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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창세기 25:1-18 “ 아브라함의 죽음 ”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오늘 이방인인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후손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창세기를 보아오면서 또 금요일 성경공부를 통하여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애초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주셨기에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동일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야 말 것을 이제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길로 인도 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에 그의 출발과 과정과 죽음까지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를 잠시 요약을 하고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를 보고 신약에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생애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우상을 섬기던 곳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시니 떠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어떻게 거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이미 믿음의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브라함을 그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런 것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끊어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취미, 습관, 인정, 애정까지 끊는 것이라고 말합디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요. 고향 친척 아비집을 어떻게 떠나옵니까? 그런데 우리가 자칫 잘못생각하면 내가 굳은 각오와 결심으로 그런 일을 이루어 내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극기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등을 떠밀어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아내를 동생이라 속이고 자기가 죽을까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런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니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바로왕이 오히려 자기에게 잘못하였다고 하는 경험을 통하여 자기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씩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아내를 여동생이라 하는 사건이 있고 아예 가는 곳 마다 그렇게 하자고 사라와 약속을 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 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드디어 믿습니다. 그러자 그 믿음을 보고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언약을 행합니다. 그런데 지나가신 분은 하나님만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쪼개어지는 즉 생명을 담보로 맺는 계약입니다. 아브라함은 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 사건도 결국 하나님이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86세에 첩을 통하여 낳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13년간이나 말씀하지 아니하시다가 99세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언약의 후손은 사람의 혈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도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삭을 주심으로 약속의 씨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짐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대속으로 인하여만 살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그 씨로 인하여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생애 최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 죽은 후에 후처를 취하여 자녀를 몇 명 더 낳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기 전에 이들을 어떻게 정리를 하는가 봅시다. 6절입니다.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고 다른 자녀에게는 재물만 주어서 자기 생전에 그 아들들이 이삭을 떠나서 살게 합니다. 동쪽으로 가서 살도록 조치를 합니다. 죽기 직전에 이제야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다른 자녀들 그것도 이삭보다 더욱 노년에 낳은 자녀라 할지라도 그들이 이삭과 함께 유업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분리를 시키는 것입니다.
7-8절입니다. 아브라함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100년을 하나님에 의하여 인도되어 이제 드디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고서 이스마엘도 역시 이삭과 분리가 일어납니다. 12-18절에 이스마엘의 족보와 거주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6절에 이들도 12방백이라는 것입니다. 비언약의 자손이라도 언약의 자손이 나중에 12지파가 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가짜를 만들어 내는데 꼭 진짜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테이션 보석들이 인기가 있지요. 그리고 유명제품의 모방한 제품을 가짜인줄 알고도 사는 것이라고 하지요. 진짜가 있으니 가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가짜가 더 진짜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 그러는데 그 궁극점이 무엇인지 유심히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아들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성경이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여정이라면 우리가 동일하게 믿음으로 부름 받았다면 아브라함을 신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봄으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C.D성경에서 성구를 찾아보니 아브람이란 단어가 53회, 아브라함이란 단어가 신구약 총 235회, 신약에만 74회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족보를 말할 때도 사용되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혈통을 주장하는 일에도 사용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데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창세기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보았는데 과연 신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검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받는 것입니다.
1. 마태복음 1: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신약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다윗과 언약하신 그 하나님으로 태어나는 언약의 후손 약속된 씨가 신약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씨에 대한 약속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후에 하나님이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 씨의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후 약 2,000년이 지나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이 씨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족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새롭게 만들어 지는 족보가 되는데 여기에 아브라함과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그리스도에게서 소급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없느냐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이 요한복음 8:56에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씀 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시간의 전후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우리는 아멘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예수님을 보고서 나의 주여 라고 하였다는 것이 누가복음 20:41-44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보고서 주라고 하였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시작되는 하늘의 족보입니다. 온 세상을 없는 것처럼 여기시고 예수님으로 온 세상을 통일하시어 새로운 족보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이 내용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혈통이나 전통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세례요한입니다.
