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시대에도 신앙은 필요한가
-스위치 ON(스스로 위로하고 치유하기) 북 콘서트
교구청 내의 대신학원 강당에서 북 콘서트가 열렸다. 쌀쌀한 늦가을의 밤 추위에도 강당을 꽉 메웠다. 교구 문화국 담당 사제 박병규 신부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여러분 눈을 감으라고 하면서 무엇이 보입니까 하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게 여러분의 앞날이라고 하여 한바탕 웃음으로 열기를 띄웠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스위치를 켜겠다고 했다.
진행에 앞서 교구장의 모두 발언이 있었다. 추위에도 많이 참석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북 콘서트의 주제가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둘의 차이와 다양성을 풍요의 원천으로 여기고 두 개의 시선으로 하느님을 깨닫고 섬기는 초대라고 했다. 김도현 물리학 박사 신부의 저서 ‘과학의 시대에도 신앙은 필요한가.’에서 궁금증의 답을 찾자고 했다.
진행은 묻고 답하는 담론으로 패럴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중간에 노래와 연주도 있었다. 초대된 신부님은 키이스트 물리학자인 김도현 신부와 대신학교 신학자인 송영민 신부였다. 과학만능시대에 사는 우리는 과학과 신앙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였다. 오늘날 과학만능시대의 무신론자인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학자들은 자기들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 때 결국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우연성이라고 한다. 진화론의 첫 출발인 생명체의 출현, 우주의 빅뱅에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과학과 신학은 애초부터 다른 색깔을 가진 영역이며 방법론이 달라서 다툴 필요도 없다고 했다. 부언하면 음악과 미술의 관계라고 한다. 음악 하는 사람이 미술 하는 사람보고 왜 그러냐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과학의 법칙들이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이다. 과학의 기준은 갈릴레오 이래로 현대적 의미의 기술적 과학이 태동하고 발전하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또한 과학 법칙에 관한 질문과 답은 여전히 형이상학 혹은 신앙 종교의 영역에 의존하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했다. 음악과 미술이 서로 보완적 관계이듯이 과학과 종교도 그런 관계라고 했다.
근대 과학자 중에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어떤 세계에 대해서는 그것이 신의 영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신은 우리가 말하는 신인지 범신론적인 신인지 알 수 없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연구는 겸손한 태도로 남겨두면 다른 분들이 나머지를 보충하고 채워줄 수 있는데 고집스럽게 문제를 유발하고 있기도 하다.
과학자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한다. 일본의 오염수 문제로 두 과학자가 나와 상반된 이론을 펼쳤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일반 대중들은 과학자들이 얘기하면 다 옳다고 믿는다. 대중 매체의 건강보조식품 광고가 그러한 것이다.
과학은 여러 실험과 데이터를 수집해서 귀납적으로 과학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니 훨씬 객관성이다. 그러나 신앙은 그 역으로 연역적이다. 특정한 계시의 개별성으로 모든 사건의 보편성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신학도 여러 체험과 여러 데이터로 하느님의 어떤 이미지를 그려 나가도록 하나의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을 고유한 신앙인처럼 만들어가는 이것 역시 귀납적이라고 했다. 신앙의 귀납은 동일성이라는 것이지만, 과학은 무조건 같은 게 계속 반복적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과학과 신앙의 차이이다.
토머스 쿨은 과학은 모래성을 쌓는 것이라 했다. 과학은 한시적으로 유용한 지식을 얻는 과정이지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며 쌓다가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이라고 했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공전하거나 자전한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음에도 금성과 목성의 관측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믿는 대로 실제로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양자역학이 세상에 출연하면서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양자역학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다. 그러면 언제 입자이고 언제 파동이냐? 관찰자의 주관이 그 결과를 바꿀 수 있다. 과학은 관찰자와 무관하게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과학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며 100년, 50년 정도 지속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러하니 절대적 객관성이 담보되지 못한다면 과학 영역 바깥에 있는 신앙에 대해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세상 모든 걸 다 설명해 줄 수 있을거라고 얘기하는 게 과학만능주인데 실제로 과학은 패러다임 전환에 의해서 언제든지 무너지고 변화될 수 있으니까 그게 진화이다. 과학만능시대의 무신론 과학자들도 확실의 객관적 지향이 아니라 확신의 주관적인 현실적 태도이다. 그들의 내적 확신은 일종의 믿음, 신념, 더 나아가 ‘신앙’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과학만능주의는 ‘비종교적 신앙’인 것이다.
오늘날 과학 시대에 신앙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신앙은 과학 영역 바깥에 대한 문제이다. 과학만능시대에 모든 필요한 것을 해결하니 종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그들도 어떤 개인적 신념, 비종교적 신앙 안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해서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종교성을 탈피할 수 없으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신앙은 존재한다. 과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이다.