했으면 합니다. 외적, 내적인 계명 준수를 떠나, 하느님 보시기에 흐뭇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모습이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의 행동일 것입니다. 아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강영구 신부-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대에게
오늘도 신문에서는 어떤 재벌회장의 딸 이윤형의 자살 사건을 다루고 있군요. 서민들은 꿈도 꿀 수 없는 2천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젊은 아가씨가 무엇이 부족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돈만 있으면 떵떵거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윤형은 저승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돈은 행복도 아니고 기쁨도 아닙니다. 인생을 세워야 할 기초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돈 위에 자기 인생을 세우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어디에다 세우려고 합니까? 지금 당신이 발 딛고 서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한 번 내려다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짓듯 하느님의 말씀 위에 인생을 세우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는 비오고 바람 부는 날이 끊이지 않고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합니다. 자칫 허술한 기초 위에 인생을 세웠다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든든한 반석 위에 인생을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말씀과 함께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글과 말
-박동진 신부-
이따금 글을 쓰게 되면서, 말로 표현하는 것을 글로 다 담아내지 못함을 느낍니다. 또 말은 하면서도,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글에 힘이 있는 것은 말을 잘 담아낸 덕분일 것이며,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은 삶이 온전히 배어 있는 덕택일 것입니다. 옥수수 농사를 짓다가 수확을 얼마 앞둔 때의 일입니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큰 수확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태풍으로 옥수수들이 다 쓰러졌습니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옥수수를 따고 돌아오는데, 온통 흙투성이가 된 모습을 주교님이 보시고 “뭘 했기에 옷이 그러냐”고 하시기에 저도 모르게 “옥수수를 캐고 왔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주교님은 웃으시며 “옥수수도 캐는 거냐”고 하셨습니다. 땅에 쓰러진 옥수수를 따서 그렇게 답했던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주일, 도시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는데 미사 중 보편지향기도에서 신자들이 <매일미사>에 나오는 기도만 달랑 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바로 옆에서 이웃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시름하는데, 말로만 포장되고 글로만 길들여진 우리네 속내를 그대로 보는 듯했습니다. 옥수수 농사라는 것이 내 삶에 없었더라면, 저 역시도 과연 ‘수해로 아파하는 농민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지 의문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글만 잘 쓰는 이’나 ‘말만 그럴듯한 이’를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들의 ‘주님’이라는 고백이 삶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삶이 바탕이 되면 절로 입이 열려 말도 나오고 글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양승국신부-
<산사에 떨어지는 풍경소리>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조과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나쁜 짓 하지 말고 선행을 하여라.”
“그런 것쯤이야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말입니다.”
이에 조과 선사가 말했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쉽게 알 수 있으나 백 살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어찌 그리도 가슴을 콕콕 찌르는지, 아파서 혼났습니다.
잘 꾸며져 그럴듯하지만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말,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실속이 전혀 없는 말, 달콤하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말을 엄청 던져온 제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강의라도 하러 가면 너무나도 ‘웃기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루에 묵주기도 기본으로 100단씩 바치는 묵주기도의 달인들 앞에서 겨우 기껏해야 하루 5단 정도 바치는(그것도 가끔씩 빼먹는) 제가 묵주기도의 가치, 중요성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면서 보다 자주 바칠 것을 강조합니다.
일주일 내내 봉사에 전념하는 분들, 갖은 굳은 일을 마다않는 봉사의 전문가들 앞에서 봉사란 이래야 한다느니, 봉사란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제 모습이 한심스럽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입에 거품 물고 외치지만 정작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지요.
엄청 속보입니다.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핵심은 ‘조화 있는’ 신심인 듯합니다. 영혼과 육신의 조화, 머리와 가습의 조화, 생각과 행동의 조화, 기도와 삶의 조화, 몸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져 합니다. 이 둘을 가급적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외쳐댔던 많은 공허한 말들이 허탈한 메아리가 되어 제 주변을 맴돌아 자책하게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참된 신앙생활은 말에 그치지 않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감정적인 것, 환상적인 것만을 추구하지 않음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열심히 내 집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또 다른 집 하나 장만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란 토대 위에, 그분의 말씀이란 기초 위에,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란 바탕 위에 지어지는 견고한 영혼의 집을 짓기 바랍니다.
많은 말보다는 깊이 있는 침묵과 더불어.