마태복음 3:8-9입니다. “봉독”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이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기존의 혈통과 전통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인데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마귀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충격의 말씀입니까? 자기들은 누군가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이미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도대체 더 큰 복과 기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이것을 복이라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복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잘 증거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 한곳만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16절까지 봉독합니다. “봉독”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브라함의 복이고 또 이러한 복을 이방인도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인데 이러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저주 받으시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씨란 결국 갈라디아서 3:16절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그 자손들이 바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함을 받는 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가 보여주는 복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이란 분명한 변화가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믿음의 결단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행위가 바뀌어 지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서의 믿음과 갈라디아서의 믿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3. 아브라함의 죽음.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은 나그네요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다가 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는 순간부터 고난의 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종을 부리는 정도의 기반 잡힌 삶을 뒤로 하고 죽음의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고대 사회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러나 부르심을 받고 그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심으로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간 것이 아브라함의 복인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풍요가 주는 그곳에서 떠나옴으로 불안한 장래를 향하여 나아갔지만 그것이 영생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오늘 우리는 순례자의 걸음을 걷고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아브라함의 죽음 앞에서 더욱 새롭게 확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죽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이며 소망인 것입니다.
38. 창세기 25:19-34 “ 선택 ”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그 언약은 영원하기에 그 아들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 갑니다. 25:11절에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도 있고, 그두라에게서 낳은 여러 아들도 있지만 하나님이 지명하여 복을 주셨다는 사람은 이삭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복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이스마엘 같은 복이 아니라 언약을 이어가는 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을 이어가는 복은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선택이란 말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개입되면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이 사람들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일들로 바꾸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게 되면 사람들의 일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말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선택으로 일하십니다. 그러한 선택을 받은 자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서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데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2:17-18절에서 1)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 2)네 씨로 대적의 문을 얻게 하겠다. 3)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이러한 약속을 받았지만 그러나 문제는 결혼한 이삭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이 결국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자녀가 없는데 무슨 언약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사라와 연결하여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리브가는 사라의 장막에 들어왔습니다. 사라의 모습처럼 언약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실력으로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여 20년간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서 자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다면 기도 안하여도 자녀를 주시면 될텐데 왜 기도를 하게 하시고 자녀를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는 너희의 실력으로 낳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고자 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보면 당장에 기도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보게 됩니다. 기도란 나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인데 오히려 기도가 방법론처럼 되어 가지고 봐라 기도하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말하면 곤란합니다. 기도 자체가 자기의 부족과 무능력을 고백하는 것인데 기도하니 자녀 얻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자신의 기도한 실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한 기도란 언제나 자기가 부인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들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합니다. 자신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기도나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이 이를 온전하게 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기도하여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여 아이를 주시려면 하나님이 언약을 이어갈 자 하나만 주시면 되는데 쌍둥이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쌍둥이가 배속에서부터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리브가가 하나님께 이게 왠일이냐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두 민족이 네 태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그리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배속에서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그 언약을 믿고 이루어 가는가를 보면 자기들은 전혀 그런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들의 취향대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들 입맛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야곱의 생애에서 더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여주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놓고서도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봅니다. 하나님이 이미 태중에 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선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모두가 자기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삭입니다. 이삭이 누구를 좋아합니까? 에서를 좋아합니다. 육신적인 장남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냥하여 와서 요리해 주니 더욱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아랑곳없이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줄테니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축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곱이 가로챈 것을 통하여 그제서야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리브가입니다. 단지 야곱이 언약을 받았다는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잘 도와주니 야곱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이 이어갈 줄로 확신을 하였다면 이삭에게 바른 말로 이야기를 하여야지요. 야곱이 언약을 이어갈 자라고 말하기보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야곱이 장자권을 받아 내기 위하여 속이는 것입니다.
에서입니다. 배고파서 야곱이 끓이고 있는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겨주는데 이것을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말로서 그렇게 한다고 하여서 장자권이 바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기를 축복할 아버지가 자기를 더 좋아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데 어떠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망령되다고 합니다.
야곱입니다. 이름이 발꿈치를 잡다 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인데 이 이름의 뜻이 사기꾼이라는 뜻이 있답니다. 그러니 야곱은 장자권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모르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확보하여야 되는 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장자권을 빼앗아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방법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그 현장에서 원수에 대하여 나타납니다. 네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가 됩니까? 아브라함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하였으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네 사랑하는 이삭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바치는 그 희생 안에 누가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대신으로는 어린양이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도 나중에 야곱보다 에서를 축복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 자기가 장자권을 획득하여야 되는 줄 알고 온갖 꾀를 다 동원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얍복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를 원수로 알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얍복강에서 누가 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며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곳에서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절름발이 이스라엘 그리고 마지막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어긋나게 안수하고 축복을 함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일하심이 어떠한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란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제대로 알아 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모습은 자기들의 이익과 욕심을 따라 행동한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이 이루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적절한 속어가 무엇입니까? 강아지는 짖어도 경부선 열차는 달린다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 드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에는 우리의 어떠한 선행 조건이 없기에 창세전에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쓸 수 없을 때에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를 통하여 바울 사도가 무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9:10-13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에게서 야곱을 태중에서 선택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말씀을 이 세상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입니다. 자기의 행위의 결과로 복과 화가 주어져야지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우습게 여기는 사례가 교회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임을 부정하고 시비를 거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14-1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말하면 반대론자들이 있을 줄 알고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무슨 불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 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원한다고 달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도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하여 로마서 9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를 강퍅케 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으로 삼은 이유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바로가 억울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니가 감히 무언데 하나님을 그렇게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파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체계가 인과율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모든 과학적인 원리가 그렇습니다. 현대 그룹의 회장 승계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장자를 제치고 5남이 회장의 승계를 한 것은 이 사람이 전체 경영면에서 더 낫다는 판단에 의하여 승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그 사람의 어떠한 자질과 능력에 의하여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김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는 자기가 잘난 자가 아니라 불쌍히 여김을 입은 것이 얼마나 좋은지 나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하고 오히려 그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후계구도를 세웠지만 결국 부르시고 택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됨을 보여주시는 것이 야곱의 생애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이라면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베드로후서 1:10-11절을 봅니다. “봉독” 힘써 할 것이 무엇입니까?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것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39. 창세기 25:19-34 “ 장자 만들기 ”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를 장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의 선택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야곱이 장자가 되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에 대하여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늘 누구에게 기대를 더 거느냐 하면 장자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니 딸만 낳는 집안에서는 아들 낳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자기의 이름을 이어갈 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자기의 대가 끊어지기에 아들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자기가 죽더라도 제사를 지내주는 아들이 있음으로 자기의 존재가 아들로 통하여 영속되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기력의 시작이기도 하니 더욱 장남에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과 꼭 같은 심정은 아니더라도 이삭이나 리브가는 자기들이 사랑하는 자로 장자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자가 되면 아버지의 축복권과 상속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는 장자는 다른 아들보다 유산을 두몫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태어난 서열순서 보다는 누가 아버지의 장자권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과 리브가도 그 장자권을 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장자권을 믿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미 복중에 있을 때, 어떤 행함이 있기 전에 장자권을 약속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언약대로 이루어 가실 것이기에 일부러 속여가면서 장자권을 따 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리브가가 그렇게 장자권을 따 내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위한다기 보다는 마치 몽구와 몽헌이 회장권쟁탈을 하는 것과 같다고 보아집니다. 몽구와 몽헌이를 야곱과 비교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야곱이 깨어지기 전의 삶의 모습은 자기가 장자의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잠도 안자고 수고하고 애쓰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는 장자가 무언지를 알아가는 한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알아간 장자란 이 땅의 서열이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장자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그의 말년에 아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요셉의 두 아들 중에서 장자권을 에브라임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장자인데도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가 야곱의 생애 중에서 야곱 자신보다 요셉을 통하여 더 분명히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구체적인 실현이 요셉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누가 장자가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꿈을 꾸었지요. 그런데 요셉이 꾼 꿈을 가지고 사람들은 비젼을 가지라고 하는데 2,000년대의 비젼이 어떻고 하면서 요셉을 들먹이는데 그러한 인생의 포부나 야망을 위한 꿈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당찬 꿈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주가 되고 싶고 황제가 되고 싶고 신이 되고 싶은데 단지 현실이 그렇게 받혀주지 못하니 눌려 살 뿐입니다. 