“땡그랑떙그랑 하며 적막한 산사에 떨어지는 풍경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풍경소리는 단 한 음절의 소리밖에 낼 줄 모릅니다. 단순한 쇳소리에 불과한 그 소리가 어째서 온갖 잡념과 고뇌를 밀어내고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는 영혼의 소리로 화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풍경소리가 정적(靜寂)의 침묵 속에 탄생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소음 속에서 울린다면 그것도 하나의 잡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도 마찬가집니다. 온갖 수식으로 꾸민 화려한 언어는 찰라에 끝납니다. 하지만 침묵의 절절에서 탄생된 언어는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오랜 세월 마음속에 머물며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는 풍경소리를 냅니다.”(‘풍경소리’ 샘터 참조)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박상대신부-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는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유대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는데 동의함을 선언하였고, 이에 미국은 대대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후세인-멕마흔협정(1915년)과 중동의 터키영토 분할을 결정한 사이크스-피코협정(1916년)에 모두 위배되는 것이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 장군의 침략으로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 기원후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이 처참히 멸망한 뒤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비참한 운명을 감수하며 언젠가는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세울 것을 기약하고 ‘시오니즘’(Zionism,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운동)을 꿈꾸어 왔었다.
그들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인가. 1948년 UN은 영토도 없는 ‘이스라엘 건국’을 전 세계에 공포한다.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유대인들의 ‘대 예루살렘 계획’은 일사불란하게 전쟁도 불사하며 진행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했던가? 2천년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원주민 아랍인들이 고립되고 추방되면서 점령자에 대한 분노와 고통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만다.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유대인들의 아랍인들에 대한 태도는 실로 냉정하다. 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주택, 정착금, 직업)아래 이스라엘을 향한 이민 길에 오른다. 2004년 현재 이스라엘에는 피부색이 다른 유대인계 에티오피아인들이 9만 명이상이 정착하고 있다. “이민의 조건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답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자”이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무엇인가?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21절)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眞髓)는 각각 산상설교(마태 5,1-7,29)와 평지설교(루가 6,17-47)에 담겨있다. 물론 산상설교가 평지설교보다 내용도 풍부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로운 점은 둘 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것이다.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도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을 사람은 없겠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로 인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줄곧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를 요구하셨다. 이 정의를 가지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는 설교나 가르침을 경청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청한 내용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라시는 정의가 만들어진다.
들은 것,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래도 다짐해야 한다. 다짐은 출발점이고, 이는 길을 열어준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짐하지 말자. “1%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의 변화와 전진과 개선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으며, 완성은 꿈도 못 꾼다. “생각을 바꾸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바뀌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생각이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의 기반이 된다. 실수가 잦으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 되어버리듯이 조그만 것이라도 빈도(頻度)가 잦아지면 습관이 되는 법이다. 조그맣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좋은 생각과 좋은 다짐으로 좋은 습관을 들이는 연습을 하자. 말은 행동이 아니니 말로만 ‘주님, 주님!’ 하지 말고,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 즉 가르침의 내용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반석 위에 나의 집이 설 수 있도록 기초를 놓자.◆
주님, 주님!(마태 7,21.24-27)
-유 광수신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는 말씀을 묵상하자.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이 무슨 주술을 외우듯이 입으로만 "주님, 주님!"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입으로 주님, 주님하고 많이 부르는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아침 저녁기도 묵주의 기도, 미사 참례 등 주님, 주님하고 부르지 않을 때가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생활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는다.
예레미아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이곳은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한다마는 그런 빈말을 믿어 안심하지 말고 너희의 생활 태도를 깨끗이 고쳐라."(예레 7, 4) 고 하였듯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고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실행해야할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 6,39)라고 하셨듯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셨다. 즉 하늘에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셨던 것이다.
나의 구원은 그리고 우리 모두의 구원은 "주님, 주님!"하고 이름을 불러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고,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고,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으며,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고, 우리의 반역 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 4-8 참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걸어가셨던 그 고난의 길을 나도 걸어간다는 것이다. 즉 나와 내 이웃의 구원을 위해 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러 가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뜻은 결코 입으로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주님, 주님하면서 자기 몸은 하나도 까딱하려하지 않고 또 자기 희생은 하나도 바치려고 하지 않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한다면 어떻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주님, 주님!하고 입술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행동은 전혀 주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우리의 믿음은 입술에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건설되어야 한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 7,6)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믿음은 입술 끝으로 혹은 산만하고 분산된 시선으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온통 바쳐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어야 한다. 신앙은 입술로만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생활이요,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신앙생활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입술로가 아니라 실천으로 옮겨져야 하고 그 실행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코전 13,3)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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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