이 세상이 그런대로 질서 있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힘에 의하여 마지못하여 그렇게 살고 있지 누가 좋아서 낮아진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을 가지고 꿈을 크게 가져라 이런 말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을 통하여 성경은 무엇을 계시하고 있습니까? 요셉도 그런 꿈을 꾸고 나니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은 자기가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서 자랑하니 더욱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형들의 비리를 고자질하는 요셉이고 또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고 있으니 더욱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 한번 죽어보라고 형제들이 사막의 빈 우물에 던졌다가 직접 피를 흘리기보다는 종으로 팔아 버려서 종으로 살다가 죽어버리라는 식으로 팔아 버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팔려간 요셉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란 세상이 주의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가를 주의 역할을 받은 자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주의 역할을 할 자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란 버림받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주가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을 통하여 세상의 주의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버려짐 속에서도, 인간의 방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한 사람을 주로 지목하여 세우셨다면 그가 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처음 팔려간 집에서 요셉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어도 명목상 일뿐이고 실제 가정의 제반 상황을 주관하는 자는 요셉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주인의 유혹과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감옥에서도 역시 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감옥의 제반 사무를 요셉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궁의 총리가 되어서도 애굽의 역사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왕이 아니라 요셉입니다.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하는 것이 요셉이 주장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야곱이 이집트에 오게 되고 야곱이 바로왕을 축복합니다. 누가 주입니까? 축복을 하는 자가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역할은 야곱이 주가 됨을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주가 됨을 보이기 위하여 먼저 애굽으로 파송된 자인 것입니다. 야곱의 잃어버린 아들, 버림 받았던 자가 버린 자를 구하는 주가 되는 자리에 이른 것이 바로 하나님과 야곱과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나중에 장자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내용이 창세기 49:22-26절입니다. “봉독” 형제 중에 뛰어난 자가 되는 것은 희생하는 자 섬기는 자가 장자가 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장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자는 세상의 장자와 전혀 다르게 오히려 버림받고 배척받고 죽는 모습으로 나오는 장자입니다. 요셉의 장자에 대한 기록을 한곳 더 보고자 합니다.
역대상 5:1-2절입니다. “봉독”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유다 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어려운 부분입니다. 요셉에게서 왕이 나오면 쉬울텐데 왕은 또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주어지는데도 주권자는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장자의 명분이라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권자가 오면 자리를 비켜서야 되는 그런 장자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개인의 장자 만들기가 야곱을 하나님이 장자로 만드시고 그것을 요셉을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가 이제는 한 국가를 장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장자를 죽이리라”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애굽에서 출애굽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장자를 만들어 내는 일을 위하여 10가지 재앙이 주어지고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장자의 죽음입니다.
장자의 죽음을 면하려면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만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장자로 삼으십니까? 히브리인들입니까? 애굽인입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생각하는데 그러나 여기에서구별이 없습니다. 히브리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장자는 죽는 것이고 애굽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장자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재앙을 통과하는 마지막은 혈통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란 어린양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을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서 매년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로 남아 있으려면 어린양의 피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하여 모든 초태생의 수컷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시고 사람의 장자도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자를 대신하여 누가 바쳐집니까? 한 지파를 선택하여 장자를 대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민수기 3:11-13절입니다. “봉독” 장자를 대신하는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가 장자를 대신하는 것은 장자는 희생당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는 제사를 담당하는 역할 즉 하나님 앞에 어린양의 희생을 반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이 레위 지파에서 영원한 제사장이 나오면 되는데 또 다시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혈통이나 족보가 아니라 제 3의 인물이 나와야 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에 대하여 시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7 “봉독” 아들을 낳으심. 2:12 “봉독” 아들에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가 급하심. 시편 89:27-29절 장자를 세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자가 어떤 일을 당합니까? 89:38-51절을 봅니다. 기름부은 자가 버림받음. 그리고 52절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란 희생하는 자를 통하여 장자를 삼으시고 그 장자로 인하여 다른 아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맏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입니다. 예수님을 맏아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장자를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아들로 삼았지만 이스라엘이 제대로 아들의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완전한 제사를 드릴 완전한 장자를 가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도 아니요, 율법도 아니요, 레위 지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요 한 별다른 대제사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11-17절입니다. “봉독”
28절입니다.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아들로 인하여 새로운 장자들의 모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절에서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 이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장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만들어 내셨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맏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새로운 장자들의 총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8-29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 만들어 내신 것이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남아 있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의 결론입니다. 맏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그 나라가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희생의 흔적을 지닌 장자의 모습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모습이 없이 쓸데없는 욕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 장자의 희생아래 장자의 총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놓치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